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까지 그 기반을 충실히 닦은 화학은 19세기에 들어서면서 폭발적인 발전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19세기 화학을 정리하는 작업이 쉽지 않습니다. 화학 혁명 까지는 그래도 (억지로라도) 하나의 줄거리를 따라가면서 역사를 정리할 수 있는데, 점차 여러 장소에서 다양한 주제의 연구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면서 이를 하나의 흐름으로 정리한다는 것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화학사학자들이 19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어느 정도 시간 순서를 희생하면서라도) 주제별로 묶어서 그 역사를 정리하곤 합니다. 이러한 서술은 현대 화학의 여러 주제가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 각 주제별로 흐름을 따라 살펴볼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으나, 당시 화학자들의 실제 상호 작용을 가려버린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면을 부각하고자 조금 더 시간의 흐름을 따라 화학의 역사를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글과 다음 글에서는 1800년을 전후한 시기의 화학을 다루겠습니다. 이 시기는 다양한 화학 현상에 관련된 여러 논쟁이 시작된 시기이고, 이 중에는 이 시기 안에 결론이 난 논쟁도 있었지만 더 긴 시간을 기다려야 끝나는 논쟁들도 있었습니다.
라부아지에 사후 프랑스 화학을 대표하는 인물은 베르톨레(Claude Berthollet, 1748-1822)입니다. 베르톨레는 라부아지에의 가까운 동료로 함께『화학 명명법』을 집필한 사이입니다. 그는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라부아지에가 사형당한 이후에도 혁명 정부에서 중용되었고, 나폴레옹과도 가까운 사이로 지냈으며, 왕정복고 이후 루이 18세 정부에서도 상원 의원을 지내며 천수를 누렸습니다. 그는 1799년 파리 근교 아르케이(Arcueil)로 이주하여 개인 실험실을 차리고 젊은 화학자들을 훈련시켰습니다. 1806년 물리학자 라플라스도 아르케이로 이주하면서 아르케이는 당시의 프랑스 과학을 상징하는 도시가 되었죠. 화학자들은 자주 베르톨레의 집에서 소규모 모임을 가졌고, 모임에서 논의한 내용들을 논문으로 출판하기도 했습니다.[참고문헌 1]
베르톨레는 19세기에 들어서면서 화학계를 뜨겁게 달군 논쟁의 주인공입니다. 이 논쟁은 화학 반응의 반응물들이 일정한 비율로 결합하는가에 대한 논쟁으로, 일명 “베르톨레-프루스트 논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논쟁을 다루는 많은 글들이 프루스트가“정답”을 찾은 반면, 베르톨레는 아집에 사로잡혀 비합리적인 주장에 집착했다는 식으로 표현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베르톨레에게 다소 불공평한 평가입니다. 베르톨레의 생각은 그렇게 단순하거나 무지하지 않았고, 그의 논증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아도 일리가 있습니다. 프루스트 역시“정답”을 대번에 찾은 것이 아니었고, 자신의 주장을 다듬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오늘 글의 첫 번째 부분에서는 베르톨레-프루스트 논쟁을 최대한 당시의 입장에서 살펴보도록하겠습니다.[참고문헌 2]
프루스트(Joseph Proust, 1754-1826)는 스페인에서 활동하던 프랑스 화학자로, 1799년 산화 구리에 대한 실험을 기반으로 구리는 산소와 단일한 비율로 결합한다는 결과를 출판합니다.[참고문헌 3] 그는 자연에서 발견되는 산화 구리와 자신이 실험실에서 합성한 산화 구리를 비교하여 각 화합물 내에서 산소와 구리의 질량비는 동일하다는 것을 보였습니다. 이는 놀라운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화학 반응에서 반응물들이 일정한 비율로 반응한다는 생각은 18세기 말의 화학자들에게 일반적인 생각이었고, 지난 글에서 살펴본 것처럼 “당량” 개념도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프루스트가 일정 성분비의 법칙을 최초로 주장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오류입니다. 프루스트는 당시 화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던 가정을 열정적으로 변호했던 사람으로 보는 것이 좀 더 정확한 평가일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실제로 많은 금속 화합물은 단일한 성분비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10년전 라부아지에도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고, 프루스트 역시 그 사실을 금방 깨닫습니다. 프루스트는 1801년 금속 황화물에 관한 논문에서 자연에서 발견되는 황화 철, 황화 구리 등의 성분비가 여러 가지임을 보고합니다. 그리고 실험실에서와는 달리 자연에서는(자연의 특별한 힘 때문에) 과량의 황이 함유될 수도 있다는 다소 불만족스러운 설명을 남깁니다. 그는 혹시 자신 이 실험을 잘못한 것은 아닌지 계속해서 의심하고 있었고, 반복된 실험 끝에 실험실에서도 자연에서처럼 두 가지 비율로 구성된 금속 황화물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합니다. 프루스트는 1802년 이 결과를 출판하면서 화학 반응에서 반응물들은 고정된 비율로 반응하지만, 그 비율이 여러 가지일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제 베르톨레가 링 위에 등장할 차례입니다. 그는 1803년 『화학 정역학론(Essai de Statique Chimique)』을 출판합 니다. 이 책은 화학 전반에 대한 이론 체계를 제공하려는 목적으로 쓰여진 책이었고, 19세기 초반 화학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베르톨레는 이 책에서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친화도 이론(affinity theory)을 비판적으로 검토합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두 물질이 반응하여 새로운 물질을 만든다면 그 둘 사이의 친화도가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두 물질은 항상 동일한 비율로 반응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미 그 당시에도 압력이나 온도 등 실험 조건에 따라 반응비가 달라 질 수 있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습니다.[참고문헌 4] 이로부터 베르톨레는 친화도는 실험 조건에 의존하는 상대적인 양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 입자를 가정하고,[참고문헌 5] 그 입자들 사이의 화학적 친화력은 입자의 종류에 따라 달라지며, 그 모든 친화력이 완벽하게 평형을 이루는 조건이 물질이 안정하게 존재하는 조건이라는 이론을 수립합니다. 비록 물리학에서처럼 방정식을 풀어 완벽하게 해를 구한 것은 아니지만, 베르톨레는 이러한 상황에서 생성 물이 안정해지는 조건은 단 하나가 아닐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반응물의 종류뿐 아니라 반응물의 양, 계의 부피 등이 안정한 조건에 영향을 줄 수 있겠죠. 온도의 경우 온도가 올라가면 부피가 커지고 온도가 떨어지면 부피가 작아진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고, 온도에 따른 상 전이 현상 역시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베르톨레는 자신의 이론을 적용하여 왜 일반적으로 기체의 반응성이 고체의 반응성보다 높은지를 설명하였습니다. 기체는 입자들 사이의 거리가 먼 상태이므로 서로 화학적 친화력이 강하게 작용하지 않는 반면, 고체는 입자들이 화학적 친화력으로 꽁꽁 뭉쳐 있습니다. 고체 상태의 입자들을 반응시키기 위해서는 이 친화력을 끊어내야 하므로, 고체를 반응시키기가 더 어려운 것이죠. 베르톨레의 이론이 오늘날의 이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르톨레의 이론을 따라가다 보면 반응물이 반드시 일정한 비율로 반응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반응물의 양조차도 반응비에 영향을 준다면, 반응비가 하나의 숫자로 나오는 것이 더 이상하겠죠. 베르톨레는 반응비가 최솟값과 최댓값 사이의 임의의 값을 가질 수 있으며, 이 값은 반응물의 양을 비롯한 여러 실험 조건에 의존한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최솟값은 두 반응물이 결합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양이 존재하므로 필요하고, 최댓값은 결합이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는 포화 상태에 대응합니다.
그렇다면 실험적으로 일정한 성분비가 관찰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베르톨레도 이 명백한 실험적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기에 대해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합니다. 먼저 실험 기법의 오차 때문에 성분비가 일정한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을 수 있고, 두 번째로는 반응 조건이 특수한 경우에 일정한 성분비가 관찰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당시에도 수소 기체와 산소 기체가 2:1의 부피비로 반응하여 액체 물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는데, 베르톨레는 이 반응이 특수한 상황이라고 보았습니다. 기체가 액체로 응축되면서 부피가 크게 변하기 때문에 생성물이 가질 수 있는 안정적인 구조가 매우 제한적이고, 그 구조를 만들 수 있는 부피비는 2:1 밖에 없다는 것이었죠. 베르톨레는 여기에 더하여 실제로 성분비가 고정되어 있지 않은 다른 예들(대표적으로 금속 산화물)을 제시하며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베르톨레는 프루스트의 연구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화학 정역학론』에서도 프루스트에 대한 반박이 등장합니다. 그 중 중요한 논점은 금속 황화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황화 구리는 일정한 비율의 구리를 포함한 것처럼 보이지만, 황철석(pyrite)에 포함된 구리의 비율은 제멋대로였습니다. 그런데 베르톨레의 이론에 따르면“화합물”과“혼합물”은 명확히 구분되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참고문헌 6] 베르톨레는 프루스트에게 둘 사이의 명확한 개념적 구분을 요구합니다. 프루스트는 1804년 반박 논문을 써서 화합물과 혼합물은 실험적으로 쉽게 구분할 수 있다고 답합니다. 혼합물은 쉽게 분리되는 반면 화합물을 그 구성 성분으로 분리하기 위해서는 훨씬 까다로운 작업이 필요하죠. 베르톨레는 이러한 답변에 만족하지 못했고, 보다 체계적인 반론을 준비하여 발표합니다. 이 둘 사이의 논쟁은 1807년까지 계속되었고, 어느 한쪽도 패배를 인정하지 않은 채 끝나버립니다.
이후 화학계는 프루스트의 손을 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프루스트가 더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미 학계에 일정 성분비에 대한 개념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이 논쟁을 거치면서 화학계가 얻은 것은 이론과 실험 사이의 관계에 대한 고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르톨레는 매력적인 이론 체계를 제시했고, 그 체계에 기반하여 실험 결과를 설명했습니다. 비록 반응의 비율에 관해서는 결국 프루스트의 설명이 채택되었더라도, 베르톨레의 이론 체계 역시 많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보편적인 이론에 대한 관심이 점차 커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글에서 살펴볼 두 번째 주제는 물의 전기분해입니다.[참고문헌 7] 18세기에도 전기의 존재는 알려져 있었지만 정전기의 형태로만 다룰 수 있었습니다. 화학에서도 정전기 스파크를 이용해 수소와 산소로부터 물을 만드는 등 실험에 조금씩 응용하고 있었죠.[참고문헌 8] 그러던 중 1800년, 이탈리아 물리학자인 알레산드로 볼타(Alessandro Volta, 1745-1827)가 서로 다른 금속판을 번갈아 쌓아 올린 후 소금물에 적신 섬유를 둘러주면 전류가 흐른다는 사실을 보고하였습니다. 이 사실 이 영국에 전해지자마자 니컬슨(William Nicholson, 1753- 1815)과 칼라일(Anthony Carlisle, 1768-1840)이 이 장치를 이용하여 물을 수소 기체와 산소 기체로 분해하는데 성공합니다. 실험은 단순했지만,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이 성공에 고무된 사람들은 전문 화학자들이나 아마추어 화학자들이나 할 것 없이 전기 실험에 달려들었죠.
그런데 이 단순한 전기분해 실험에는 큰 문제가 있었습니 다. 언뜻 이 실험 덕분에 물이 수소와 산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실험적으로 완벽하게 증명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수소 기체는 양극, 산소 기체는 음극에서 발생한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하나의 물 입자에서 수소와 산소 입자가 생성되는 것이라면, 어떻게 이들은 먼 거리를 사이에 두고 만들어지는 것일까요? 당시 과학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설명을 제시하였습니다. 물이 화합물이 아니라 원소라는 반동적인(!) 가설이 그 중 하나였습니다. 독일의 화학자 요한 리터(Johann Ritter, 1776-1810)는 양극에서는 양전기가 물과 결합하여 산소가 생성되고, 음극에서는 음전기가 물과 결합하여 수소가 생성되는 것이라는 합성 이론을 제안하였습니다. 플로지스톤 이론의 거두였던 프리스틀리 역시 관련 논문들을 읽고 스스로 연구를 진행하여 1802년 자신의 실험 결과를 발표하면서 음전기와 플로지스톤이 연결되어 있고, 양전기가 산소와 연결되어 있다는 가설을 제시하였죠. 예상할 수 있듯, 라부아지에가 승리한 세상에서 이러한 견해는 소수 견해였고 결국 무대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프랑스에서는 유명한 박물학자 조르주 퀴비에(Georges Cuvier, 1769-1832)에게 볼타 전지 관련 현상들을 연구하도록 하였습니다. 퀴비에는 이 문제에 대해 합성 이론 외에도 가능한 설명을 조사하여 보고합니다. 그 중에는 전기분해의 결과로 각 전극의 주변에서 입자들이 비대칭적으로 존재하게 된다는 설명과, 전기가 물 속에 들어가면 바로 분해가 일어나지만 한 종류의 입자만 즉시 방출되고 나머지 입자는 전류와 함께 흘러가서 반대쪽 극에서 방출된다는 설명이 있었습니다. 어느 설명도 만족스럽지 않았던 차에, 독일의 화학자 테오도르 그로투스(Theodor Grotthuss, 1785- 1822)가 1806년 수소와 산소로 이루어진 물 입자들이 물 속에서 보이지 않는 사슬을 이뤄 양쪽 극을 연결한다는 가설을 제시합니다. 전기가 흐르면 한쪽 극에서 수소가 발생하고, 짝을 잃은 물 입자는 반대편 수소 입자를 사로잡습니다. 이 과정은 반대쪽 극까지 이어지고, 결국 혼자 남은 산소는 반대쪽 극에서 기체 형태로 방출되겠죠. 이 가설은 큰 인기를 끌었지만,“정답”의 위치에 오르지는 못했습니다.[참고문헌 9] 당시 화학자들은 전기가 무엇인지 정확히 몰랐고, 전기가 물질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따라서 “정답”을 못 찾았다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참고문헌 10] 하지만 그럼에도 화학자들은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설명을 만들어냈고, 다양한 실험을 수행하여 데이터를 축적했습니다. 그 결과 19세기를 거치면서 전기화학은 화학의 주요 방법론으로 자리매김하게됩니다.
오늘 글에서는 1800년을 전후한 두 가지 논쟁, 베르톨레-프루스트 논쟁과 물의 전기분해 논쟁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두 가지 논쟁은 화학에서 “이론”의 위치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볼 기회를 줍니다. 전기분해 논쟁은 애초에 이론을 만들 수 있는 근본 개념들조차 확실하지 않은 새로운 분야에서 벌어졌기에, 다양한 이론이 튀어나와 각축을 벌였고 어느 하나가 정답으로 정해지지 못했습니다. 반면 베르톨레-프루스트 논쟁은 화학자들이 계속해서 탐구해온 분야에서 진행되었고, 당시 화학자들의 두 가지 입장을 잘 보여줍니다. 베르톨레는 완벽한 “이론”에 기반하여 화학 현상을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프루스트는 그런 거창한 이론을 만들기보다는 실험 결과에 기반한 건조한 설명을 제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베르톨레의 이론은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가 그리던 아름다운 화학 이론은 동시대를 살아 가던 영국의 한 물리학자에 의해 제시됩니다. 바로 다음 글의 주인공인 존 돌턴(John Dalton, 1766-1844)입니다.
참고문헌
1. JohnHudson,『화학의 역사』(서울: ㈜도서출판 북스힐, 2005), 131-133쪽.
2. 이내용은 다음 글들에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SatishC. Kapoor,“Berthollet, Proust, and Proportions,”Chymia 10: 53-110(1965); Kiyohisa Fujii,“The Berthol- let-Proust Controversy and Dalton’s Atomic Theory 1800-1820,”The British journal for the History of Science 19: 177-200 (1986). 3. 실제로는 구리의 산화수가 두 가지 이상 가능하기 때문에 틀린 내용입니다. 이 실험은 탄산 구리에 대한 실험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프루스트는 탄산 구리를 먼저 얻고 이를 가열하여 산화 구리를 얻었기 때문에 두 가지 설명 모두 맞다고 할 수 있습니다. 4. 한 세대 전 라부아지에(1786년)나 베리만(1779-88년) 등이 이미 “친화도”가 온도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 실험하여 그 결과를 보고한 바 있었습니다. 5. 다음 호에서 돌턴을 다루면서 깊이 살펴보겠지만, 기본 입자라는 개념은 당시 화학자들에게 보편적인 개념이었습니다.
6. 당시에는 “분자”의 개념이 없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분자”개념 없이 화합물과 혼합물을 개념적으로 구분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죠. 7. 이 내용은 다음 책에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장하석,『물은 H2O인가? 증거, 실재론, 다원주의』, 전대호옮김(김영사, 2021), 2장. 8. Aaron J. Ihde, The Development of Modern Chemistry (New York, NY: Dover Publications, Inc., 1984), pp. 124-125.
9. 이 가설의 변형된 버전이 오늘날 “그로투스 메커니즘”이라는 이름으로 물속의 빠른 전하 수송을 설명하는데 사용됩니다.
10. 결국 이 문제는 1880년대에 아레니우스의 이온 이론이 등장해서야 설명이 가능해집니다.
최 정 모 Jeong-Mo choi
• 한국과학기술원 화학과, 학사(2003.3-2011.8)
• Harvard University 과학사학과, 석사(2011.9-2015.5, 지도교수 :Naomi Oreskes)
•Harvard University 화학 및 화학생물학과, 박사 (2011.9-2016.5, 지도교수 : Eugene I. Shakhnovich)
•Washington University in St. Louis,박사 후 연구원(2016.8-2019.4, 지도교수 : Rohit V. Pappu)
• 한국과학기술원 자연과학연구소, 연구조교수(2019.6-2020.8)
• 부산대학교 화학과, 조교수(2020.9-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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