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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율표


1860년대는 유기화학의 전성기였습니다. 이제 유기 화합물들은 수소, 산소, 질소, 탄소를 원자가에 맞춰 레고 블록처럼 잘 연결하면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유기화 학자들은 합성을 통해 싸고 질 좋은 염료처럼 인류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화학자들은 유기화학의 발전에 열광했고, 야망 있는 젊은 화학자들은 앞다투어 유기화학 연구에 뛰어들고 있었죠. 하지만 1860년대가 끝나갈 때쯤, 전혀 다른 방향에서 화학의 흐름이 바뀝니다. 바로 오늘날 화학의 상징으로 널리 사용되는 “주기율표”가 발명된 것입니다. 이 주기율표는 비슷한 시기에 최소 여섯 명(!)의 화학자들에 의해 제안됩니다. 이는 시대적으로 1860년대가 주기율표가 등장할 만 한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글에서는 그 배경과 더불어 주기율표 등장의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참고문헌 1]

1860년 칼스루헤 회의 이후 화학계에서는 “원자” 와“분자”개념이 정리되기 시작했습니다. 칸니차로와 그를 따르는 젊은 화학자들은 “아보가드로의 법칙”을 통해 분자를 정의하는 방식을 선택하였고, 이와 더불어 당시까지 발전한 질량분석법을 이용하여 각 원자의 원자량을 매우 정확하게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케쿨레가 이끄는 구조 이론의 성공은 각 원소가 갖는 독특한 성질이라 할 수 있는 원자가 개념을 화학계에 널리 퍼뜨렸습니다. 여기에 1860년에 발표된 분광분석법이 원소를 확인하고 새로운 원소를 발견하는데 큰 역할을 수행합니다. 종합하자면, 1860년대를 거치면서 “원자”의 여러 성질이 논란의 여지 없이 명확하게 정량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에 1860년대 말에 주기율표 개념이 등장할 수 있었습니다. 뒤집어 말하자면, 1860년대 이 전의 화학자들은 주기율표를 만들고 싶어도 만들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되베라이너(Johann Wolfgang Dobereiner, 1780-1849)를 살펴보죠. 그는 1817년 칼슘과 바륨의 원자량 평균이 스트론튬의 원자량과 유사하다는 보고를 했고, 1829년 이를 확장하여 원자량이 등차 수열을 이루는 세 개의 원소쌍이 있다는 삼원소(triad) 개념을 제안하여 주기율표의 선구자로 여겨집니다. 되베라이 너는 이로부터 더 일반적인 법칙을 찾아내고자 했지만, 그에게는 1860년대의 화학이 없었기에 주기율표를 만들어 낼 수 없었습니다.[참고문헌 2]

화학사학자들은 1860년대에 주기율표를 “발견”한 사람을 여섯 명 정도로 봅니다.[참고문헌 3] 이들은 서로의 연구에 대해 몰 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주기율표의 발견자로 기념되어야 할까요? 오늘날에는 거의 이견 없이 멘델 레예프를 주기율표의 발견자로 기립니다만, 100년 전만 해도 그 문제는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 문제 는 과학사학계에서 일찍부터 관심을 끈 문제였고, 과학계 의 대표적인 우선권 문제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는 각 사람의 업적을 간단하게 소개하고[참고문헌 4] 멘델레예프의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여섯 명 중 하나는 아니지만, 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뒤마의 연구를 먼저 소개하겠습니다. 뒤마는 1857 년부터 1859년까지 여러 논문을 통해 많은 원소들의 원자량이 a+8n이라는 간단한 식으로 표현될 수 있음을 보였습니다.[참고문헌 5] 여기서 a는 어떠한 정수이고, n은 1, 2, 3, …으로 올라갑니다. a에 따라 원소들을 분류할 수 있다는 것이 뒤마의 아이디어였습니다. 하지만 뒤마가 이를 표의 형태로 정리하지는 않았기에 주기율표의 발견자로는 여겨지지 않습니다. 드샹쿠르투아(Alexandre-Emile Beguyer de Chancourtois, 1820-1886)는 1862년 뒤마의 아이디어 를 확장하여 원자량 사이의 관계를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는 “표”를 최초로 만들어냈습니다.

뉴랜즈(John Newlands, 1837-1898)는 뒤마의 아이디어에 관심을 갖고 원자들의 원자량 사이의 패턴을 연구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숫자가 정확하게 맞지 않았기 때문에 고민이 많았죠. 그는 1864년 칸니차로의 원자량을 사용하면 숫자가 훨씬 더 정확하게 맞는다는 사실을 깨달 았습니다. 게다가 분광기를 통해 새로 발견된 원소인 세슘, 루비듐, 탈륨, 인듐도 본인이 찾은 규칙에 맞아들어갔습니다. 그는 1865년 원소들을 원자량대로 나열하면 여덟 개마다 비슷한 성질의 원소가 등장한다는 “옥타브의 규칙”을 발표하면서 이를 표현하는 표를 첨부합니다[그림 1].

오들링(William Odling, 1829-1921)은 되베라이너의 삼원소 개념을 확장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1864년 칸니차로의 원자량을 받아들이면서 같은 삼원소쌍에 포함된 각 원소의 원자량은 약 16 정도 차이를 보인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여기에 원자가 개념을 사용하여 같은 원자가를 갖는 원소들을 같은 줄에 배치하였고, 이로부터 주기율표를 도출하여 1865년 발표합니다. 힌리히스(Gus- tavus Detlef Hinrichs, 1836-1923)는 뒤마의 아이디어 에서 출발하여 1867년 비슷한 주기율표를 만들었습니다. 마이어(Lothar Meyer, 1830-1895)는 멘델레예프와 비슷한 세대로, 멘델레예프와 같이 칼스루헤 회의에 참석 했던 젊은 화학자였습니다. 그는 칸니차로의 체계를 일찍 부터 받아들였고, 뒤마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하여 1864년 자신의 교과서 속에서 주기율표를 제안하였습니다[그림 2]. 그의 주기율표는 원자가가 같은 원자들 사이에는 원자 량이 일정한 크기만큼 변화한다는 개념을 담고 있었습니 다. 다만 그는 주기율표로부터 일반적인 법칙을 끌어내는 것은 다소 조심스러워 했습니다. 이후에도 여러 번 주기 율표를 개정한 그는 멘델레예프가 주기율표를 발표한 후 마지막까지 멘델레예프와 우선권 논쟁을 벌였습니다.[참고문헌 7]

이들 각 사람의 업적을 살펴보면 왜 멘델레예프가 주기율표 발견자로 추앙받는지 의아해집니다. 이들 모두 “표” 의 형태로 주기율 법칙을 발표하였고, 세부 사항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주기율표를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과학사학자 들은 멘델레예프가 불공정하게 공을 독식했다고 생각합니 다. 사실 이렇게 여러 버전의 주기율표가 1860년대에 등 장할 수 있었던 것은 다 그전까지 쌓여온 화학 지식 때문 이었습니다. 이 지식을 종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 들이라면 누구나 주기율표 개념을 생각해낼 수 있었던 것 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특히, 주기율표 자체보다는 그 주기율표의 활용 면에서 차이 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이클 고딘(Michael Gordin) 이라는 화학사학자는 현대의 관점에서 주기율표가 가져야 하는 중요한 특징 여섯 가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고, 이들을 모두 만족시킨 주기율표는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 뿐이었다고 말합니다.[참고문헌 9]

자, 이제 멘델레예프 이야기를 해봅시다. 그는 상트페 테르부르크 대학교에서 화학을 전공하여 1856년 석사 학위를 받은 후, 1857년 같은 학교의 강사로 임용됩니다. 이 당시 그는 이미 로랑과 게르하르트가 개혁한 시스템을 받아들여 사용하고 있었고, 물질의 분류에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는 1859년부터 1860년까지 유럽을 방문하여 액체 유기물의 응집 현상을 연구하였고, 1860년에는 칼 스루헤 회의에 참석하여 칸니차로의 유명한 연설을 들었 습니다. 1861년 러시아로 돌아온 멘델레예프는 유기화학 교과서를 집필하여 출판합니다. 이 책은 최신 이론이라 할 수 있는 칸니차로의 이론을 잘 담아내고 있었으며, 러시 아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듬해인 1862년 상트페테 르부르크 과학원에서는 이 책을 높이 평가하여 멘델레예 프에게 데미도프 상(Demidov Prize)을 수여하였습니다. 그는 유기화학 교과서뿐 아니라 다양한 화학 교과서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1862년에 일반화학 교과서를 번역하였고, 1863년에 유기화학 교과서의 개정판을 냈으며, 1864년에 분석화학 교과서를 번역하였습니다. 이는 당시 러시아 화학계의 수요를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19세기에 러시아를 통치한 여러 황제들은 정치적으로 보수적 이건 개혁적이건 유럽 국가들을 따라잡기 위해 과학과 교육에 많은 투자를 하였습니다. 특히 크리미아 전쟁(1853- 1856)에서 유럽의 전투력을 맛본 러시아는 대대적인 교육 시스템 개혁을 시행합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러 시아 학계도 유럽의 최신 연구를 따라잡는 한편 학계와 산 업계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길러내야 한다는 압력을 받고 있었습니다.[참고문헌 10] 멘델레예프도 이러한 흐름에 동참한 것입니다.

집필과 번역으로 바쁜 중에도 멘델레예프는 1865년 알코올 수용액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같은 해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서 교수로 일하기 시작합니다. 1867년 스승의 뒤를 이어 일반화학 석좌교수로 임명된 그는, 일반화학 교과서를 집필하면서 원소들을 체계적으로 설명할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는『화학의 원리(Osnovy khimii)』1부에서 원자가를 기준으로 수소, 산소, 질소, 탄소, 그리고 할로젠 원소들을 소개하였고, 2부를 시작하면서 알칼리 금속과 알칼리 토금속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그 이후 구리 등 원자가가 여럿 존재하는 것 처럼 보이는 금속들을 만나면서 난관에 봉착합니다. 그는 이 시점에 원자량으로 시선을 돌렸고, 여기서 영감을 얻어 주기율표를 만들게 됩니다[그림 3].[참고문헌 11] 이 날짜는 1869 년 2월 17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최초의 주기율표를 발표한 이후 멘델레예프는 이 주기율표를 확장하고 체계화하는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그는 세상을 뜨는 날까지 여러 차례 주기율표를 개정하여 발표 하였고, 주기율표와 여러 화합물의 물리적 성질, 화학적 성질을 연결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특별히 주기율표를 기준으로 그 때까지 알려진 원소들의 원자량을 교정하였고, 역시 주기율표를 기준으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원소들과 그들의 성질을 예측하였습니다.[참고문헌 13]  1871년 발표한 주 기율표에서 멘델레예프는 다양한 원소를 예측하였고, 그 중 에카붕소(원자량 44), 에카알루미늄(원자량 68), 에카 실리콘(원자량 72)에 대해서는 상세한 성질까지 예측합니다.[참고문헌 14,15]

1875년 8월 27일 드부아보드랑(Lecoq de Boisbau- dran, 1838-1912)은 분광기를 이용하여 새로운 원소인 갈륨을 발견하였음을 보고합니다. 소식을 들은 멘델레예 프는 이 원소가 에카알루미늄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드부아보드랑은 이 때까지 멘델레예프의 연구에 대해 전혀 몰랐습니다. 그래서 이에 관해 흥미로운 이야기 한 가지 가 전해 옵니다. 드부아보드랑은 처음에 이 원소의 밀도가 15℃에서 4.7 g/mL라고 측정하였고, 이는 멘델레예 프의 예측값 5.9-6.0 g/mL에서 벗어나는 결과였습니다.

멘델레예프는 즉각 편지를 보내 자신의 예측값을 알려 주었고, 드부아보드랑은 조심스럽게 밀도를 재측정하여 1876년 5.935 g/mL라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이 결과를 들은 멘델레예프가 얼마나 의기양양했을지 상상이 되시죠? 갈륨이 발견되기 전까지 멘델레예프의 연구는 주기율표 연구를 해오던 몇 명의 화학자들 사이에서만 회자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갈륨의 발견으로 화학자들은 멘델레 예프의 주기율표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고, 1879년 닐슨 (Lars Fredrik Nilson, 1840-1899)이 에카붕소에 해당 하는 스칸듐을 발견한 뒤에는 이 주기율표의 위상이 더욱 확고해집니다. 마침내 멘델레예프는 마이어와 함께 1882 년 영국왕립학회에서 수여하는 데이비 메달(Davy medal)을 받습니다.

두 개의 새로운 발견으로 어떤 자연법칙이 “증명”될 수 있을까요? 최소한 멘델레예프의 경우에는 갈륨과 스칸듐이 발견되면서 많은 지지자를 얻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주기율 법칙이 확실하게 증명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화학자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멘델레예프에게는 다행스럽게도, 1880년대를 거치면서 주기율표는 여러 번 자신의 가치를 증명합니다. 예를 들어 그전까지 우라늄의 원자량은 60 혹은 120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멘델레예프는 주기율표에 기반하여 240이라는 값을 제시하였고, 결국 이 값이 1882년 실험으로 확인됩니다. 베릴륨의 원자량은 화학자에 따라 9 혹은 14를 주장하고 있었고, 멘델레예프는 9를 지지하였습니다. 각 입장을 뒷받침하는 실험 결과가 엇갈려서 출판되었지만, 결국 1884년 멘델레예프의 예측이 맞았음이 확실하게 입증되었습니다. 그리고 1886년에는 윙클러(Clemens Winkler, 1838- 1904)가 멘델레예프가 예측한 에카실리콘에 해당하는 저마늄을 발견하였고, 그 성질이 예측과 일치함을 다시 한 번 보였습니다. 이러한 사례가 쌓이면서 1880년대 말이 되면 주기율표는 의심의 여지 없는 “과학적 법칙”의 자리에 오릅니다.

오늘 글에서는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가 탄생한 배경과 그 수용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주기율표는 한 천재가 영감을 받아 순식간에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거기 필요한 여러 요소들이 차곡차곡 쌓인 후에 만들어진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고, 발표되자마자 바로 수용된 것이 아니라 처음 발표된 시점에서 20년 정도의 시간을 들여 오랜 검증 과정을 거쳤음을 보았습니다. 같은 시기, 화학계에서는 원자가 실재하는 존재인지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오늘의 주인공인 멘델레예프는 원자가 실재한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주기율표와 원자 설은 공존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까지 했죠.[참고문헌 16]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정말 황당한 주장인데요, 도대체 당시 화학자들 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요? 다음 시간에는 이 이 야기를 다뤄보겠습니다.




최 정 모 Jeong-Mo Choi


•  한국과학기술원 화학과, 학사(2003.3 - 2011.8)

•  Harvard University 과학사학과, 석사(2011.9 - 2015.5, 지도교수 : Naomi Oreskes)

•  Harvard University 화학 및 화학생물학과, 박사 (2011.9-2016.5, 지도교수 : Eugene I. Shakhnovich)

•  Washington University in St. Louis, 박사 후 연구 원(2016.8 - 2019.4, 지도교수 : Rohit V. Pappu)

•  한국과학기술원 자연과학연구소, 연구 조교수(2019.6 - 2020.8)

•  부산대학교 화학과, 조교수(2020.9- 2024.8), 부교수(2024.9- 현재)






  1. 이  내용은  다음  글들에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Hans Werner  Schutt, “Chemical  Atomism  and  Chemical  Classification” in  The Cambridge History of Science, Volume 5: The Modern Physical and Mathematical Sciences, ed. Mary Jo Nye (Cambridge, United Kingdom: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 Stephen G.  Brush,“The  Reception  of  Mendeleev’s  Periodic  Law  in  America  and  Britain,” Isis 87,  595-628  (1996);  Michael  D.  Gordin,“The  Textbook  Case  of  a Priority Dispute: D. I. Mendeleev, Lothar Meyer, and the Periodic System,”in Nature Engaged: Science in Practice from the Renaissance to the Present,

    eds. Mario Biagioli and Jessica Riskin (New York, NY: Palgrave Macmillan, 2012); Masanori Kaji,“Mendeleev’s Discovery of the Periodic Law: the Origin and the Reception,” Foundations of Chemistry 5, 189-214 (2003).

  2. Don C. Rawson,“The process of discovery: Mendeleev and the periodic law,” Annals of Science 31 (3), 181-204 (1974).

  3. Jan W. van Spronsen,“The Prehistory of the Periodic System of the Elements,”J. Chem. Edu. 36 (11), 565-567 (1959); Heinz Cassebaum and George B. Kauffman,“The Periodic System of the Chemical Elements: The Search for Its Discoverer,” Isis 62 (3), 314-327(1971).

  4. 이하의 논의는 Cassebaum and Kauffman (1971)과 Gordin (2012)를 주로 참조하였고, 다음 책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150 Years of the Periodic Table, eds. Carmen J. Giunta, Vera V. Mainz, and Gregory S. Girolami (Cham, Switzerland: Springer Nature Switzerland, 2021).

  5. 이는 칸니차로가 개혁한 원자량을 받아들이면 a+16n으로 써야 합니다.

  6. Newlands,“On the Law of Octaves,”Chemical News 12, 83 (1865).

  7. J. W. van Spronsen,“The Priority Conflict between Mendeleev and Meyer,”J. Chem. Edu. 46, 136-139 (1969).

  8. Lothar  Meyer,  Die modernen  Theorien  der Chemie und ihre Bedeutung  fur die chemische  Statik (Breslau:  Maruschke  &  Berendt,  1864),  137.

  9. Gordin (2012), 60-61쪽.

  10. Loren R. Graham, Science in Russia and the Soviet Union: A Short History (Cambridge,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32-55.

  11. 이  과정에서  멘델레예프가“원소  카드”를  만들어  이리저리  배치하면서  주기율표를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역사성이  부족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Michael D. Gordin, “Paper Tools and Periodic Tables: Newlands and Mendeleev Draw Grids,” Ambix 65 (1), 30-51 (2018).

  12. D. I. Mendeleev, Periodicheskii Zakon. Klassiki Nauki, ed. B. M. Kedrov (Moscow: Izd. ANSSSR, 1958), 9.

  13. 멘델레예프의“예측”이 갖는 철학적 함의에 대해서 Brush (1996)를 참고하십시오.

  14. 에카(eka-)는 산스크리트어에서 1을 의미하는 접두사입니다. 2를 나타내는 접두사는 드비(dvi-), 3을 나타내는 접두사는 트리(tri-)로, 멘델레예프는 예측된 원소가 알려진 원 소로부터 몇 칸 떨어져 있는지를 이용해 예측된 원소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15. 이런 식으로 멘델레예프는 열 가지 원소를 더 예측했는데, 이 중에서는 다섯 개만 성공하였습니다. Philip J. Stewart,“Mendeleev’s Predictions: Success and Failure,” Foundations of Chemistry 21, 3-9 (2019) 참조.

  16. Gordin (2012), 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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