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영 | 광주과학기술원 지구·환경공학부, kimtaeyoung@gist.ac.kr
완충 용량
연구는 생성의 과정이다. 관찰과 측정을 통해 데이터가 만들어진다. 실험 데이터를 해석하고 검증하여 논문을 생산한다. 논문들이 모여 새로운 이론이 태어나고 지식은 확장된다. 새로운 지식을 생성하는 연구의 과정은 분명 흥미롭고 보람된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많은 시간과 꾸준한 노력이 필요한 도전적이고 어려운 작업이다. 연구자는 실험을 설계하고, 데이터를 분석하며, 논문을 작성하는데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종종 실험에 실패하고, 데이터 해석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며, 저널에 투고된 논문이 거절되기도 한다.
연구자가 연구를 하는 동안 수 없이 겪게 되는 실패와 좌절을 극복하고 지속적으로 연구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연구 수행 과정 중에 느끼는 압박감과 어려움을 이겨내기에 충분한 완충 용량(buffer capacity)을 갖추는 게 필요하다. 수용액 내에서 수소 이온 지수(pH)의 변화에 대한 완충 용량은 짝산/짝염기(conjugate acid/conjugate base)의 농도가 높고, 이들의 산 해리 상수(acid dissociation constant, pKa)가 해당 pH에 가까워질수록 커진다. 따라서 연구 스트레스에 대해 높은 완충 용량을 갖기 위해서는 연구 과정의 각 단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도전들에 대응할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짝산/짝염기들을 포함하는 높은 농도의 완충 용액을 준비해 두고, 이를 상황에 맞춰서 적절히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림 1. 자기 긍정과 자기 동기부여를 짝산/짝염기로 해서 만들어진 완충 용약, 자발성
자기 긍정
연구를 하는 동안 마주치는 일상적인 실패와 실망을 이겨내기에 충분한 완충 용량을 가지는 완충 용액을 만들기 위한 짝산과 짝염기는 자기 긍정(self-affirmation)과 자기 동기부여(self-motivation) 능력이다. 자기 긍정은 자신의 능력과 삶의 조건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연구는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는 여정이고, 그 여정의 출발점은 연구자 자신이다. 자기 긍정은 연구자가 자신이 하는 연구의 주인이 되게 하는 근거이다. 새롭고 도전적인 연구를 하다 보면 실험에 실패하는 일이 잦아진다.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 연구자는 낙담하게 된다. 이로 인한 연구자의 좌절과 부정적인 태도는 결국 자신의 연구 능력을 약화시키고 연구의 성공 가능성을 낮추게 된다. 연구자가 연구 과정 중에 마주치는 도전과 장애물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 연구자 내면의 힘에 대한 자신감과 긍정적인 태도는 어렵고 도전적인 여러 상황 속에서도 연구에 대한 동기를 유지시키고 집중력을 회복시킬 수 있는 유연성과 탄력성을 제공한다. 그러나 자기 긍정이 자신의 실수나 잘못에 대한 무조건적인 승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연구자의 자기 긍정은 연구 과정 중에 자신이 잘못된 해석을 하거나 연구가 실패할 수 있음을 긍정하고, 동시에 이를 해결하는 연구 과정 자체를 긍정함을 의미한다.
연구자의 자기 긍정의 힘은 다른 연구자들과 공동 연구를 하는데도 큰 도움이 된다. 현대과학에서는 전공이 서로 다른 연구자들 사이의 학제간 연구나 융합 연구가 활발하다. 공동 연구를 통해 성공적인 연구 성과를 얻기 위해서는 연구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동시에 공동 연구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과 책임을 분명히 인식하면서 공동 연구자들을 배려하고 신뢰해야 한다. 연구자가 본인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다른 연구자의 의견이나 반응을 받아들이는 데 더 적극적이다. 왜냐하면 자기 긍정의 힘은 나와 외부 세계와의 차이를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긍정하기 때문이다. 자기 긍정을 기반으로 한 적극적인 외부 수용 태도는 공동 연구 과정 중에 발생할 수 있는 참여 연구자들 사이의 갈등을 줄이고 협력 효과를 증가시킨다.
경쟁력 있는 연구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자기 긍정의 힘은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 자기 긍정을 위해서는 가장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한다. 자신의 장점을 찾기 위해 본인이 긍정할 수 있는 자신의 특징들을 적어본다. 잘 생각나지 않으면 자신이 믿을 수 있는 동료나 친구들에게 의견을 구해도 좋다. 자기 긍정의 힘은 성공의 기쁨에서도 얻을 수 있다. 자기 긍정은 자신감을 필요로 하고, 자신감은 성공의 기억에서 생긴다. 우리에겐 큰 성공보다는 작은 성공의 경험이 더 많다. 따라서 자기 긍정의 힘을 갖기 위해서는 작은 성공에서도 성취감을 찾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더불어 실패 속에서도 내가 긍정할 수 있는 부분을 찾을 수 있으면 더 좋다. 또한 불안이나 비난은 자기 긍정과 함께 어울리기 어렵다. 부정적인 생각을 멀리하기 위해 자신에게 격려와 칭찬과 같은 긍정적인 힘을 보태 줄 수 있는 친구와 동료들을 주위에 가까이 한다.
자기 동기부여
연구를 수행하며 겪는 실패의 충격을 줄여주는 데 필요한 완충 용액의 또 다른 주요 성분은 자기 동기부여 능력이다. 자기 동기부여는 여러 도전과 장애에도 불구하고 연구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만드는 힘이다. 자신이 어떠한 동기를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느냐에 따라 연구 성과의 질이 달라지고, 연구의 성패가 결정되기도 한다. 자기 긍정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가치, 장점들을 찾고 그 의미를 평가하는 내부를 향한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자기 동기부여는 내적 자기 긍정을 바탕으로 외부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자신을 격려하는 나와의 대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자기 긍정과 자기 동기부여는 짝산/짝염기의 관계로, 둘 사이에는 서로 양성자 하나의 차이 밖에 없다. 자기 긍정은 자기 동기부여를 낳고, 자기 동기부여는 자기 긍정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연구자의 자기 동기부여 능력은 연구를 수행하면서 마주치는 여러가지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연구는 이전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아무도 가지 않았던 곳을 향해 떠나는 탐험이자 모험이다. 미지의 세계에는 접해본 적 없는 낯선 도전들이 기다리고 있다. 이러한 도전들 속에서 겪을 수 밖에 없는 고난과 연속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연구자가 낙담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서 연구 목표를 향해 꾸준히 나아갈 수 있게 만드는 힘은 자기 동기부여에서 나온다.
연구 과정 중에 발생하는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해 나갈 수 있는 힘을 키우기 위해서도 자기 동기부여가 중요하다. 어떤 문제에 대한 적절한 해결책을 찾는 과정은 크게 네 단계로 나뉜다. 먼저 문제가 되는 현재의 상황과 조건들을 파악해야 한다. 다음으로 문제 해결을 위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 수준을 정한다. 세번째로 현재 수준과 목표 수준 간의 차이를 해소하기 위한 여러 방안을 궁리한다. 마지막으로 만들어진 방안들을 문제에 적용하여 최적의 해결책을 찾는다. 따라서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문제를 이해하고 현재 상황과 목표 수준과의 차이를 구분하는 분석 능력뿐만 아니라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 내고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실행 능력이 필요하다. 연구자는 최종 연구 목표를 향한 자기 동기부여를 통해 제시된 문제의 해결책 마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만들어진 여러 아이디어를 평가하여 문제 해결에 가장 효과적인 방안을 결정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스스로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이를 유지하기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연습과 노력이 필요하다. 먼저 성취하고자 하는 분명한 목표를 세우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하지만 그 목표는 본인이 달성할 수 있는 정도로 도전적인 것이어야 한다. 너무 어려운 목표는 성공 가능성도 낮고 시간도 오래 걸려서 동기 부여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원대한 목표는 그것을 작은 몇 개로 나누어서 단계별로 도전해 나가는 게 좋다. 또한 계획하는 목표는 매우 구체적이어야 한다. 연구 목표가 구체적이지 않으면 연구의 진행 정도를 파악하기 어려워 성취감을 얻기가 어렵다. 스스로에게 성취감이란 보상 없이 동기 부여를 지속하기는 쉽지 않다. 연구에 대한 자기 동기부여를 위해서는 연구자가 본인의 열정을 쏟을 만한 연구 대상을 찾는 노력도 지속해야 한다. 본인이 하고 있는 연구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 동시에, 최신 논문을 읽고 학회에서 다른 분야 연구자의 발표를 들으며 새로운 분야에 대한 학습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한다.
자발성
자기 긍정과 자기 동기유발이라는 짝산과 짝염기로 만들어지는 완충 용액은 자발성(spontaneity)이다. 자발성은 외부 자극 없이도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능동적인(active) 힘이다. 연구는 동일함의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체계를 생성하는 작업이다. 능동적인 힘인 자발성은 지속적으로 새로움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반면에,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반동적인(reactive) 힘인 비자발성은 새로움을 계속 생성할 수 없다. 반동적인 힘은 외부의 자극이나 에너지가 사라지면 아무 일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동적인 힘은 외부 세계와의 상대 비교를 통해 부족한 결핍을 채우지만, 능동적인 힘은 상대방과의 비교 대신 스스로 탁월함을 추구한다. 따라서 능동적인 힘은 새로운 가치를 세워 이를 확산시키고, 자발성은 독립적인 연구자로서 연구의 주인이 될 수 있게 해준다.
자발성을 지닌 연구자가 되기 위해서는 새로움이 주는 낯섦과 불안함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연구에는 언제나 여러가지 불확실성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연구를 하면서 마주치는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는 장애물이 아니라 새로운 발견을 가능하게 해주는 열린 기회이다. 연구의 자발성을 기르기 위해서는 생각의 유연함(plasticity)도 필요하다. 생각이 유연한 연구자는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새로운 방법을 받아 들이는데 좀 더 적극적이고, 연구가 실패하거나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을 때도 쉽게 대안을 찾는다.
자발성을 지속하기 위한 필요조건은 건강한 신체이다. 화학 반응의 자발성은 자유 에너지(free energy)에 의존하고, 자발적 반응(spontaneous reaction)은 자유 에너지가 감소하는 반응이다. 즉 자발적인 반응을 시작하고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높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강인한 정신력과 더불어 건강한 신체가 뒷받침 되어야 새롭고 도전적인 연구를 꾸준히 진행할 수 있다. 연구의 자발성을 유지하기 위한 건강한 신체를 갖기 위해서는 주기적으로 운동을 해야 한다. 운동을 하는 동안에는 연구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푹 빠져들어 즐길 수 있는 운동이면 더 좋다. 사실 연구 과정에는 연구자가 직접 실험을 하는 신체적 활동보다는 실험을 계획하고 데이터를 해석하는 등의 정신적 활동이 압도적으로 더 많다. 이와 같은 두 활동 간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서도 주기적인 운동이 필요하다.
김 태 영 Tae-Young Kim
• 서울대학교 화학과, 학사(1993.3-1999.2)
• 서울대학교 화학과, 석사(1999.3-2001.2, 지도교수 : 김희준)
• Indiana University 화학과, 박사(2002.1-2009.9, 지도교수 : James P. Reilly)
• California Institute of Technology 박사 후 연구원(2009.9-2010.9, 지도교수 : Jesse L. Beauchamp)
• University of California at Los Angeles 박사 후 연구원(2010.9-2012.2, 지도교수 : Peipei Ping)
• 광주과학기술원 기초교육학부 조교수(2013.3-2016.2)
• 광주과학기술원 지구·환경공학부 조교수, 부교수(2016.3-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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