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물리화학(2)(2025년 8월호)
- 洪均 梁

- 8월 1일
- 5분 분량

지난 글부터 우리는 1880년대에 등장한 “새로운” 물리 화학을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구조 이론은 복잡한 유기 화합물의 구조를 성공적으로 설명해냈지만, 화학 반응에 대해서는 여전히 알려주는 것이 많지 않았죠. 이 문제를 풀고자 도전했던 세 명의 젊은 화학자에 의해 “새로운” 물리화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바로 판트호프, 오스트발트, 그리고 아레니우스였습니다. 판트호프에 대해서는 지난 글에서 살펴보았으니, 오늘은 나머지 두 사람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참고문헌 1]
오스트발트(Wilhelm Ostwald, 1853-1932)는 발트 해 연안의 리가(Riga) 출신으로, 이 지역은 러시아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지만 독일계 이민자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오스트발트 역시 그 중 하나였죠. 그는 1872년 도르파트 대학교(Dorpat University)에 입학하여 1875년 학위 과정을 마쳤고, 1877년에는 석사 학위 논문을, 1878년에는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했습니다. 이때부터 오스트발트의 관심사는 화학적 친화도를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는 두 종류의 물질이 반응할 때 방출하거나 흡수하는 열이 얼마나 되는지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오스트발트는 이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굴베르그와 보게의 논문을 발견하였고, 이들의 질량 작용 법칙을 토대로 반응열을 직접 측정하는 대신 부피 변화나 굴절률 변화로부터 화학적 친화도를 계산하는 방법을 개발하였습니다.
하지만 오스트발트의 연구 결과는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변방의 젊은 화학자가 수행한 비주류 연구에 관심이 없었죠. 오스트발트는 교수 자리를 얻기 위해 분투했지만 그를 써주는 곳은 없었고, 그는 중등 학교 교사로 연명하다가 1881년에서야 간신히 신생 학교인 리가 기술대학교(Riga Polytechnic Institute)의 교수 자리를 얻었습니다. 그 이후 오스트발트의 연구도 점차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주기율표로 유명한 화학자 마이어가 자신의 『화학의 최신 이론(Die Modernen Theorien der Chemie )』 1883년 개정판 에서 오스트발트의 연구를 상세하게 소개한 것입니다. 오 스트발트 본인도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는 『일반화학 개론(Lehrbuch der allgemeinen Chemie )』이라는 교재[참고문헌 2]를 집필하여 1885년과 1887년 출판하였습니다. 이렇게 업적을 인정받으면서 그는 마침내 1887년 라이프치히 대학교의 물리화학 교수로 임용되었습니다.
아레니우스(Svante Arrhenius, 1859-1927)는 스웨덴 출신의 화학자로, 1876년 웁살라 대학교(Uppsala University)에 입학하여 수학, 화학, 물리학을 공부했고, 자그마치 세 학기만에 학부 과정을 마친 영재였습니다. 이후 그는 1878년부터 웁살라 대학교에서 대학원 과정을 시작하였는데, 지도교수와 잘 맞지 않아 1881년 스웨덴 과학 아카데미(Swedish Academy of Sciences)의 물리 학자 에리크 에들룬드(Erik Edlund, 1819-1888)에게로 옮겨 갔습니다. 그는 여기서 전해질에 관한 연구를 수행 하여 1884년 박사 학위 논문으로 제출하였습니다. 그런 데 이 학위 논문은 심사위원들에게 매우 안 좋은 평가를 받았죠. 당시 스웨덴의 학위 논문은 총 다섯 개의 등급으로 평가되었는데, 처음에는 심사를 간신히 통과하는 수준 인 네 번째 등급을 받았고, 그나마 아레니우스가 열심히 변론한 끝에 간신히 3등급으로 올릴 수 있었습니다. 오늘 날로 비유하자면 D를 받았다가 C로 올린 셈입니다.
학위 논문이 도대체 어떤 내용이었길래 이렇게 박한 평가를 받았을까요? 박사 학위를 시작하던 시기 그는 용액의 전기 전도도로부터 용질의 분자량을 결정하는 문제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비휘발성 용질에 대해 용액의 전기 전도도가 변화한다는 것이 이미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죠. 아레니우스는 다양한 용액을 대상으로 전기 전도도를 측 정하였고, 용액이 묽어질수록 용질의 입자 수당 전기 전 도도가 높아지는 현상을 관찰하였습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동일한 화학종이 용액 내에서 “활성(active)” 상태와 “비활성(inactive)” 상태를 가질 수 있고, 농도가 낮아질수록 활성 상태의 비율이 높아져서 전기 전도도가 높아진다는 가설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활성 상태 의 비율을 활동 질량(active mass), 오늘날 활동도(ac- tivity)로 불리는 양에 대응시켜 반응 속도, 평형 상수, 반응열 등과의 연결 고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활성 상태는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아레니우스는 중성 분자들이 전하를 띤 조각들로 쪼개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바로 오늘날 이온(ion)으로 불리는 조각들입니다. 중성 분자들이 물에 녹으면서 양이온과 음이온을 형성하고, 이 이온들이 전기적으로나 화학적으로나 활성 상태를 이룬다는 것이 아레니우스의 생각이었습니다.
이 이론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전해질 용액에 서 전기가 흐를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19세기 초부터 많은 화학자 및 물리학자들이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전해질 용액에 전기를 가하면 그 때 용액이 분해되면서 양전하와 음전하를 띤 입자들이 발생한다는 게 초기의 지배적인 가설이었죠. 패러데이(Michael Faraday, 1791- 1867)는 1834년 이 입자들에 이온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물리학자 클라우지우스(Rudolf Clausius, 1822-1888)는 1857년 이러한 가설에 반기를 들었습니 다. 이온은 전기를 가할 때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전해질 용액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전기를 가할 때 이온이 만들어진다면 실제로 측정되는 열에 비해 훨씬 큰 열이 발생할 것이라는 것이 그 근거였습니다. 클라우지우스에 따르면 전해질은 양이온과 음이온으로 쪼개져서 존 재하는 상태가 자연스러운 상태입니다. 종종 둘 사이의 전기적 인력 때문에 달라붙어서 중성 입자를 이루기도 하지만, 분자들의 랜덤한 움직임 때문에 다시 떨어져 나오 게 됩니다.
클라우지우스는 화학자 윌리엄슨(Alexander Williamson, 1824-1904)과의 대화로부터 이러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비대칭 에터 합성으로 유명한 윌리엄슨은 화학 반응을 설명하기 위해 용액 내에서 입자들이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짝을 바꾸고 다닌다는 가설을 제시 한 바 있습니다. 예를 들어 AB와 A’B’라는 물질이 섞여 있다면 A와 B가 쪼개지고 A’과 B’도 쪼개져서, 용액 내에서는 AB, A’B’ 뿐 아니라 AB’, A’B 등도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그 중 화학적 친화도 가 가장 높은 쌍이 관찰되는 것입니다. 이 설명에서 A와 B 자리에 양이온과 음이온을 넣으면 클라우지우스의 이론이 만들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가리켜 클라우지우스-윌리엄슨 가설이라고 부릅니다.[참고문헌 3] 아레니우스는 학위 논문에서 클라우지우스-윌리엄슨 가설을 차용하여 본인의 이론을 발전시켰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아레니우스의 업적은 이 정성적인 가설을 정량화 할 수 있는 이론을 만들어낸 것이었습니다.
비록 그 접근법은 새롭고 창의적이었지만, 아레니우스의 학위 논문은 다소 어설펐습니다. 논문의 결론은 일반적으로 실험에서 사용되는 용액의 농도보다 훨씬 묽은 농도에서 측정한 데이터들에 의존하고 있었고, 그마저도 충분히 많은 수가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산의 세기와 활동도 사이의 관계는 겨우 다섯 개의 샘플에서 측정한 데이터로부터 도출되었죠. 활동도처럼 중요한 개념도 명확한 정의 없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아레니우스의 학위 논문이 왜 그런 평가를 받았는지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심사위원들이 아집에 사로잡혀 위대한 연구를 못 알아본 것이 아니라, 논문의 만듦새가 심사위원들을 만족시키기에는 다소 부족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포기했다면 아레니우스의 경력은 이 정도에서 끝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레니우스는 용감한 한 걸음을 내딛습니다. 학위 논문을 자신이 존경하는 화학자였던 오스트발트에게 보낸 것입니다. 오스트발트 역시 처음에는 이 논문을 읽고 엉터리라고 생각했지만, 여러 번 그 내용을 곱씹어 본 끝에 그 가치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바로 스웨덴을 방문하여 아레니우스를 만났고, 자신의 실험실로 초청했을 뿐만 아니라 아레니우스가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습니다. 아레니우스는 1885년 이후 오스트발트의 실험실을 비롯한 유럽 각지를 방문하며 연구를 수행했고, 점차 자신의 지평을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아레니우스가 성장해 가는 사이, 이미 물리화학 분야의 권위자로 자리잡은 오스트발트는 “새로운” 물리 화학의 발전을 가속할 수 있는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물리화학 분야의 학술지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참고문헌 4] 그는 1886년 9월 베를린에서 열린 독일 자연과학자 총회에 참석하여 자신의 아이디어를 선배 과학자들에게 선보였습니다. 반응은 냉랭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관련 학술지가 이미 충분히 많아 새로 창간하는 학술지는 독자가 없을 것이라 했고, 또 다른 이들은 기존 학술지에서도 물리화학 논문은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고 했죠. 오스트발트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출판사와 접촉하여 학술 지 간행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같은 시기에 물리화학 학술지를 준비하던 팀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이시도어 트라우베(Isidor Traube, 1860- 1943)라는 젊은 화학자를 편집자로 내세운 이 팀에서는 1886년 11월 오스트발트에게 편지를 보내 자기 팀에 합류하라고 권유하였습니다. 오스트발트는 이 제안을 받아 들이기 어려웠는데, 그들의 계획에 따르면 트라우베가 실질적인 권한을 가지고 오스트발트는 얼굴 마담 노릇만 할 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트라우베는 아레니우스의 해리 이론을 반대하는 사람이었고, 오스트발트가 그런 사람과 함께 일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죠.
오스트발트는 발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당시 “새로운” 물리화학과 관련된 연구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던 연구자 스물두 명에게 편지를 보내 학술지에 참여해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판트호프도 그 중 하나였는데, 원래 판트호프는 트라우베의 학술지에 참여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오스트발트의 설득 끝에 이쪽으로 돌아섰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오스트발트와 함께 하기로결정했죠. 마침내 1887년 2월 15일, 『물리화학 저널( Zeitschrift für physikalische Chemie )』이 첫 호를 선보였습니다.[참고문헌 5] 오스트발트와 판트호프가 공동 편집자로 표시되어 있었지만, 판트호프의 양보로 실질적인 편집권은 오스트발트에게 있었습니다. 이 『물리화학 저널』은 대성공이었습니다. 첫 호는 총 678쪽 분량으로 논문 53편이 실렸고, 그 것도 세계적인 화학자와 물리학자들이 쓴 논문들이었습니다. 『물리화학 저널』의 성공과 더불어 “새로운” 물리화 학은 화학계 내의 확고한 분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참고문헌 6]
한편, 비슷한 시기인 1887년 초에 아레니우스는 판트 호프의 1886년 논문을 접하게 됩니다. 이 논문에서 판트호프는 오늘날 용액의 총괄성으로 알려진 여러 성질들을 열역학 원리로부터 유도해 냈습니다. 바로 증기압 강하, 어는점 내림, 끓는점 오름, 그리고 삼투압이었죠. 특히 판트호프는 삼투압이 P = cRT라는 식을 따를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참고문헌 7] 여기서 c는 농도, T는 온도, R은 기체 상 수입니다. 그런데 실제 실험에서 측정된 삼투압과 비교해 보니, 비전해질 용액의 경우에는 이 식이 정확히 맞아 들어가는 반면, 전해질 용액에서는 일정한 비율만큼 차이가 났습니다. 판트호프는 이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i라는 보정 인자를 도입했고, 전해질 용액에 대해서는 삼투압이 P = icRT라는 식을 따른다고 정리했습니다.[참고문헌 8] 문제는 왜 전해질 용액에 대해서만 이런 인자가 필요한지 설명할 수 없었다는 것이죠.
아레니우스는이 문제를 해결하여 1887년 3월 30일 판트호프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잘 정리해 『물리화학 저널』에도 발표하였죠.[참고문헌 9] 아레니우스는 자신의 학위 논문에서 도입한 개념을 활용하여 전해질 용액의 경우 용질이 이온으로 해리되면서 그 양이 늘어나게 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결국 보정 인자 i의 의미는 용질 입자가 용액에서 얼마나 잘 쪼개지는지를 나타내는 척도입니다. 이 보정 인자는 용액의 삼투압이나 어는점 등을 측정하여 구할 수 있고, 만약 아레니우스의 이론이 맞다면 삼투압으로 구한 i나 어는점으로 구한 i나 동일한 조건의 용액에 대해서는 같은 값을 주겠죠. 아레니우스는 아흔 종류의 용액을 조사하여 실제로 두 값이 거의 동일하다는 것을 보였습니다.
아레니우스의 논증에 감탄한 것은 판트호프만이 아니었습니다. 오스트발트 역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즉각 아레니우스의 이론을 차용하여 용액의 성질을 탐구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를 1888년 1월 『물리화학 저널』 2호에 발표하였습니다.[참고문헌 10] 여기서 오스트발트는 질량 작용의 법칙과 해리 이론을 결합하여 전해질 용액의 활동도와 평형 상수 사이의 관계식을 얻어냈습니다.[참고문헌 11] 한편 아레니우스는 판트호프의 속도론을 발전시켜 1889년 유명한 아레니우스 속도 식을 발표했죠.[참고문헌 12] 이제 판트호프, 오스트발트, 아레니우스는 하나의 “학파”를 이루었고, 훗날 과학사학자들이 이들에게 이온주의자(ionist)라는 이름 을 붙여줍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온주의자들은 연구 내용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용액을 다루는 이론을 개발해 나갔고, 화학계 내에서 이들의 연구는 점차 큰 중요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연구는 여러 면에서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이 때까지 화학은 고등 수학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물리학과는 거의 접점이 없었죠. 하지만 이온주의자들의 연구를 통해 화학에서도 고도로 이론적 인 연구가 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물리화학”은 화학의 새로운 분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화학의 다른 분야들에도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죠.
과학사학자들 사이에는 물리화학과 유기화학의 역사적 순서에 관한 흥미로운 논의가 있습니다.[참고문헌 13] 미국 화학회에 서 발간하는 학술지 중에서 『물리화학 저널(Journal of Physical Chemistry)』은 1896년, 『유기화학 저널(Journal of Organic Chemistry )』은 1936년 창간되었습니다. 사실 학문 분야로서 정체성을 먼저 다듬은 것은 유기 화학입니다. 그런데 왜 유기화학 학술지가 더 늦게 등장 했을까요? 이는 1887년 오스트발트의 『물리화학 저널』 이 창간되기 전까지 화학은 곧 유기화학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리비히 연감』 등의 화학 학술지에 실리는 대부분의 논문은 유기화학 논문이었고, 일반화학, 광물화학, 응용화학 등의 분야가 존재하기는 했지만 유기화학에 비해 그 영향력이 미미했죠. 19세기 말에 물리화학이 “정의”되고 그 영향력이 커지면서 유기화학도 화학의 한 분야로서 자신의 이름을 갖게 된 것입니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어떻게 이 세 명의 젊은 화학자들이 이와 같은 큰 변화를 불러올 수 있었는지 한 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이들은 모두 화학의 변방 출신이었습니다. 판트호프는 네덜란드, 오스트발트는 발트해 러시아, 아레니우스는 스웨덴 출신이었고, 유명한 학교를 졸업한 것도, 유명한 선생에게 사사를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당시 화학의 중심은 유기화학이었고, 화학을 공부 하려는 야망 있는 젊은이들은 전부 유기화학에 뛰어들었죠. 오스트발트는 훗날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내가 더 크고 유명한 대학교에서 공부했다면] 분명히 당대 화학계 거물들의 영향 아래 완전히 떨어졌을 것이다. 이들은 예외 없이 유기화학에 전념하였다. 나 역시 의심의 여지 없이 유기화학자가 되었을 것이다.”[참고문헌 14] 이들은 화학의 중심 부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도리어 유기화학이 아닌 다른 문제에 천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수학과 물리학 에 익숙한 사람들이었고, 새로운 접근법을 도입하는 데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이들의 성공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지난 글에서 살펴본 노르웨이의 굴베르그와 보게 역시 변방 출신으로 비주류 문제를 연구했지만 큰 관심을 받지 못했으니까요. 이들의 성공에는 오스트발트의 명민한 감각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습니다. 앞서 살펴본 것 처럼 오스트발트는 아레니우스를 발굴했고, 학술지를 창간했으며, 교과서를 썼습니다. 이미 소개한 『일반화학 개 론』 외에도 새로운 물리화학의 관점에서 분석화학 교과서, 무기화학 교과서를 써서 출판했죠. 게다가 오스트발 트는 뛰어난 교육자로서 많은 후학을 길러냈습니다. 루이스(Gilbert N. Lewis, 1875-1946)와 노이스(Arthur Amos Noyes, 1866-1936) 등 미국을 대표하는 물리화 학자들이 오스트발트 밑에서 공부했죠. 미국 매사추세츠 출신인 노이스는 처음 독일로 유학 와서 유기화학을 공부 하고자 했으나, 여러 연구실에서 거절당했습니다. 그나마 받아준 곳에서는 연구가 잘 진행되지 않았죠. 그 때 노이스는 수업을 통해 오스트발트를 알게 되었고, 물리화학에 흥미를 느껴 물리화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오스트발트의 연구실은 점차 몸집을 불리고 명성을 쌓아갈 수 있었습니다. 물리화학의 위상 역시 점차 확고해졌고요.
물리화학이 빠른 속도로 화학 내에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는 동안, 또 하나의 분과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바로 생화학입니다. 19세기 초반 생화학은 유기화학의 일부로 존재했지만, 생리학과의 상호작용을 거친 끝에 19세기 말이 되면서 자신만의 영역을 갖게 됩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1877년 『생리화 학 저널(Zeitschrift für physiologische Chemie )』의 창간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 이야기를 좀 살펴볼까 합니다.
참고문헌
이번 호의 내용은 다음 글들에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Mary Jo Nye, From Chemical Philosophy to Theoretical Chemistry: Dynamics of Matter and Dynamics of Disciplines, 1800-1950 (Berkeley, C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3); John W. Servos, Physical Chemistry from Ostwald to Pauling: The Making of a Science in America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1990); Elisabeth Crawford, “Arrhenius, the Atomic Hypothesis, and the 1908 Nobel Prizes in Physics and Chemistry,” Isis 75, 503-522 (1984).
여기서 “일반화학”이라는 용어는 오늘날과는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이는 오늘날의 “물리화학”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오스트발트는 일반적인 원리를 탐구하는 화학이라는 의미로 “일반화학”을 사용하였습니다.
Axel Petit, “Associating Physics and Chemistry to Dissociate Molecules: The History of the Clausius-Williamson Hypothesis,” Historical Studies in the Natural Sciences 46 (3), 360-391 (2016).
이 내용은 다음 논문을 많이 참조했습니다. Matthias Pohle, “Wilhelm Ostwald und die Zeitschrift für physikalische Chemie,” Mitteilungen der Wilhelm-Ostwald- Gesellschaft zu Großbothen 3 (3), 40-63 (1998).
전체 명칭은 『물리화학, 화학양론 및 친화력 이론 저널(Zeitschrift für physikalische Chemie, Stöchiometrie und Verwandtschaftslehre)』입니다.
선배 화학자 리비히가 역시 학술지를 활용해 본인의 연구 분야를 활성화시켰던 전략이 떠오릅니다. “화학사 돌아보기 17. 리비히의 왕국,” 『화학세계』 2024년 2월호 참조.
오늘날 판트호프의 삼투압 식으로 알려진 식입니다.
오늘날 판트호프 인자(van’t Hoff factor)로 알려진 인자입니다.
Arrhenius, “Über die Dissociation der in Wasser gelösten Stoffe,” Zeitschrift für physikalische Chemie 1, 630 (1887).
Ostwald, “Zur Theorie der Lösungen,” Zeitschrift für physikalische Chemie 2, 36-37 (1888).
오늘날 오스트발트의 희석 법칙(dilution law)으로 불립니다.
Arrhenius, “Über die Reaktionsgeschwindigkeit bei der Inversion von Rohrzucker durch Säuren,” Zeitschrift für physikalische Chemie 4, 226-248 (1889).
Mary Jo Nye (1993), 107쪽.
John W. Servos (1990), 21쪽.

최정모 Jeong-Mo Choi
• 한국과학기술원 화학과, 학사(2003. 3 - 2011.8)
• Harvard University 과학사학과, 석사(2011. 9– 2015. 5, 지도교수:Naomi Oreskes)
• Harvard University 화학 및 화학생물학과, 박사 (2011.9 –2016.5, 지도교수:Eugene I.Shakhnovich)
• Washington University in St. Louis, 박사후연구원 (2016.8– 2019. 4, 지도교수 : Rohit V. Pappu)
• 한국과학기술원 자연과학연구소, 연구조교수(2019. 6– 2020. 8)
• 부산대학교 화학과, 조교수(2020.9- 2024.8), 부교수(2024.9-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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