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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세계 독자 여러분께 드리는 호소문(2025년 7월호)

  • 작성자 사진: 洪均 梁
    洪均 梁
  • 6월 28일
  • 11분 분량

최종 수정일: 7월 1일

한규일 | 경기과학고등학교 화학교사, hank1013@gs.hs.kr 


안녕하세요? 경기과학고등학교에서 화학을 가르치고 있는 교사 한규일입니다. 학교로 꾸준히 배송되는 화학세계를 받으면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은 학술적 인 연구 성과 소개글보다는 주로 연구실 소개와 특히 <화학교육> 코너를 탐독하는 독자이기도 합니다. 화학교육 코너에 투고 요청을 받은 게 처음은 아닌데, 제가 화학세계를 읽는 화학 선생님들께 공유해드릴 수 있는 특별한 노하우나 남다른 시각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에 한사코 고사를 하다가 작년 말 어쩌면 평소 사적인 자리에서 푸념하곤 하는 이야기를 화학세계의 일반 독자분들께도 들려드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는 생각 끝에 덜컥 수락했었고, 뒤늦게 깊이 후회하면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독자분들께 호소할 제 이야기는 순전히 개인의 주관적인 생각이며, 화학 교사들의 입장을 대표한다고 보기에도 무리가 있음을 먼저 양해해주시기 바 랍니다.

혹시 2024년 4월 21일부터 3주에 걸쳐 MBC에서 방영된 ‘교실 이데아’[참고문헌 1]라는 기획 프로그램을 시청한 적이 있으신가요? 첫 방송 된 1부에 대학수학능력시험(이하 수능)에 대한 흥미로운 실험이 소개되었습니다. 국어, 수학, 영어와 관련하여 각 영역에서 현재 전문가로 활약하고 있거나 그에 준하는 능력을 갖추었을 것으로 예상하는 분들에게 과목별 수능 시험을 실제 시험시간과 동일한 시간을 부여해서 치르게 한 후, 채점은 물론 전체적인 경험에 대한 감상을 인터뷰로 들어보고 있습니다. 저는 진작에 수 능 화학Ⅰ·Ⅱ를 현장 화학자들에게 풀게 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왔었는데 거의 제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동 일한 취지의 기획물이 방영된 것이 참 반가웠습니다. 예를 들어 수학은 카이스트를 졸업하고 국방과학연구소에 서 유도미사일 개발이나 인공위성 유도 항법 등을 연구하 고 있는 연구원이라든지 현직 수학과 교수처럼 소위 수학으로 먹고사는(?) 분들을 모아 100분 동안 30문항인 실 제 수능 수학(미적분학 선택) 시험을 보게 했는데요, 평균 점수가 오십 점대 중반(백 점 만점)에 그쳤습니다. 그나마 수능을 직접 치러본 세대인 젊은 수학과 교수 한 분이 한 문제만 틀려서 97점으로 체면치레가 된 경우도 있더군요.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은 대체로 현장에서 화학을 업으로 삼고 계실 것으로 짐작합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전 국수학과학경시대회 화학 부문 대상 수상의 경험이 있는 분도, 국제화학올림피아드에 국가대표로 참가해 금메달을 수상하신 분도 분명 계실 겁니다. 하지만 감히 단언컨대 20문항으로 구성된 화학Ⅰ 또는 화학Ⅱ 시험을 수능처럼 30분 동안 풀게 해드렸을 때 다 맞거나 하나만 틀리는 분은 단 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호소문이라고 제목 붙여놓고 왜 도발을 하냐 싶으실지 모르겠으나 저는 그만큼 자신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분이 화학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무슨 의미냐면 수능 화학 과목의 시험문제는 화학을 잘하느냐 좋아하느냐는 것을 측정하고 있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소위 평가의 ‘타당도’가 심각하게 결여된 시험입니다. 방송에서도 다른 과목의 수능 시험문제 역시 타당도가 떨어진다는 언급이 직접 되고 있습니다만 제 생각에 화학은 특히 도가 지나칩니다. 이런 글을 작성할 날 이 올 줄 모르고 제대로 준비하고 있지 못하다 보니 구체적인 사례를 들기 위해 예시 문항을 먼저 골라야 했습니다. 부랴부랴 작년 11월에 실시된 2025학년도 수능 문제 부터 열어서 찾아보았는데, 아시다시피 재작년에 실시된 2024학년도 수능부터는 최고 난도를 갖는, 이른바 ‘킬러 문항’을 배제하라는 서슬 퍼런 지시—공고한 이권 ‘카르텔’이 구축되어 있다면서 세무조사에 인사조치에 아주 요란했었죠. 카르텔이라는 단어에 트라우마 겪으신 독자분 들께는 대단히 송구합니다—때문에 전성기(?)의 극악무 도한 난이도 문제까지는 없었습니다만 그 이전에 출제된 더 난해한 문제를 고르기보다 그나마 풀이를 차근차근 설명할 수 있는 것을 골라 이게 왜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하 는지 설명드리는 것이 낫겠다 싶어서 화학Ⅰ 19번 문제 를 소개하겠습니다. 



벌써 당황스러움을 느끼실 분도 계실지 모르겠으나, 제 시문의 마지막에 제시된 A와 C의 분자량 비와 화학 반응식을 이용하면 분자량이 A:B:C=5:4:2를 이룬다는 결정 적인 정보를 비교적 손쉽게 획득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이 정도의 정보를 얻는 데까지 또 다른 수수께끼(들)를 풀어야 간신히 도달할 수 있는 문제가 19번쯤을 차지할 수 있었던 데 비해 거의 숨기지 않고 직접 제시해 주었으 니 참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가)에 들어있던 B의 몰수와 첨가한 A의 몰수가 동일하므로 반응이 종료된 (다)에는 B와 C가 각각 질량으로는 16wg, 2wg씩, 몰수로는 초기 (가)에 있던 것과 비교해 2배, 0.5배가 되므로 밀도는 (가)에서의 




라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직접발문에서 묻고 있는 x와 분수식의 분자까 지 해결이 되었고, 백번 양보해서 여기까지는 화학 양론 을 이해하는지 묻는다고 간주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실제 상황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감안 하지 않는다면요. 그런데 분수식의 분모를 구하려면 반응이 진행되고 있는 도중의 특정 시점인 (나)의 상황을 파악해야 합니다. 정압 조건에서 기체의 부피 비는 몰수 비와 같으므로 (가)의 B 8wg이 5n몰이었다고 전제할 때(이런 것이 문제 푸는 요령이랍니다. 부피 비 5:11이 쉽게 풀릴 가능성이 높아서요) 추가되는 A 5n 몰 중 2n 몰만 분해되어 A, B, C가 각각 3n, 7n, n 몰씩 존재하 는 시점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분자량이 2배인 B 5n 몰이 8wg이었으니 C n몰은 0.8wg이므로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출제자가 숨겨놓은 정답 을 찾았으니 해피엔딩일까요? 



먼저 반응이 진행되는 중간의 특정 시점에 반응물들과 생성물들이 얼마만큼씩 존재하는지는 어떻게 알아낼까, 과연 그걸 알아야 하는 상황은 어떤 때일까를 고민해 보면 펨토초 레이저로 분자 반응 동역학을 연구하는 어떤 유명한 교수님이 떠오르기도 합니다만 반응 경로상의 전이 상태들 미시 구조를 밝혀 반응의 메커니즘을 규명하고자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로, 화학자들한테는 이 문제의 (나) 시점에 A, B, C가 몇 몰씩 존재하는지 아는 것은 전혀 가치로운 일이 아닐 것 같습니다. 너무 익숙한 단서 조항이라 굳이 진술되지 않았지만, 피스톤과 실린더 사이의 마찰이 없다 쳐서 내부 압력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까지도 가능할 수 있죠. 하지만 열평형을 이루게 기다려 반응 종결 후 온도가 반응 시작 전 온도와 같은 상황을 구현할 수 있는 데 비해 반응이 진행되고 있는 중간 시점 에까지 온도가 변하지 않는 것을 구현할 방법이 과연 있을지 저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뭐 꼭 필요한 것만 알아야 하냐, 모름지기 화학자라면 저 정도는 쉽게 추론할 수 있으니 이걸 물어보는 게 뭐 그리 잘못되었냐 하신다면 서두에 말씀드린 바 있듯 지극히 제 개인적 의견이니 괘념치 마시기 바랍니다. 직접발문에 구하게 되어있는 x와 이 해괴한 분수식의 값을 곱하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를 담고 있을까, 그걸 왜 알아야 할까 궁금해하지 않으셔야 할 겁니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걸리는 시간에 관한 것입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저는 이 문제를 처음 딱 보는 순간 위와 같은 방식으로 풀어야겠다는 전략이 쫘악 머릿속에 그려지지는 않았습니다. 매년 수능은 물론 2차례의 모의수능 문제까지 풀어보는 현직 교사임이 무색할 정도로 이렇게도 궁리해 보고 저렇게도 궁리해 본 끝에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고, 이에 따라 처음 엔 분자량을 각각 5Μ, 4Μ, 2Μ이라고 놓고 계산을 시작 하다 보니 과정이 훨씬 조잡해졌고 한 차례 계산 실수를 되돌린 것까지 감안하면 문제를 읽기 시작한 순간부터 정답을 고를 때까지 거의 10분 가까운 시간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위의 풀이는 겨우겨우 한 번 풀어서 답을 구한 후 과정을 정리해서 다시 진술한 것입니다. 누구 말처럼 밥 먹고 하는 일이 이런 문제 풀기를 몰입해서 반복 연습하 는 것인 수험생 입장에서는 문제를 딱 보는 순간 이런 전략이 떠오르는 게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을 수도 있습니 다. 하지만 바로 실마리 잡고 문제를 해결한다 해도 제대로 풀려면 아무리 짧게 잡아도 3~5분은 걸리지 않을까요? 20개의 문제 중에는 척 보면 답이 탁 나오는 쉬운 문항도 꽤 많지만, 오히려 쉬운 문제일수록 함정(?)에 빠지 지 않도록 신중하게 읽고 검토해야 하는 법이니 30분이 라는 제한 시간 동안 이 정도 시간이 소요되는 문제가 서 너개 이상 포함된 스무 문항을 해결한다는 것은 화학을 잘하는 것만으로는 도무지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화학적으로 차근차근 추론하고 제시된 문제 상황을 종합적으로 분석·이해하려는 시도는 고득점을 방해하는 나쁜 습관으로 치부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수능 문제는 출제진과는 독립적으로 구성된 1차 검토진과 2차 검토진에 의해 검토를 거쳐 확정됩니다. 출제진의 구성 못지않게 검토진에도 자타가 공인하는 노련하고 실력 있 는 현직 화학 선생님들이 섭외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학교 현장에서 수능 대비 수업을 오래 해오신 분, 수능이 종료되면 해설 강의를 제작하시는 분 등 ‘전문가’라 는 칭호가 무색하지 않은 분들이신데, 이분들에 의한 검토는 출제본부에 입소해서 30분간 직접 풀어서 답안지를 제출하게 한 뒤 이어서 시간을 더 제공해서 두 시간 정도 후에 검토자 회의를 하는 방식이라고 들었습니다. 30분 풀어서 만점 받는 검토자는커녕 시간 내에 20문항을 다 풀기라도 하는 분이 없답니다. 두 시간을 풀게 해도 크게 나아지질 않구요. 출제진이 미리 작성해 놓은 풀이를 베껴 쓰는 데만도 30분이 부족하기 일쑤인 시험, 도대체 누구를, 무엇을 위한 시험인가 심각하게 의구심이 든 적이 많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막상 매해 수능 시험 결과를 보면 누군가는 만점을 꼭 받습니다. 심지어 올 수능 화학 Ⅰ의 1등급 컷은 50점 만점2이라고 알려졌습니다. 응시 생의 5.9%가 30분 안에 20문제의 정답을 다 골랐다는 이야기니 이쯤 되면 제가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이 글을 적고 있는 내내 불편한 마음도 드는 것입니다. 거 의 2천6백명에 가까운 만점자들은 화학을 정말 잘하는 학생일까요? 화학을 잘 모르는 학생이 만점을 받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만 만점을 받은 학생이 한 문제를 틀려 2등급으로 밀려난 학생에 비해 명백하게 화학을 더 잘 한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제한된 시간 안에 교묘 하게 숨겨둔 하나의 정해진 답을 고르는 능력이 도대체 화학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입니까.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 걸까요? 수능은 문자 그대로 대 학교에서 수학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는지 측정(/판정?)하고자 시작되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대학에서 누구를 선발하는 것이 나은지—정확히는 나은지라기보다 그렇게 했을 때 반발할 여지가 적은지가 맞을 것 같습니다—를 비교·결정해 주는 변별의 기능만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온 흐름이 오랜 시간 동안 점점 더 공고해졌고, 이것이 오늘의 사태를 초래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모든 문제가 그렇듯 원인이 이렇게 단순하게 하나로 귀결된다 고 단정할 수 있는 건 아니고 훨씬 더 복잡한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봐야겠으나 가장 결정적인 원인 으로 지목되어야 마땅합니다. 수능을 주관하는 한국교육 과정평가원에서는 출제진과 검토진에 ‘좋은’ 문항이 수험생에게 제공될 수 있도록 신신당부합니다. 교육학에서 는 좋은 문항을 평가할 때 타당도, 신뢰도, 객관도 등을 살펴보지만, 수능 문제로 요구되는 좋은 문항의 요건에는 이걸 뛰어넘는 최우선 순위 요건이 따로 있습니다. 그 어떤 요건보다 중요한 것은 정답 시비가 없어야 한다는 점 입니다. 모든 문항의 ① ~ ⑤ 답지 중에는 단 하나의 정답 만이 존재해야 합니다.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다 보니 자칫 최종적으로 답없음이나 복수정답 처리되는 문항이 발생하면 그야말로 대형 사곱니다. 문책성 인사조치로 이 어지기도 하니 다른 모든 요건보다 이를 우선시하는 것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닙니다. 그런데 전부 단 하나의 답지로 정답이 정해진다 해도 사고에 준하는 민원 폭주 사례가 또 있으니, 그것은 소위 난이도 조절 실패라 부르는 사태 입니다. 어려운 문항이 없어서 만점자가 응시자의 11%보다 많으면 2등급이 아예 없어지는데, 화학에서는 아직 사례가 없었지만, 실제 4차례 정도(2005 생물Ⅰ, 2006 물리Ⅰ, 2016 및 2021 물리Ⅱ)의 사고 사례는 출제진에게 강한 압박이 됩니다. 2등급이 없는 게 무슨 문제가 되냐 싶지만 다른 과학탐구 과목 선택자와의 형평성 문제가 제기되기도 하고, 실수로 하나만 틀려도 3등급이 되어 이른 바 상위권 대학을 목표로 하는 수험생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생각보다 큰 사고로 간주됩니다. 여기서 좀 더 들어가서 어떤 과목에서 만점자가 많이 나오면 그들의 표준점수가 만점자가 적은 다른 선택과목의 만점 자보다 낮을 확률이 크다는 것도 출제진들에게는 유의해 달라는 요청 사항이 됩니다. 표준점수라는 것이 평균과 표준편차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평균은 낮추되 점수 분포의 편차를 줄일 수 있는 손쉬운 방법으로 전체적으로 쉽게 정답을 고를 수 있는 문항을 많이 포함하면서 킬러 문항 서너 개를 섞는 경향이 굳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고등학생들이 배우는 화학에서 어려운 문제를 출제하는 것은 꽤 까다로운 일입니다. 여기에 EBS 수능 교재에 연 계시켜서 사교육 없이 준비가 가능하게 해줘야 한다는 이유를 내세우다 보면 기존 교과서나 교재에 등장하지 않는 생소한 상황은 화학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충분히 유추해서 풀 수 있다 해도 제시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러니 ‘어려운’ 문항은 ‘해결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문항과 동치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앞에서 다뤘던 19번 문항 에서 화학 반응식의 계수를 미지수로 제시하고, 또다른 자료로부터 계수를 구하게 한 뒤에야 간신히 문제를 해결 할 수 있게 하는 식으로 킬러문항이 구성되기 일쑤였습니다. 화학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이런 문항을 빨리 푸는 능력까지 보장해 줄 수는 없습니다. 별도의 스킬이 숙련 되어 있어야 하는데 대체로 편법이 많습니다. 문항의 패턴을 보고 흔하게 사례를 드는 화학 반응을 몇 개 대입해 봐서 운 좋게 이게 들어맞아 빨리 해결되면 좋은 점수를 받는다든지, 위의 19번 문항같으면 x가 0.9니까 (나) 상 황까지 풀지 않고 정답지에 있는 9, 18, 27 중에 적당한 것 하나를 고른다든지 하는 식입니다. 여기까지 다 반영 된 후에야 전체적으로 문항들이 타당한지 신뢰로운지가 구색을 맞추듯 고려될 수 있는 상황이라고 보셔야 할 것 입니다.

[표 1]은 과학탐구 영역이 지금처럼 8개의 선택과목으 로 구성되기 시작한 2005학년도부터 올해 신입생이 치른 2025학년도까지 수능 과학탐구영역의 응시자 수를, [그림 1]은 이를 수능을 응시한 전체 인원으로 나눈 비율 의 변화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화학은 Ⅰ·Ⅱ 모두 가장 응시자가 많은 선택과목으로 시작했으나 가장 드라마틱하게 응시자 수가 감소하고 있습니다. 급기야 화학Ⅰ은 2024학년도부터는 과학탐구Ⅰ 네 과목 중 선택자 수가 가장 적은 과목이 되었고, 의대 정원 증원 이슈 때문에 반 짝 반등해서 그렇지 화학Ⅱ도 2024학년도 수능에서는 꼴찌였습니다. 8개 중 최대 2과목만 선택할 수 있게 된 후 화학Ⅱ는 줄곧 대체로 1% 미만의 수험생만 응시했었 다는 것도 눈여겨보셔야겠습니다. 보시다시피 유독 화학 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또한 학교에서 화학을 배웠지만  수능에 응시하지 않는 것일 뿐인 학생도 분명 존재합니다. 하지만 일반계 학교 현장에서 화학Ⅱ 수업을 담당하 는 선생님은 종종 자괴감에 빠지곤 합니다. 흥미진진한 화학 수업을 제공하면 동기부여가 되지 않겠냐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수능 시험이라는 강력한 외적 동기를 포기하는 것이 디폴트가 되어 버린 교실에서 어떤 수업을 어떻게 구성할지 외롭게 고민하면서도 의욕이 잘 생기질 않는 것은 물론, 가뜩이나 학령 인구수 때문에 교사 수 감축 압박이 가중되고 있는데 화학 선택자 수 감소 속도가 더 빠르니 함께 고민할 동료 화학 선생님 수도 줄어드는 악순 환이 시작되는 분위기입니다.

서두에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2022 개정교육과정이 본격 적용되는 올해 고등학교 1학년부터는 화학Ⅰ·Ⅱ 과목을 배우지 않고 수능 과학탐구영역도 과목 선택을 하지 않게 되므로 지금껏 설명드렸던 상황은 어쩌면 내년까지만 버티면 그만인 이야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참고로 일반 고등학교에서는 공 통 과목으로 ‘통합과학’과 ‘과학탐구실험’을 두 개 학기 씩 배우게 되며, 수능 탐구영역은 통합사회와 통합과학을 모두 응시하는 방식으로 바뀝니다. 기존 화학 영역의 내 용은 통합과학 이외에도 일반 선택 과목인 ‘화학’, 진로 선택 과목인 ‘물질과 에너지’, ‘화학 반응의 세계’로 분산되 어 각각 한 학기씩 선택하여 배울 수 있게 됩니다만 수능에는 출제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벌써부터 많은 우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과학탐구 선택과목의 수능 준비가 너무 어려웠다는 인식도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 분명 존재함에도 수능 점수(또는 등급)가 지금처럼 대학 입시에서 ‘변별력’을 제공해야 한다—그 이전에 더 좋은 대학 덜 좋은 대학이 있고, 더 좋은 대학일수록 졸업 후 출발점이 높다는 현실 인식이 근본적인 원인이겠지만— 는 강박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제가 비판하는 이러한 문제 는 새롭게 바뀐 수능에서 외려 더욱 심각해질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나마 출제할 수 있는 영역이 적어지면서 네 과목의 출제자들이 하나씩의 킬러문항을 더 기상천외 한 방식으로 개발하는 모습이 상상되는 게 그저 제 기우 이길 바라고 있습니다.

수능 출제 또는 검토에 참여해 보신 분들은 제 글에 불편함을 느끼실 수도 있습니다. 특히 예시로 콕 집어낸 문 제를 출제하신 분께 대단히 송구합니다. 제가 만나본 출제 참여 교수님, 선생님들은 물론 교육과정평가원에서 수능 업무를 담당하는 연구사분들도 한 분 한 분 모두 훌륭한 화학자들로 개인적으로 존경하고, 올곧은 인식에 공감하는 바도 많기에 이 글을 누군가에게 귀책시키려는 의도로 쓴 것이 전혀 아닙니다. 다만 최소한 화학세계를 읽고 계시는 독자분들만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지속해서 목소리를 내주십사 호소드립니다. 수능이 실시되면 당일 저녁에 곧바로 문항이 공개되면서 이의 신청 게시판이 한시적으로 열립니다. 공개된 정답이 틀린 것 같다, 문제가 이상하다 같은 수험생의 항의 정도가 소수 달리곤 하는데 대 부분은 착오에 의한 것으로 영향력이 미미합니다. 하다못해 이 게시판에라도 현장의 화학자들이 직접 문제를 풀어 보신 후 정답 오류가 아니라 문항의 타당성에 대해 평가 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일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좀 더 욕심을 내본다면 국가교육과정을 개편하는 과정에도 현장 화학자의 목소리가 더 반영될 수 있도록 관심과 참여가 절실합니다. 많은 수의 화학자들은 본인의 연구가 너무 바쁜 나머지 대학에 입학하기 전 학생들이 화학을 언제 어떻게 어디까지 배우는지 신경쓰시지 못합니다. 혹시 최근에 입학한 대학생들 상태가 유난히 과거와 다르다고 느껴지신다면 그것은 학생들 탓만 할 일이 아니라 그 들에게 제공되는 화학에 대한 배움의 기회와 활용이 예전만 못한데 기인한 것일 수 있다고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2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공통과학 부전공 연수를 받을 때 한 물리학과 교수님이 ‘요즘엔 물리Ⅱ를 배우지도 않은 학생들이 물리학과에 입학하기도 한다’고 한탄하시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지금은 화학과를 포함해서 어느 학과든 이런 현상을 아무도 불편하다 이상하다 생각하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느껴집니다. 고등학교 때까 지 뭘 얼마나 어떻게 배우든 어차피 대학에 들어오면 제 대로 다시 가르치면 된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지 모르나, 이미 화학 자체에 마음을 닫아버린 상태로 입학하는 일 정도는 최선을 다해 막아야지 않겠습니까? 어떤 학문 이든 소수의 천재가 전반적인 발전을 이끄는 측면도 분명 히 있겠지만 저변이 좁아지면 결국 그 영향은 고스란히 돌아와 발전의 원동력을 끌어내리게 될 것입니다. 혹시 여기서 조금 더 여력이 되신다면 화학에 흥미를 느끼는 자발적인 학습자들에게 본인의 학습 정도와 방향성의 적절함을 확인할 수 있는 평가 체계를 새로 만들어 주시면 금상첨화가 될 겁니다. 이미 대한화학회에서 오랫동안 화 학올림피아드를 주관하고 계절학교, 통신교육 등의 기회를 제공하고 계시지만 국제화학올림피아드 국가대표를 선발하는 중요한 목적이 있는 시험인 만큼 일반 학생들에게는 진입 장벽이 매우 높습니다. 참고로 한국물리학회에서는 ‘물리인증제’라는 제도를 통해 물리학의 다양한 영역에서 본인의 학습 수준을 확인할 수 있도록 별개의 평가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가 2023년부터는 기존의 중학생 물리대회와 통합하여 ‘물리대회(The Physics League; TPL)’[참고문헌 4]라는 이름으로 대회를 연 2회 운영하고 있습니다. 마침 한국중학생화학대회(KMChC)도 화학올림피아드 위원회에서 주관하고 있는데, 이처럼 화학도 얼마든지 분야별 학습 수준을 측정할 수 있는 절대평가 유형의 좋은 문항을 많이 제공할 수 있을 테고, 석차가 아니라 기준 점 수에 따라 등급을 부여하는 제도를 만들어 화학 인증제든 적당한 이름을 붙여 시행하면 화학을 좋아하고 화학 분야 로의 진로를 희망하는 학생들에게 적절한 동기부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화학올림피아드 고1반부 여름학교 입교 대상자 추천의 요건으로 인증제의 몇 개 영역에서 몇 급 이상의 결과를 요구한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활용성도 높일 수도 있을 것 같구요. 타당성이 충분히 확보된 좋은 문제들이 누적되면 언젠가는 이것이 수능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을 테고, 일선 학교 현장에서도 현재 수능보다 훨씬 더 유용하게 참고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 됩니다. 나아가 평가가 그저 누가 누구보다 더 우월한지—그나마 그조차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결과를 만들기 일쑤지만 —기어이 줄을 세워 부족한 자원을 불평 못 하 게 배분하는 기능에 천착하는 시대착오적인 패러다임을 벗어나 방향을 제시하고 필요한 학습을 효과적으로 유도 하는 긍정적 피드백과 동기부여라는 순기능을 제공하도록 하는 선구적 역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서없는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답답한 마음이 좀 후련해질까 싶었지만 글로 쓰고 보니 마음이 더 무거워집니다. 일개 필부의 푸념으로 가벼이 여기셔도 좋고, 혹시 평소에 비슷한 생각을 갖고 계셨던 화학세계 독자분 이 계신다면 언제든 머리 맞대어 좋은 방법을 찾는 일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부디 건승하십시오. 



참고문헌

1. 다양한 사이트에서 다시보기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무료 썸네일로도 제공되고 있습니다. https://tv.naver.com/v/50227955?playlistNo=909445 

2. 공식적인 등급 컷은 표준점수(https://www.data.go.kr/data/15080193/fileData.do) 만으로 발표되나 EBS 등 신뢰할 수 있는 복수의 기관에 의한 추정에 따른 원점수 환산 결과입니다. 





한규일 Gyuil Han


•  한국과학기술원 화학과, 이학사 (1990.3-1994.2)

•  성균관대학교 교육대학원(화학교육전공), 교육학석사(1997.9-2000.2)

•  경기도교육청  교사(2000.3-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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