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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tune favors the prepared mind


<화학세계가 만난 화학자>에서는 대한민국 화학계에 공헌한 화학자와의 인터뷰를 소개해 드리고 있습니다.


이번 호에는 KAIST 김명자 이사장님을 모셨습니다. 이사장님은 화학을 전공하고 학계, 행정, 입법, 기업, 언론, NGO 등을 거치며 50여 년간 멀티플레이어로 일해 오셨습니다.

교수 출신으로 김대중 대통령 정부에서 환경부 장관(1999-2003년)에 임명되어‘헌정 최장수 여성장관’과‘국민의 정부 최장수 장관’의 기록을 남겼습니다. 또한 비례대표 국회의원(2004-2008년)으로 국방위원회에서 국방 R&D 강화와 병영문화 개선에 기여했습니다.

이후 계속 단체장을 맡으며 특히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KOFST) 50년 사상 최초의 여성 회장(2017-2020년)에 선출되어 과학기술계를 이끌었습니다. 기업 부문에서도 한국지속가능발전기업협의회(KBCSD) 회장, 민간 부문 대기업 이사회 의장 등을 지냈습니다. 2023년부터는 KAIST 이사장을 비롯해 이십여 개 직함으로 봉사하고 계십니다.

화학자로서 1970년대부터 과학기술 연구와 교육에 종사하며 과학기술 정책 수립과 추진, 과학기술 저술과 언론 활동, 과학기술의 대중화, 과학기술의 외연 확대여성 과학기술 인력의 사회 진출 등에서 일해 오셨는데, 이처럼 독보적 발자취를 남기고 계신 이사장님의 경험과 소회를 소개해 드립니다.

[모더레이터: 한순규 KAIST 화학과 교수]




1. 이사장님께서는 1966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화학과를 졸업하셨는데, 화학을 전공으로 택한 계기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다른 인터뷰에서 고등학교 시절 국어, 영어 등 문과 소질이 있었다고 하셨던데,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다시 화학을 전공하실 것 같으신지요? 또 진로선택의 고민을 가진 중고등학생들에게 어떤 조언의 말씀을 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옛날로 돌아간다면 다시 화학을 선택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결국 자신의 적성에 잘 맞고 가장 즐겁게 잘하는 일을 찾아야 하는데, 지금까지 화학의 스페셜리스트라기보다는 과학과 다른 분야의 융합이라고 할까, 제너럴리스트로 살고 있으니까요. 아마도 과학기술 분야(아마도 AI)를 선택할 것 같긴 한데, 결국 융합으로 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어릴 적부터 인생 목표나 포부가 컸던 사람이 아니고, 단지 공부를 많이 했으면 좋겠다는 학문적 허영심(?)이 있었을 뿐입니다. 대학 진학에서 자연계를 택한 건 당시 교환교수로 예일대학교에 계셨던 아버지의 말씀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1957년 소련의 스푸트닉 충격으로 과학교육혁명이 진행되면서 아시아계 유학생들에게 조교 장학금을 많이 주던 때였습니다.

화학을 진로로 선택함에 있어 여러 가지 장점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화학이 자연과학 분야 중에서도 응용성이 넓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화학은 이론 연구도 가능하고, 그것을 이용한 응용연구도 가능합니다. 또한 산업계에 바로 적용 가능한 학문이기도 합니다. 타 분야와의 융합연구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습니다. 최근 AI를 필두로 하여 전산학 관련 전공이 인기가 많은데 어느 특정 시기에 특정 전공이 인기 있는 사회적 흐름은 컨트롤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 나라의 의대 편중 현상은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임상치료에 치중된 현재의 의학 교육 및 연구로는 첨단 바이오 강국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2. 지금의 장관님을 있게 한데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누구인가요?


제가 학창시절부터 인문학적인 소질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과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고 좀 더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찾아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1971년 학위 끝낸 후 곧바로 귀국해 강단에 섰고 1980년대부터는 교양 과학사(科學史)를 가르쳤습니다. 문명사 속의 과학기술과 다른 분야 사이의 상호작용은 참 흥미로운 주제였습니다. 이 길로 들어서도록 인도해 준 선생님은 저보다 3년 후배인 서울대 김영식 교수(당시 화학과 소속)였습니다. 하버드대학에서 이학박사를 하고 프린스턴대학에서 문학박사를 받은 독보적인 배경의 존경할 만한 대학자를 만난 것은 참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김영식 교수의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 정에 청강생으로 수업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 계기가 제 커리어의 중요한 한 점(dot)이 되어 다른 점들과 연결된 것 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3. 이사장님께서는 미국 버지니아대학(University of Virginia)에서 물리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1974-1999년 숙명여자대학교 화학과 교수를 지내셨습니다. 1970년대 초반에는 연구 장비와 시설 등 여건이 상당히 열악했고, 과학기술계 여성인력의 사회 진출에 대한 인식도 지금과는 격차가 컸습니다. 자녀 셋을 두셨는데 일-가정 양립의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일-가정을 양립해야 하는 젊은 연구자들에게(남녀를 불문하고) 지혜의 한 말씀 해주실 수 있을까요?


남성의 고유 영역으로 인식되던 과학기술 분야에서, 특히 유교 전통의 한국 사회에서, 62학번 여학생이 걸어온 길이 꽃길이었을리는 없지요. 심신의 고단함이 만만치 않았던 건 분명한데 그때는 그걸 별로 느끼지도 못했습니다. 1971년 귀국 후 아이가 셋에 며느리 역할을 하면서, 1972년 서울대학교 강사를 시작해 1974년 숙명여대 조교수로 부임했습니다. 하루를 25시간으로 살아도 모자랐습니다. 그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 여성이 전문직 직업을 갖고 활동한다는 것이 이례적인 일이었고 모든 것은 제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습니다. 그때는 육아 등의 주어진 모든 집안일을 하면서도 일을 해야 했고 그 어려움에 대해서는 불평을 할 생각도 못했습니다. 지금과는 많이 분위기가 달랐죠.

당시 숙명여대 실험실에는 pH 미터, 화학 저울, 전위차계 등이 있는 정도였는데, 어쩌면 실험시설 탓을 하는 것은 핑계였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연구실 여건이 좋았다고 하더라도 과연 잘했을까 싶으니까요. 다만 일생 동안 쉰 기간이 없고, 숙명여대 교수이면서 서울대 강사(교양 과학사)도 10년간 했습니다.

1980년대, 우리 사회는 군사독재에 대한 저항으로 혼란에 휩싸였고, 대학 캠퍼스에서의 최루탄 세례로 알레르기도 생겼습니다. 집과 학교를 오가며 강사 수준의 교수 노릇을 하면서 심리적 갈등이 심해졌습니다. 자아(ego)를 살릴 수 있는 돌파구가 필요했고, 강박관념에 쫓겨 찾은 것이 과학사와 관련되는 번역과 저술 활동이었습니다. 교자상에서 볼펜으로 글씨를 쓰면서 집필 진도를 하루하루 기록하며 자신을 다그치다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됐습니다. 책이 줄줄이 나오고 언론도 많이 탔지만, 오른쪽 엄지손가락 인대가 늘어나 글쓰기가 불편해지고 자세가 잘못되는 등 무리가 와서 한참 동안 한의원도 들락거렸습니다. 당시 번역하던 책에는 아이가‘나랑 놀자’면서 끄적거린 연필 자국이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공저 포함해서 저역서가 20여 권이 됐습니다.

일-가정을 양립해야 하는 젊은 연구자들이 많은 어려움 이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게 다 한 때더라구요. 일을 하는 것만큼이나 가정을 돌보는 것도 돌이켜보면 인생의 소중한 한 부분이 되더군요. 쉽지 않겠 지만 집과 직장에서 주어진 여건에서 모두 최선을 다하고 이상적으로는 즐기기까지 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 같습니다.“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의 정신으로요.





4. 이사장님께서는 1999년 25년간의 화학과 교수직으로부터 환경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는데, 어떻게 변신을 했는지, 그 과정이 궁금합니다. 특히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시절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으로 활동하셨고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시절 장관직을 수행하셨습니다. 초당적인 행보라고 할 수 있는 데 그 이후로도 그러한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요인이 무엇인가요?


김영삼 대통령 때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10명 중 홍일점)으로 활동을 하였습니다. 이후 정권이 바뀌면서 9명의 자문 위원이 바뀌었는데 저는 유일하게 연임을 하였습니다. 제가 꾸준하게 저술작업을 하면서 신문에 칼럼도 꾸준하게 썼고, 뉴스에서 과학기술 분야 해설도 하였기 때문에 연임했던 것 같습니다. 이후 보고 차 김대중 대통령을 몇 번 뵌 인연이 있을 뿐인데, 공직기강 팀에서 실무적으로 올린 명단의 첫 후보로 장관이 됐습니다. 따라서 당과 언론에서는 전혀 생소한 인물이었습니다. 제가 재임하는 동안 여섯 번의 개각이 있었는데 환경부에 세 번째로 들어가서 끝까지 갔습니다.

사실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시절에는 대통령과 독대한 적이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이 퇴임한 후에는 찾아뵈었습니다. 그때가 2003년이었는데 2004년 총선을 앞두고 여당과 야당 모두에서 비례대표 후보로 제의가 있던 참이었습니다. 이에 정치참여를 해야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는지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물었더니, 정치 참여는 적극적으로 하되 방식은 원하는 방향으로 하라는 조언을 받았습니다. 제가 원래 공격적인 성향이 아니고 “싸움”을 싫어하고 잘하지도 못하는 성격이었기에 당시 여당이던 열린 우리당에 입당하게 되었고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사실 국회의원으로서 정치의 생리가 저와는 썩 맞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정치를 계속 할 것이 아니고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겠다고 마음먹었기에 저의 소신대로 입법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노무현 대통령 때는 건설교통부 장관으로 내정됐었는데, 몇 주일 고심하다가 고사했습니다. 이후 이명박 대통령 정부에서는 <사회통합 위원회>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정부에서 과총 회장으로 재임하였고 2015년에는 과학기술 창조장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정부 시절에는 과학기술 유공자가 되었습니다. 현재 윤석열 대통령 정부에서는 <국민통합위원회> 5명의 고문 중 한 명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2004년 국회의원 시절 중앙일보에서 국회의원의 진보/보수 성향을 발표한 바 있는데 저는 딱 중간에 있었습니다. 다만 제가 항상 견지하고자 한 것은 환경부에서도, 국회에서도 그리고 그 후에도 과학적으로 사고하고 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하여 문제를 접근하고 푸는 것이 었습니다. 자연과학의 학문적 배경과 훈련이 사회적 현상을 다루는 문제풀이에서 특이한 메커니즘으로 작동했다고 느끼고 그것이 저의 오늘을 만들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모든 이유로 저는 자연과학 분야로 시작해서 행정, 입법, 민간 부문에서 일하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와 함께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5. 전공으로 보면 환경부보다는 과학기술부 장관이 되실 것이라 예상했는데요. 환경 행정을 맡게 된 것이 1992년에 쓰신 『동서양의 과학전통과 환경운동』이라는 책과 연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교수가 장관으로 들어가면 공무원들의 텃세도 있을 것 같은데, 환경부를 잘 이끄신 비결이 궁금합니다. 더욱이 법적 근거에 의한 제1회, 2회 (2001년, 2002년) 정부 부처 업무평가에서 최우수 부처 대통령 표창을 받은 리더십의 노하우가 무엇인지요?


1999년 아무런 정치적 끈도 없는 여교수가 손숙 환경부 장관의 후임으로 오게 되자 초기의 부처 분위기는 썰렁했습니다. 공무원들은 외부에서 오는 장관의 경우 교수보다는 국회의원을 선호한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업무는 맡기고 대국회 관계를 잘 해결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교수가 장관으로 성공한 경우가 드물다는 세평(世評)도 나중에 들었습니다. 교수는 비판을 받기보다는 하는 자리이고, 장관직은 국회, 언론, 국민으로부터 쓴소리를 달게 받아야 하는 자리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환경부에 들어가서 태도가 바뀐 건 없으니 변신이랄 건 없습니다. 다만 私心을 버리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公僕으로서의 책무와 사명을 다 해야 한다는 자세로 일했습니다. 해야 될 일이라고 판단하면 아무리 어려움이 있어도 하고, 해서는 안 될 일이라면 누가 뭐래도 안 된다는 원칙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판단이 얼마나 옳은가의 문제인데, 그것은 건전한 양식과 양심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환경부에 간지 몇 달 지나자, 어느 분이‘조직 분위기가 다 잡힌 것 같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분위기가 잡힌 데에는 인사가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던것 같습니다. 인사원칙은 사람마다 소질과 적성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적재적소에 사람을 배치하되 철저하게‘일 중심, 성과 중심’으로 '公平無私'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조직의 和合을 최대한 강조했습니다.“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남의 일이라도 나의 일로 여겨 함께 대처해야 한다, 민원업무는 나 자신 또는 내 가족의 일로 생각하고 처리해야 한다, 열정과 정성으로 일해야 한다”를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장관으로 격에 맞게(?) 일했다기보다는 사무관, 과장, 국장일 구분 없이 함께 일했습니다. 처음에는 좀 긴장하는 듯했지만, 곧 익숙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환경부 가족들이 저보고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일 욕심이 엄청나게 많고 사람 욕심이 많다’고요. 저는 조직의 생명은 사람이고 특히 리더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인터뷰도 수없이 많이 했고, 최장수 장관의 비결이 뭐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습니다. 서슴지 않고‘덕을 많이 입었기 때문’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러면 그런 도움을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처럼 복잡한 사회 시스템 속에서 혼자서 해치울 수 있는 일은 거의 없고, 서로 힘을 모아야 성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陰陽의 德을 입는다는 것은참으로 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법적 근거에 의한 정부부처 업무평가에서 1회, 2회 연속 최우수부처가 된 것도 기록이 됐고, 지금도 환경부의 최전성기였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김대중 대통령‘국민의 정부’마감과 함께 퇴임하면서 환경부 가족들에게 빛나는 졸업장에 우등상까지 안겨줘서 고맙다고 했습니다. 20여 년 전에 일하던 환경부 가족과는 지금도 정기모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옛날 말로 의리를 중시합니다. 수행비서 다섯 명은 지금 다 실국장 급이 됐습니다. 2023년 10월 4일부터 3일간 김대중 평화회의 (Peace Forum)가 열리는데, 저도 발제를 합니다. 기후위기 등 다중위기 극복이 주제인데, 마침 장관 시절 2000년도에 김대중 대통령의『21세 기 환경 비전』어록을 출간했었습니다. 지금 읽어도 혜안이 돋보여서 그 내용을 결론으로 소개합니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으로 김대중 대통령을 뵙게 된 인연으로 최장수 장관직을 수행했고, 현재까지 김대중 평화센터 등 관련 기관의이사를 하면서, 김대중 대통령을 모시고 일한 데 대한감사의 마음이 큽니다.


6. 2016년에는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 50년 사상 최초의 여성 회장으로 선출되어 다양한 변화를 일구셨습니다. 과총을 이끄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이었는지요?


2016년 차기회장으로 당선되고 2017년 회장으로 취임할 때 과총은 기관 경고를 받는 등 여건이 매우 나빴고, 취임식 날 오전에야 로비에 설치했던 노조 농성 텐트를 거둔 상태였습니다. 과총은 600여 개의 과학기술 학회와 단체, 공공, 민간 연구소, 13개 지역연합회, 18개국 재외과협으로 구성된 거대조직입니다. 기초과학에서 산업까지 스펙트럼이 넓다 보니‘소통과 통합’의 가치 실현이 중요하다고 판단돼서 취임 당시 슬로건이‘우리 함께’였습니다. 회원 단체가 주인의식을 갖고‘우리 함께’로 뭉칠 때, 과총의 시대적 소명을 다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제 인생의 마지막 프로젝트라면서 늘 하던 대로 일벌레로 일했습니다. 4차 산업혁명 관련 이슈별로 공론화장을 열고, 규제 개선과 인력 양성, 정책 제안 등에 대한 과학기술계의 의견을 수렴하고 정부 등 다른 부문과 공유하는 시스템을 정착시키는 프로그램을 추진했습니다. 위원장직에는 여성을 공동위원장으로 모시는 원칙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포럼, 세미나, 전문가회의 등 300여 차례의 국내외 모임을 개최했고, 축사 전문으로 행사에도 많이 다녔습니다. 과총 안팎에서“과총이 변했다”는 말을 들을 때 보람이 컸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사업으로는 과총의 숙원사업이던 과학기술회관 2관(현재 명칭) 건설사업을 공청회 등을 거쳐 설계 도면부터 바꿔 본 궤도에 올린 것입니다. 2013년 당초 계획은 낡은 별관만을 철거해 신규 건물을 본관에 연결하는 수 평 증축이었으나, 이후 효율성, 공공성, 안전성을 대폭 확보한 통합신축계획으로 변경해 착공 했습니다. 26개 영구입주기관 권리범위 협약체결 등 지난한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리고 1960년대 이후 쓰이던 과총 CI를 현대 감각에 맞게 개정한 것도 역사적 기록입니다. 개정할 것인가 여부부터 논의를 거쳤고, 다행히도 사회공헌 사업으로 기부까지 받았습니다. CI 리뉴얼 과정에서 회원단체가‘함께 만드는 CI’가 될 수 있도록, 현장과 온라인 인터뷰와 설문을 실시하는 등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21세기 과총의 비전과 사명, 혁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세우고, 과총의 정신(mind)과 실천(behavior)의 아이덴티티(Identity)를 형상화한 현대적 이미지인데, 지금도 볼 때마다 뿌듯합니다.

2019년에는‘미세먼지 국민포럼’과‘플라스틱 이슈 포럼’을 시리즈로 각각 6회 이상 열면서 온라인 소통도 하고, 실천계획도 도출했습니다. 과총이 환경 이슈를 시리즈로 다룬 이유는 2018년도 과총 선정‘올해의 10대 과학기술 뉴스’에서 미세먼지와 플라스틱 이슈가 1, 2위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환경 이슈가 과총까지 저를 따라온 것 같아서, 사명감을 갖고 과학기술과 환경을 접목시키는 작업을 했습니다. 동분서주하면서 환영사 등을 쓰다 보니 쌓인 원고가 아까워서, 결국“산업혁명으로 세계사를 쓰다”책을 쓰게 됐습니다. 원고를 줄였는데도 590페이지가 넘는 책을 보고서 “이걸 어떻게 썼을까”싶기도 한데, 과총 회장을 한 덕분에 얻은 결실입니다. 2020년에는‘팬데믹과 문명’까지 두 권이 우수과학도서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7. 이사장님께서는 우리나라 헌정 사상 최장수 여성장관, 과총 최초의 여성 회장, 민간부문 최초의 이사회 여성 의장 등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 과학기술인입니다. 여성 과학자들이 현장에서 겪는 애로사항에 대해 어떻게 보시는지, 그리고 그 해결 방안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헌정 최장수 장관은 어차피 후배들이 깨야 할 기록이고, 지난 정부에서도 꽤 오래 한 여성장관들이 있어서 저는 쓰지를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얼마 전에 인터뷰를 하는데 국장급 언론인이 재임 기록을 다 계산해 갖고 와서 제가 헌정 최장수라고 확인해주시더군요. 저 자신은 그동안 1980년대부터 홍일점에 익숙해져서인지 특별히 여성으로 구분하는 것에 익숙하지는 않습니다.

서구 과학사(科學史)에서도 초기에 제기된 질문은“과학 속의 여성은 왜 그렇게 소수인가?”였습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일-가정 양립의 딜레마는 과학기술 전공에서 특히 심각합니다. 그러나 최근 OECD 자료를 보면 여성의 고등 교육 이수 비율과 미국의 대졸 이상 남녀 비율에서 여초(女超) 현상이 뚜렷하고 과학기술계 진학도 활발합니다. 과학 기술 분야는 특히 훈련과 교육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재정 투입도 더 많이 해야 합니다.

저출산 고령화로 해외 인력 유입을 강조하는 상황에서 이렇게 키워놓은 인력을 여성이라는 이유로 사장(死藏)시키는 악순환은 차단돼야 합니다. 그러나 개인으로서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므로 국가적 차원의 전략적이고도 적극적인 대책이 필요합니다. 모성 보호와 고용 촉진 등 사회적인 맞춤형 대책이 절실합니다.

여성 과학기술계의 징크스는 유리천장(Glass Ceiling)과‘새는 파이프라인(Leaky Pipeline)’입니다. 여성 과학자가 겪는 관행적, 사회문화적, 심리적 장벽을 남성 과학자는 이해 못 합니다. 육아 출산 등으로 경력 단절이 되기 쉬운데, 왕성하게 연구활동에 전념해야 할 나이에 그런 고비를 맞게 됩니다. 일단 공백이 생기면 과학기술 분야는 특히 경쟁력을 회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다 보니 과학기술계 여성 정규직 인력의 비중이 20%대로 매우 낮습니다.

4차 산업혁명의 개념을 최초로 주장한 클라우스 슈밥 세계경제포럼(WEF) 회장은 2016년 한국에서 4차 산업혁 명의 거대한 변화 속도와 규모를 예측하며“여성인력의 고차원적인 창의성이 발휘되는 시대라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4차 산업혁명 시대는 모든 기술과 산업의‘융합’이 기본이고, 융합은 소통 능력을 최우선으로 요구하므로 이런 덕목에서 여성이 강점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있습니다. 다만 거대한 흐름 속에서 기회를 만들 수 있어야 하는데, 자신감과 역량을 키우고 롤 모델과 성공 스토리를 만들고, 여성 인재 양성과 활용의 연구개발 생태계가 조성돼야 할 것입니다. 한국은 인재에 힘입어 오늘날의 성장을 일구었습니다. 이제 더 늦기 전에 한국의 NIS(National Innovation System) 내에서 여성인력이 과학기술혁신의 새로운 추동력이 될 수 있는 실질적인 정책 대안이 나와야 합니다. 여성계는 참여의 정신으로 팔로워십을 키우고 리더십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8. 2023년 5월에 KAIST 이사장으로 선임되었습니다. KAIST의 역할과 임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KAIST는 QAIST 신문화전략 핵심가치 추구를 기치로 내걸고 구체적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Question(창의 인재), Advanced Research(Post AI 융복합연구), Internaization(글로벌 인재), Start-up(기술가치 창출), Trust(소통과 신뢰 문화)가 비전입니다. 구성원들의 열정이 뜨겁습니다. 이사장으로서 글로벌화 구현, 융복합 인재 양성, 융복합 협업 연구 활성화를 위한 인프라 구축과 혁신 생태계 조성 구현에 힘쓰고 있습니다. 융복합이 핵심 키워드인데, 사실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각 분야의 수월성을 갖추는 것은 기본이고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와 협력 정신이 중요합니다. 근대사를 보면 산업혁명에 앞장선 국가가 세계사의 주역이 됐고, 그 과정에서 개방과 혁신은 불가결의 요소였습니 다. 혁신이 최고의 가치가 되는 분야가 바로 과학기술이고, 과학기술혁신(STI)은 국가 경제와 사회 발전의 막강한 원동력입니다. 과학기술 특성화 대학으로서 R&D 특허, 기술이전, 창업에 의한 상용화와 시장 진출로 경제적, 사회적 이익을 국민에게 돌아가도록 하고 국가 경쟁력 강화에 더욱 기여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융합형 인재, 여성 인력, 학제적 프로그램, 실질적 국제협력의 활성화가 과제입니다.

인재가 혁신, 경쟁력, 성장을 이끄는 핵심 요소가 된 시대입니다. KAIST가 배출하는 인재는 창의성, 주도성, 호기심, 협력 등의 자질과 함께 비판적 사고, 감성적 지능, 소통과 팀워크, 인지적 유연성, 복합적 문제해결 능력 등 사회적, 감성적 학습기술을 갖춰야 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자연계 전공 학생들이지만 인문사회적 자질과 소양을 갖출 수 있도록 학풍과 교육과정, 훈련 프로그램을 강화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덕목은 평생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자산이고 조직에서의 인간관계, 즉 사회적 웰빙을 높여주기 때문입니다. 캠퍼스에서 서로 배려하고 소통하고 감사하는 것을 깨우치는 프로그램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직종에서 정년을 마치고도 15-20년의 시간을 알차게 보내야 하는 것이죠. 그렇게 할 수 있는 소양을 대학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9. 앞에서 말씀하셨듯이, 62학번으로 현재도 왕성하게 활동하시고 KAIST 이사장으로서 젊은 세대와 교감해야 하는데, 세대 차이를 느끼시는지 궁금합니다.


KAIST 이사장으로서도 젊은 교수진과 학생들, 이른바 MZ 세대와의 소통에 마음이 쓰이는 게 사실입니다. 밀레니엄 M세대는 1980년-2000년대 초반 출생, Z(Zero)세대는 2000년대 중반 이후 출생 세대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하도 세상이 빨리 바뀌고 있어서 이 둘을 묶는 것도 이질성이 상당할 것 같습니다. 여하튼 MZ세대와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게 사실이므로 이해하기 위해서 소통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중학생 및 고등학생인 손녀들과 대화를 많이 하면서 그들의 심리를 이해하려고 하는데, 그건 잘되고 있습니다.

세대 차이에 대한 에피소드를 하나 말씀드리면, 2005년에 KAIST와 포 항공대 여학생들이 국내외 7명 여성 과학자를 인터뷰해서 인생 스토리를 엮은『과학해서 행복한 사람들』(사이언스북스)이란 책이 나왔습니다. 당시 저는 국회의원 시절이라‘이공계 교수 출신 여성 정치인’카테고리에 들어서‘한국 정치에 향기를 불어넣은 여성과학자’로 인터뷰를 했습니다. 2004년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되고 보니, 서울대 자연과학대학이 배출한 최초의 국회의원이었습니다. 그때 인터뷰를 한 학생들은 제가 2002년 한국과학 문화재단 선정 제1회‘닮고 싶고 되고 싶은 과학자’였고, 국회에서 국방위원회 간사로 일하고 있었고, 헌정 최장수 여성장관으로 환경부 정부 부처 업무 평가에서 잇따라 최우수 부처로 이끌었다는 기록에 관심이 크다고 했습니다. 국회 초선으로 국회윤리특별위원장이라는 상임위원장도 했습니다.

그런데 학생 기자들은 저를 만난 뒤 이렇게 썼습니다.“인터뷰를 하기 전에 내가 상상했던 선생님의 모습은‘철의 여인’이었다. 한 치의 실수도 없이 맡은 일을 똑 부러지게 해내는 당찬 여성. 실제로 만나 뵌 김명자 선생님은 기대 했던 그대로‘여장부’셨다. 그러나 선생님의 당찬 모습 뒤에는 부드러운 여성성이 있었다. 김명자 선생님의 섬세한 리더십은 바로 그 부드러운 카리스마에서 나오는 것임이 느껴졌다. 여성성을 바탕으로 남성 중심의 관료사회를 개혁한 일은 분명 멋진 일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높은 위치에 올라가기까지는‘무식하고 우직하게’기존 시스템을 따라가 줘야만 했다. 환경부 장관이 되어 자신의 소신을 펴게 되기까지 선생님이 걸으셨던 험난한 과정을 보면서, 전 과목 올 A+를 받은 친구의 성적표를 구경할 때 느끼는 부러움과 착잡함이 뒤섞인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습니다. 슈퍼우먼으로 열심히 살았는데, 젊은이들에게는‘무식하고 우직하게’기존 체 제에 순응한 삶으로 보였으니까요. 사회는 단계적으로 발전하고, 우리 세대는 그 시대의 가치관을 갖고 살았고, 그 속 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제 시대가 바뀌면서 새로운 가치가 자리 잡고 있으니, 우리 후배들은 보다 좋은 여건에서 희망과 비전을 펼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 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합니다. 나이가 이렇게 되니 경쟁하고 평가 받아야 할 이유가 없어져서 자유롭습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성취라는 것도 결국은 자신의 마음가짐에 달렸다는 것을 깨닫게 됐고요. 그런 자유로움이 가장 큰 자산이 됐고, 그간의 경험으로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때 가장 보람 있고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10. 이사장님께서는 화학자로 커리어를 시작하셔서 “정치” 분야에서도 다양한 성과를 거두셨습니다. 이사장님의 활동을 보면서 사회 각 분야에서 과학자의 목소리를 내서 국정 운영과 정책에 반영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화학 분야 전문가들은 대부분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것이 화학연구와 교육입니다. 전문 분야 이외의 사회적, 정치적 활동에 대해서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경우가 많습니다. 과학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은 인정하지만 연구 활동과 병행하기가 쉽지 않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네 무슨 말씀인지 잘 이해합니다. 한우물만 파기도 힘든 게 과학기술 전공인데, 사회적, 정치적 활동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지요. 그런데 세상이 달라져서 과학기술의 영향이 너무 커졌습니다. 기술혁신뿐만 아니라 과학기술의 사회문화경제적 영향, 심지어 가치관에 미치는 영향까지 고려해야 할 임무가 주어진 것입니다. 기술혁신의 가속화에 따라 과학기술계의 사회문화적, 인류사적, 윤리적, 가치관적 책임은 계속 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술혁신 속도 조절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인간의 가치가 기술의 가치를 제어할 수 있겠는가의 질문을 하게 되는 상황입니다.

또한 과학기술은 사회혁신 실현에도 기여할 책무가 있습니다. ‘삶의 질 향상’,‘공공복지 안전’,‘기후위기 해결’,‘따뜻한 과학’ 등이 주요 의제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건, 의료, 교육, 위생, 환경, 안전 등 사회적 목표 달성에 기여하는 과학기술혁신 정책에서 과학자의 역할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과학자로서 사회, 경제, 문화, 윤리, 가치관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을 넓혀 관심과 전문성을 갖출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 국민과 사회에 다가가는 과학기술계가 되어야 예산 지원의 기반도 튼튼해집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과학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는 과학자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역에서 전문 분야 이외의 사회적, 정치적 활동에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입니다. 다양한 분야에 지적 호기심을 갖고 참여하는 것이 세분화된 전문 분야에서의 훌륭한 결실을 내는데 장애가 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반드시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직접 연관되는 것 같지 않았던 점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긴 안목으로 보면 새로운 길을 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궁극적으로는 그들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과학만이 세상 전부는 아님을 인식하고 학생들을 지도하고 활동해야 할 것입니다.


11. 끝으로 지금 이 시간에도 열심히 연구와 교육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한국의 화학자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62학번으로 지금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계신 입장에서 언젠가는 정년을 맞이 하게 될 대한화학회 회원들에게도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우리 후배 화학자들이 자신의 연구와 교육 활동에서 스트레스를 덜 받고 보람을 많이 느끼면서 좋은 성과를 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려운 얘기를 너무 쉽게 했나요. 과학기술인은 자율적인 연구 환경에서 자신의 전공에 몰두할 수 있고, 그래서 훌륭한 업적을 내고 인정을 받을 때 행복하게 느낄 것입니다. 그건 개인적인 행복이고, 자신의 연구가 상용화와 시장 진입을 거쳐 경제적, 사회적 효용 가치를 발휘해 사람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사회 발전에 기여하게 된다면 더 큰 행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마디 더 보태자면, 누구나 언젠가 정년퇴임을 하게 돼 있는데, 그 이후의 긴 시간을 못다 한 취미생활로 보내는 것도 새로운 낙(樂)이 되겠지요. 그러나 현역일 때부터 연관 분야에 관심을 갖고 참여한 경험이 과학자로서의 이모작 인생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정년 후에도 15-20여 년의 삶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계속 연구비를 받아서 그때도 연구를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모두가 그렇게 하지는 못 할 것입니다. 그 시기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연구 관련 분야에 관심을 갖고 새로운 인생의“dot”을 찍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재직 중에 창업을 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하고, 앞서 말씀드렸듯이 과학 커뮤니케이션에 관심을 갖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루이 파스퇴르의 경구를 자주 인용하는데,“Fortune favors the prepared mind”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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