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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셀리우스의 시대


스웨덴의 화학자 옌스 야코브 베르셀리우스(Jons Jakob Berzelius, 1779-1848)는 19세기 전반 화학을 이해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베르셀리우스는 데이비로 대표되는 전기화학과 돌턴으로 대표되는 원자설을 통합하여 화학을 이해하는 관점을 정립하였습니다. 그는 화학 결합을 설명하는 이원론을 창안하였고, 원자량 데이터를 정교하게 확립하였으며, 오늘까지 사용되고 있는 화학 기호를 만들어 냈습니다. 게다가 베르셀리우스는 삶의 족적도 범상하지 않 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의 삶을 소개하고, 그의 주요 업적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참고문헌 1]

베르셀리우스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습니다. 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는 그가 네 살일 때 사망했고, 어머니는 역시 짝을 잃은 홀아비였던 새아버지와 결혼합니다. 베르셀리우스가 여덟 살이 되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새아버지는 점잖고 교양 있는 사람으로 그 이후에도 베르셀리우스를 맡아 키웠지만, 베르셀리우스가 열한 살이 되던 해 세 번째로 결혼하면서 가족이 너무 늘어 더이상 베르셀리우스를 감당 할 수 없었습니다. 이후 베르셀리우스는 외삼촌 댁에 맡겨 졌습니다. 외삼촌 내외가 베르셀리우스를 학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행복하지 않았고, 14세에 독립하여 가정교사 일을 하여 돈을 벌면서 중학교[참고문헌 2]를 다녔습니다. 1798년 그는 열아홉의 나이로 웁살라 대학교에 진학하여 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같은 시기에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독학하여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언어 능력은 이후 베르셀리우스의 과학 활동에 큰 도 움을 줍니다.

당시 의대 커리큘럼에서는 화학 실험을 수행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고, 베르셀리우스에게 주어진 첫 실험은 황산 철의 연소 실험이었습니다. 1주일 동안 수행해야 하는 실험이었지만 그는 몇 시간 만에 실험을 끝냈고, 이 실험으로 화학에 큰 흥미를 느낀 그는 담당 조교의 호의를 얻어 실험실을 몰래 들락거리며 논문에서 읽은 실험을 수행하곤 했습니다. 당시 웁살라 대학의 화학 석좌 교수는 요한 아프젤리우 스(Joḧ an Afzelius, 1753-1837)로, 베르셀리우스가 비밀리에 실험실을 이용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걸 금지시키는 대신 공식적인 허가를 내주었고, 이후 베르셀리우스의 연구 결과를 논문으로 출판하는 데에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습니다. 베르셀리우스의 첫 논문은 온천수의 분석 논문으로 1800년 출판됩니다.

베르셀리우스는 1802년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스톡홀름의 군의관 학교 조교 자리를 얻습니다. 여기서 그는 자유롭게 화학 연구를 수행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이 자리가 무급으로 일하는 자리였다는 점이죠. 그는 돈을 벌기 위해 광천수 생산 사업에 재산을 투자하였지만, 한 푼도 건지지 못했습니다. 이후 스스로 식초 공장을 세워서 사업을 시작했지만, 역시나 큰 빚만 남기고 실패하고 말죠. 베르셀리우스는 본인의 자서전에서 이 시기를 돌이키며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안타깝게도 [나는] 그 전까지 식초 공장을 본 적이 없었고, 더 나빴던 점은 내가 과학을 산업에 응용하는 데에는 재능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 무능력 때문에 나는 삶 전반에서 많은 돈을 잃었다. 우리 공장에서는 아세트산이 매우 느리게 생산되었고 그마저도 충분히 진하지 않았다.” 이후 거의 10년 동안 베르셀리우스는 수입이 생기는 족족 빚을 갚아야 했습니다.

이 시기에 베르셀리우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전기 현상이었습니다. 그는 볼타 전지를 여러 물질에 연결해 보기도 하고, 심지어 질병 치료에 활용할 수 있을지 연구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연구의 결과, 1803년에는 염에 전기를 가하면 알칼리[참고문헌 3]와 산이 생성된다는 보고를 하기도 했습니다. 베르셀리우스는 의사로서의 전문성을 더하여 인체에서 유 래된 물질과 체액을 화학적으로 분석해 보기도 했고, 광물을 분석하여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물질(산화 세륨)을 찾아내기도 했습니다. 베르셀리우스는 즉시 산화 세륨의 발견을 논문으로 써서 접수했지만, 바로 직전에 다른 화학자가 동일한 물질을 발견하여 출판했다는 실망스러운 답변을 받았습니다.

1807년, 베르셀리우스는 스톡홀름 외과 대학의 의약학 교수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1808년『화학 교과서(Lar̈bok i Kemien)』를 출판하였고, 같은 해 스웨덴 과학원(Swedish Academy of Science)의 회원으로 선출됩니다. 점점 유명 세를 탄 그는 1818년에는 귀족 작위를 받았고, 1820년에는 과학원 서기로 임명되죠. 이 시기, 즉 1807년부터 1820년 까지가 베르셀리우스가 가장 왕성하게 연구 활동을 진행한 시기입니다.

베르셀리우스는 1809년 당시 유럽 화학계를 강타한 돌턴의 원자설에 대해 듣고 관심을 갖게 됩니다. 다만 돌턴의 책을 얻기 힘들었기 때문에 그는 우선 리히터가 했던 것처럼 알 려진 무기 산화물, 산, 염에 대해 당량을 엄밀하게 계산하여 데이터로 만들었습니다. 이 데이터는 1810년부터 1812년 사이에 발표되었는데, 특히 1811년과 1812년에 출판된 논문 에서 그는 화학적 친화력이 전기적 현상이라는 가설을 제시 합니다. 서로 전기적으로 반대인(즉 양전하와 음전하) 두 원자가 서로 결합하여 화합물을 형성하고, 이 때 두 원자의 비율은 중성을 만들 수 있는 최소한의 비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이론을 확장하여 분자 내의 원자 수를 결정할 수 있는 규칙을 몇 가지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두 종류의 산화물이 서로 결합할 때는 두 화합물의 결합비가 각 산화물이 포함하고 있는 산소의 수에 비례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고, 가연성 물질이 결합할 때는 각 물질이 결합할 수 있는 산소의 수에 따라 결합비가 결정된다는 규칙이 있었습니다.[참고문헌 4]

베르셀리우스는 1812년이 되어서야 돌턴의 책을 손에 넣게되었고, 그 지식을 기반으로 원자량 연구에 본격적으로 뛰어 듭니다. 베르셀리우스는 지난 글의 월라스턴과 마찬가지로 산소의 원자량을 기준으로 각 원소의 원자량을 계산하였는데, 이는 산화물이 수소화물보다 더 다양하게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한 분자에 포함된 원자의 수였습니다. 베르셀 리우스는 기체의 경우 동일한 부피 안에는 동일한 수의 입자가 포함되어 있다는 가설[참고문헌 5]을 사용하였고, 금속 산화물의 경우에는 MO2와 같은 비율이 원자 간의 반발력을 고려할 때 분자를 안정적으로 만들 것이라는 가설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렇게 1814년, 최초의 원자량 표가 발표됩니다. 이 표는 대부분 베르셀리우스가 직접 측정한 실험값에 기반하고 있었고, 그렇지 않은 데이터는 정확히 원전을 밝혀두었습니다. 당시 베르셀리우스는 최고의 분석 화학 기술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대부분의 원자량는 네 개에서 일곱 개까지의 유효 숫자로 표시되었죠. 1815년 윌리엄 프라우트(William Prout, 1786-1850)는 모든 원자의 원자량은 수소 원자량의 배수라는 가설을 발표하였습니다. 역시 원자량 연구에 몰두하고 있던 톰슨은 자신의 원자량 데이터를 이용하여 프라우트의 가설이 실험적으로 옳다고 주장했지만, 베르셀리우스는 자신의 엄밀한 데이터를 통해 각 원소의 원자량이 수소 원자량의 정수 배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였습니다.[참고문헌 6]

하지만 당시에 분자 내 원자의 질량비를 실험적으로 정확히 결정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고, 베르셀리우스는 이후 여러 차례 자신의 원자량을 수정해야 했습니다. 베르셀리우스의 개정 작업에 큰 도움을 준 두 가지 규칙이 있습니다. 1819년 아일하르트 미처리히(Eilhard Mitscherlich, 1794-1863)가 같은 수의 원자를 포함하고 있는 화합물은 유사한 결정 구조를 갖는다는 규칙을 발표합니다. 이 규칙을 이용하면 화합물 내의 원자 수를 조금 더 쉽게 결정할 수 있었죠. 그리고 비슷한 시기 듀롱(Pierre Dulong, 1785- 1838)과 프티(Alexis Petit, 1791-1820)는 금속의 경우 원자량과 비열의 곱이 일정하다는 규칙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규칙들을 이용하면 기체 외의 화합물에 대해서도 보다 정확 하게 원자량을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규칙들을 조합하여 그는 당시 유럽 화학계에서 가장 정확하다고 간주된 원자량 데이터를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베르셀리우스는 정확한 원자량 데이터만 남긴 것이 아닙니다. 그는 화합물의 분류와 화학 결합 이론에도 큰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1813년 베르셀리우스는 새로운 화학 표기 법을 고안합니다. 이전까지 화학 물질과 화학 반응은 문장으로 기술되거나 간단한 그림으로 표시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표기법은 여러모로 불편했기 때문에 베르셀리우스는 이해도 쉽고 인쇄도 용이한 새로운 표기법을 만들었죠. 각 원소 물질의 라틴어 이름 첫 글자를 화학 기호로 사용하는, 바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표기법과 같은 표기 법입니다. 물론 첫 글자가 같은 원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베르셀리우스는 다음과 같은 규칙을 만들었습니다.[참고문헌 7]


(1)비금속은 무조건 한 글자로 표시한다.

(2)금속의 경우 이름이 겹치는 원소가 있다면 두 번째 글자까지 표시한다.

(3)만약 두 번째 글자까지 이름이 겹친다면 첫 글자를 쓰고 이어서 처음으로 겹치지 않는 자음을 쓴다.


그 결과 비금속 황(sulphur)은 S가 되었고, 금속 규소 (silicium)는 Si, 금속 안티모니(stibium)는 St, 금속 주석 (stannum)은 Sn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화학 반응식을 만들어야죠. 베르셀리우스는 화학 기호 하나가 단위 부피를 의미한다고 보았습니다. 단위 부피가 여러 개 필요하다면 숫자를 붙여서 표시합니다. 일산화 구리의 조성은 Cu + O로, 이산화 구리의 조성은 Cu + 2O로 표시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화합물은 더이상 더하기 기호를 사용하지 않고 원소 기호를 전부 붙여서 표현합니다. 이 때 동일한 원소가 여러 부피 포함되어 있다면 위첨자로 쓰도록 했습니다. 즉, 일산화 구리는 CuO이고 이산화 구리는 CuO2가 됩니다. 이를 통해 화학자들이 복잡한 화학 반응식을 대수식처럼 쉽게 다룰 수 있게 되었고, 특히 이 표기법은 유기화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게 됩니다.[참고문헌 8] 또한 앞서 살펴본 것처럼 베르셀리우스는 전기화학에 큰 감명을 받았기 때문에, 데이비가 그랬던 것처럼 전기 현상을 이용해 화학 결합을 설명하고자 하였습니다. 사실 전기 분해 실험을 직접 해본 화학자들에게, 양극과 음극에서 발생하는 두 가지 물질이 원래 물질의 구성 요소라는 생각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죠. 게다가 그 두 가지 물질은 전기적으로 양전하와 음전하를 띠고 있습니다. 따라서 두 물질은 전기적 인력을 통해 서로 안정적인 화합물을 형성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 전기화학적 이원론(electrochemical dualism)이라 부릅니다. 전기화학적 이원론은 무기 화합물을 설명하는 데에 큰 성공을 거두었고, 유기 염들 역시 전기 분해로 쪼갤 수 있었기 때문에 유기 화합물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널리 믿어졌습니다.[참고문헌 9]

명민한 이론가이기도 했던 베르셀리우스는 이전까지 활동한 여러 화학자들의 개념을 통합하여 자신의 이원론을 완성하였습니다.[참고문헌 10] 그는 베르톨레로부터 여러 종류의 분자들이 서로 다른 화학적 친화력을 작용하고, 이것이 평형을 이루는 점이 안정한 화합물을 만드는 지점이라는 개념을 흡수 하였습니다. 이 화학적 친화력을 전기적 인력으로 대체하면 베르셀리우스의 이원론이 되죠. 그리고 돌턴으로부터는 각 분자가 여러 원자들로 구성될 수 있다는 개념을 도입하였습니다. 서로 모순인 것처럼 보였던 베르톨레와 돌턴의 이론을 자신의 이론 속에 조화롭게 녹여낸 것입니다.

전기화학의 영웅이었던 데이비 역시 베르셀리우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베르셀리우스의 연구 초반, 특히 1806년에서 1811년 사이의 기간 동안 베르셀리우스는 데이비와 서신을 교환하고 데이비를 칭송하는 글을 쓰는 등 좋은 관계를 유지했죠. 하지만 1811년 이후 그 관계가 삐걱거리기 시작합니다. 1811년 데이비는 뮤리움산(oxymuriatic acid)[참고문헌 11] 에서 산소를 찾을 수 없었다고 발표하였습니다. 당시 라부 아지에의 영향으로 모든 산에는 산소가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고, 베르셀리우스 역시 뮤리움산에 산소가 포함되어 있다는 이론에 기반하여 자신의 이원론을 펼 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데이비의 발표는 베르셀리우스에게 큰 배신으로 다가왔습니다. 게다가 데이비는 계속해서 원자론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베르셀리우스의 이원론은 원자론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역시 큰 문제였습니다. 결국 1812년, 베르셀리우스가 데이비의 책을 혹평하면서 둘 사이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져 버렸습니다.

베르셀리우스의 삶에 대해 아직 남은 이야기가 몇 가지 더 있습니다. 먼저 후학 양성 이야기를 해볼까요. 베르셀리우스는 많은 학생을 두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나마도 화학자들보다는 의사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그의 연구실에는 주로 한 명, 많아야 두 명의 학생이 있었고, 베르 셀리우스는 그들을 성심성의껏 교육하였습니다. 베르셀리우스 연구실을 거쳐간 학생들은 좋은 곳에 자리 잡을 수 있 었는데, 이는 베르셀리우스의 교육이 훌륭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그가 제자들의 일자리를 위해 발 벗고 뛰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는 제자에게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1834년 카롤린스카 대학의 교수 자리에서 은퇴하기까지 했습니다.

한편, 베르셀리우스는 늦은 나이까지 결혼하지 않고 홀로 살았습니다.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젊은 시절 어느 선배 과학자의 이야기를 듣고 죽을 때까지 결혼은 생각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 과학자는 비록 현재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지만, 가족과 함께 살면서 생기는 여러 문제가 골치 아프므로 만약 다시 옛날로 돌아간 다면 결혼을 심각하게 고민해 볼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하죠. 그러나 1834년 스웨덴을 덮친 콜레라 사태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면서 베르셀리우스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나는 처음으로 외롭다고 느꼈고, 내 경제적 상황이 탄탄할 때 빨리 결혼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베르셀리우스는 1835년, 56세의 나이로 친구의 딸(당시 24 세!)과 결혼식을 올렸답니다.

베르셀리우스는 삶 자체로도 매력적인 사람이지만,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다재다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중 특히 유기화학이 베르셀리우스의 업적을 기반으로 급격하게 성장하게 됩니다. 베르셀리우스 이전까지는 유기 화합물을 설명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고, 라부아지에나 돌턴 등도 유기 화합물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이론으로 설명해낼 수 없었습니다. 이제 때가 무르익었습니다.



참고문헌


1. 이 내용은 다음 글들에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Alan J. Rocke,“Atoms and Equivalents: the Early Development of the Chemical Atomic Theory,”Historical Studies in the Physical Sciences 9: 225-263 (1978); Hans-Werner Schuẗt,“Chemical Atomism and Chemical Classification”in The Cambridge History of Science, Volume 5: The Modern Physical and Mathematical Sciences, ed. Mary Jo Nye (Cambridge, United Kingdom: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 Ferenc Sz- abadváry, History of Analytical Chemistry, trans. Gyula Svehla (Oxford, UK: Pergamon Press, 1960), Chapter VI.

2. 중학교라고 번역했지만 중·고등학교를 합친 중등교육 기관입니다.

3. 알칼리 금속의 산화물을 가리킵니다.

4. Kiyohisa Fujii,“The Berthollet-Proust Controversy and Dalton’s Chemical Atomic Theory 1800-1820,”The British Journal for the History of Science 19 (2): 177-200 (1986).

5. 이 가설은 그가 아보가드로의 연구를 모른 채 독자적인 논리에 따라 개발한 가설 입니다.

6. 원자의 질량이 매우 유사한 질량을 가지고 있는 양성자와 중성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프라우트의 가설은 본질적으로 크게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동위원소의 존재 때문에 실제 원자량은 프라우트의 가설과 맞지 않게 됩니다.

7. 오늘날의 원소 기호는 이 규칙을 엄밀하게 따르지 않기 때문에 불규칙적으로 보입니다. 베르셀리우스는 당시 알려져 있던 원소들을 대상으로 이 규칙을 고안하였습니다.

8. Ursula Klein,“Berzelian Formulas as Paper Tools in Early Nineteenth-Century Chemistry,”Foundations of Chemistry 3: 7-32 (2001).

9. Alan J. Rocke,“The Theory of Chemical Structure and Its Applications” in The Cambridge History of Science, Volume 5: The Modern Physical and Mathematical Sciences, ed. Mary Jo Nye (Cambridge, United Kingdom: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

10. Colin A. Russell,“The Electrochemical Theory of Berzelius, Part I: Origins of the Theory,”Annals of Science 19 (2): 117-126 (1963).

11. 염산(HCl)입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누가 정답을 맞힌 것인지 뻔히 보이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명확하지 않았음을 이해합시다.





최정모 Jeong-Mo Choi


  • 한국과학기술원 화학과, 학사(2003.3-2011.8)

  • Harvard University 과학사학과, 석사(2011.9-2015.5, 지도교수 : Naomi Oreskes)

  • Harvard University 화학 및 화학생물학과, 박사 (2011.9-2016.5, 지도교수 : Eugene I. Shakhnovich)

  • Washington University in St. Louis, 박사 후 연구원(2016.8-2019.4, 지도교수 : Rohit V. Pappu)

  • 한국과학기술원 자연과학연구소, 연구조교수(2019.6-2020.8)

  • 부산대학교 화학과, 조교수(2020.9-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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