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0년대는 화학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시기입니다. 우선 젊은 화학자들을 중심으로 유기 화합물의 이론이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정립된 화학 지식과 화학자들 사이의 교감에 기반하여, 1860년에 최초의 화학 국제 회
의인 칼스루헤 회의(Karlsruhe congress)가 열릴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 시기는 합성화학이 산업적인 가능성을
보여준 시기이기도 합니다. 합성화학은 염료 산업의 발전을 견인했고, 화학이“ 새로운 분자를 만들 수 있는” 학문
으로 그 가치를 보여주는데 기여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훗날 물리화학의 모태가 되는 열화학이 그 체계를 만들어
가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 외에도 많은 성취가 있었지만, 오늘은 이 세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1850년대
화학의 발전상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참고문헌 1]
우선 1850년경 화학계의 분위기를 한 번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1840년대까지 유기 화합물에 대한 연구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고, 지난 글까지 살펴본 것처럼 그러면서
여러 이론들이 등장하였습니다. 리비히를 비롯한 구세대 화학자들은 라디칼 이론에 만족한 채 합성을 통해 유기화
학 연구를 수행하고 있었지만, 더 나은 이론을 두고 치열하게 토론하고 있었던 젊은 화학자들 사이에서는 유형 이
론이 널리 유행하고 있었지요. 재미있는 것은 이 두 이론이 유기 화합물의 구조에 대해 주장하는 바는 전혀 달랐지
만, 예측이나 설명에 있어서는 비슷한 결과를 주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리비히는 게르하르트에게 쓴 편지 속에서 게르하르트의 최신 연구를 언급하며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완전히 정반대인 두 이론이 하나의 합성에서 만난다는 것이 참 이상합니다.”[참고문헌 2] 실제로 대부분의 화학자들은 그 때 그 때 편리한 설명을 취해서 자신의 실험 결과를 설명하곤 했습니다.
이 시기 화학계에 등장한 중요한 개념은 바로 원자가(valence)입니다. 1850년이 넘어가면서 젊은 화학자들을 중심으로 각 원자가 다른 원자나 라디칼과 이룰 수 있는 결합의 수가 정해져다는 생각이 등장합니다. 이는 지난 시간에 소개한 유형 이론의 귀결이었습니다. 유형 이론에 따르면 유기 화합물은 물 유형, 암모니아 유형과 같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물 유형은 산소 원자 하나에 수소 원자 두 개가 결합한 형태를 기본으로 하여, 수소 원자가 다른 원자나 라디칼로 대체된 분자들을 총칭하는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산소 원자는 본래 두 개의 원자 혹은 라디칼과 연결될 수 있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요?
1851년 윌리엄슨은 산소는 정확히 두 개의 원자나 라디칼과 연결될 수 있다는 생각을 발표했고, 이를 이어받아
1854년 아우구스트 케쿨레(August Kekule, 1829-1896)는 산소나 황이“ 이중 염기성(dibasic)”을 띤다는 이론을 제시합니다. 이는 산소나 황이 수소 두 개와 결합한다는 표현으로, 오늘날의 용어로 이야기하자면 2의 원자가를 갖는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아돌프 뷔르츠(Adolphe Wurtz, 1817-1884)는 1855년 질소가 삼중 염기성을 띤다고 발표하였습니다.[참고문헌 3]
이러한 분위기의 정점을 찍은 것이 1858년 발표된 케쿨레의 논문입니다. 이 논문에서 케쿨레는 탄소가 “사원소
성(tetratomic)”을 띠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개념에 기반하여 탄소와 탄소가 연결된 사슬이 유기 화합물의 골격을 형성하고 있고, 산소나 질소와 같은 헤테로원자(heteroatom)들은 그 안에서 특정한 위치를 점유하여 라디칼을 만들며, 마지막으로 빈 자리는 수소 원자들이 채우고 있다고 논증하였습니다.[참고문헌 4] 이는 화합물 내의“ 원자”들 이 실재하고, 이들이 공간에서 특정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중요한 함의를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케쿨레의 이론을 가리켜“ 구조 이론”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다.
구조 이론은 양반된 반응을 낳았습니다. 1858년 당시 40세가 안 된 젊은 화학자들은 구조 이론에 열광한 반면,
40세가 넘은 화학자들은 케쿨레의 이론을 무시하였습니다. 리비히, 뵐러, 분젠, 뒤마 모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탄소 원자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개념은 당시 화학자들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개념이었고, 어떠한 실험으로도 증명할 수 없는 “가설”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저 색다른 아이디어 정도로 치부되었죠. 리비히는 이러한 논란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오직 [관측] 사실만이 참이고, 사실들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그저 참에 가까울 뿐이다.”[참고문헌 5]
1858년은 화학계에서 다른 의미로도 중요한 해입니다. 예전에 리비히가 1840년 이후 이론에 흥미를 잃고 합성화학 연구에 매진했다는 이야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리비히 실험실에서 당시 합성화학 연구를 주도한 학생 중 한명으로 빌헬름 호프만(Wilhelm Hofmann, 1818-1892)이 있었습니다.[참고문헌 6] 그는 리비히의 총애를 받은 학생으로 1841년 리비히 밑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845년 최초의 “유기 합성” 논문을 발표합니다. 그는 같은 해 영국의 왕립 화학 칼리지(Royal College of Chemistry)의 책임자로 임명되었고, 이후 타르와 석탄에서 추출된 유기 화합물을 연구하였습니다. 여기까지는 흔한 화학자 이야기인 것 같지만, 이후 흥미로운 사건이 일어납니다.
1856년 호프만의 학생이었던 윌리엄 퍼킨(William Perkin, 1838-1907)이 타르에서 추출된 아닐린을 산화시
켜 보랏빛 물질을 얻는데 성공합니다. 이 물질은 염료로서 뛰어난 성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퍼킨은 바로 그 상업적 가치를 알아보았고, 호프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물질을 특허로 등록했습니다. 그리고 큰 공장을 세워 1858년부터 대량생산을 시작했습니다. 1859년“ 모브(mauve)”라는 브랜드 이름을 받은 이 물질은 유럽 패션업계를 강타했습니다. 싸고 질 좋은 보랏빛 염료를 찾아 헤매던 패션업계 종사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 염료를 사용했죠. 퍼킨은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습니다. 그리고 타르 염료 산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순수 화학 연구가 대규모 산업으로 응용된 역사상 첫 번째 예이자, 합성화학의 능력을 사회에 명백하게 보여준 첫 번째 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참고문헌 7]
1858년 호프만 역시 아닐린으로부터 붉은색 물질을 얻는 데 성공합니다. 호프만은 영국과 프랑스의 회사들과 협력하여 이 물질을 염료로 개발하였고,“ 크림슨(crimson)” 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모브의 인기는 몇 년 못 가 시들었지만, 크림슨은 보다 오랜 기간 사랑을 받았습니다. 호프만은 연구를 계속하여 다양한 색상의 염료를 개발
하였고, 이후 10년 이상 염료 산업의 발전을 이끌었습니다. 호프만 본인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1862년 런던 국제
박람회에서 호프만의 염료는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전시장에는 다양한 색으로 염색된 옷감이 펼쳐져 있었
고, 각 옷감 옆에는 해당 염료가 결정 상태로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시장 중앙에는 이 모든 염료의 원천이
된 시꺼멓고 끈적끈적한 타르가 전시되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고 합니다.[참고문헌 8]
여기서 호프만이나 퍼킨의 연구는 구조 이론과 별 상관이 없었다는 점을 한 번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이들은
리비히의 합성화학을 따르는 자들로서, 분자의 특별한 내부 구조를 가정하지 않고도 합성을 통해 지식을 축적하는
데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퍼킨이 퀴닌(quinine)을 합성하려다 우연히 모브 염료를 발견했다는 서술이 많이 퍼져있지만, 과학사적으로 보다 엄밀하게 살펴보면 실제로 퍼킨의 발견은 당시 합성화학이 추구하던 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즉, 퍼킨은 결과를 정확히 예측하고 합성을 시도한 것이 아니라, 특정 조건에서 이런저런 물질을 섞으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탐구하고 있었던 것이죠. 여기서 충분히 발전한 학문이라면 서로 다른 접근법과 철학을 가지고도 다양한 성과를 이룰 수 있다는 점을 볼 수 있습니다.
한편, 당시 화학계에는 조금 다른 관점으로 화학 반응에 접근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화학 반응에서 발생하거나 흡수되는 “열”을 탐구하는 연구자들이었죠. 일찍이 라부아지에가 라플라스와 함께 열량계를 개발하여 정량적으로 반응열을 측정하려고 한 이후(1781), 화학계에서는 열의 존재가 거의 무시되어 왔습니다. 60년 만에 이 관심을 되살린 것이 1840년대에 활동한 화학자 헤스(G. H. Hess, 1802-1850)입니다. 헤스는 당시 과학의 변방이었던 러시아에서 활동했던 사람으로, 베르셀리우스를 한 번 만난 것 외에는“ 주류” 화학자들과의 교류가 별로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당시 젊은 화학자들이 열광적으로 뛰어들었던 유기화학 연구가 아닌 다른 연구를 했는지도 모릅니다.
헤스는 1839년부터 1842년까지 출판된 일련의 논문을 통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그는 여기서 열화학
(thermochemistry)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도입하였고, 1840년 논문에서는 본인의 실험 결과를 종합하여“ 화합물이 어떻게 형성되든 그 형성 과정에서 발생하는 열의 총량은 항상 같다”는 공리를 제시합니다.9 흥미로운 것은 이 내용이 열역학에서 에너지 보존 법칙이 처음 발표되기도 전에 출판되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헤스가 열역학의 발전에 직접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고, 라부아지에 때부터 내려오는“ 보존”이라는 개념을 확장시킨 시도이자 리히터가 했던 것처럼 화학을 수학화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같은 시기에 물리학계에서는 열역학이 그 뼈대를 갖춰 나가고 있었습니다.10 현대 열역학의 효시는 카르노(SadiCarnot, 1796-1832)의 1824년 논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 논문에서 열원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일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이 논문은 학계에 알려지지 않았고, 1834년 클라페이론(Emile Clapeyron, 1799-1864)이 엄밀한 미적분학을 사용해 열기관에 관한 이론을 정리할 때에 와서야 다시 빛을 보게 됩니다. 카르노와 클라페이론은 둘 다 엔지니어였습니다. 그들은 경험적으로 열기관의 열효율이 100%가 될수 없음을 알고 있었고, 이에 기반하여 고온에서 저온으로 열이 흐를 때 일을 할 수 있는 양이 한정되어 있음을 수학적으로 입증했죠. 모든 열이 일로 변환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편, 열과 일이 동등하다고 믿었던 물리학자들이 있었습니다. 마이어(Julius Mayer, 1814-1878)는 1842년 열
이 일로 변환될 수 있다는 주장을 처음 발표했고, 1845년에는 열과 일이“ 힘”의 두 가지 형태라고 주장했습니.[참고문헌 11] 줄(James Joule, 1818-1889)은 1843년 일과 열이 서로 변환 가능하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입증하였고, 1845년에는 영국 과학진흥협회의 화학 분과 모임에서 열의 기계적 “당량(equivalent)”을 어떻게 측정할 수 있는지 발표하였습니다.[참고문헌 12] 헬름홀츠(Hermann von Helmholtz, 1821-1894)는 1847년 에너지의 총량이 보존된다는 에너지 보존 법칙을 처음으로 정리하여 발표하였습니다.
즉, 1840년대에는 열역학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열과 일의 관계에 대한 두 가지 입장이 상충하고 있었습니다. 열이 일로 완전히 변환될 수 있다는 마이어, 줄, 헬름홀츠의 입장과, 그렇지 않다는 카르노, 클라페이론의 입장이 그것입니다. 논란이 지속되던 와중에 1850년, 클라우지우스(Rudolf Clausius, 1822-1888)가 이 두 입장을
화해시킨 논문을 발표하죠. 클라우지우스는 여기서 에너지 보존 법칙은 첫 번째 법칙으로, “열을 일로 100%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다”라는 명제는 두 번째 법칙으로 정리하고, 이에 기반하여 두 입장을 모두 포함하는 이론 체계
를 정립합니다. 톰슨(William Thomson, 1824-1907)[참고문헌 13] 역시 1851년 비슷한 이론을 발표하였습니다. 이후 열역학은 빠른 속도로 정리되었고, 그 근간에 있는 “에너지” 개념은 물리학계에서 대대적으로 유행하게 됩니다. 기존의 물리학도 전부 에너지 개념을 중심으로 다시 쓰여졌죠.[참고문헌 14] 1850년대 화학계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열화학 연구가 활발히 시작되고 있었습니다.[참고문헌 15] 화학자들은 화학 반응에서 방출되거나 흡수되는 열을 측정하여 데이터를 모으기 시작했고, 이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열역학 이론도 고민했습니다. 나아가서는 이 반응열의 근원을 설명해 보려고 노력했죠. 예를 들어 1851년에는 화학 반응에 수반되는 열의 양이 온도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이 실험적으로 밝혀졌고, 1858년 물리학자 키르히호프(Gustav Kirchhoff, 1824-1887)가 열역학 법칙을 이용하여 이 사실을 수학적으로 증명합니다. 이 시기의 열화학자들은 반응열이 구성 성분들 사이의 화학적 친화도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단순하게 분해 반응에서는 열이 방출되고 결합 반응에서는 열이 흡수된다고 믿었죠.
열화학의 발전은 유기화학의 발전과는 다소 다른 양상을 띱니다. 열화학은 태생적으로 열역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에, 동시대에 발전하던 유기화학과는 달리 물리학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16 예를 들어 엔트로피 개념이 열역학에서 등장하자, 열화학자들은 그 개념을 화학 반응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고민했죠. 유기화학과 열화학은 그 중심 철학에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유기화학자들은 (그 실재성을 어디까지 인정하느냐와는 별개로) 원자 개념을 중심으로 화학 반응을 이해했습니다. 반면 열화학자들 은 에너지 개념을 중심으로 화학 반응을 이해했죠. 이는 훗날 원자론자들과 반원자론자들 사이의 논쟁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1858년은 케쿨레가 탄소의 원자가 논문을 발표한 해이자, 퍼킨이 모브 염료를 대량생산하기 시작한 해이고, 키
르히호프가 반응열의 온도 의존성을 수식으로 유도한 해입니다. 1850년대 화학의 풍경은 이처럼 다채로웠습니다.
참고문헌
이 내용은 다음 글들에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Alan J. Rocke, “The Theory of Chemical Structure and Its Applications” in The Cambridge History of Science, Volume 5: The Modern Physical and Mathematical Sciences, ed. Mary Jo Nye (Cambridge, United Kingdom: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 Hans-Werner Schütt, “Chemical Atomism and Chemical Classification” in The Cambridge History of Science, Volume 5: The Modern Physical and Mathematical Sciences, ed. Mary Jo Nye (Cambridge, United Kingdom: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 N. W. Fisher, “Kekule and Organic Classification,” Ambix 21 (1): 29-52 (1974); Virginia M. Schelar, “Thermochemistry and the Third Law of Thermodynamics,” Chymia 11: 99-124 (1966).
Fisher, 앞의 글, 30쪽에서 재인용.
지난 글까지는 화학자들 사이의 사제 관계를 종종 언급했습니다만, 이 시대 젊은 화학자들은 다양한 연구실에서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 “XX의 제자”와 같은 단순한 표현으로 화학자들을 소개하기 어려워집니다. 케쿨레의 경우 리비히를 비롯한 독일 교수들, 뒤마를 비롯한 프랑스 교수들에게 사사했고, 여기에 더하여 게르하르트로부터도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같은 해에 쿠퍼(A. S. Couper, 1831-1892) 역시 탄소의 원자가가 4라는 가설을 발표하였지만 안타깝게도 큰 주목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Schütt, 앞의 글, 247쪽에서 재인용.
Catherine M. Jackson, “Synthetical Experiments and Alkaloid Analogues: Liebig, Hofmann, and the Origins of Organic Synthesis,” Historical Studies in the Natural Sciences 44(4): 319-363 (2014).
이 명제는 다소 조심스럽게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그 이전에도 화학의 산업적 응용에 대한 많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호프만 본인이 리비히 밑에서 공부할 때 리비히의 명령을 받아 염료 연구를 수행한 적이 있습니다. Jackson (2014) 참조.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대규모 산업으로 응용”된 첫 번째 예라는 점입니다.
Alan J. Rocke, “Hypothesis and Experiment in the Early Development of Kekule’s Benzene Theory,” Annals of Science 42: 355-381 (1985).
오늘날 헤스의 법칙으로 알려져 있는 법칙입니다.
Crosbie Smith, “Force, Energy, and Thermodynamics” in The Cambridge History of Science, Volume 5: The Modern Physical and Mathematical Sciences, ed. Mary Jo Nye (Cambridge, United Kingdom: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 Gregory S. Girolami, “A Brief History of Thermodynamics, As Illustrated by Books and People,” J. Chem. Eng. Data 65 (2): 298-311 (2020).
당시 물리학 용어도 통일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아직 “에너지”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전이므로, 여기서 “힘”이라는 용어는 “에너지”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이 내용이 “화학” 분과 모임에서 발표되었다는 것은, 헤스의 연구 이후 화학자들 사이에 “열”에 대한 관심이 살아났음을 방증합니다.
이 톰슨이 훗날 작위를 받아 켈빈 경(Lord Kelvin)이 되었고, 오늘날 절대 온도의 단위에 그 이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에너지에 비해 훨씬 이해하기 어려운 “엔트로피” 개념은 1865년이나 되어서야 등장했고, 당시에는 물리학자들조차도 그 개념을 익숙하게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헤스 본인은 1850년, 48세의 나이로 요절하였기 때문에 이 시기의 발전을 직접 볼 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 열화학은 19세기 말에 “물리화학(physical chemistry)”이라는 이름을 받게 됩니다.
최정모 Jeong-Mo Choi
• 한국과학기술원 화학과, 학사(2003.3-2011.8)
• Harvard University 과학사학과, 석사(2011.9-2015.5, 지도교수 : Naomi Oreskes)
• Harvard University 화학 및 화학생물학과, 박사 (2011.9-2016.5, 지도교수 : Eugene I. Shakhnovich)
• Washington University in St. Louis, 박사 후 연구원(2016.8-2019.4, 지 도교수 : Rohit V. Pappu)
• 한국과학기술원 자연과학연구소, 연구조교수(2019.6-2020.8)
• 부산대학교 화학과, 조교수(2020.9-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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