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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 없는 화학(2026년 5월호)

  • 5월 1일
  • 9분 분량

1890년대의 화학은 구조화학에 분자의 입체 구조까지 포함시키면서 많은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이 모든 이론의 기반에는 “원자” 개념이 있었습니다. 1860년대에만 해도 실재는 확인할 수 없지만 유용한 도구 정도로 취급받던 원자[참고문헌 1]는, 1880년대를 거치는 동안 그 공간적인 배치가 화학적 성질을 설명할 수 있음이 밝혀지면서 보다 실제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화학 한쪽 구석에서는 원자 개념을 두고 뜨거운 논쟁이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이 논쟁의 중심에는 탁월한 물리화학자 오스트발트가 있었죠. 그는 원자 개념을 거부하고 에너지를 중심으로 모든 화학을 다시 쓰고자 했습니다. 오스트발트는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오늘 글에서는 그를 중심으로 1890년대의 논쟁을 살펴보고자 합니다.[참고문헌 2] 

오스트발트가 처음부터 원자 개념에 의심을 품었던 것은 아닙니다. 1880년대 전반까지 그가 수행한 연구에서는 당시 화학계에서 받아들이던 원자와 분자 개념을 동일하게 활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가까운 동료이자 공동 연구자였던 판트호프와 아레니우스의 이론이 이온 등 입자 개념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당연한 일이었죠.[참고문헌 3] 다만 오스트발트는 열역학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있었고, 열역학이 화학의 여러 문제를 설명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열역학의 상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일과 열의 관계에 대한 논란은 1850년을 전후하여 열역학 제1법칙과 제2법칙이 형식화되면서 정리되었고, 열역학은 에너지를 중심으로 일관된 개념을 갖추게 되었습니다.[참고문헌 4] 1865년 엔트로피 개념이 정의되었고, 1870년대부터 기브스(Josiah Willard Gibbs, 1839-1903)와 플랑크(Max Planck, 1858-1947)가 에너지 보존 법칙과 엔트로피 증가 법칙만 가지고 열역학 체계를 수학적으로 엄밀하게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1882년 헬름홀츠(Hermann Helmholtz, 1821-1894)는 두 법칙을 결합하여 오늘날 헬름홀츠 에너지로 알려져 있는 물리량을 정의하였고, 이 헬름홀츠 에너지를 이용하여 열역학적 변화가 자발적으로 일어날지 아닐지 판단할 수 있음을 보였습니다. 화학에도 시사하는 바가 큰 연구 결과였죠. 

한편, 기본 입자들의 움직임으로부터 열역학적 설명을 제공하는 분자 운동론 역시 19세기 후반에 큰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참고문헌 5] 분자 운동론은 역학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기본 입자들이 매우 많이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이들 집단의 움직임을 통계적으로 처리하면 여러 가지 측정 가능한 양들을 도출해낼 수 있다는 가설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클라우지우스(Rudolf Clausius, 1822-1888)는 1857년 논문에서 다원자 분자의 움직임을 “적당히” 정리하면 돌턴의 부분 압력 법칙, 게이뤼삭의 동일 부피 법칙 등을 도출할 수 있음을 보였습니다. 

분자 운동론 연구에 통계적인 관점을 도입한 것은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1831-1879)입니다. 맥스웰은 1860년 기체 분자들의 속도에 대한 확률 분포를 도입하여 기체의 열역학적 성질을 설명하고자 하였습니다. 여기서 바통을 이어받은 인물은 탁월한 젊은 물리학자 볼츠만(Ludwig Boltzmann, 1844-1906)이었습니다. 볼츠만은 맥스웰의 통찰을 일반화하고 수학적으로 정교화하여 단순하고 강력한 분자 운동론 이론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러한 초기 분자 운동론의 성공적인 사례 중 한 가지는 판데르발스 상태 방정식입니다. 판데르발스(Johannes Diderik van der Waals, 1837-1923)는 1873년 박사학위 논문에서 그 당시까지 축적된 분자 운동론을 활용하여 상호작용이 포함된 기체 분자의 거동을 묘사하는 식을 찾아냈죠. 

두 가지 열역학 법칙[참고문헌 6]과 수학만을 사용하여 결과를 도출하는 고전 열역학과, 기본 입자들의 거동을 통계적으로 처리하여 결과를 도출하는 분자 운동론은 큰 문제 없이 어울릴 수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심지어 볼츠만은 1872년 엔트로피 증가 법칙을 분자 운동론을 사용하여 증명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H-정리(H-theorem)라고 불리는데, 비평형 상태의 분자들이 평형 상태로 가기 위해서는 분자의 분포와 관련된 H라는 물리량이 점차 감소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평형에 도달하면 H는 일정하게 유지되고요. 즉 H는 감소하거나 동일한 값을 유지해야만 하는데, 엔트로피는 –H에 비례하는 값이기 때문에 엔트로피는 동일하게 유지되거나 증가해야만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 H-정리는 큰 논란을 불러일으킵니다. 분자 운동론의 가정대로 기본 입자들이 역학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면, 그 움직임을 역으로 돌려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합니다. 어떤 비평형 상태에서 평형 상태까지 가는 기체 입자들의 움직임을 영상으로 녹화해서 본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볼츠만의 H-정리에 따르면 엔트로피가 점점 증가하겠죠. 그런데 그 녹화된 영상을 거꾸로 돌리면 어떨까요? 시간을 거꾸로 돌린다고 역학 법칙이 바뀌는 것은 아니므로, 각 기체 입자 입장에서는 어떠한 물리 법칙도 위배하지 않고 거꾸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의 엔트로피는 점점 감소하게 됩니다. 따라서 H-정리는 “운 좋은” 초기 상태에만 적용되는 정리라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상황은 점차 더욱 악화됩니다. 그간 분자 운동론에서 예측해 온 값들은 실험값과 차이를 보여 왔습니다. 이를 줄이기 위해 과학자들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좀처럼 합리적인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기체 분자의 비열(specific heat) 문제가 있었습니다. 다원자 분자의 비열은 분자 운동론의 예측값과 실제 실험으로 측정한 값 사이에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 이 차이는 분자의 진동 운동이 불가능하다고 가정하면 설명할 수 있었기에,[참고문헌 7] 1876년 볼츠만은 두 원자가 단단한 결합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진동이 불가능하다는 설명을 제시하였습니다. 당대의 물리학자들은 이러한 설명에 불만을 표현했습니다. 볼츠만의 생각처럼 “이상적인”, 무한히 단단한 결합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분자 내에 약간의 탄성만 존재해도 볼츠만의 논증은 무너지고 맙니다. 또한 당시에는 분자의 선 스펙트럼이 분자 내 원자들의 진동 운동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분자 내에 진동 운동이 없다는 가정은 큰 반발을 샀습니다. 

볼츠만의 시도 외에도 비열 문제를 해결하려는 여러 시도가 있었습니다. 맥스웰은 “단단한 구 형태의 원자”라는 개념을 포기하고, 대신 원자가 매질 내 소용돌이 형태로 존재한다고 보자고 제안하였습니다.[참고문헌 8] 그러면 유체역학 법칙들로부터 원자와 분자의 성질을 끌어낼 수 있고, 볼츠만의 이상한 가정을 도입할 필요도 없어집니다. 하지만 실제로 의미 있는 값을 도출하기에는 계산이 너무 복잡했고, 실제로 이 이론이 실험값과 일치하는 비열을 예측한다는 것은 증명할 수 없었습니다. 운동 에너지가 분자 내에서 재배치되는 시간이 무척 길다는 가정을 도입하는 이론도 있었습니다. 이 경우에는 비열이 실험값과 가깝게 맞춰질 수는 있으나, 역시 그런 가정을 도입해야 하는 합당한 이유를 제시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한탄하며 켈빈은 이런 코멘트를 남겼습니다. “기체의 비열과 관련된 사실과 볼츠만-맥스웰 체계를 화해시킬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참고문헌 9] 이러한 비열 문제는 수치 오차를 뛰어넘어, 분자 운동론의 기본 가정이 현실과 일치하는지를 의심하게 만드는 단초로 작용했습니다. 

고전 열역학과 분자 운동론, 이 두 가지 이론은 딱 맞는 것 같았지만 본격적으로 맞추어 보려고 하니 짝이 맞지 않는 퍼즐처럼 어색한 관계였습니다. 그때까지 모든 실험을 잘 설명해 온 고전 열역학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문제는 분자 운동론이었죠. 플랑크는 1891년 분자 운동론을 가리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분자 운동론은] 60년대 초반에 반짝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 이론을 정교하게 만들려는 모든 시도는 새로운 물리적 결과만 준 것이 아니라 해결하기 힘든 어려움에 빠지고 말았다.”[참고문헌 10] 심지어 원자나 분자가 실재한다는 입장을 포기하지 않고 있던 볼츠만마저도 1890년대 후반에 오면 분자 운동론을 현상을 설명하는 유용한 도구로 이해해도 무방하다는 식의 방어적 논법을 병행하기 시작합니다. 

물리학계의 이런 변화는 오스트발트에게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는 1880년대 말부터 분자 운동론에 기반하여 열역학을 설명하려는 여러 시도들이 대개 입증할 수 없는 무리한 가정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오스트발트는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1890년 봄의 어느 하루, 학생과 연구 관련 토론을 마치고 개인 연구실에 돌아온 그는 원자 개념에 기반하여 열역학적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혼란스럽고 불명료하다는 느낌 속에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에너지와 물질이라는 두 가지를 가정하는 것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고, 에너지만으로 현상을 설명한다면 충분할 수 있겠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 생각]은 나에게 번개처럼 번쩍하는 효과를 주었다. 나는 마치 거센 바람 속에서 우산이 뒤집히는 것과 비슷한 물리적 느낌이 내 뇌에서 일어나는 것을 경험했다.”[참고문헌 11] 

이 “개종” 사건 이후 오스트발트가 바로 원자 및 분자 개념을 버린 것은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판트호프와 아레니우스, 그리고 새로 등장한 네른스트(Walther Nernst, 1864-1941)라는 젊은 물리화학자의 이론까지 포함하여 화학 내 물리화학의 가치를 방어하는 입장이었고, 이온 개념은 그 이론들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온 개념을 대체할 개념을 아직 만들어내지 못한 오스트발트가 하루아침에 이온 개념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논쟁 가운데 오스트발트는 비판자들의 공격 중 많은 부분이 기본 입자들의 평균적인 거동으로부터 열역학을 도출하는 과정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는 분자 운동론적 접근법을 포기하면 깔끔하게 방어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오스트발트는 이후 기본 입자라는 개념 없이 에너지를 중심으로 연구를 수행합니다. 그는 역학, 열역학, 화학의 여러 사실들을 에너지 원리만 가지고 유도하였고, 화학적 변화는 그저 에너지의 형태가 바뀌는 것뿐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참고문헌 12] 그는 “물질 없는 화학(Chemie ohne Stoffe)”을 추구했습니다.[참고문헌 13] 이러한 변화는 <물리화학 저널(Zeitschrift für physikalische Chemie)>의 편집자로서 그가 보인 태도에서 잘 드러납니다. 1887년 창간된 이 저널은 초반에는 분자 운동론 논문들에도 공간을 내어주었지만, 오스트발트의 “개종” 이후 태도가 변했습니다. 그는 1892년 10월 학술지에 투고된 분자 운동론 논문을 검토하면서 다음과 같은 코멘트를 남겼습니다. “본 심사자는 분자 운동론 가정의 유용성에 대해 계속해서 의구심을 표현해 왔으며, 본 연구가 의미 있는 여러 결과를 만들어냈지만 그 의구심을 극복하지는 못했다고 본다.”[참고문헌 14] 

오스트발트의 강력한 에너지 중심 철학은 이내 반향을 만들어냈습니다. 1890년 이후 다양한 분야에서 “에너지론(energetics)”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기 시작했고, 에너지론을 다루는 논문들도 쏟아져 나왔습니다. 1893년 독일 자연과학자 대회(Naturforscherversammlungen)에서는 화학자 오스트발트를 비롯해 물리학자, 식물학자, 병리학자 등이 에너지론의 응용에 대해 논의하였습니다. 오스트발트는 급기야 진화와 자유 의지의 문제도 에너지를 사용해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죠. 이러한 관심을 반영하여, 1895년 뤼베크(Lübeck)에서 열릴 자연과학자 대회의 주제는 아예 “에너지론의 현황”으로 정해졌습니다.[참고문헌 15] 

오스트발트와 더불어 이 시기 에너지론 진영을 대표하는 인물로 게오르그 헬름(Georg Helm, 1851-1923)이 있습니다. 헬름은 수리물리학자로 열역학을 다양한 분야에 적용하는 연구를 해왔습니다. 그는 “수리화학(mathematical chemistry)”이라는 용어를 만들었고, 경제 현상을 에너지론의 관점에서 설명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헬름은 내성적이고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이 헬름이 뤼베크 대회의 기조연설자로 초청받았고, 오스트발트 역시 연설 시간을 할당받았습니다. 타고난 연설가였던 오스트발트는 이 기회를 이용해 에너지론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자신의 발표 시간을 초반에 배치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오스트발트의 화려한 언변을 두려워 했던 것일까요, 대회 주최측에서는 헬름을 초반에, 그리고 오스트발트를 가장 마지막 날에 배치하였습니다. 

뤼베크 자연과학자 대회는 1895년 9월 16일 월요일에 시작했습니다. 화요일 오전에 헬름의 발표가 있었습니다. 헬름은 에너지로 현상을 설명하는 두 가지 방법으로 역학적 에너지만 이용하는 역학적 방법(분자 운동론은 여기 포함됩니다)과 여러 에너지 형태의 변환을 가정하는 열역학적 방법이 있다고 소개했고, 바로 토론 시간을 가졌습니다.16 예상대로 볼츠만은 에너지론에 강한 반론을 제기하였고, 플랑크와 네른스트를 비롯한 여러 수학자, 물리학자, 화학자들이 여기 합류하였습니다. 반면 에너지론을 옹호하는 측은 헬름과 오스트발트 뿐이었습니다. 그마저도 헬름은 불붙은 토론에 당황하여 거의 말도 못 꺼내고 있었습니다. 오스트발트는 일기당천의 기세로 토론에 임했지만, 전세는 점점 불리하게 흘러갔습니다. 이 토론을 참관했던 젊은 물리학자 좀머펠트(Arnold Sommerfeld, 1868-1951)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볼츠만과 오스트발트 사이의 토론은 마치(…) 황소와 절륜한 검투사 사이의 싸움 같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놀라운 검술에도 불구하고, 투우사는 황소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볼츠만의 논증이 성공했다. 당시 우리 젊은 수학자들은 모두 볼츠만의 편에 섰다.”[참고문헌 17] 

뤼베크 대회가 끝나고, 헬름과 오스트발트는 불만을 쏟아냈습니다. 헬름은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고 표현했고, 오스트발트는 이 행사가 에너지론자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정교하게 설계된 행사였다고 비난했죠. 하지만 이것은 공격의 서막에 불과했습니다.18 대회가 끝나고 두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볼츠만은 에너지론을 공격하는 논문을 출판했습니다. 그는 헬름과 오스트발트가 오류와 아집으로 가득찬 이론에 갇혀 있다며, 이들이 젊은 세대를 오도하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 한 달 뒤에는 플랑크가 에너지론을 비판하는 논문을 출판했죠. 플랑크는 볼츠만과는 다른 방향에서 에너지론을 비판했는데, 그 수학적 체계가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그것이었습니다. 특히 플랑크는 에너지론자들이 엔트로피 개념을 오용하고 있다고 공격하였습니다. 오스트발트와 헬름은 즉각 반박 논문을 썼지만, 볼츠만도 바로 재반박 논문을 써서 대응합니다. 이 과정을 지켜본 젊은 세대 과학자들은 점차 에너지론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과학사학자 히베르트(Erwin Hiebert)는 1896년 말부터 에너지론의 몰락이 본격화되었다고 봅니다.[참고문헌 19] 

이러한 전쟁통에 오스트발트 이외의 화학자들은 어떤 입장이었을까요? 서두에도 이야기한 것처럼, 당시 화학은 이미 원자 개념을 중심에 두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화학자들은 원자가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은 에너지일 뿐이라는 오스트발트의 입장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아레니우스도 자신의 전해질 이론이 원자론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발트에게 동의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은사를 노골적으로 공격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아레니우스는 뤼베크 대회에 참석한 후 그 내용을 스웨덴 과학자들에게 보고하는 글에서, 에너지론은 “자연철학(Naturalphilosophie)의 추측”에 불과하다는 평가와 더불어 뤼베크 대회에서 오스트발트가 “완전히 패배”했다고 썼습니다.[참고문헌 20] 아마 주류 화학자들의 입장을 가장 잘 대변하는 사람은 뤼베크 대회에서 “원자론의 문제들”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한 유기화학자 마이어(Viktor Meyer, 1848-1897)일 것입니다.[참고문헌 21] 마이어는 이 강연에서 오스트발트의 에너지론은 화학 연구에 큰 도움이 안 된다고 평가합니다. 그는 화학 연구는 이미 원자 가설에 깊이 의존하고 있으며, 에너지론은 에너지 변환을 설명할 수 있지만 화학의 구조 문제를 설명할 수 없다고 지적하죠. 

오스트발트의 에너지론은 1890년대 과학계를 휩쓸고 지나간 돌풍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물리학자들은 고전 열역학과 분자 운동론 사이의 관계를 두고 고민하고 있었고, 오스트발트의 에너지론은 한 가지 해결책으로 제시되었죠. 하지만 초반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1895년 뤼베크 대회 이후 에너지론은 급격히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집니다. 한편, 화학자들은 오스트발트의 과격한 주장에서 한 발짝 물러서 있었습니다. 원자가 무엇인지에 대해 정확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미 화학 연구의 핵심 가설이 되어 버린 원자론을 포기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원자의 실체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는 화학자들도 있었습니다. 뤼베크 대회 강연에서 마이어는 원자 스펙트럼에 기반하여 원자가 복잡한 내부 구조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는 언급을 남깁니다. 흥미롭게도 이 언급은 향후 10여 년 동안 과학계를 뒤흔들 발견들을 예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그 이야기를 다뤄보겠습니다.


참고문헌


  1. “화학사 돌아보기 23. 원자는 실재하는가,” 『화학세계』 2025년 2월호 참조.

  2. 이번 호의 내용은 다음 글들에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R. J. Deltete, “Wilhelm Ostwald’s Energetics 1: Origins and Motivations,” Foundations of Chemistry 9:3-56 (2007); Peter Clark, “Atomism versus thermodynamics,” in Method and Appraisal in the Physical Sciences: The Critical Background to Modern Science, 1800-1905, ed.  Colin Howson  (Cambridge, United Kingdom: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6); Robert Deltete, “Helm and Boltzmann: Energetics at the Lübeck NAturforscherversammlung,” Synthese 119: 45-68 (1999); Erwin N. Hiebert, “The Energetics Controversy and the New Thermodynamics,” in Perspectives in the History of Science and Technology, ed. D. H. D. Roller (Norman, OK: University of Oklahoma Press, 1971);

  3. 오스트발트의 초기 삶과 업적에 관해서는 “화학사 돌아보기 26. 새로운 물리화학 (2),” 『화학세계』 2025년 8월호 참조.

  4. 19세기 전반의 열역학과 화학적 응용에 대해서는 “화학사 돌아보기 19. 1850년대의 풍경,” 『화학세계』 2024년 6월호 참조.

  5. 분자 운동론의 초기 역사에 대해서는 “화학사 돌아보기 20. 칼스루헤 회의,” 『화학세계』 2024년 8월호에서 짤막하게 다루었습니다.

  6. 열역학 제3법칙은 20세기 초에 네른스트에 의해 제안됩니다.

  7. 오늘날은 에너지가 연속적이지 않고(양자역학적인 이유로 인해) 불연속적이라는 이유로 상온에서 대부분의 기체 분자는 진동 운동을 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8. 소용돌이 원자 개념은 맥스웰이 처음 제안한 것은 아닙니다. 그 전에도 여러 물리학자들에 의해 비슷한 개념이 제시되었습니다. Helge Kragh, “The Vortex Atom: A Victorian Theory of Everything,” Centaurus 44(1-2): 32-114 (2002).

  9. Clark (1976), 85쪽에서 재인용.

  10. Clark (1976), 89쪽에서 재인용.

  11. Deltete (2007), 31-32쪽에서 재인용. 하지만 Deltete는 실제로 이 경험이 아주 극적인 것은 아니었을 거라며, 1887년부터 오스트발트가 점차 에너지 중심 사고로 이 동하고 있었음을 지적합니다.

  12. 말년의 그는 물리학과 화학뿐 아니라 생물학과 심리학, 경제학, 사회학에 이르기까지 에너지 원리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하였습니다.

  13. Niles R. Holt, “A Note on Wilhelm Ostwald’s Energism,” Isis 61(3): 386-89 (1970).

  14. Deltete (2007), 42쪽에서 재인용.

  15. 흥미롭게도 이 주제는 에너지론의 강력한 반대자였던 볼츠만의 추천으로 정해졌다고 합니다. Deltete(1999)는 볼츠만이 에너지론을 공개적인 자리에서 확실하게 무너 뜨리려고 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저 논란이 많은 주제를 자유롭게 토론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16. 헬름의 강연록은 미리 배포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참가자는 그 내용을 읽고 왔을 것입니다.

  17. Deltete (1999), 56쪽에서 재인용.

  18. 이 대회 전까지 볼츠만은 헬름, 오스트발트와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19. Hiebert (1971), 78쪽. 

  1. Crawford, “Arrhenius, the Atomic Hypothesis, and the 1908 Nobel Prizes in Physics and Chemistry,” Isis 75, 503-522 (1984), 특히 508쪽. 

21. Viktor Meyer, “Probleme der Atomistik,” Verhandlungen der Gesellschaft deutscher Naturforsdier und Ärzte II(1), 95-110 (1895).




최정모 Jeong-Mo Choi


•  한국과학기술원 화학과, 학사(2003. 3 - 2011.8)

•  Harvard University 과학사학과, 석사(2011. 9– 2015. 5, 지도교수: Naomi Oreskes)

•  Harvard University 화학 및 화학생물학과, 박사 (2011.9 –2016.5, 지도교수: Eugene I.Shakhnovich)

• Washington University in St. Louis, 박사후 연구원 (2016.8– 2019. 4, 지도교수: Rohit V. Pappu)

•  한국과학기술원 자연과학연구소, 연구조교수(2019. 6– 2020. 8)

부산대학교 화학과, 조교수(2020.9- 2024.8),부교수(2024.9-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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