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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빛낸 화학자 ⑮

김동한(金東漢) 포항공과대학교 교수(1934~)



김동한 교수님은 1934년 일제 강점기 중에 태어나셔 서 6.25 전쟁을 겪는 등 나라가 어려운 시기에 학창시절을 보냈다. 소학교(초등학교)에서는 일본인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았고, 일본어만 사용했다. 고등학교 1년은 서울에서 기차 통학을 하면서 공부를 하였고, 도중에 6.25 전쟁으로 공부를 중단했다가 휴전 이후에는 수원에서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미군부대에서 일을 하시면서 고교 시절을 보내셨다. 그럼에도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서울문리대 화학과에 합격하셨다. 대학을 졸업하시고 국방부과학연구소에서 육군 이등병 연구원으로 근무하시는 중 당시 상공부가 주관한 충주 비료공장 운전요원 선발시험에 합격하셔서 대통령 특령으로 제대하시고 충주에 내려가셨다. 미국과 스위스에서 공장 시운전을 위한 기술훈련을 받고 돌아오셔서 시운전에 참여하셨다. 충주 요소비료공장은 6.25 후 심각한 식량 사정에 대처하여 미국이 지워준 공장으로 우리나라 중화학공업의 시조이다.

1961년 요소비료가 제대로 생산됨에 선생님은 Univ. of North Carolina 화학과 대학원의 입학허가를 받고 미

국 유학길에 오르셨다. 한국에서는 들어보지도 못한 유기정성분석화학의 TA(Teaching Assistance)로 학부 학

생들의 실험을 가르치시면서 학업을 시작하셨는데, 6.25 전쟁 전후로 열악한 환경에서 화학을 제대로 배우지 못

한 탓에 처음에는 크게 고생하셨으나 4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으셨다. 김동한 교수님은 당시를 회상하시면서 돌

아올 여비가 없어서 학업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셨다. 박사학위 논문 연구는 3명의 박사학위 과정 선배

들이 합성에 실패한 비타민B의 일종인 엽산의 이성질체를 합성하는 것이었다. 학위과정 동안 이 이성질체를 모

두 합성하여 동료들을 놀라게 하셨다고 한다. 대학원 과정에서 수행한 연구 결과를 Chem. Ind. (폐간되어 현재

는 없음)에 발표했는데 지도교수는 자기는 기여한 바가 전혀 없으니 학생들만을 저자로 발표하라고 했다. 잘 알

려진 화합물의 분자구조가 오류라는 것을 밝히시고 새 구조식을 제시하였고, 가난한 나라에서 온 보잘것없는 학

생이 학생의 신분으로 학술지에 논문을 냈다는 사실이 당시 학과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박사과정을 마친 뒤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 후 연구원을 시작할 예정이었으나, 박사 지도교수님의 권유로 당

시 세계적 제약회사인 Wyeth Laboratories Inc. (2009년 화이자에 합병되었음)에 입사하여 신약 개발 연구를

시작하게 된다. Wyeth에서 20년간 근무하는 동안 69건의 특허와 3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회사를 떠나기

전 5년간 개발에 참여한 혈압 강하제 개발에서는 직접 설계한 화합물이 임상 시험에까지 진전되어 큰 기대를

하였지만, 예상치 못한 부작용으로 중도에서 멈추게 되었다. 그 당시 혈압 강하제는 가장 뜨거운 신약 개발 분

야였고, 당시 임상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약으로 시판되었다면 교수님은 전혀 다른 삶을 사셨을 것이라고 회고

하셨다.

제약회사에 근무하시면서, 유기반응의 분자차원 이해에 있어서의 새로운 개념인 전자 밀기(Electron Pushing)

에 관한 Breslow 교수의 “Organic Reaction Mechanism”을 장세희 교수와 공동으로 번역해서 1968년에

출판하셨다. 이는 한국의 유기화학을 국제수준으로 제고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국제 학술지인 Journal of Hetorocyclic Chemistry의 편집자문위원으로 위촉을 받고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시면

서 헤테로고리화학 발전에 기여하셨다.

김동한 교수님의 업적에서 포항공대 화학과 설립에의 기여는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교수님은 미국에 계시

는 동안 재미한국과학기술자협회의 임원 및 회장을 역임하시면서 많은 재미 한국인 과학자들과 친분을 쌓아 오

셨다. 그 당시에 김호길 박사와의 인연도 시작되었다. 포항제철의 후원으로 포항공대가 설립될 당시 김호길 초대

총장의 간곡한 부탁으로 1986년 9월 귀국하여 김호길 총장과 함께 포항공대 설립에 참여하고, 화학과를 설립

하게 된다. 사실은 당시 김호길 초대 총장께서 재미과학기술자협회(KSEA) 필라델피아 지부 모임에서 김동한 박

사가 포항에 오기로 했다고 일방적 발표를 한 것이 시작이 되어 결국 반강제로 포항으로 오시게 되었다. 어려움

속에 신설된 화학과를 국내 최고 수준으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시는 중에 1991년 생리분자과학연구센터

를 설립하시고, 같은 해에 JACS에 단신 속보로 새로운 효소억제제 개발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셔서 국내 화학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셨다. 이 연구는 효소억제제가 효소의 활성부위에 작용하여 공유결합을 형성함으로써 효소

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시키는 억제제를 합리적으로 설계하는 내용의 연구로서 효소억제제 개발에 새로운 접근법

을 제시하였다. 다음 해에는 럭키중앙연구소의 김상수 박사팀과의 공동연구를 통해 이 억제제가 효소에 결합한

구조를 밝히시고, 또 한 번 JACS 에 단신 속보로 발표하셨다. 이 연구는 효소의 구조를 기반으로 효소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시키는 억제제를 디자인하여 보다 높은 효능의 약물을 개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1999년

에는 포항공대 화학과에 연구년으로 오셨던 진직 교수와의 공동연구로 Nature에 논문을 발표하였다. 포항공대

화학과 설립 초기의 이러한 성과는 향후 학과 발전에 기틀을 마련하여 연구 센터 내의 동료 교수들의 꾸준한 연

구 성과를 이끌어 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김동한 교수님께서 포항공대 화학과에 재직하신 18년 동안 10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시고, 두 권의 신약개발 입문서를 저술하셨다. 특히 “신약개발을 중심으로 한 의약화학”과 “창약화학”, 이 두 권의 저서는 교수님의 오랜 기간의 신약 개발 경험이 묻어난 중요한 저서로 평가된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9명의 박사와 26명의 석사 논문을 지도하셨으며 11명의 박사 후 연구원이 지도를 받았다. 재직 기간에 이태규 학술상과 상허재단의 상허대상(학술부문)을 수상하셨으며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의 종신회원으로 추대되셨다.

교수님께서 포항공대 화학과에 재직하시는 동안, 학과의 창립 멤버이시고, 가장 연장자이심에도 늘 후배 교수

들이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하시고 학과 발전을 위해 헌신하셨다. 그리고, 미국에서 20년이 넘는 기

간 동안 근무하신 Weyth Laboratory Inc. 을 떠나 포항공대 설립에 참여하신 때가 만 52세이셨고, 위에서 언급

한 포항공대 화학과에서의 업적이 50대에 전혀 기반이 없는 환경에서 이루어낸 업적이라는 점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2019년에는 80대 중반의 연세에도 “국외에서 본 19세기 말의 동아시아와 김홍집”이라는 역사

서를 저술하실 정도로 아직도 글을 쓰시고 연구하시는 일에 대한 열정이 여전하심을 알 수 있다. 교수님의 학자

로서의 열정과 노력, 후배 연구자들에 대한 배려, 50대에도 새로운 삶을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 정신은 후학들에

게 훌륭한 귀감이 된다.


서강대학교 화학과 이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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