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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스루헤 회의


1860년 9월 3일, 독일의 휴양도시 칼스루헤(Karl- sruhe)에 140명의 화학자가 모였습니다. 이들은 이곳에 2박 3일 동안 머물면서 당시 화학계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여러 주제에 대해 토론하였습니다. 바로 훗날 칼스루헤 회의(Karlsruhe congress)로 불리는, 화학계 최초의 국제 학술대회입니다. 칼스루헤 회의가 당시 화학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사학자들마다 다양한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 상징성이 크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오늘 글에서는 칼스루헤 회의의 배경과 그 경과를 살펴보고, 칼스루헤 회의가 미친 영향을 정리해 보겠습니다.[참고문헌 1]

1850년대까지 화학은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특히 유기화학 분야를 중심으로 다양한 이론이 등장했고, 실험 기법 역시 고도로 정교해지고 있었죠. 하지만 놀랍게도 그 기초를 살펴보면 깔끔하게 합의된 체계가 없는 상황이 었습니다. 우선 “원자(atom)”, “분자(molecule)”, “당량 (equivalent)”등의 용어가 비슷하면서도 다른 개념을 가 리키는데 혼용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뒤마는 연구 초기에 원자와 분자를 엄밀하게 구분하지 않고 그저 기본 입자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했으며, 라디칼의 치환 개념이 확립된 다음에는“당량”이라는 용어를 대신 사용하였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의미로 “원자”와 “분자”를 구분해서 사용한 것은 1842년 게르하르트가 최초였습니다만, 그러한 구분법이 바로 전체적인 동의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그 결과 그 이후에도 학자들마다 조금씩 다른 의미로 용어들을 사용했습니다. [참고문헌 2]

보다 심각한 문제는 원자량이었습니다. 1850년대에도 화학자들마다 다른 기준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간단한 예로 물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돌턴은 최대 단순성의 원리를 따라 수소와 산소가 일대일로 결합하여 물을 만든다고 생각했고, 산소 원자량이 수소 원자량의 여덟 배라고 가정하여 HO라는 식을 제안했습니다. 리비히와 뒤마는 물 분자에 대해 이 식을 사용했습니다. 베르셀리우스는 이에 동의 하지 않았고, 산소가 수소보다 16배 무겁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HO라는 식을 사용하였고, 여기서 취소선은 동일 한 원소에 대해 두 개의 원자가 포함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즉, 취소선을 안 쓰는 표기법을 따른다면 H2O와 같이 쓸 수 있습니다. 이 후 화학자들은 대부분의 반응에서 기체물(수증기)이 항상 두 부피씩 발생된다는 것을 발견했고,[참고문헌 3] 일부 화학자들은 이 사실을 반영하여 물을 H4O2와 같이 표기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분자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표기법이 무척 다양해질 수 있었습니다. 특히 유기 화합물들의 경우 그 문제가 심각했죠. 일례로 케쿨레가 1861년 출판 한 교과서에서는 아세트산의 화학식으로 19가지를 소개하 고 있습니다[그림 1]. 설령 아세트산의 실험식을 C4H4O4 로 동일하게 쓴다 해도,[참고문헌 4] 전기적 이원론을 따르는 경우, 라 디칼 이론을 따르는 경우, 유형 이론을 따르는 경우에 따 라 서로 다른 표기법이 사용되었고, 동일한 이론 안에서도 분자를 어떻게 나누어 이해하느냐에 따라 표기법이 심각 하게 달라질 수 있었습니다. 물론 각 화학자별로 사용하는 용어과 원자량, 표기법에는 일관성이 있었기 때문에 각 연 구실 내의 연구는 체계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만, 서 로 다른 전통에 속한 화학자들끼리 소통하는 데에는 혼란 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인식한 케쿨레는 동료 화학자 두 명과 함께 국제회의를 기획합니다. 1859년 겨울, 케쿨레는 유명 한 화학자들에게 서신을 보내 회의에 대한 아이디어를 알렸고, 많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에 기반하여 그는 1860 년 7월, 이 회의에 대한 공식적인 초청장을 유럽 전역에 발송하였습니다. 초청장은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로 작성되었습니다. 초청장의 마지막에는 회의를 지지하는 화학 자 45인의 서명을 수록하였는데, 그중에는 리비히, 뵐러, 뒤마, 분젠, 윌리엄슨, 호프만 등 당시 유럽을 대표하는 쟁 쟁한 화학자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초청장에 서 케쿨레는 원자, 분자, 당량 등의 개념, 입자의 정확한 당량과 화학식, 합리적인 표기법 등을 논의하자고 말하면서, 이 회의에서 문제들이 대번에 확실히 결론 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많은 오해를 제거하고 여러 부 분에서 합의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모임을 계획하면서 케쿨레는 뚜렷한 그림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케쿨레는 단순히 자유 토론만으로는 결론이 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고, 최종적으로는 투표를 통해 한 가지 안을 결정할 계획이었습니다. 또한 회의 진행을 담당할 의장을 따로 선출하지 않고 매 순서마다 좌장을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의장 선거를 별도로 진행하게 되면 선거에서 떨어진 사람이 감정적으로 불쾌해질 수 있을 뿐 아니라, 우쭐해진 의장이 멋대로 회의를 진행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참석자 모두에게 발언권을 주는 것은 시간의 효율성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으므로 “토론자”를 몇 명 선정하여 토론을 주도할 수 있도록 하고자 했습니다. 특히 이들 토론자는 각 국가를 대표하는 젊고 열정적인 화학자로 뽑아서 새로운 세대의 입장을 많이 반영하고자 했습니다.[참고문헌 5]

초청장에 호응한 화학자들이 9월 3일 칼스루헤로 모여 들었습니다. 초청장에 서명한 45명 중 실제로 칼스루헤에 온 사람은 스무 명이었고,[참고문헌 6] 이들을 포함하여 총 140명의 화학자들이 자리에 함께 했습니다.[참고문헌 7] 회의의 공식 언어는 따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나, 회의록이 프랑스어로 기록 된 것을 보면 대부분 프랑스어로 진행되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유럽의 화학자들은 대개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를 어느 정도 구사했기 때문에 의사소통에 큰 문제는 없었을 것입니다.

아침 9시, 칼스루헤 현지에서 회의를 조직한 벨친(Karl Weltzien, 1813-1870)의 환영사를 첫 순서로 일정이 시 작되었습니다. 벨친은 분젠에게 첫 좌장을 맡아달라고 했 지만 분젠은 거절했고, 벨친이 그대로 좌장을 맡기로 하였 습니다. 이 시간에는 다섯 명의 토론자를 선출하였습니다.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뷔르츠(Adolphe Wurtz, 1817- 1884; 프랑스 파리), 슈트레커(Adolph Strecker, 1822- 1871; 독일 튀빙엔), 케쿨레(1829-1896; 벨기에 겐트), 로 스코(Henry Roscoe, 1833-1915; 영국 맨체스터), 쉬시 코프(Leon Schischkow, 1830-1907; 러시아 상트페테 르부르크). 케쿨레의 계획대로 다양한 국가 출신의 젊은 화학자들이 토론자로 뽑힌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어 케쿨레가 총회에서 논의할 문제를 미리 준비할 위원회를 조 직하자는 의견을 냈습니다. 이후 오전 11시, 케쿨레를 비 롯해 9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모여 총회에서 논 의할 문제를 선정하였습니다.

위원회는 그 외의 질문들을 정하려 하였으나 결론을 내 지 못했고, 이렇게 세 개의 질문을 정리하여 다음 날 아침 총회에서 발표합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해 케쿨레가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그는 기체·액체·고체로 존재하는 물리적 분자와 화학 반응에서 최소 단위로 존재하는 화학적 분자를 구분하고, 원자가 조합되어 화학적 분자를 이룬다는 의견을 제시하였습니다. 이어 칸니차로(Stanislao Can- nizzaro, 1826-1910)가 물리적 분자와 화학적 분자의 구분은 필요 없다는 의견을 냈습니다. 다음으로 뷔르츠가 발 언권을 얻어 자신은 케쿨레의 의견에 동의하지만, 이 문제 는 당장 결론을 낼 수 없으니 추후에 더 논의해 보자고 말 합니다. 이어 밀러 (William Miller, 1817-1870)가 두 번째 질문에 대한 의견을 제시합니다. 그는 단순한 원자들과 복합 물질의 원자들을 구분해야 하므로 “복합 원자”라는 표현은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여러 의견을 제시했지만 아무런 결론을 낼 수 없었고, 총회는 거기에서 마무리되었습니다.

총회 직후 위원회가 다시 모였습니다. 케쿨레는 다음 총회에서는 표기법을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화학식 내의 기호가 일정한 의미를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데에 동의하였습니다. 많은 토론이 오고 간 끝에, 결국 다음 질문 하나를 결정하였습니다. “최근 과 학의 발전을 반영할 수 있도록 일부 원자량을 두 배로 하는 화학 표기법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여기서 일 단 위원회는 폐회하였고, 같은 날 늦은 시간 한 번 더 모였습니다. 여기서 케쿨레는 어떤 원자량을 쓰는 것이 좋은지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뒤마는 베르셀리우스의 원자량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했고, 뷔르츠 역시 여기에 동의하였습니 다. 하지만 다른 반대 의견이 제시되었고, 계속해서 논의 는 평행선을 달렸습니다. 결국 위원장과 위원회 서기들이 총회 때 논의될 질문을 정리하는 것으로 결정하였습니다.

셋째 날 총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위원회에서 준비한 질 문은 다음 세 가지였습니다.

칸니차로가 일어나 두 번째 질문에 대해 반대 의견을 피력하였습니다. 그는 최근 게르하르트가 세운 업적[참고문헌 8]을 칭송하며, 뒤마가 개발한 기체 밀도 측정 실험의 정밀성과, 그 데이터에 기반한 게르하르트의 이론이 얼마나 합리적인지 설명하였습니다. 그는 이어 아보가드로의 원리가 가지는 중요성을 피력하며, 베르셀리우스의 체계는 아보가드로의 원리를 고려하지 않았으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 하였습니다. 그는 게르하르트의 체계를 모두 받아들이고 이에 따라 원자량도 수정해서 사용하자는 결론을 내립니다. 칸니차로의 발언이 끝나자 많은 사람들이 너도 나도 의견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콥(Hermann Kopp, 1817- 1892)은 이러한 다양성을 볼 때 투표로 하나의 안을 결정 하지 말고 각자의 자유를 존중하자는 발언을 했고, 이 발언은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얻습니다. 이후 세 번째 질문과 관련하여 취소선을 쓰는 것이 어떠한가에 대한 논의가 짧게 있었고,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못한 채 좌장인 뒤마가 셋째 날 총회의 폐회를 선언하였습니다.

칼스루헤 회의는 성공적이었을까요? 회의를 주최한 세 사람의 목적을 생각해 보면 거의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자유 토론을 통해 결론을 내리는 것은 고사하고, 원래 계 획대로 투표를 하는 것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주제를 많이 다룬 것도 아니었습니다. 유력한 화학자들 중에 리비히나 뵐러처럼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게다가 회의장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즉흥적으로 길게 의견을 제시 했고, 결국 토론자들 중심으로 회의를 체계적으로 운영한 다는 계획도 다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회의의 소득이 있다면, 그저 서로의 입장 차이만 확인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회의에 참석했던 젊은 화학자들에게는 다른 의미로 이 회의가 의미 있는 경험이었습니다. 칼스루헤 회의의 마지막 총회에서 흥미로운 사건이 하나 발생합니다. 사실 칸니차로는 자신의 주장을 이미 2년 전에 논문으로 정리하여 출판한 바 있습니다.[참고문헌 9] 칸니차로의 추종자였던 파베시(Angelo Pavesi)라는 이탈리아 화학자가 이 논문 복사본을 여러 부 준비해 회의장에서 나누어 주었습니다. 당시 서른 살이었던 마이어(Lothar Meyer, 1830-1895)는 회의를 마치고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이 논문을 읽었고, 이후에 몇 번 더 정독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평을 남기죠. “내 눈에서 비늘이 벗겨진 것처럼, 의심이 사라지고 평화로운 확신의 느낌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칸니차로의 연설을 감명 깊게 들은 젊은 화학자가 한 명 더 있었습니다. 당시 26세의 멘델레예프(Dmitri Mendeleev, 1834- 1907)였죠. 그는 회의 직후 스승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 회의의 내용을 요약하면서 칸니차로에 대한 찬사를 남깁니다. 칼스루헤 회의에서 칸니차로의 주장이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그의 이론은 이후 젊은 화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마이어를 감동시킨 칸니차로의 논문은 다음과 같은 구조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칸니차로는 역사를 되짚어 가면서 논리를 만들어갑니다. 먼저 게이뤼삭, 아보가드로, 앙페르를 소개하면서 이들이 알려진 실험 결과로부터 논리적인 가설을 만들어냈다고 소개합니다. 즉, 동일한 압력과 부피에서 같은 부피의 기체는 기체의 종류와 상관없이 같은 수의 분자들을 포함한다는 가설입니다. 칸니차로는 베르셀리우스가 자신의 전기적 이원론에 집착하느라 아보가드로의 이론을 무시했다고 비판합니다. 칸니차로는 동일한 온도와 압력 조건에서 다양한 기체 물질의 밀도를 측정한 값에 아보가드로의 이론을 적용하여 분자량을 계산하였고, 이것이 그간 학계에서 다른 방식으로 계산한 값들과 일치한다는 것을 보였습니다. 심지어 비교적 단순한 무기화합물 뿐 아니라 복잡한 유기화합물들에 대해서도 동 일한 결과를 얻었습니다.[참고문헌 10]

이렇게 칸니차로는 아보가드로의 이름을 부활시키는데성공합니다. 하지만 이전[참고문헌 11]에 논한 적 있듯이, 돌턴과 동시 대인인 아보가드로가 이후 50년 동안 높은 평가를 받지 못 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참고문헌 12] 아보가드로는 베르톨 레-게이뤼삭으로 이어지는 학문적 계보를 따라 부피를 중심으로 화학 반응의 단위 입자를 생각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이 접근법은 기체에만 적용할 수 있는 것이었고, 아 보가드로는 무리해서 액체와 고체 시스템에도 자신의 이론을 적용하고자 했습니다. 불행히도 당시의 측정 정확도는 정밀한 데이터를 줄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그가 제시한 증기 밀도 데이터는 참값의 60%에서 800%까지 들쭉날쭉한 오차를 보였죠. 따라서 아보가드로의 이론은 실제 분자량 결정에는 큰 쓸모가 없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모든 기체가 종류와 상관없이 동일한 압력과 온도에서 동일한 부피 속에 동일한 수의 입자를 갖는다”는 가정이 아보가드로 당시에는 합리적인 근거가 없는 가설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결국 아보가드로는 동시대 화학자들 에게 큰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보가드로가 인정받지 못했다고 해서 아보가드로가 제시한 개념이 완전히 무시된 것은 아닙니다. 화학 반응에서 기체 반응물과 기체 생성물의 부피 사이에 정수비가 성립한다는 사실은 실험적으로 확립된 명백한 사실이었고, 이는 아보가드로 당시부터 원자량 결정에 널리 활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보가드로는 원자와 분자를 구분하지 않았지만, 1830년대와 40년대에 원자와 분자의 구분이 등장하면서 아보가드로의 가설이 관심을 받게 됩니다.[참고문헌 13] 원자와 분자의 구분에 기초하여 원자량 계산 작업을 체계적으로 수행한 것이 게르하르트였고, 칸니차로는 그 게르하르트의 작업을 이어받았습니다. 칸니차로의 시대가 되면 실험적 정확도가 꽤 높아져서 아보가드로의 이론이 잘 성립한다는 것을 실험적으로도 보일 수 있었습니다. 특히 칸니차로의 연설에서 등장했던, 뒤마의 증기 밀도 측정 기법이 큰 역할을 수행했죠.“화학은 1811년 혹은 1821년의 아보가드로에게는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었고, 1858년의 칸니차로에게는 준비가 되어가고 있었다.” [참고문헌 14]

준비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은 화학만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온도와 압력에서 같은 부피 안에는 같은 수의 입자들이 들어 있다”는 가설은 분자 운동론을 통해 증명할 수 있는데, 바로 그 분자 운동론이 칸니차로 시대에 형태를 갖춰 나가고 있었습니다.[참고문헌 15] 18세기부터 유체역학을 이론적 기반으로 삼아 기체의 성질을 분석하려는 시도가 여럿 있었습니다.[참고문헌 16] 그러다 1843년, 워터스턴(John Waterston, 1811-1883)이라는 스코틀랜드 물리학자가 입자들을 통계적으로 처리하여 열역학적인 물리량들을 계산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는 1845년과 1851년 후속 논문을 출판하여 균등 분배 원리(equipartition theorem) 등을 제안했죠. 이 후 클라우지우스(Rudolf Clausius, 1822-1888)의 1858년 논문, 맥스웰(James Maxwell, 1831-1879)의 1859년 논문 등을 통해 분자 운동론이 엄밀한 이론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고, 이후 볼츠만(Ludwig Boltzmann, 1844- 1906)이라는 걸출한 물리학자의 활동으로 분자 운동론이 완성되죠. 칼스루헤 회의의 배경 시기와 잘 겹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칸니차로는 같은 이탈리아 출신 선배 화학자인 아보가드로가 억울하게 무시당했다고 생각하고 그를 구제 해주고자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동기가 무엇이든 칸니차로는 아보가드로의 가설에 기반하여 체계적으로 원자량과 분자량을 결정할 수 있음을 보이는 한편, 베르셀리우스와 그 추종자들의 고정관념 때문에 아보가드로가 학계에서 매장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칼스루헤 회의에 참석한 젊은 화학자들은 칸니차로의 연설과 논문으로부터 큰 감명을 받았고, 칸니차로의 이론과 더불어 그가 제시한 (역사적으로 부정확한) 배경 설명은 이후 화학계에 계속해서 영향을 미쳤습니다. 칼스루헤 회의는 그 목적을 이루지 못했는지 모르겠지만, 칸니차로는 성공을 거둔 셈입니다.





  1. 이  내용은  다음  글들에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Bernadette  Bensaude-Vincent,“Languages  in  Chemistry”in  The  Cambridge  History  of  Science,  Volume  5: The Modern Physical and Mathematical Sciences, ed. Mary Jo Nye (Cambridge, United Kingdom: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 Clara de Milt,“Carl Weltzien and the Congress at Karlsruhe,”Chymia 1: 153 169 (1948); Clara de Milt,“The Congress at Karlsruhe,”Journal of Chemical Education 28 (8): 421-425 (1951); Aaron J. Ihde,“The Karlsruhe Congress: A Centennial Retrospect,”Journal of Chemical Education 38 (2): 83-86 (1961).

  2. 자세한  논의는  다음  글  참조.  Mi  Gyung  Kim,“The  Layers  of  Chemical  Language,  II:  Stabilizing  Atoms  and  Molecules  in  the  Practice  of  Organic  Chemistry,” History of Science 30 (4): 397-437 (1992).

  3. 수소와 산소가 반응하여 물을 만드는 반응(2H2 + O2 → 2H2O)도 두 부피의 수소와 한 부피의 산소가 반응하여 두 부피의 물을 만들어냅니다.

  4. 현대의 분자식은 CH3COOH로 C2H4O2에 해당하지만, 탄소의 원자량을 6, 산소의 원자량을 8로 보면 이 식이 얻어집니다.

  5. Michael W. Monnich,“Fur̈unsere schone Wissenschaft eine Einigung anzubahnen,” Nachrichten aus der Chemie 58: 539-543 (2010).

  6. 뒤마와 분젠은 참석했지만 리비히, 뵐러, 윌리엄슨, 호프만은 불참하였습니다.

  7. 공식 기록에 이름이 남은 사람은 127명입니다.

  8. 구체적인 내용은 뒤에서 소개하겠습니다.

  9. Cannizzaro,“Sunto di un corso di filosofia chimica,” Il nuovo cimento, vii (1858).

  10. Harold Hartley,“Stanislao Cannizzaro, F.R.S.(1826-1910) and the First International Chemical Conference at Karlsruhe in 1860,” Notes and Records of the Royal Society of London 21 (1): 56-63 (1966).

  11. “화학사 돌아보기 13. 원자설의 여파”,『화학세계』2023년 7월호.

  12. Nicholas Fisher,“Avogadro, the Chemists, and Historians of Chemistry: Part 1,” History of Science 20 (2): 77-102 (1982); Alan Chalmers,“From Avogadro to Cannizzaro: The Old Story”in The Scientist’s Atom and the Philosopher’s Stone (Dordrecht, Netherlands: Springer Dordrecht, 2009).

  13. 즉, 아보가드로는 무시된 것이 아닙니다. 아보가드로의 논문들은 아보가드로 당시부터 계속해서 화학 논문에 인용되었습니다. 보통 부정적인 맥락으로 인용되었다는 게 문제  였을 뿐입니다.

  14. Fisher, 앞의 글, 84쪽.

  15. C. Truesdell,“Early Kinetic Theories of Gases,” Archive for History of Exact Sciences 15 (1): 1-66 (1975).

  16. 오일러(Leonhard Euler, 1707-1783), 베르누이(Daniel Bernoulli, 1700-1782)와 같이 쟁쟁한 수학자들이 이 문제를 다뤘습니다.





최 정 모 Jeong-Mo Choi

 

  • 한국과학기술원 화학과, 학사(2003.3 - 2011.8)

  • Harvard University 과학사학과, 석사(2011.9 - 2015.5, 지도교수 : Naomi Oreskes)

  • Harvard University 화학 및 화학생물학과, 박사(2011.9-2016.5, 지도교수 : Eugene I. Shakhnovich)

  • Washington University in St. Louis, 박사 후 연구원(2016.8 - 2019.4, 지도교수 : Rohit V. Pappu)

  • 한국과학기술원 자연과학연구소, 연구 조교수(2019.6 - 2020.8)

  • 부산대학교 화학과, 조교수(2020.9 -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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