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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 빛, 생명, 그리고 탄소 (2025년 4월호)

  • 작성자 사진: 洪均 梁
    洪均 梁
  • 3월 30일
  • 2분 분량

최종 수정일: 4월 1일


원자와 분자의 개념을 명료화하고자 한 칼스루헤 회의 (1860년) 이후의 화학은 몇 가지 흐름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원소의 주기율에 대한 이해가 점점 깊어지면서 원소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할 수 있게 되었고, 최초의 주기 율표가 등장하였습니다(1862-1869년). 오랫동안 사용해 온 원소와 원자 개념을 다시 비판적으로 돌이켜 보자는 사람들도 등장했죠(1866-1869년). 한편, 구조 이론은 점점 성숙하여 벤젠과 같은 어려운 분자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1865년), 오랫동안 미스터리였던 여러 이성질 현상을 성공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때까지의 구조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성질 현상이 있었습니다. 바로 광학 이성질 현상입니다.[참고문헌 1]

19세기 초, 결정과 빛을 연구하던 과학자들에 의해 빛의 편광(polarization) 현상이 발견되었습니다. 어떤 결정들의 경우, 결정에서 반사되거나 결정을 투과된 빛이 복굴절 등 특이한 성질을 보인 것입니다. 프랑스의 물리학자 비오(Jean-Baptiste Biot, 1774-1862)는 편광 현상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여 편광면을 회전시키는 성질을 갖는 여러 결정들을 찾아냈고, 심지어 결정뿐 아니라 생명체에서 추출 한 액체들(레몬 기름, 당 수용액 등)도 그런 성질을 나타내 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결정은 무언가 눈에 보이는 구조를 가지고 있으니 빛을 회전시킬 수 있다 치더라도, 구조가 없는 액체가 빛을 회전시킨다는 건 이해하기 어려웠죠. 비 오는 결국 액체의 구성 입자 자체가 무언가 내부 구조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웁니다.

비오는 1832년 자신의 연구 내용을 발표했으나 큰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뒤마를 비롯한 당시 유기화학자들은 화합물의 조성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고, 내부 구조 같은 개념은 화학에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학계의 냉대에도 불구하고 비오는 고집스럽게 연구를 지속하여 자연에서 추출한 유기 물질과 실험실에서 합성한 유기 물질들이 설령 동일해 보이더라도 서로 다른 광학 활성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발표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장뇌(camphor)는 강한 향을 갖는 나무 추출물로, 당시 프랑스 화학자들은 테레빈유를 이용하여 장뇌를 실험실에서 합성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뒤마는 최신 질량 분석법을 이용해 자연에서 얻어진 장뇌와 합성된 장뇌가 동일한 물질임을 증명했죠. 비오는 자연에서 얻어진 장뇌는 광학 활성을 갖는데 반해 합성된 장뇌는 광학 활성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을 보였고, 이를 근거로 두 물질이 다르다고 주장 했습니다. 하지만 비오의 주장은 화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광학 활성이 화학계에 의미를 갖기 시작한 것은 “화학자” 로랑이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였습니다. 비오는 1840년 경부터 모르핀, 퀴닌과 같은 알칼로이드의 광학 활성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알칼로이드의 합성을 연구하고 있던 로랑에게 연락을 취했습니다. 비오는 로랑이 합성한 알칼로이드를 얻어서 광학 활성을 측정했고, 합성된 알칼로이드는 광학 활성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였습니다. 이들은 광학 활성이 생명체에서 합성된 물질만 가지고 있는 특별한 성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로랑은 자연에서 얻어진 맹독성 물질에 치환 반응을 반복해서 시키면서 광학 활성과 독성을 측정하였고, 광학 활성이 낮아질수록 독성 또한 떨어지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광학 활성이 생명체 내의 “활성”을 나타내는 지표라는 결론 을 내렸습니다.[참고문헌 2]

이후 배턴을 이어받은 사람은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1895)였습니다.[참고문헌 3] 파스퇴르는 로랑의 강의를 듣고 깊은 감화를 받아서, 급기야 본인의 학위 논문 주제를 결정학으로 변경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는 비오의 편광계를 사 용하여 여러 액체의 광학 활성을 측정한 내용으로 학위 논 문을 작성하여 1847년 제출하였고, 이후에도 광학 활성 연구를 지속하였습니다. 그는 자연에서 만들어진 타르타르산의 결정을 이용해 결정 구조와 광학 활성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타르타르산의 결정은 보통 완벽한 대칭 구조를 이루지 않는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고, 이렇게 비대칭적인 결정은 광학 활성을 나타냈습니다. 파스퇴르는 광학활성을 띠지 않는 결정을 찾아내어 그 결정 구조를 살펴보 았습니다. 결정이 완벽하게 대칭적인 구조를 이룰 것이라 생각했던 그의 가설과는 달리, 결정은 서로 거울상인 비대 칭적 구조가 반반 섞여 있는 형태를 띠고 있었습니다. “[이를 발견한 순간] 내 심장이 멈췄다.”[참고문헌 4] 그는 조심스럽게 두 구조를 분리해냈고, 각 구조를 편광계로 측정하여 서로 반대인 광학 활성을 보인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사실은 1848년 논문으로 발표되었고, 화학계를 뒤흔들었죠.

이제 슈퍼스타가 된 파스퇴르는 계속해서 광학 이성질 현상을 연구하였습니다. 그는 알칼로이드 연구를 지속하였고, 1860년 광학 활성을 갖는 물질들은 전부 비대칭적인 결정 구조를 가져야 한다는 가설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그는 인공적인 합성을 통해 광학 활성을 갖는 물질을 얻을 수 있을지 궁금하여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이런저런 시도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광학 활성을 갖는 물질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광학 활성을 갖는 물질을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고, 결국 그는 생명체 내의 화학과 실험실 내의 화학은 다르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즉, 광학 활성을 가진 분자는 생명체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분자라는 것입니다.

1873년, 에밀 융플라이쉬(Emile Jungfleisch, 1839- 1916)가 파스퇴르의 주장에 도전장을 내밉니다. 융플라이 쉬는 무기 물질만 이용하여 타르타르산의 라세믹 염, 즉 광학 활성을 가진 비대칭 결정과 그 거울상 결정이 반반 섞인 혼합물을 합성해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보고하는 논 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지난 이십 년간 합 성 화학이 놀랍도록 발전한 덕분에 비교적 가까운 미래에 생명체를 구성하는 필수 요소를 인공적으로 생산할 수 있 을 것으로 보인다. (중략) 광학 활성은 생명의 개입 없이도 만들어질 수 있다.”[참고문헌 5] 파스퇴르는 이 사실을 듣고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파스퇴르는 생명체 내의 화학이 특이 한 것은 비대칭 결정을 만들어낼 때 한 종류의 거울상만 생산해내기 때문이며, 설사 화학 합성을 통해 광학 활성을 가진 분자를 만들어낸다 하더라도 생명체의 도움 없이 두 거울상 중 한 가지만 추출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신의 논지에는 흔들림이 없다고 주장했죠. 이 문제는 오랫동안 화학계의 풀리지 않은 문제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른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애초에 광학 활성은 왜 생기는 것일까요? 광학 활성을 갖는 분자들과 그렇지 않은 분자들은 어떤 차이를 갖고 있을까요? 1860년대에 구조 이론이 성숙해 가면서 화학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할 준비를 갖춥니다.[참고문헌 6] 1874년, 젊은 두 화학자가 광학 활성의 기원을 설명하는 논문을 각각 발표합니다. 이들은 서로의 연구에 대해 몰랐지만, 그럼에도 상당히 유사한 설명을 제시하였습니다. 바로 네덜란드의 판트호프 (Jacobus van’t Hoff, 1852-1911)와 프랑스의 레벨 (Joseph Le Bel, 1847-1930)입니다.

판트호프와 레벨은 탄소 원자가 결합을 이룰 때 정사면체와 같은 구조를 만든다는 가설을 제시하였습니다[그림 1]. 그리고 탄소 원자에 결합하는 네 개의 원자 그룹(R1, R2, R3, R4)이 전부 다르다면, 이들이 어떻게 결합하는가에 따라 두 가지 종류의 이성질체(VII, VIII)가 만들어질 수 있음 을 보였습니다. 이 두 가지 이성질체가 바로 서로 다른 광학 활성을 보이는 이성질체의 기원이라는 것입니다. 이 이 론은 융플라이쉬의 “실패”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R1, R2, R3를 세 개의 점으로 본다면, 이들은 하나의 평면을 이룹니다. 여기에 마지막 R4를 치환 반응이나 추가 반응을 통해 도입한다고 합시다. R4가 평면의 위쪽으로 붙든 아래쪽으 로 붙든 물리적으로는 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두 이성질체는 같은 비율로 만들어지게 되고, 합성으로 광학 활성을 가진 분자를 한 종류만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처음에 이들의 논문은 큰 흥미를 끌지 못했습니다. 판트호프는 당시에 스물둘의 젊은 화학자로 직업도 없는 상태였고, 학계에 이름이 알려진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판트호프의 논문은 네덜란드어로 되어 있었는데, 심지어 네덜란드 화학자들조차도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판트호프는 주의를 끌기 위해 두 가지 전략을 취합니다. 먼저, 자신의 논문을 보다 보편적인 언어였던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이듬해(1875년) 출판하였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자신의 모형을 종이로 만들어 논문과 함께 유명한 화학자들에게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수신자 중에는 자신의 옛 스승인 케쿨레와 뷔르츠가 포함되어 있었고, 구조 이론의 권위자와 구조 이론의 격렬한 반대자가 골고루 섞여 있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지지자를 모으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론을 과학적 토론의 장으로 끌어올리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판트호프의 노력은 결국 성과를 거둡니다. 1-2 년 안에 그의 이론은 (반대자들과 더불어) 많은 지지자들을 얻었고, 판트호프의 이름은 유럽의 화학자들에게 널리 알려졌습니다. 판트호프와 레벨의 이론은 입체화학(stereo- chemistry)의 효시로 여겨지며, 이로써 구조 이론의 마지막 중요한 조각이 맞춰졌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참고문헌 8]

오늘 글에서는 결정과 빛의 이야기에서 출발하여 광학 활성을 설명하려던 화학자들의 노력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광학 활성 연구에는 비오와 로랑 같은 선구자들이 있었고, 이들의 노력은 파스퇴르에 이르러 결실을 맺습니다. 파스퇴르는 결정의 비대칭성과 광학 활성을 연결시키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광학 활성을 생명 현상의 특징으로 제안하였죠. 한편, 구조 이론이 발전하면서 광학 활성을 원자 수준에서 설명하는 이론도 등장합니다. 바로 판트호프와 레벨이 발표한 탄소 원자 주위의 사면체 구 조였죠. 이렇게 구조 이론에서 큰 성공을 거둔 판트호프는, 흥미롭게도 3년 만에 구조 이론을 떠나버립니다.[참고문헌 9] 그는 1877년 이후로 전혀 다른 연구를 진행하였고, 결국 이 새로운 연구의 성취를 인정받아 1901년 최초의 노벨화학상 수상자로 선정되기에 이릅니다. 이 새로운 연구 분야는 바로 열역학을 화학에 적용하는 연구였는데요, 다음 글에서 는 이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문헌

  1. 이 내용은 다음 글들에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Theresa Levitt, “Morphine Dreams: Auguste Laurent and the Active Principles of Organised Matter,” Ambix 68 (1): 97-115 (2021); Paolo Palladino, “Stereochemistry and the Nature of Life: Mechanist, Vitalist, and Evolutionary Perspectives,” Isis 81 (1): 44-67 (1990); Trienke M. van der Spek, “Selling a Theory: The Role of Molecular Models in J. H. van’t Hoff’s Stereochemistry Theory,” Annals of Science 63 (2): 157-177 (2006).

  2. 생기론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사실 이 때쯤 생기론은 이미 화학계에서 퇴출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활성(activity)” 이라는 용어에 생기론적 뉘앙스가 담겨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3. 오늘날 파스퇴르는 주로 미생물학 및 면역학과 연결되지만, 사실 그는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의 화학 교수였고, 칼스루헤 회의에도 초대받은 유명한 화학자였습니다.

  4. Levitt, 앞의 글, 113쪽에서 재인용.

  5. Palladino, 앞의 글, 49-50쪽에서 재인용.

  6. “화학사 돌아보기 21. 화학 구조의 인식,” 『화학세계』 2024년 10월호 참조.

  7. Peter J. Ramberg and Geert J. Somsen, “The Young J. H. van ‘t Hoff: the Background to the Publication of his 1874 Pamphlet on the Tetrahedral Carbon Atom, Together with a New English Translation,” Annals of Science 58: 51-74 (2001), 73쪽에서 재인용.

  8. 8.   레벨의 경우에는 이론 자체도 난해했고, 판트호프처럼 이후 화학계에서 계속 명성을 날리지도 못했기 때문에 다소 주목을 받지 못한 면이 있습니다. 다음 논문을 참고하십시오. Robert B. Grossman, “Van’t Hoff, Le Bel, and the Development of Stereochemistry: A Reassessment,” Journal of Chemical Education 66 (1): 30-33 (1989).




최정모 Jeong-Mo Choi


•  한국과학기술원 화학과, 학사(2003. 3 - 2011.8)

•  Harvard University 과학사학과, 석사(2011. 9 - 2015. 5, 지도교수:Na mi Oreskes)

•  Harvard University 화학 및 화학생물학과, 박사 (2011.9 - 2016.5, 지도교수:Eugene I. Shakhnovich)

•  Washingt n University in St. L uis, 박사후연구원(2016.8 - 2019. 4, 지도교수 : R hit V. Pappu)

•  한국과학기술원 자연과학연구소, 연구조교수(2019. 6 - 2020. 8)

•  부산대학교 화학과, 조교수(2020.9 - 2024.8), 부교수(2024.9 -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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