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의 덕목 : 공공(公共)의식
김태영 | 광주과학기술원 지구·환경공학부,
kimtaeyoung@gist.ac.kr
하얀 가루의 정체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이른 시각. 갑자기 서쪽 하늘에서 붉은 섬광이 번쩍였다. 1954년 3월 1일 새벽, 태평양의 비키니 환초(Bikini atoll)로부터 160 km 정도 떨어진 해상에서 다랑어 조업을 하고 있던 일본의 ‘제5후쿠류마루(福龍丸)호’ 선원 23명은 이 섬광이 향후 이들의 삶에 얼마나 깊고 어두운 그림자를 남길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섬광이 나타나고 몇 분 후, 평소처럼 배에서 아침식사를 하던 선원 들에게 바다에서 지진이 일어난 듯한 충격과 굉음이 전해졌다. 그 뒤로 한 시간쯤 더 지나자 하늘에서 재와 같은 ‘하얀 가루’가 내리기 시작했고, 곧 선원들의 몸 속으로 파고 들었다. 이 하얀 가루의 정체는 미국이 태평양 마샬 제도(Marshall islands) 근처에서‘캐슬 작전(Operation castle)’이라는 암호명으로 수행한 일련의 핵실험 중 첫 번째 핵폭탄 ‘브라보(Bravo)’로 생긴 방사성 낙진(落塵)이었다.[참고 문헌 1]
사실 제5후쿠류마루호는 미국이 실험 전에 정한 위험 반경 바깥에 위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연구진의 폭발력에 대한 예측 실패와 기상 변동으로 인해 피해 범위가 크게 확대 되었다. 조사 결과 폭발 실험 해역 주변에서 조업 중이던 총 100여 척의 배와 여기에 탑승한 선원들이 방사능에 피폭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1946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핵실험을 위해 비키니 환초에서 약 200 km 떨어진 롱게리크 (Rongerik) 환초로 강제 이주 되었던 1000여 명의 원주민들도 피폭을 피할 수 없었다.
▲ 캐슬 작전의 브라보 폭탄 실험으로 생긴 버섯 구름(왼쪽)[참고문헌 2]과 피폭 피해를 입은 제5후쿠류마루호(오른쪽) 선체[참고문헌 1]
핵실험의 흉터
미국이 1946년부터 1958년까지 모두 67차례에 걸쳐 태평양 비키니 환초에서 실행한 핵실험의 피해는 낙진에 의한 생명체의 방사능 피폭에 그치지 않았다. 2019년에 델라웨어 대학(University of Delaware)의 Arthur Trembanis 교수 연구팀은 최신의 수중음파탐지기를 이용하여 미국의 원자폭탄 실험이 진행되었던 비키니 환초 주변 4곳의 고분해능 해저 입체 지도를 완성했다.[참고문헌 3] 그런데 연구팀은 세계 최초의 수중 핵실험이 진행되었던‘베이커(Baker)’폭탄이 터진 현장에서 예상치 못했던 너비 대략 700 m, 깊이 약 8 m 크기의 큰 분화구를 발견했다. 당시 수중 핵폭발의 충격으로 해저에 생겨난 인공 분화구가 실험이 시행된지 70여 년이 지나서도 메워지지 않고, 거의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진행되었던 핵실험의 또 다른 목적은 바다에서 핵폭탄이 터졌을 때 근처 해상에서 작전 중인 해군 선단이 입을 수 있는 직접적인 피해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2차 대전 이후에 획득한 독일, 일본의 전함과 미해군에서 퇴역한 함선과 잠수함에 여러 측정 장비를 설치한 후에 핵 실험 장소 주변에 배치하였다. 실험에 동원되었던 수십 척의 전함들은 핵실험이 진행되면서 많이 침몰했는데, Trembanis 교수 연구팀은 잠수부를 내려 보내 난파선 여섯 척의 현재 상태를 확인하였다. 침몰한 배의 선체 곳곳은 찢기거나 크게 뒤틀려 있었는데, 이는 핵실험으로 발생하는 높은 온도와 압력에 의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흉터들이다. 심지어 몇 개의 난파선에서는 분해가 진행되면서 기름이 흘러나와 해양 생태계를 오염시키고 있었다. 핵실험으로 초래된 해저 지형의 불가역적 변화와 해양 생태계 오염은 인간의 ‘과학 활동’이 자연을 어떻게, 또 어느 정도까지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현대의 거대과학
이전 시기의 과학과 비교하여 20세기 이후의 현대과학이 갖는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이른바 ‘거대과학 (Big science)’의 등장이다. 20세기 이전의 근대과학은 개인 연구실에서의 단독 연구 혹은 몇명의 연구자들 간의 사적인 교류를 통한 소규모 공동 연구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과학이 응용학문인 공학기술과 밀접하게 결합되고, 국가가 과학 연구를 주도하게 되면서 과학 연구의 규모가 거대화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이 영국과 캐나다의 적극적인 협조 아래 공동으로 진행한 핵무기 개발 연구였던‘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 가 거대과학 연구의 출발점이자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한 대형 입자 가속기를 이용한 입자물리학 연구, 우주정거장 에서의 유인 우주 탐사 연구, 인공위성이나 극지에서의 쇄빙선을 활용한 기후변화 연구 등도 거대과학 연구에 해당된다. 한편 2003년에 처음으로 인간 유전체의 염기 서열과 지도를 완성했던‘인간 유전체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는 여러 나라의 과학 인력과 많은 예산이 13년간 투입된 거대과학 영역의 연구였지만, 유전체 분석 기술의 비약적 발전 덕분에 지금은 한 연구실에서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거대과학 연구에는 막대한 자본과 인력, 대형 장비와 시설이 필요하기 때문에, 어느 한 개인이나 개별 국가에서 단독으로 진행하기 어렵다. 동시에 거대과학에서 다루는 우주 탐사, 대체에너지 개발, 환경오염, 기후변화, 재난대응, 신약개발 등과 같은 연구 주제들은 단일 과학기술 영역의 한계를 뛰어 넘는 융합 연구적 성격을 띠고 있다. 거대과학이 가지는 이러한 다학제(Multi-disciplinary), 학제간(Inter-disciplinary), 다목적(Multi-purpose) 연구의 특징으로 인해 연구의 결과물이나 연구개발 과정 중에 파생되는 새로운 과학기술들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광범위하다. 거대과학 연구의 최종 성과에 따라 기존의 과학연구 패러다임이 바뀌기도 하고, 이전에 없던 학문이나 기술의 발전을 유도하기도 하며, 정부 정책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근거 자료로 이용되기도 한다. 따라서 거대과학 연구의 성공과 그 성과물의 올바른 활용을 위해서는 다양한 학문 분야와 전문 지식의 통합을 위한 긴밀한 의사소통과 협업능력, 그리고 인류 공동체에 대한 공공의식이 연구자들에게 필요하다.
공공의식
그렇다면 현대의 거대과학 연구자에게 필요한 ‘공공(公共)의식’이란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일까? 먼저 공(公)’의 의미를 살펴보자. 한자‘公’은‘八(여덟 팔)’와‘厶(사사 사)’ 가 합쳐진 글자이다. 여기서‘八’은 서로 등진 모습을 표현한다. 그리고‘厶’는 팔을 몸 안쪽으로 구부려 안고 있는 모양이다.‘公’과 반대의 뜻을 가진‘사사로울 사(私)’는 벼(禾)를 팔로 끌어안아(厶)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것을 나타 낸다. 즉‘公’은‘사사로움(厶)에 등진다(八)’라는 의미가 된다. 결국‘公’은‘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는 의미로서,‘공평(公平)’, ‘공정(公正)’,‘공익(公益)’등의 단어에 사용된다. 다음으로‘공(共)’의 의미를 알아보자.‘共’은 ‘廾(받들 공)’과‘八(여덟 팔)’이 결합된 글자이다.‘廾’은 기본적으로 두 손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무언가를 받쳐드는 모양, 혹은 팔짱을 끼거나 서로 손을 맞잡는 것을 표현한다. ‘共’의 반대 개념은‘분(分)’으로,‘共’은‘나누지 않고 여럿이 하나로서 함께 하다’라는 의미를 가지며,‘공동(公同)’, ‘공존(共存)’,‘공생(共生)’등으로 활용된다. 결론적으로 거대과학 연구자가 지녀야 할‘공공의식’이란 연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한 개인의 이익이나 관점에 치우치지 않고, 연구 결과의 공적 활용과 사회적 가치에 대해 분명히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과학연구의 공공성
사실 공공의식은 비단 거대과학 분야의 연구자들에게만 한정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일반적인 과학연구의 공공성을 고려해 볼 때, 공공의식은 모든 과학자들이 연구를 수행하는데 꼭 갖추어야 할 덕목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과학연구가 공공성을 가지는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우선 연구비의 출처이다. 현대과학 연구에서 쓰이는 연구비는 대부분 국민들의 세금으로 만들어지는 공적 자금이다. 사기업 들은 제품 개발과 생산을 위해 자체적으로 연구비를 마련하기도 하지만, 민간기업에서 이뤄지는 연구개발에도 적지 않은 공적 자금이 투입되고 있다. 국가의 공공 연구비로 수행 된 과학연구의 결과는 모든 사회 구성원들에게 공개되어 누구나 공평하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과학연구의 공공성은 연구 결과의 신뢰도 향상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연구자가 생산한 결과나 데이터뿐만 아니라, 연구 과정이나 연구 방법 등을 투명하게 공개함으로써 다른 연구자나 일반 대중 들이 연구 결과를 재현하고 검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이러한 투명한 검증 과정은 과학연구 결과의 정확도와 타당성을 향상시켜 과학연구에 대한 공동체의 동의와 적극적인 지지를 이끌어내는데 도움을 준다. 과학연구가 공공성을 띠는 또 다른 이유는 과학연구 결과가 사회구성원의 삶이나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과학의 역할은 연구실 안에만 갇혀 있지 않다. 과학연구의 결과는 사람들이 가치판단을 하거나 정부가 정책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과학은 생명윤리나 인공지능의 역할과 같은 복잡한 가치판단의 문제를 고민할 때, 다양한 시각과 핵심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구성원들의 의사결정에 도움을 준다. 또한 과학은 기후변화나 환경오염과 같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을 마련하는데 필요한 과학적 지식과 분석의 틀도 제공해 준다.
현대과학의 힘
하지만 과학자에게 공공의식이 필요한 가장 큰 이유는 현대과학이 가지는 막대한 힘의 크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본 핵실험 연구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현대과학의 핵기술은 잘못 사용되어질 경우 인류 전체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유전자 조작 기술의 발달은 생물종의 다양성을 위협하고 유전자 치료 의료 기술의 안정성에 대한 논란을 야기하고 있다. 최근에 일어 나고 있는 인공지능 기술의 급격한 발전은 인간의 노동과 사고능력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제기하고 있다. 실시간 인터넷으로 전지구인의 삶이 연결되어 가고 있는 현대에는 국지에서 일어난 변화가 전세계로 퍼져 나가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초연결사회에서 과학자들이 공공의식을 가지고 국경과 학문의 경계 분야를 넘어 서로 협력하고 지식을 공유할 때만이 인류가 안고 있는 복잡한 과학적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다.
참고문헌
1. https://en.wikipedia.org/wiki/Daigo_Fukury%C5%AB_Maru
2. https://en.wikipedia.org/wiki/Castle_Bravo
3. https://agu.confex.com/agu/fm19/meetingapp.cgi/Paper/580698
김태영 Tae-Young Kim
•서울대학교 화학과, 학사(1993.3-1999.2)
•서울대학교 화학과, 석사(1999.3-2001.2, 지도교수 : 김희준)
•Indiana University 화학과, 박사(2002.1-2009.9, 지도교수 : James P. Reilly)
•California Institute of Technology 박사 후 연구원 (2009.9-2010.9, 지도교수 : Jesse L. Beauchamp)
•University of California at Los Angeles 박사 후 연구원 (2010.9-2012.2, 지도교수 : Peipei Ping)
•광주과학기술원 기초교육학부 조교수(2013.3-2016.2)
•광주과학기술원 지구·환경공학부 조교수, 부교수(2016.3-현재)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