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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설의 여파


최정모 | 부산대학교 화학과, jeongmochoi@pusan.ac.kr



지난 글에서 우리는 19세기 당시 돌턴의 원자설이 어떤 맥락에서 만들어졌고 어떤 맥락에서 수용되었는지를 살펴 보았습니다. 돌턴은 기체와 대기를 연구하는 뉴턴주의자로서 기체의 성질을 설명하기 위해 기체 입자들을 도입하였고, 그 과정에서 다소 과감한 가정을 도입하여 원자설을 형식화하였습니다. 당시 화학자들은 단위 입자의 개념과 일정 성분비의 법칙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럼에도 돌턴의 원자설은 유럽 화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바로 그 단위 입자의 질량을 결정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글에서는『화학 철학의 새 체계』직후 약 5년 동안 화학자들이 이 원자설을 어떻게 수용하고 발전시켜 나갔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참고문헌 1]

돌턴의 원자설이 발표될 즈음 “원자”라는 개념은 물리학계와 화학계에서 다소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참고문헌 2] 물리학계에서는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기본 입자”를 원자라고 불렀습니다. 물리학자들은 이 입자들의 기계적 움직임으로 세상이 돌아가고 있다고 믿었고, 보통 단일한 종류의 입자를 상상했습니다. 반면 화학계에서는 분자를 구성하고 있는 단위 입자들을 원자라고 보았고, 다양한 종류가 존재할 수 있다고 보았죠. 돌턴의 원자설은 이 두 가지 정의를 하나로 합친 것이었습니다.[참고문헌 3] 돌턴의 관심사는 바로 그 물리적인 실체로서의 원자가 얼마의 무게를 갖느냐였습니다. 그러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실험 데이터는 당량(equivalent) 데이터였죠. 18세기 말 리히터(Richter)가 동일한 양의 산에 반응하는 염기의 양을 종류별로 조사 해서 발표한 이래, 많은 화학자들은 두 물질이 반응할 때는 항상 그 질량비가 일정하게 유지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베르톨레-프루스트 논쟁의 핵심이 바로 그 질량비가 일정하냐는 것이었죠.) 만약 그렇다면 그 비율로부터 원자의 질량도 결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량으로부터 원자량을 계산하기 위해서는 분자를 이루는 원자의 비율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돌턴의 원자설에는 “최대 단순성 규칙”이라는 규칙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기체 원자들은 분자를 구성할 때 최소한의 비율로 결합한다는 것이었죠. 그 당시에도 일산화탄소와 이산화 탄소처럼 동일한 원소들이 다른 비율로 결합하는 예들이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돌턴은 당시 알려져 있던 화합물을 전부 조사하여 그 중 비율이 가장 작은 화합물이 1:1로 결합하여 만들어 졌다고 가정하였습니다. 이 규칙을 따르면 물은 산소 원자 하나와 수소 원자 하나로 구성되어 있고(아직 과산화 수소가 발견되기 이전입니다), 암모니아는 질소 원자 하나와 수소 원자 하나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산화 탄소는 탄소 원자 하나와 산소 원자 두 개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참고문헌 4] 우리 눈에 어색하게 보이는 이 규칙은 당시 화학자들의 눈에도 거슬렸습니다. 1811년 존 보스톡(John Bostock, 1773-1846)이라는 화학자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죠. “입자 들이 특정 비율로 결합할 때, 그 결합이 일대일이라고 알 수 있는 때는 언제인가? 물이 산소 원자 두 개와 수소 원자 한 개, 혹은 산소 원자 한 개와 수소 원자 두 개로 구성되는 것 (...)은 왜 불가능한가? 나는 돌턴 씨가 다른 모든 조합에 비해 이 일대일 결합을 선호하는 어떠한 이유도 찾지 못했다.”[참고문헌 5] 돌턴은 바로 반론을 제시하였습니다. 원칙적으로 원자 A에 원자 B가 결합한다고 하면 최대 열두 개까지 결합할 수 있지만,[참고문헌 6] 원자들은 같은 종류의 원자들끼리 서로 밀어내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장 안정적인 구조는 두 원자가 일대일로 결합하는 구조라는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두 원소가 한 가지 비율로만 결합하지 않을 때 발생하였습니다. 앞서 일산화 탄소와 이산화 탄소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사실 이들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는 탄소 일정량에 결합하는 산소의 양이 두 화합물에서 두 배 차이가 난다는 것 뿐입니다. 돌턴은 일산화 탄소를 가장 단순한 화합물로 놓고 각각 탄소 하나에 산소 하나, 탄소 하나에 산소 두 개가 붙는다고 보았지만, 반대로 이산화 탄소가 가장 단순한 화합물이라고 보면 일산화 탄소가 탄소 두 개에 산소 하나로 구성되고, 이산화 탄소는 탄소 하나에 산소 하나로 구성되는 상황도 가능해집니다. 어느 쪽이 맞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돌턴은 이러한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증기압을 이용한 별도의 실험적 증명을 시도하였지만, 설득력은 약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당시 돌턴의 이론에 열광했던 화학자들도 최대 단순성 규칙을 그대로 적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들은 나름의 방법으로 원자량을 결정하려고 하였습니다. 이 글에서는 영국의 화학자들, 즉 토머스 톰슨 (Thomas Thomson, 1773-1852), 윌리엄 월라스턴(William Hyde Wollaston, 1766-1828), 험프리 데이비(Humphry Davy, 1778-1829)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톰슨은 돌턴 원자설의 강력한 지지자였습니다. 톰슨은 심지어 돌턴이 원자설을 잘 정리하여 발표하기도 전인 1804년 돌턴과의 대화를 통해 기본적인 아이디어를 듣고 크게 흥분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는 특히 최대 단순성 규칙에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1807년 자신의 책『화학의 체계 (System of Chemistry)』제3판에서 돌턴의 최대 단순성 규칙을 적용하여 원자량을 계산해 보기도 했습니다(이 책은 심지어 돌턴의『화학 철학의 새 체계』1권이 나오기도 전에 출판되었습니다). 톰슨은 1807년 데이비와 월라스턴에게 돌턴의 원자설을 소개합니다.

데이비는 당시 영국 화학계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참고문헌 7] 그는 1800년 볼타의 전기와 그를 이용한 물의 분해실험에 대해 듣자마자 바로 전기화학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다양한 전기 분해 실험을 직접 수행하면서 화학적 친화도의 근원에는 전기 현상이 있다고 생각했고, 1806년 발표한 논문에서 정전기, 전류, 전기 분해, 화학적 친화도, 화학 결합 등을 개념적으로 연결하려는 대담한 시도를 하였습니 다. 이후 데이비는 이전까지 원소로 간주되던 물질인 알칼리와 알칼리 토류[참고문헌 8]를 전기로 분해하는데 성공하였고, 이를 1808년 논문으로 발표했습니다. 이렇게 전기를 이용하면 다른 방법으로는 분해하기 어려운 분자의 구성 성분들을 떼어낼 수 있고, 이를 통해 화학적 친화도를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이 데이비의 생각이었습니다.

데이비는 1809년 강연에서 돌턴의 원자설을 처음 언급합니다. 그는 전기 분해를 통해 알칼리 토류에 포함된 산소의 양을 측정할 수 있었고, 그 비율 속에서 규칙성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돌턴의 원자설로부터 예측되는 산소의 양과 자신이 실험으로 직접 측정한 양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비록 데이비 자신은 돌턴의 원자론을 믿지 않았고 오히려 세상이 단일한 종류의 기본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는 쪽에 가까웠지만, 원자량 개념이 화학 연구에 유용하다는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죠. 그는 이 원자량 개념을 활용해 자신의 전기적 화학 결합 이론을 확장합니다.

데이비는 1810년 이후 여러 편의 논문을 통해 (“원자”라는 표현 대신 조심스럽게 “비율”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지만) 다양한 원소의 원자량을 제안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1812년『화학 철학의 기초(Elements of Chemical Philosophy)』 라는 책을 통해 당시에 실험값이 존재했던 총 37개의 원소에 대해 원자량 데이터를 정리하여 발표합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데이비의 원자량은 돌턴의 원자량과 다릅니다. 특히 데이비는 물 분자의 구성이 수소 원자 두 개에 산소 원자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수소 기체와 산소 기체가 반응 하여 물을 만들 때 부피 비율이 2:1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로부터 돌턴이 제안한 수소의 원자량의 두 배를 해서 수소의 원자량으로 잡고, 이걸 기준으로 다른 물질들의 원자량을 새로 계산하였죠. 데이비는 돌턴의 원자량이 “사실에 근거한”비율에서 벗어난 데이터라고 여겼습니다.

한편 월라스턴은 1808년 이후 원자량 연구를 시작하였고, 직접 실험을 통해 많은 물질의 당량을 결정합니다. 그는 1812년경 수소가 아니라 산소의 원자량을 기준으로 잡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고, 마침내 1813년 학회 발표를 통해 자신이 계산한 원자량을 공개하였습니다.(이 데이터는 1814년 논문으로 출판되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월라스턴도 데이비처럼 원자라는 표현을 피하고 대신“당량(equivalent)” 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물리학자였던 돌턴은 원자가 실재한다고 믿었고, 원자량 연구는 실제 원자의 원자량을 찾아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월라스턴은 원자의 실재성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월라스턴에게 원자량은 규약(convention)이었고, 규약에 맞춰 숫자를 조작 하면 실제 화학 반응을 정확하게 기술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일 뿐이었습니다.[참고문헌 9]

월라스턴의 원자량 데이터는 즉각적인 호응을 얻었습니다. 많은 화학자들이 원자의 실재성에 의문을 표하고 있던 상황에서, 월라스턴은 원자라는 가설적 존재에 대한 이론적 논의 없이 당량 계산을 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데이비는 월라스턴의 데이터가 가설과 분리된 실용적인 데이터라며 만족을 표했고, 톰슨 역시 1813년과 1814년에 출판한 논문에서는 월라스턴의 데이터에 영향을 받아 산소의 원자량을 1로 잡은 원자량 데이터를 제시하였죠. 또한 월라스턴은 실험값을 어디에서 얻었는지 그 출처를 꼼꼼하게 표시하 였고, 이 전례를 따라 톰슨 역시 출처를 표시하였습니다. 월라스턴의 꼼꼼한 데이터는 영국에서 1860년대까지 활용될 정도로 인기가 있었습니다.

[표 1]에서는 각 과학자들의 원자량 데이터를 정리하였습니다.[참고문헌 10] 당시에는 어느 물질이 원소인지에 대해 합의가 안 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염소의 경우, 돌턴과 월라스턴은 염소를 무리움(murium, Mu)이라는 원소의 산화물로 생각했고, 데이비와 톰슨은 염소 자체가 원소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경우 돌턴과 월라스턴은 무리움의 원자량을 보고했고 데이비와 톰슨은 염소의 원자량을 보고 했겠죠. 동일한 기준으로 맞추기 위해 이런 경우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원소를 기준으로 원자량을 다시 환산하였고, 이런 데이터는 괄호 안에 표시해 두었습니다. 데이터를 보시면, 물 분자의 조성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쟁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수소 분자와 산소 분자가 이원자 분자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물 분자가 HO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산소의 원자량을 8 근처로, H2O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16 근처로 계산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실험 데이터를 사용했느냐에 따라 원자량 값이 약간씩 차이가 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영국 밖에서는 돌턴의 원자설이 어떻게 수용되었을까요? 흥미롭게도 많은 경우 돌턴의 원자설이 그대로 수용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뉴턴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작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뉴턴의 나라였던 영국에서는 자연 현상을 입자들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관점이었지만, 그 밖의 나라에서는 굳이 입자 개념에 집착할 필요를 못 느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질량”이 측정 량의 대표로 사용될 필요도 없었죠. “질량”대신 널리 사용 된 실험적 측정량은 “부피”였습니다.

먼저 조제프 게이뤼삭(Joseph Louis Gay-Lussac, 1778-1850)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참고문헌 11] 게이뤼삭은 베르톨레의 제자로서 돌턴의 원자설이 발표되던 당시 프랑스 화학계의 총아였습니다. 그는 1808년 게이뤼삭의 법칙으로 알려진 기체 반응의 법칙을 발표합니다. 기체들의 반응에서, 반응하는 기체와 생성되는 기체의 부피 사이에는 간단한 정수 비가 성립한다는 법칙이죠. 앞서 데이비가 이 법칙을 활용하여 물의 조성을 결정했음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우리도 오늘날 게이뤼삭의 법칙을 이용해 물질의 조성비를 결정한다고 배웁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게이뤼삭은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일정 성분비의 법칙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물질의 반응비는 실험 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법칙이 돌턴의 원자설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항변했습니다. 그는 오직 기체에서만 부피비가 정수비로 나온다는 점은 고체/액체에서 기체가 될 때 극적인 부피 변화가 수반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경험적” 법칙이라고 설명했고, 따라서 화학 반응에서 성분들 사이의 비율이 일정하다는 것은 일반화할 수 있는 원리가 아니라고 주장했죠. 게다가 게이뤼삭에게 있어 돌턴의 원자설은 최대 단순성의 원리라는 임의적인 가설 위에 세워진 것이므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돌턴 역시 게이뤼삭의 법칙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자신은 그 법칙을 이해할 수 없다는 글을 남겼습니다. 게이뤼삭은 1828년이 되어서야 산-염기 반응을 다루기 위해 일정 성분 비의 법칙과 돌턴의 원자설을 받아들입니다. 그는 자신의 글에서 영국 화학자들이 고심하여 만든 표현들인“원자”, “비율”, “당량”이라는 표현을 섞어서 사용하였는데, 이는 그 철학적 함의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점을 시사 합니다.

두 번째 인물로 이탈리아의 과학자 아마데오 아보가드로 (Amadeo Avogadro, 1776-1856)를 살펴봅시다.[참고문헌 12] 아보가드로는 1811년 게이뤼삭의 법칙에서 출발하여 같은 수의 기체 입자는 “그 종류와 무관하게”동일한 압력에서 같은 부피를 점유한다는 가설을 끌어냅니다. 그는 이러한 가설에 기반하여 모든 물질의 “증기 밀도”를 계산하고자 하였습니다. 즉, 단위 부피의 산소와 결합하는 각 원소의 질량을 이용해 단위 부피당 질량을 계산한 것이죠. 문제는 그가 기체 뿐 아니라 액체와 고체에 대해서도 동일한 작업을 수행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기체로 존재하는 홑원소물질과 화합물에 대해서는“맞는”데이터를 만들어냈지만, 나머지 수백 종류의 물질에 대해서는(심지어 당시 기준으로 보더라도) 엉터리 데이터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아보가드로 역시 돌턴의 원자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실험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최소 단위는 부피, 혹은“증기 밀도”라고 주장했고, 수소의 부피를 1로 잡아 그로부터 다른 원소들의 단위 부피를 결정하는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오늘날 흔히 아보가드로가 분자 개념을 처음 도입했다고 여겨지지만, 사실 그는 원자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원자와 분자 개념을 구분하지 않았습니다.[참고문헌 13]






















표 1. 원소별 과학자들의 원자량


50년 후 화학자들은 아보가드로를 “재발견”합니다. 그리고 그의 가설을 활용하여 원자와 분자 개념을 정교하게 다시 정의하죠. 그러면서 왜 그동안 화학계에서 이 중요한 가설이 무시당했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돌턴과 게이뤼삭을 비롯한 동시대 화학자들을 비난합니다. 이 전통은 이후로도 쭉 이어져서 라이너스 폴링(Linus Pauling, 1901-1994)마저 아보가드로가 무시당한 역사를 비통하게 여겼습 니다. 하지만 화학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사실 아보가드로가 무시당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아보가드로 이후의 화학자들도 그의 논문을 읽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보가드로의 법칙은 이론적 설득력이 약할뿐더러 응용 가능성도 높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보가드로의 법칙은 기체에만 적용됩니다. 그런데 19세기 전반 화학자들이 관심을 갖고 있던 많은 물질들은 기체가 아니었습니다. 아보가드로는 액체와 고체에 자신의 법칙을 적용하려고 애를 썼지만, 그 결과는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액체와 고체를 다룰 수 있는 다른 유용한 법칙들이 많은데, 굳이 부정확한 아보가드로의 법칙을 선택할 이유는 없겠죠.

돌턴이 일으킨 돌풍은 어디로 이어졌을까요? 영국에서 출발해 게이뤼삭의 나라 프랑스, 아보가드로의 나라 이탈리아, 그리고 독일로 퍼져나간 돌풍은 토르베른 베리만의 나라인 스웨덴에도 도착합니다. 옌스 야코브 베르셀리우스 (J¨ons Jakob Berzelius, 1779-1848)도 돌턴의 원자설에 대해 듣게 됩니다.



참고문헌


1. 이 내용은 다음 글들에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Alan J. Rocke,“Atoms and Equivalents: the Early Development of the Chemical Atomic Theory,”Historical Studies in the Physical Sciences 9: 225-263 (1978); L. A. Whitt,“Atoms or Affinities? The Ambivalent Reception of Daltonian Theory,”Stud. Hist. Phil. Sci. 21 (1): 57- 89 (1990); Hans-Werner Schütt,“Chemical Atomism and Chemical Classification”in The Cambridge History of Science, Volume 5: The Modern Physical and Mathematical Sciences, ed. Mary Jo Nye (Cambridge, United Kingdom: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

2. 지난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원자(atom)”와“분자(molecule)”라는 단어는 19세기 초에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들이 오늘날과 같은 의미로 분화되기까지는 시간 이 걸렸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여 지난 글에서는“원자”나“분자”라는 표현을 최대한 배제하였습니다만, 오늘 글에서는 해당 단어들을 사용하지 않고는 논의를 진행하 기가 어려워 불가피하게 두 단어를 오늘날의 의미로 도입하여 쓰겠습니다.

3. 지금 우리의“원자”개념은 돌턴의“원자”개념과 유사하기 때문에 이 대목에서 이상함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두 개념을 엄밀하게 구분하던 당시 사람들에게는 혼동을 주었습니다. 그 결과 19세기 내내“원자”개념을 둘러싼 논쟁이 이어집니다. 자세한 논의는 주석 1번에서 소개한 Whitt의 글과 Schütt의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4. John Dalton, A New System of Chemical Philosophy, Vol. 1, pp. 214-215.

5. Alan J. Rocke, 앞의 글, pp. 231-232에서 재인용. 여기서“일대일”이라는 단어는 binary의 번역어입니다. 돌턴은 두 개의 원자로 구성된 분자를 binary라고 불렀습니다.

6. 오늘날의 기호로는 AB12입니다. 12라는 숫자는 기하학적으로 가장 조밀하게 구를 쌓아 두었을 때 한 구와 접촉하는 구의 수에서 유래합니다. 즉, 오늘날의 용어로는 최대 배위수가 12라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7. Colin A. Russell,“The Electrochemical Theory of Sir Humphry Davy, Part I: the Voltaic Pile and Electrolysis,”Annals of Science 15 (1): 1-13 (1959).

8. alkali, alkaline earth. 각각 알칼리 금속과 알칼리 토금속의 산화물을 가리킵니다.

9. 원자는 실재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화학자들 사이의 규약인가? 이것이 이후 19세기 화학을 규정하는 큰 논제 중 하나가 됩니다. 케큘레를 비롯한 많은 19세기 화학자들은 원 자 개념을 규약으로 여겼고, 굳이 원자의 실재성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10. Alan J. Rocke, 앞의 글, Table 2에서 재인용.

11. Kiyohisa Fujii,“The Berthollet-Proust Controversy and Dalton’s Chemical Atomic Theory 1800-1820.”The British Journal for the History of Science 19 (2): 177-200 (1986).

12. Nicholas Fisher,“Avogadro, the Chemists, and Historians of Chemistry: Part 1,”Hist. Sci. 20 (2): 77-102 (1982).

13. Mi Gyung Kim,“The Layers of Chemical Language, II: Stabilizing Atoms and Molecules in the Practice of Organic Chemistry,”Hist. Sci. 30, 397-437 (1992).




최 정 모 Jeong-Mo Choi

  • 한국과학기술원 화학과, 학사(2003.3-2011.8)

  • Harvard University 과학사학과, 석사 (2011.9-2015.5, 지도교수 : Naomi Oreskes)

  • Harvard University 화학 및 화학생물학과, 박사 (2011.9-2016.5, 지도교수 : Eugene I. Shakhnovich)

  • Washington University in St. Louis, 박사 후 연구원(2016.8-2019.4, 지도교수 : Rohit V. Pappu)

  • 한국과학기술원 자연과학연구소, 연구조교수(2019.6-2020.8)

  • 부산대학교 화학과, 조교수(2020.9-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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