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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히, 뵐러, 뒤마 <화학사 돌아보기>


오늘 글에서는 리비히(Justus von Liebig, 1803-1873), 뵐러(Friedrich Wöhler, 1800-1882), 뒤마(Jean-Bap- tiste Dumas, 1800-1884)라는 세 명의 화학자를 중점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비슷한 나이대였던 이들은 때로는 경쟁자로, 때로는 공동 연구자로, 때로는 친구로 유럽 화학계를 이끌어 나갔습니다. 흥미롭게도 이들은 모두 그 이전 세대 거장의 제자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리비히는 게이뤼삭 밑에서 공부했고, 뵐러는 베르셀리우스로부터, 뒤마는 테나르로부터 화학을 배웠습니다. 이들은 이전 세대의 연구를 충실히 전수받아 그를 뛰어넘는 새로운 연구를 수행하였으며, 자신의 뒤를 잇는 후배 세대에게도 연구를 체계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오늘 글에서는 특히 이들의 초기 삶과 업적에 집중하여 살펴보겠습니다.[참고문헌 1]

뵐러는 수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화학에 관심을 갖고 1820년 마르부르크 대학교에 입학합니다. 1823년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그멜린(Leopold Gmelin, 1788-1853)의 지도 아래 의학 박사 학위를 받은 뵐러는, 그멜린의 추천을 따라 스웨덴의 베르셀리우스 밑에서 공부 하러 떠납니다. 약 1년 동안 함께 시간을 보낸 뵐러와 베르셀리우스는 이내 최고의 관계를 이루었습니다. 뵐러는 베르셀리우스와의 만남을“헤아릴 수 없는 축복”이라고 칭했고, 베르셀리우스 역시 뵐러를 최고의 애제자로 삼았습니다.[참고문헌 2] 뵐러는 1826년 독일로 돌아와 베를린 공과대학교에서 화학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뵐러는 베르셀리우스의 책과 논문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등 독일에서 베르셀리우스를 대변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1828년 요소를 합성했을 때도 그는 베르셀리우스에게 가장 먼저 편지를 보내 기쁜 소식을 알렸죠.

한편, 리비히는 약재상으로 일하던 부친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릴 때 학과 공부에서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고, 아버지는 그를 학교에서 빼내 약사로 훈련받도록 보냈습니다. 이 시기에 화학에 흥미를 갖게 된 리비히는 아버지를 설득하여 화학을 더 공부하기 위해 1820년 본 대학교에 입학합니다. 아버지와 친분이 있었던 화학 교수 카스트너(Karl Kastner, 1783-1857) 밑에서 공부하던 그는 1821년 카스트너가 에를랑겐 대학교로 옮기자 그를 따라 에를랑겐 대학교로 옮겨갔고, 카스트너의 추천으로 1822년 10월부터 파리에 가서 화학을 공부하게 됩니다. 리비히는 당시 화학의 중심지였던 파리에서 17개월을 머물면서 화학을 공부했습니다.[참고문헌 3] 리비히는 테나르의 지도를 받아 화학 연구에 매진했고, 1823년 뇌산염(fulminate)에 관한 첫 연구 결과를 발표합니다. 테나르는 리비히를 대신하여 이 결과를 과학 아카데미 모임에서 발표하였는데, 이 때 젊은 리비히의 인간미를 보여주는 짤막한 촌극이 벌어졌습니다. 테나르의 발표가 끝나고 한 낯선 신사가 리비히를 찾아왔습니다. 그 신사는 리비히를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하고 싶다고 말했죠. 리비히는 그 신사가 누구인지 몰랐고, 너무 무섭고 부끄러운 나머지 그 저녁 식사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신사는 알렉산더 훔볼트 (Alexander von Humboldt, 1769-1859)였고, 리비히를 자신의 오랜 친구 게이뤼삭에게 소개해 주고자 저녁 식사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훔볼트는 당시 독일 학계를 대표하는 지식인으로서 세계 곳곳을 탐험하는 박물학자이기도 했습니다. 멀리 아메리카 대륙과 러시아까지 탐험했던 그는 당시 유럽에 와있었는데, 그곳에서 젊은 학자들을 발굴하는 데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 중 한 명이 제네바에서 생리학과 약제학을 공부하고 있던 젊은 화학자 뒤마였습니다. 훔볼트는 제네바에서 뒤마를 만나 그를 파리로 초청하였고, 뒤마는 1823년 파리로 와서 테나르와 함께 화학 연구에 매진하게 됩니다. 그런 훔볼트가 과학 아카데미 모임에 참석했다가 또다른 젊은 화학자를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첫 번째 기회는 놓쳤지만, 마침내 리비히는 훔볼트의 주선으로 게이뤼삭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둘은 순식간에 끈끈한 사제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뵐러와 베르셀리우스의 관계처럼, 리비히와 게이뤼삭 역시 서로를 진심으로 아끼는 사이를 이루었지요. 이후 리비히는 언제나 게이뤼삭을 자신의 스승으로 여겼고, 게이뤼삭이 세상을 뜰 때 까지 깊은 존경심과 우정을 유지했습니다. 1824년 5월, 훔볼트의 추천으로 리비히는 21세의 나이에 기센 대학교의 교수가 됩니다. 게이뤼삭을 만난지 6주만에 헤어진 셈이지만, 독일로 돌아간 이후에도 리비히는 프랑스 학계와 깊은 관계를 유지합니다. 대학에 입학한 첫 학기부터 프랑스어를 공부했던 리비히는 프랑스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 능력을 활용하여 리비히는 게이뤼삭을 비롯한 프랑스 화학자들과 프랑스어로 서신을 교환했고, 논문을 출판할 일이 있으면 프랑스 화학 저널인『Annales de chimie』를 가장 먼저 고려했습니다.

재미있게도, 이 시기의 베르셀리우스와 뵐러는 프랑스 스타일의 화학을 싫어했습니다. 리비히의 초기 논문을 두고 베르셀리우스와 뵐러가 나눈 서신을 보면, 연구가 빠르지만 불완전하다거나 엉성하다는 평가가 많이 나오고,“부분적인 관찰 결과와 불완전한 분석으로부터 중요한 결론을 서둘러서 도출한다”는 표현도 사용되었습니다. 뒤마는 더 심한 혹평을 받았습니다. 베르셀리우스는 뒤마를 가리켜“모든 프랑스인들이 그렇듯 뒤마는 발견을 뒤쫓아 다닐 뿐이다”라고 평가하였고,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뵐러는 베르셀리우스에게 뒤마가 남의 연구를 표절한 것으로 의심되는 여러 연구를 정리한 목록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뵐러와 리비히의 운명은 흥미롭게 겹쳐집니다.[참고문헌 4] 리히비는 파리에서 뇌산 은(silver fulminate)을 연구했고, 뵐러는 스톡홀름에서 시안산 은(silver cyanate)을 연구했습니다. 그런데 각자 무게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두 물질은 동 일한 조성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다혈질이었던 리비히는 이 결과를 보자마자 뵐러를 강하게 공격하였습니다. 반면 보다 차분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뵐러는 리비히에게 샘플을 보내 직접 확인하게 했죠. 분석을 마친 리비히는 1826년, 뵐러의 분석이 올바르게 수행되었음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습니다.[참고문헌 5] 그리고 뵐러와 리비히는 좋은친구가 됩니다. 이들은 평생에 걸쳐 1000통 이상의 서신을 교환했고, 여러 연구를 함께 수행하였습니다. 1829년 리비히가 뵐러에게 쓴 편지에는 심지어 이런 말이 나오죠.“나는 우리의 우정이 우리가 마주친 사소한 충돌로 인해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며, 여전히 서로를 지지할 것이라 확신 한다네.”[참고문헌 6]

이 시기는 유기물의 조성 분석법이 급속도로 발전하던 시기였습니다. 우리의 주인공들이 바로 그 주역이었죠. 리비히는 1831년 칼리구(kaliapparat)라는 기구를 발표합니다.[참고문헌 7] 당시 유기 분석법은 시료 내의 탄소와 수소를 산화시켜 이산화 탄소와 물을 얻는 방식을 주된 방식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시료를 많이 사용하면 기체가 많이 발생하여 수집 및 정량화가 어려웠죠. 따라서 시료를 적게 사용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정확도의 하락으로 귀결되었습니다. 리비히는 수산화 포타슘(KOH)과 염화 칼슘(CaCl2)을 이용하여 이산화 탄소와 물이 발생하는 즉시 반응하여 액체 및 고체 상으로 포집되도록 기구를 고안하였습니다. 이제 많은 양의 시료를 사용할 수 있었고, 정확도도 크게 상승하였습니다.[참고문헌 8] 뵐러와 베르셀리우스는 칼리구를 보자마자 극찬하였습니다. 뒤마는 처음에 이 기구를 평가절하 하였지만, 이내 그 가치를 알아보고 자신도 이 기구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뒤마 자신도 새로운 분석 방법 개발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는 1826년 기체의 밀도를 정량적으로 결정하는 방법을 개발하였고, 1833년에는 질소의 함량비를 정량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을 발표하였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분석법의 발전으로 정확한 원소 함량비를 구할 수 있게 되면서, 유기화학의 발전은 가속화됩니다.

뵐러와 리비히는 1832년 함께 쓴 논문에서 벤조산(benzoic acid), 벤조인(benzoin) 등의 화합물에서 특정 원자단 (C7H5O)9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 원자단을 벤조일 라디칼(benzoyl radical)로 명명하였습니다.“라디칼”이라는 용어는 뿌리를 의미하는 라틴어 radix에서 온 말로, 여러 화합물 내에서 변하지 않는 덩어리로 존재하는, 뿌리가 되는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연구는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후 빠른 속도로 에틸(ethyl), 메틸(methyl), 아세틸(acetyl), 카코딜(cacodyl) 라디칼 등이 제안되었습니다. 이때는 베르셀리우스의 이원론이 여전히 영향력을 떨치고 있던 때라, 사람들은 이 라디칼이 마치 무기화합물 내 양이온처럼 유기화합물 내에서 전기적으로 양성을 띠고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원론과 라디칼 이론이 결합되자 모든 것이 아름답게 설명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내 라디칼 이론은 반대에 부딪힙니다. 주된 공격은 뒤마로부터 왔습니다. 먼저 무엇을 라디칼이라고 보아야 하는지가 모호하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리비히는 에탄올(CH3CH2OH)의 라디칼을 에틸(CH3CH2)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도 에탄올에 탈수 반응을 시키면 에틸렌(CH2CH2)이 형성된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에탄올의 라디칼은 에틸이 아니라 에틸렌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라디칼은 무엇을 기준으로 정해야 하는 걸까요? 더 큰 문제는 많은 화합물에서 염소가 수소를 대체 할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일찍이 1815년에 게이뤼삭이 사이안화 수소(HCN)로부터 염화 사이아노젠(CNCl)을 얻어낸 바 있었고, 이후 뒤마는 클로로포름(CHCl3)의 수소가 염소로 대체될 수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베르셀리우스의 이원론에서 수소는 전기적으로 양성을 띤 원소로, 염소는 전기적으로 음성을 띤 원소로 분류되어 있었습니다. 만약 염소가 수소를 대체할 수 있다면, 그 나머지 부분은 전기적으로 양성일까요, 음성일까요? 이를 설명할 수 없었던 베르셀리우스의 이원론은 큰 곤경에 처하게 됩니다.

1835년, 뒤마의 학생이었던 로랑(Auguste Laurent, 1807-1853)은 라디칼의 개념을 뒤바꾼 새로운 이론을 제시합니다. 그는 나프탈렌(naphthalene, C10H8)과 그 할로젠유도체들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다가 이들 모두를 하나의 종류로 묶어 표현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는 탄소와 수소로만 구성된 나프탈렌을“근본 라디칼(fundamental radical)”이라 부르고, 그 할로젠 유도체들을“유도 라디칼(derived radical)”이라 불러 라디칼 개념을 확장 하였습니다.이제“라디칼”은“변하지 않는 덩어리”가 아니라“동일한 탄소 틀을 공유하는 유기 물질들”을 총칭하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흥미롭게도 로랑은 이 아이디어를 결정학에서부터 얻었습니다. 결정 구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각 원자의 종류가 아니라 원자의 배열이었습니다. 즉, 서로 다른 조성으로 구성된 결정들이라 하더라도 이들이 같은 배열을 이루고 있다면 유사한 결정 구조를 갖게 됩니다. 로랑은 유기 분자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추측한 것입니다. 탄소 틀이 동일하다면 설사 수소가 할로젠 원자로 대체된다 하더라도 비슷한 성질을 가지게 될 것이고, 이들은 동일한 종류로 분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뒤마는 로랑의 새로운 이론을 접하고 처음에는 거부했으나, 1838년 아세트산(CH3COOH)의 수소 세 개를 모두 염소로 치환한 트라이클로로아세트산(CCl3COOH)이 아세트 산과 유사한 성질을 보이는 것을 발견하고 로랑의 이론을 받아들입니다. 이 이론은 화학 반응에 의해 서로 변환되는 화합물들은 같은 수의 원자들이 같은 방식으로 결합해 있는, 동일한“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는 이론으로 발전하여 유형 이론(type theory)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서로 결합 방식만 같다면 구성 원자가 전기적으로 양성이든 음성이든 상관없었기 때문에, 결국 유형 이론이 널리 받아들여지면서 베르셀리우스의 이원론은 점차 무대에서 밀려나게 됩니다. 리비히의 연구 결과들도 유형 이론으로 더 잘 설명할 수 있었고, 그도 더 이상 라디칼 이론을 고집할 수만은 없었죠. 예를 들어 그는 아세트산과 트라이클로로 아세트산이 동일하게 산으로 작용하는 걸 보면서 산성을 띠게 하는 원자는 산소가 아니라 수소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리비히는 1838년 발표한 논문에서 산은 산화된 라디칼이 아니라 치환 가능한 수소 원자를 포함하는 물질이라는 이론을 주창하죠.

하지만 리비히는 점차 이러한 이론적 논쟁에 피곤을 느꼈습니다. 1839년에 쓴 글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새로운 결정 물질을 발견하는 것도 어렵지 않고, 그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수행하는 것은 현재로선 심지어 더 쉽다. 하지만 이 물질이 말하게 만들고, 어디서부터 왔는지, 누가 친척인지 자백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문제다.”[참고문헌 10] 결국 리비히는 이후 화학 이론 연구에 관심을 접고 합성 화학에 집중합니다. 사실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나 분자에 대한 고찰을 그만두고, 그 때까지 개발된 여러 화학 모형들을 도구로 삼아 새로운 물질들을 합성하고자 하는 방향성은 당시 유럽화학계 전반에서 관찰되었습니다. 리비히도, 뵐러도, 뒤마도 예외는 아니었죠. 그들 입장에서는 이 모형 들이 정말로 옳은지 그른지 따지는 것은 확인이 불가능한 (원자는 보이지 않으니까요!) 형이상학적 논쟁에 불과했고, 어쨌든 이 모형들이 실험 결과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예측 하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요.

리비히, 뵐러, 뒤마는 모두 19세기 초중반 화학계를 이끌어나가는 거물들 이었습니다. 오늘 글에서 살펴본것처럼 이들의 경쟁과 협력으로 당시 화학이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리비히는“리비히학파”라 불릴 정도로 많은 수의 제자들을 체계적으로 길러냈습니다. 뒤마도 파리에서 유사한 프로그램을 시도했지만 그만큼 성공하지는 못했죠. 결국 리비히이후 화학의 중심지는 프랑스에서 독일로 옮겨지게 됩니다. 여기에는 당연히 리비히 한명의 역할뿐 아니라 다양한 요소가 개입되어 있었습니다. 다음글에서는 리비히학파의 성공과 이시기 연구 헤게모니의 전환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까 합니다. 지금까지 주로 살펴본 화학의 지적흐름과는 조금 거리가 있겠지만, 새로운 관점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참고문헌


  1. 이내용은 다음 글들에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Alan J. Rocke,“Organic analysis in comparative perspective: Liebig, Dumas, and Berzelius, 1811-1837,”in In- struments and experimentation in the history of chemistry, eds. F.L. Holmes and T.H. Levere (Cambridge, MA: MIT Press, 2000); Ferenc Szabadváry, History of Analytical Chemistry, trans. Gyula Svehla (Oxford,UK: Pergamon Press,1960),Chapter IX;Hans-Werner Schütt,“Chemical Atomism and Chemical Classification”in The Cambridge History of Science, Volume 5: The Modern Physical and Mathematical Sciences, ed. Mary Jo Nye (Cambridge, United Kingdom: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 Alan J. Rocke,“The Theory of Chemical Structure and Its Applications”in The Cambridge History of Science, Volume 5: The Modern Physical and Mathematical Sciences, ed. Mary Jo Nye (Cambridge, United Kingdom: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

  2. T. E. Thorpe,“Berzelius and Wöhler,”Nature 31: 196-197 (1885).

  3. 리비히는 파리 체류 기간 중인 1823년 6월, 에를랑겐 대학교로부터 박사학위를 받습니다. 리비히는 박사학위논문도 제출하지 않았고 학위 수여식에 참석할 수도 없었지만, 지도교수 카스트너가 그 모든 것을 면제받을 수 있도록 강력하게 힘을 쓴 덕분에 학위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4. Soledad Esteban,“Liebig-Wohler Controversy and the Concept of Isomerism,”Journal of Chemical Education 85 (9): 1201-1203 (2008).

  5. 지난 글에서 살펴본 것처럼, 뇌산 은과 시안산 은은 1832년 베르셀리우스에 의해“이성질체”로 명명됩니다.

  6. 리비히는 1830년 베르셀리우스를 만나고 역시 좋은 관계를 맺기 시작합니다. 이후 리비히는 베르셀리우스의 원자량을 받아들여 사용합니다.

  7. 현재 미국화학회(American Chemical Society)의 로고 하단에는 이 칼리구의 형태가 삽입되어 있습니다.

  8. 2005년 이 칼리구를 리비히의 매뉴얼대로 재현한 연구가 발표되었습니다. 칼리구는 심지어 학부생도 쉽게 조작할 수 있을 정도로 쉬웠고, 다른 장비 없이도 분석의 정확도를 판단할 수 있는 자체적인 루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시료의 순도가 충분히 높다면 한 번의 조작만으로 정확한 조성을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Melvyn Usselman et al., “Restaging Liebig: A Study in the Replication of Experiments.”Annals of Science 62: 1-55 (2005).

  9. 아직 원자량이 통일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뵐러와 리비히가 실제로 사용한 분자식은 C14H10O2였습니다. 이 글에서는 혼동을 막기 위해 오늘날의 표기법을 사용합니다.

  10. Catherine Mary Jackson, Analysis and Synthesis in Nineteenth Century Organic Chemistry, Ph.D. dissertation, 103쪽에서 재인용.



최정모 Jeong-Mo Choi

• 한국과학기술원 화학과, 학사(2003.3-2011.8)

• Harvard University 과학사학과, 석사(2011.9-2015.5, 지도교수 : Naomi Oreskes)

• Harvard University 화학 및 화학생물학과, 박사 (2011.9-2016.5, 지도교수 : Eugene I. Shakhnovich)

• Washington University in St. Louis, 박사 후 연구원(2016.8-2019.4, 지 도교수 : Rohit V. Pappu)

• 한국과학기술원 자연과학연구소, 연구조교수(2019.6-2020.8)

• 부산대학교 화학과, 조교수(2020.9-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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