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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한가지는 잃지 않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이번 호에는 제131회 대한화학회 학술발표회에서 대한화학회 학술상을 수상하신 조민행 교수님(고려대학교 화학과)을 모셨습니다. 교수님께서는 극초단 분광학, 결맞음 다차원 분광학 및 분자 이미징 분야의 세계적 석학으로 높은 시간 및 공간 분해능을 가지는 새로운 분광학 및 이미징 방법을 개발하고 화학반응 및 생물학적으로 중요한 분자 시스템에 응용 하는 연구를 수행하고 계십니다. 조민행 교수님의 연구 업적과 궁금했던 그외 다양한 면모를 소개합니다.


[모더레이터: 한순규 교수 (KAIST 화학과)]



1. 『화학세계』 독자에는 청소년 및 중고등학교 선생님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중고등학교 학창시절부터 화학에 관심이 많으셨나요? 교수님께서 화학을 전공하시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막연하게 자연과학을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아무래도 그 시절에는 미래에 과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라는 학생들이 많았었기에 저 역시 그런 사회 분위기에 영향을 받지 않 았나 생각합니다. 고등학교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진학하면서 자연스럽게 이과를 선택했었는데, 아마 그 이유는 다른 과목보다 수학 및 관련 과학 과목이 상대적으로 더 재미있다고 느꼈었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화학 과목을 담당하셨습니다. 저는 다른 과학 과목보다 화학 수업을 듣는 것이 더 재미있었습니다. 제가 대학교 진학을 할 무렵에는 오로지 한 대학만을 선택해서 입시원서를 제출할 수 있었습니다. 한 대학에 원서를 쓰지만 1,2,3순위의 세 학과를 선택해서 적어 넣을 수 있었고, 제게 1순위의 학과는 화학과였습니다. 아마 제 형님이 생물학과에 다니고 계셨기 때문에 같은 분야를 전공하고 싶지는 않다는 것도 일부분 제 결정에 영향을 주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제가 화학을 전공하게 된 데 있어서 아주 특별한 계기 보다는 성장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깨달은 저의 적성과 흥미를 따라 선택하였습니다.




2. 교수님께서는 서울대학교 화학과(현재는 화학부)에서 학사학위를, 동 대학에서 화학과에서 석사학 위를, 시카고 대학교 화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셨고, MIT에서 박사 후 연구원으로 계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스승에게서 사사하셨는데 특별히 기억나는 분이 계신가요? 그 분(들)은 현재의 교수님을 있게 한데 어떠한 영향을 끼쳤나요?


석사학위 지도교수셨던 서울대학교 화학과 서정헌 교수님, 그리고 시카고 대학교에서 박사학위 과정의 대학원생 으로 있을 때 연구 지도를 해 주셨던 그레이험 플레밍 교수님, MIT에서 박사 후 연구원으로 있을 때 많은 조언과 지도를 해주신 로버트 실비 교수님 모두 다 제게는 매우 특별한 분들이셨습니다. 지금도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 분의 교수님은 각기 서로 다른 지도 방식과 철학을 가진 분들이셨습니다. 서정헌 교수님으로부 터는 유기화학 반응을 이론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설명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우면서 얼핏 복잡해 보이는 화학 현상과 더 나아가 생물학적인 현상이 분자, 원자, 전자들의 이동 및 재배열 등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레이험 플레밍 교수님은 극초단 레이저를 이용한 분광학이라는, 당시 제게는 매우 생소한 분야의 연구를 하셨던 분입니다. 제가 하고 싶다고 하는 연구에 대해 언제나 긍정적으로 말씀해주시고 충분한 기회를 주셨기에 그곳에서의 경험이 나중에 제가 독자적인 학자로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플레밍 교수님과는 1993년 말에 박사학위를 받고 졸업한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거의 30여 년 동안 지속적인 학술적 교류를 해오고 있고, 여전히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MIT에 계셨던 실비 교수님은 모든 학생과 연구원들이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셨습니다. 그와 같은 지도방법은 제가 우리나라에 와서 30년 정도의 긴 시간 동안 제 학생 연구원들을 지도한 방식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실비 교수님은 몇 년 전에 돌아 가셔서 이제는 찾아뵙거나 인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현재 서정헌 교수님, 플레밍 교수님 두 분 모두 70대이시며 여전히 건강하십니다. 앞으로 좀 더 자주 연락을 드려야겠습니다.


  • 2022년 8월 스웨덴에서 열린 Nobel Symposium(NS173)에 참석했을 때 플레밍 교수와 제자들이 함께 촬영한 사진. 왼쪽 부터 David Jonas, Tobias Brixner, Donatas Zigmantas, Thomas Mancal, Graham Fleming, Gregory Scholes, 조민행


  • 2022년 12월 플레밍교수님이 우리 연구단을 방문하셨을 때 75세 생일을 맞으셔서 우리 나라 제자들과 함께 축하 모임을 가지고 촬영한 사진. 왼쪽부터 방윤수, 조민행, 이호재, 안태규, 플레밍 교수, 김성규, 주태하, 박수민.



3. 교수님의 IBS 연구단 홈페이지의 소개된 내용을 통해 교수님의 연구는 ‘분자 동영상을 촬영할 수 있는 펨토초 다차원 분광학 도구개발 및 응용’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화학과 학부생 정도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교수님의 주된 연구관심사를 간략히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분자의 구조와 성질, 화학 반응의 메커니즘과 속도 등을 이해하고 새로운 물질을 만들고 응용하는 것이 화학을 공부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는 일들입니다. 이런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측정, 관찰, 분석하는 방법이 있어야 합니다. 분자는 너무도 작아서 그것을 눈으로 또는 현미경으로 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완전히 불가능하다고 얘기하지 않는 이유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온 전자 현미경 기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술적 발전에도 지속적으로 움직이는 용액상 분자 또는 세포와 같은 복잡한 상황 속에 있는 분자를 직접 관찰하는 것은 전자 현미경으로도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그렇게 어려운 이유는 분자의 크기가 작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 분자들은 매우 가벼워서 용액 속에서도 매우 빠른 속도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추적 관찰한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따라서 작고 빠른 분자를 연구하려면 그에 걸맞은 측정 속도를 가진 분광학적 실험 방법이 필요합니다. 극초단 분광학은 거의 1경분의 1초 정도 또는 그것보다 짧은 시간 동안에 발생하는 분자의 움직임을 거의 100경분의 1초 정도의 짧은 레이저 펄스로 순간 포착할 수 있는 실험 방법입니다. 마치 극단적 인 의미에서의 초고속 카메라를 연상하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입니다. 저희가 연구하고 개발한 다차원(극초단) 분광학이라는 것은 둘 또는 그 이상의 레이저 펄스를 이용하기 때문에 분자의 움직임 및 구조적 변화를 좀 더 심층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마치 1970년대에 있었던 흑백 TV가 기술의 개발을 통해 컬러 TV로 발전하면서 화면에 등장하는 물체와 사람들에 대해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된 것과 유사성이 있다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4. 교수님께서는 수많은 논문을 출판하셨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논문이 어떤 것인가요? 가장 기억에 남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학술 논문을 작성하는 것은 학생과 연구원,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교수 및 연구원들과 함께 연구대상 물질을 정하고, 주요 성질들을 측정하고, 그 결과를 분석해서 모든 저자가 함께 논문을 작성하고 최종적으로 적절 한 학술지에 그 논문을 출판하는 과정을 밟습니다. 그러나 저는 요즘도 거의 매년 한두 편 정도의 논문을 혼자 쓰곤 합니다. 제 연구실은 대부분 실험적 연구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항상 둘 또는 그 이상의 학생과 연구 원들이 다 함께 참여해야만 달성할 수 있는 연구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 새로운 이론 또는 관련된 해석을 요구하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혼자 연구하고 흥미로운 결과가 얻어지면 논문을 작성해 발표 하는 것을 즐기곤 합니다. 그 모든 논문은 온전히 저 혼자 연구해서 얻은 결과물들이어서 남다른 애착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혹시 이 질문이 저의 대표 논문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라면 그에 대한 답변이 따로 있지는 않습니다. 그 대신에 한가지 기억나는 논문은 있기는 합니다. 제가 시카고 대학교 화학과에 박사과정 대학원생으로 있을 때 플레밍 교수 그리고 당시 로체스터 대학교에 계셨던 무까멜 교수와 함께 논문을 작성해서『J. Chem.Phys.』에 투고했을 때의 일입니다. 논문 제출을 하고 몇 주 후에 한 명의 리뷰어가 작성한 보고서가 왔습니다. 그 익명의 리뷰어는 한 줄의 문장도 아니고 하나의 단어로‘Beautiful!’이라는 칭찬과 함께 출판을 추천했습니다. 요즘에는 논문 출판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시대여서, 많은 경우 리뷰어들의 논평을 보면 불필요하게 길고 비판적이며 때때로 삐딱한 말들로 가득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좋은 논문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 으니 축하와 함께 흔쾌히 출판을 추천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연구를 대하는 자세가 여유 있고 낭 만적이었는데, 앞으로 그런 시절이 다시 오지는 않겠지요.


  • 이 논문은 투고 후 '아름다운 논문'이라는 축하의 리뷰를 받은 것으로 기억에 남는 논문 중 하나입니다.


5. 교수님께서는 이론물리화학자로 시작하셔서 실험물리화학으로 연구영역을 확장하셨습니다. 너무 단순화한 분류법인지 모르겠으나 실험물리화학자의 경우 ‘분자거동의 이해를 위한 도구 개발’과 ‘물리 화학적 도구를 통한 분자거동의 이해’로 크게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전자에 집중하다 보면 후자에 소홀해지게 되고, 후자에 집중하게 되면 오리지널리티가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잘 하시는데, 교수님만의 노하우가 무엇인지요?


새로운 실험 방법 및 기술의 개발 연구, 기존에 개발한 연구 방법 및 실험법을 이용한 응용 연구 둘 다 매우 중 요합니다. 이와 같이 연구에 접근하는 방식을 두 가지로 구분하는 것은 적절한 분류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많은 학자가 과학 역사를 뒤돌아보고, 과학의 발전 과정을 분석하여 내린 결론에 의하면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과학 패러다임이 바뀔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2012년『Science』에 한편의 짧은 기고문이 게재되었습니다. 저자는 프린스턴 대학교 내에 있는 고등연구원 프리만 다이슨 교수입니다. 이 기고문의 제목은“Is science mostly driven by ideas or by tools?”입니다.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과학에서 혁신적인 발전이 과연 새로운 아이디어, 예를 들어 진화론, 양자역학 등과 같이 새로운 개념의 발견을 통해 이뤄지는지 아니면 X-ray, NMR, 레이저 분광학과 같이 새로운 연구 도구의 개발을 통해 이뤄지는지를 논하는 글입니다. 전자에 해당하는 주장은 토마스 쿤 학파로 불리고 후자의 주장은 갤리슨이라는 학자의 저서에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두 가지 방식의 발전이 서로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듯이 지속적이고 상보적으로 이뤄질 때 비로소 과학의 혁신적 발전과 패러다임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제 경우에는 새로운 연구 도구의 개발에 조금 더 초점을 맞 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개발된 방법의 유용성을 다른 연구실이 아닌 바로 제 연구실에서 증명하고자 노력 해왔습니다.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는 시도에서 따로 저만의 비결이 있지는 않습니다. 단지 운 좋게도 큰 연구과제들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부족하지 않은 연구비를 꾸준히 지원받을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6. 교수님께서는 2009년 『2차원 광학분광학(Two-Dimensional Optical Spectroscopy)』이라는 저서를 발간하셨습니다. 다차원 분광학 분야에서 중요한 참고서로 여겨지는 책인데 이와 같은 저서를 쓰신 계기가 있으셨나요? 또 저술과정에서 힘드신 점은 없었나요?


이 책은 제게 있어서 특별히 애착이 가는 저서입니다. 우선 이차원 분광학 분야는 21세기에 들어서야 개발된 학문이라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역사가 길지 않습니다. 2002년에 이차원 분광학 분야 최초의 국제 학술회의를 제가 주관했고, 고려대학교에서 바로 제1회 국제 학술회의가 열렸습니다. 그 뒤 많은 학자가 이 분야에 뛰어들었고, 점차 괄목할만한 발전과 함께 다양한 응용 연구 결과가 보고되었습니다. 저는 이 분야를 총 정리하는 의미에서 상 당히 긴(90페이지) 총론논문을『Chem. Rev.』에 출판했는데 그때가 2008년입니다. 그런데 이 총론논문은 시분해분광학, 극초단 분광학, 비선형 분광학, 물리화학 및 생물리학 분야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지식을 갖춘 전문가와 대학원생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분야를 처음 공부하고자 하는 대학원생과 비전문가들에게는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 다고 생각했기에 이차원 분광학에 대한 책을 저술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거의 1년 동안 저술작업을 한 뒤 비로소 이 책을 출판할 수 있었습니다. 이 분야에서는 최초의 전문서적(참고서)이어서 많은 사람이 반가워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 습니다. 책을 저술한다는 것은 논문을 작성하는 것과 다른 차원의 노력이 필요합 니다. 특히 당시의 저는 한창 연구와 논문 작성, 그리고 강의 및 교육에 많은 시 간을 할애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저술 작업에 특히 힘들었던 기억이 있습 니다. 아마 제 가족 및 주변의 많은 분의 도움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지금으로부터 수년 뒤에는 이 책의 두 번째 에디션을 쓰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009년에 출판된『Two-dimensional optical spectroscopy』책의 표지 사진




7. 지난 4월 제131회 춘계 대한화학회 학술발표회에서 진행된 교수님의 학술상 수상 강연은 굉장히 인상 깊었습니다. 이렇게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교수님의 강연은 물리와 화학의 그 경계선 어딘가에 관한 것이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교수님은 화학과 물리의 융합을 중요시하게 생각하시고 실제로 교수님이 단장으로 계신 IBS 연구단에는 다수의 물리학자가 소속되어 있습니다. 교수님께 물리와 화학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요? 두 학문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요? 또한 교수님에게 Biological Science는 어떤 의미인가요?

물리와 화학 더 나아가 생물은 서로 다른 글자로 쓰입니다. 만일 이 글자들이 서로 다름을 신경 쓰지 않는다면 이 분야들이 서로 어떻게 유사하고 다른지를 크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두 다 자연과학이라는 넓은 분야에서 각기 특정한 문제들을 연구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 서로 그렇게 다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희 연구단에는 물리학과 화학과 교수가 각각 절반씩 있습니다. 이분들의 연구 분야가 저희 연구단의 연구 스펙트럼에 잘 맞는다고 판단되어 이분들을 초청했고 지금 활발히 공동 연구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함께 모여 연구 방법, 결과, 분석 및 해석에 대해 논의할 때는 어느 분이 화학과 교수이고 어느 분이 물리학과 교수인지를 염두에 두고 얘기를 나누지 않습니다. 주어진 물질 또는 현상의 무엇을 연구 이해하고자 하는가, 그것을 위해 무엇을 측정해야 하는가, 그 결과를 그래프 또는 그림으로 그리면 어떻게 나타나고 얻어진 데이터는 특정한 경향성을 보이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 결과의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해 논할 때 각자가 어떤 학과에 소속되어 있는지를 떠올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구성원들의 소속 학과가 형식적으로 다르다는 것 이외에 학술적인 측면에서는 서로 큰 차이점이 있는지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생물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연구단에서 개발한 이미징 방법들을 살아있는 세포 또는 생체 조직에 적용하고 얻은 결과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초점을 맞춰 토론하다 보면, 그 안에서 일어 나는 분자, 생체 고분자, 세포 기관들이 어떻게 분포하고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그 바탕에는 분자 간 상호작용 원리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즉 입자물리학 또는 고에너지 물리학을 제외한 다른 모든 자연과학 현상들은 모두 다 분자 간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된다는 학자적인 믿음이 있기 때문에, 연구하고자 하는 대상의 시간-공간적인 스케일의 차이에 따라 서로 다르게 구분이 될 수는 있어도 그와 같은 구분을 꼭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8. 교수님께서는 많은 후학을 배출하셨고 그들은 지금 산업계 학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 중입니다. 훌륭한 많은 제자가 있지만 특별히 기억나는 제자가 있으신가요? 특별히 기억나는 이유가 무엇인가 요? 구체적인 일화를 소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나마 제가 이룬 업적들이 있다면, 그 모든 것들은 저와 함께 연구에 참여해준 여러 제자와 박사 후 연구원 그리고 공동연구를 해주신 동료들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기억나는 제자 한 명이 있기보다는, 저의 연구 경력을 풍성하게 해 준 모든 학생이 생각납니다. 이런 인터뷰를 통해 제자들을 한번 떠올릴 수 있게 해준 것 감사합니다.


  • 2022년 스승의 날에 연구실에서 촬영한 사진. 좌측부터 김은찬, 조민행, 장현민, 심중원, 임소희, 최영진, 박찬종



9. 교수님은 학문적 멘토의 가장 중요한 덕목/자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학생 대부분은 본인의 능력이 어떤지, 과연 성공적으로 연구를 마무리 지을 수 있는지, 졸업 후, 원하는 직장에 취업하거나 학자로서의 경력을 이어갈 수 있을지를 끊임없이 불안해합니다. 그런 불안감은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많은 대화나 상담을 통해 그때마다 해결해주려고 노력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유사한 고민을 하는 학생 및 선후배들과의 대화를 권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향으로의 작은 조언들을 해줍니다. 연구를 하다 보면 많은 경우 실패하기도 하고 실수를 범하기도 합니다.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학생들이 의기소침해하지 않도록 저 스스로 노력합니다. 그런 점에서 학문적 멘토는 인내심이 많아야 합니다. 잔소리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해야 하고, 지나치게 자주 격려 또는 칭찬을 해주는 것 역시 경계해야 한다는 점에서 많은 참을성이 필요합니다.

당연히 학문적 멘토는 본인의 분야에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적절한 조언을 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본인이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오히려 학생이나 동료 연구원으로부터 배우려는 자세, 즉 겸손함이 있어야 합니다. 제가 박사과정 학생으로 있을 때 저는 제 지도교수님이셨던 플레밍 선생님께 제가 공부하고 터득한 내용을 보고드리면서 큰 즐거움을 느꼈던 기억이 있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플레밍 선생님이 기꺼이 제 얘기를 들어주셨고, 저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씀해주셨던 것이 바로 그분의 겸손함이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학문적 멘토가 후학들에게 동기부여를 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저는 지나치게 세세한 내용에 대해 연구지도를 하는 것을 경계합니다. 큰 주제를 주고 그 이후의 연구는 학생들에게 맡겨 놓습니다. 그것을 통해 스스로에게 동기 부여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유도합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이 모든 학생에게 통하는 것은 아니어서 가끔은 멘토로서의 제 능력에 한계가 있음을 느낍니다.


10. 사회 변화의 속도가 날로 빨라지고 있는 요즘입니다. 화학은 변화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변화해야 한 다고 생각하시나요? 화학 교육 혹은 연구하는 방식에 변화가 있어야 할까요?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할 까요?


새로운 연구 방법론, 기술, 개념이 제안될 경우 그 내용이 무엇인지, 어떻게 본인의 연구에 적용될 수 있을지, 앞 으로의 발전 가능성은 있을지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공부하는 자세는 꼭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새롭게 유행처럼 떠오르는 분야로 바로 뛰어들 필요가 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자신의 고유한 연구 주제는 가능하면 긴 호흡을 가지고 오랫동안 연구를 지속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그 연구를 더욱 풍성하게 하려면 매 순간 새로운 연구방법을 탐색하고 적용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사회가 빠르게 변한다고 느끼는 것처럼 화학 더 넓게는 자연과학이 매우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새로운 분야가 탄생하고, 처음 들어보는 기술들과 용어들을 학술 논문 또는 신문 기사를 통해 듣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 맞춰 본인의 연구주제를 빠르게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다 보면 자신의 고유한 색깔을 찾고 깊이 있는 연구를 하기 어렵습니다. 다양한 분야에서의 기술적 발전과 새로운 시도들은 빠른 속도로 공부하고 나의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나만의 한가지는 잃지 않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1. 지금 이 시간에도 화학연구를 열심히 해나가는 신진/중견 화학 연구자에게 조언의 말씀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화학의 시대라고 하지는 않는 듯합니다. 그 점 안타깝게 생각하며 스스로 자조 하고 쓴웃음을 지을 필요는 없습니다. 앞서 저는 화학, 물리학, 생물학에 대한 구분을 굳이 하지 않으면서 연구에 임하고 있다고 얘기한 바 있습니다. 현재 주목받는 연구 주제가 구분상 화학 분야에 직접 속하지 않는다 해도 그 연구를 위해서는 다양한 화학적 연구 방법 및 분석 기술이 필요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반도체 개발과 상업화에는 수많은 화학 관련 연구와 응용 단계가 있었습니다. 미래의 연구 주제로 주목받는 양자 정보 및 컴퓨팅 분야를 생각해보면, 실제 양자 컴퓨터 및 통신 장비의 개발에 수많은 물질과 공정이 있을 텐데 그 중 많은 것들이 화학과 관련된 것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런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현재 또는 미래에 떠오르는 연구주제가 비록 학문적 구분의 측면에서 화학이라는 협소한 분야에 속하지 않는다 해서 그 주제의 연구에 화학이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의 연구 역량을 작은 분야에 국한하지 말고, 나는 자연과학자라는 마음으로, 내가 추진하는 화학 관련 연구를 위해 어떤 새로운 연구방법을 물리학, 생물학에서 찾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가지고, 내가 잘 알고 능숙히 다룰 수 있는 연구 방법이 다른 분야의 연구에 어떻게 사용될 수 있을지를 되뇌면서 즐겁게 연구하시기를 바랍니다.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마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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