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세계가 만난 화학자>에서는 대한민국 화학계에 공헌한 화학자와의 인터뷰를 소개해 드리고 있습니다.
이번 호에는 제132회 대한화학회 총회 및 학술발표회에서 이태규학술상을 수상하신 경북대학교 화학과 최철호 교수님을 모셨습니다.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교수님께서는 새로운 양자화학이론 개발과 응용 및 차세대 양자 소프트웨어 개발을 위한 개방형 양자 플랫폼 개발에 관한 연구를 활발히 진행하셨습니다.
이론 화학과 계산 화학에 관한 교수님의 철학과 연구 업적에 더하여 교수님의 다양한 면모를 대한화학회 회원분들께 소개해 드립니다.
[모더레이터: 한순규 교수(KAIST 화학과)]
1. 화학세계의 독자 중에는 중고등학생도 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중고등학교 학창시절부터 화학에 관심이 많으셨나요? 교수님께서 화학을 전공하시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어릴 때부터 과학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습니다. 특히 물리를 좋아했습니다. 혼자 사색하는 것을 좋아하는편 이었습니다. 대화하다가도 혼자 생각에 빠지곤 하였습니다. 고등학교에 오면서 원리를 살펴보는 물리학도 좋았지만, 물질을 다루는 화학에 대한 관심도 생겼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화학선생님이셨는데 제가 화학을 전공으로 정한 데 있어 그분의 영향이 있었을 수도 있겠네요. 결국에는“물리화학”을 전공하게 되었네요.
청소년기는 진로 선택을 하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이때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하고 선택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외적 요인에 의해서 결정을 하면 후회를 하게 될 공산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현시점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호하는 방향의 진로는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성공 확률은 낮아지겠지요. 자신이 좋아하는 영역에서 잘하면 그 진로에서 성공 확률이 더 높다고 생각합니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갖지 말고 좋아하는 것에 도전하세요!
2. 화학세계의 독자 중 화학전공 대학원생들도 많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서울대학교 화학과(현재는 화학부)에서 학사학위와 석사학위를 받으시고 미국의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Iowa State University에서 박사 후 과정을 수행하셨습니다. 이 트레이닝 과정은 순조로우셨나요? 혹시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어려움이 있었다면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고등학교 때와는 너무나 다른 학부과정에서의 공부에 처음에는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커리큘럼이 이미 짜여져 있는 고등학교와 달리 대학에서는 저에게 갑자기 주어진 자유를 처음에는 어떻게 사용할지 익숙지 않았습 니다. 그런 와중에 학부생 때부터 컴퓨터를 활용한 과학연구에 관심이 갔습니다. 컴퓨터의 과학적 활용에 관심이 많았지만 막상 서울대 화학과 교과과정에서 이를 접할 순 없었습니다. 대학원에 올라가 김관 교수님 실험실에서 처음으로 양자역학 소프트웨어인 Gaussian 76을 접했지만 막상 그 소프트웨어들은 중대형 컴퓨터용이었고, 당시 서울대 화학과에는 복잡한 계산을 할 수 있는 대형 컴퓨터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릴 테이프에 담긴 Gaussian과 MOPAC이라는 SW를 당시 386이라는 PC로 옮겨 작동시키려 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Gaussian 76은 실패했고 MOPAC은 성공적으로 PC를 이용하여 여러 양자 계산들을 수행했습니다.
당시 외국은 컴퓨터 환경이 국내보다는 좋았습니다. 박사과정 중에는 중대형 컴퓨터 활용이 훨씬 자유로워 그동안 하고자 했던 계산들을 마음껏 할 수 있었습니다. 연구적인 부분에서는 풍족하였지만 외국에서의 생활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언어 장벽도 있었고 문화적 이질감도 컸습니다. 그러한 어려움은 더욱더 연구에 집중하면서 해결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당시 여러 사람과 열린 마음으로 더 충분한 교류를 하지 못했던 것이 지금에 와서는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3. 지금의 교수님을 있게 한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셨던 분이 누구셨나요?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원래 포닥 지도교수님은 Iowa State University의 Mark Gordon 교수님이셨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큰 영향을 준 분을 꼽으라 한다면 Klaus Ruedenberg교수님을(CASSCF를 처음 개발하신 분) 꼽고 싶습니다. Ruedenberg 교수님은 양자역학의 역사와 같은 분이십니다. 수학과 이론 개발에 탁월한 능력을 갖추신 분이셨습니다. 포스닥 시절 한계에 부딪혀 있을 때 수학에 대한 신세계와 순수 열정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신 분입니다. 저에게 수학은 어렵다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그분은 수학을 마치 음악의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하듯 대하셨고, 수학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분이셨습니다. 하루는 Ruedenberg 교수님과 어떤 문제를 의논하다가 풀리지 않아 다음날 다시 논의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보니 교수님은 이미 상당한 진전이 있었습니다. 그날 새벽 2시에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새벽까지 생각해봤다고 하셨습니다. 당시 여든이 넘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저와 함께 문제의 해결을 위해 밤새워 노력하시는 모습은 지금도 뇌리에 깊이 남아 있습니다. 연구라는게 힘들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진짜 즐거울 수 있구나 하는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4. 교수님은 계산 방법론 개발을 통해 양자화학 계산의 정확도를 높이고 양자계산으로 다룰 수 있는 시스템의 크기를 현저히 높이는 알고리즘 연구를 수행해 오셨습니다. GAMESS 양자화학계산 패키지 공동 개발, QFMM 방법론 개발, SIMOMM 개발, MRSF-TDDFT 이론 개발 등 많은 성과를 내셨습니다. 연구 업적에 약자 이름이 각각 붙여진 것이 인상깊습니다. 교수님의 연구를 화학과 학부생 정도가 이해 할 수 있을 정도로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GAMESS(“게임즈”라고 발음)은 Gaussian과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누구든지 내려받아서 무료로 쓸 수 있는 양자패키지입니다. 저희가 개발한 이론들을 추가하였습니다.
QFMM은 거대 시스템의 계산량을 선형으로 증가하도록 줄이는 방법입니다. Gaussian을 써보면 알겠지만 계산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립니다. 보통은 시스템 크기(N)의 3승으로(N3) 계산량이 늘어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점전하들간 쿨롱힘들의 계산속도를 높이기 위해 개발된 FMM(Fast Multipole Method)을 양자계산에 도입 하였습니다. 즉 시스템 크기 대비 N1(선형) 으로 계산량이 늘도록 하고자 개발한 것이 QFMM입니다. 사실은 좀 더 효율적으로 만들지 못해서 아쉬움이 아직도 있는데 아직 개선의 여지가 많습니다.
SIMOMM 역시 QM/MM의 일종으로 특히 표면화학연구를 편리하게 하기 위해 개발했습니다. 시스템이 너무 크면 계산량이 많아져 모든 것을 양자계산(QM, Quantum Mechanics) 하긴 힘드니 시스템 대부분은 MM(Molecular Mechanics)으로 계산하고 정밀해야 하는 특정 계산은 QM을 하는 하이브리드 방식입니다. 특히 실리콘 반도체 표면에서의 거동을 계산하기 위해서 개발하였습니다.
MRSF-TDDFT는 가장 최근에 개발한 것으로 기존 DFT, TDDFT들의 한계들을 극복하여 특히 원뿔형 교차점, 다이라디칼, 전이상태, 화학결합분해 및 생성 등 기존 이론들로 계산이 불가능했거나 불완전했던 것에 새로운 대안을 제공하고자 개발하였습니다. 경북대에서 교수로 지내면서 어느 날 문득 그동안“연구를 위한 연구”를 진행한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는 연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한 고민을 통해서 2017~2018년에 개발한 것이 MRSF-TDDFT입니다.
기존에 많이 쓰이고 있는 DFT는 다이라디칼 시스템을 기술하지 못합니다. DFT는 두 개의 홑전자를 자꾸 짝을 지으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엉뚱한 계산 값이 나오기 일쑤입니다. 결합의 homolytic한 끊음을 잘 기술하지 못 하는 DFT의 단점들을 MRSF-TDDFT를 통해서 해결하였습니다.
또한, 여기상태의 계산에는 TDDFT를 많이 사용하는데 원뿔형 교차점 등을 올바로 기술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습니다. 서로 다른 전자상태 간의 만나는 교차점을 원뿔형 교차점이라 하는데 한 전자 상태에서 다른 전자 상태로 훌쩍 넘어가는 일이 원뿔형 교차점에서 일어납니다. 한 시스템이 형광을 보이다가 갑자기 형광을 보이지 않는 톌칭 현상을 보이기도 하는데 이게 다 여기서 기인하는 문제입니다. 원뿔형 교차점 근처의 시스템은 여기 상태에 있다가도 펨토초 상간에 기저 상태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거동을 TDDFT를 비롯한 기존 단일 참조 이론들은 잘 계산하지 못하거나, 또 계산할 수 있더라도 계산량이 지나치게 많은 반면, 저희가 개발한 MRSF-TDDFT는 원뿔형 교차점을 찾는 문제를 쉽고 빠르게 그리고 정확하게 잘 계산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존 DFT와 TDDFT로 계산하셨다면 MRSF-TDDFT가 이들의 단점을 극복할 수 있어 좋은 대안으로 적극 추천 드립니다.
5. 교수님께서는 KISTI와의 공동연구를 통하여 “스마트 사이언스 플랫폼”을 개발하셨습니다(mqcp. edison.re.kr). 이 플랫폼에 대해서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 플랫폼이 왜 중요하고 그 임팩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스마트 사이언스 플랫폼은 양자역학 소프트웨어 관련하여 사용자와 개발자 모두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개발한 것입니다. 한 교수님과 같은 양자역학 소프트웨어 사용자의 경우 Gaussian을 많이 사용하실 겁니다. 그런데 사용자의 입장에서 Gaussian을 내려받아서 설치해야 하고, 또 배워야 하는 부분이 큰 진입 장벽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을 웹 기반의 양자역학 소프트웨어를 통해서 해결하고자 하였습니다. 양자역학 계산이 낯선 사용자도 쉽게 양자역학 계산을 할 수 있는 플랫폼을 개발을 통해서 말입니다. 다양한 템플레이트를 통해서 구조만 딱 넣으면 계산이 되는 시스템, 사용자가 굳이 많은 내용을 알지 못해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개발자의 측면에서도 양자역학 소프트웨어 개발에 있어 어려움과 문제점이 많습니다. 먼저 연구개발에 있어 폐쇄성의 문제입니다. 양자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특정 그룹에 소속되거나 그 그룹과 관련이 있어야만 개발에 참여할 수 있는 문제가 있어왔습니다. 또한, 특정 그룹에 속해 있어도 자신이 생각해낸 새로운 양자이론을 기존의 시스템에 더하기 위해서는 기존 시스템을 상당 부분 이해해야만 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보통 반년 이상의 많은 트레이닝 시간이 필요합니다. 비효율적이지요. 마지막으로는 중복투자의 문제가 있습니다. 같은 양자이론이 Gaussian에도 있고 게임즈에도 있고 하는 식이죠.
저희가 제시한 새로운 플랫폼은 기존 소프트웨어를 모듈화하여 실행하는 구조로 되어 있어서 전체 소프트웨어를 이해해야 하는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모듈화를 통해 새로운 양자이론의 도입도 쉽고 그 과정에서 전체를 이해 하지 않아도 되는 플랫폼을 만든 것입니다. 흡사 휴대전화의 앱과 같은 형태로 말이지요. 휴대전화의 앱이 각자의 기능은 제한적이지만 그 각각의 기능을 저희가 편리하게 잘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사용자로서도 다양한 모듈들의 단순 연결만으로 복잡 다양한 계산들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많은 모듈이 개발된다면 컴퓨터언어를 몰라도 본인만의 소프트웨어를 아래 그림처럼 단순한 연결만으로 구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컴퓨터언어 사용 없이 누구든지 자신만의 소프트웨어를 쉽게 개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궁극적 목표입니다.
그동안 굉장히 폐쇄적이었던 양자 소프트웨어의 환경을 개방형 시스템으로 혁신하고자 하는 것인데, Gaussian을 개발했던 사람들이 굉장히 똑똑했겠지만 집단 지성을 이기기는 어려우니까요. 저는 이러한 개방형 플랫폼이 더욱 지속 가 능하게 과학발전을 견인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새로운 무료 개방형 양자소프트웨어(OQP: Open Quantum Platform)를 개발 중이고 곧 일반에 공개할 예정입니다.“스마트 사이언스 플랫폼”과 같은 취지이나 웹 플랫폼이 없이도 그와 유사한 기능을 가지는 소프트웨어입니다. 아래 그림처럼 파이선상에서 쉽게 대중적으로 많이 활용하는 DFT, TDDFT 및 저희가 개발한 MRSF-TDDFT 계산이 가능합니다. 뿐만 아니라 간단한 수정으로 다양하게 계산을 변형 시킬 수 있고 계산결과를 각자의 요구에 맞게 변형 처리 가능합니다. OQP는 제가 하는 연구만 혜택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거의 대부분의 화학자들께서 손쉽게 활용 가능한 소프트웨어입니다. 벌써 해외 연구자들의 관심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Gaussian을 활용하시겠지만 그 폐쇄적 개발환경으로 발전에 한계가 있는 반면 OQP는 개방형 및 모듈형을 추구하여 추가 개발에 있어서 손쉬운 접근이 가능합니다. 새로운 방법론들이 즉각적으로 추가될 수 있고 추가 즉시 활용 가능합니다. 따라서, 국내에서도 OQP 및 그를 활용한 많은 추가 개발/활용이 이루어지길 기대합니다. 지금 거의 최종 개발 단계인데 파이선 잘하시는 화학자분들이 조금만 도와주시면 더욱 빨리 출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많은 도움과 관심 부탁드립니다.
6. 교수님께서는 그동안 많은 논문을 출판하셨습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기억에 남는 논문이 있으신가요? 기억에 남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최근 발표된『JPC Letters』의 Perspective 논문을 통해 MRSF-TDDFT의 소개와 전망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것과 같이 MRSF-TDDFT를 2017년과 2018년에 걸쳐서 개발했는데 그게 실제로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될지는 예측이 쉽지 않았습니다. 양자이론이 결국에는 수학적 결과물에 불과 하기 때문에 실제 화학문제에 적용했을 때 얼마나 유용할지는 해 봐야 아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최초 개발 이후 MRSF-TDDFT를 실제로 써 보니 굉장히 유용한 이론이라는 공감대가 국제적으로 점차 확대되어갔습니다. 국내 최초의 양자이론인 MRSF-TDDFT 가 세계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최근 발표한『JPC Letters』의 MRSF-TDDFT 관련 Perspective 논문은 저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이 이론은 기존 가장 대중적인 DFT 및 TDDFT의 한계들을 거의 대부분 극복하는 몇 안 되는 이론입니다. 앞으로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사용되어 질 것으로 예상합니다.
7. 교수님께서는 주로 이론 및 계산화학분야의 연구를 수행해 오셨습니다. 이론/계산화학과 실험화학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교수님의 생각과 철학을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론/계산화학 연구자와 실험화학 연구자는 너무나 다른 것을 연구하기에 괴리가 큽니다. 심지어 실험화학을 연구하는 연구자 사이에도 연구 주제와 방식이 조금만 다르면 서로에 대한 이해가 어려워지는데 하물며 이론과 실험화학자 사이의 괴리는 더 클 수밖에 없지요. 그 과정에서 서로 간의 오해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화학반응 자체가 양자 현상입니다. 실제 양자세계를 눈으로 볼 수 없으므로 연구는 간접적 증거들로 결론에 도달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스펙트럼 분석은 빛이라는 도구를 활용하여 물질의 양자상태를 간접적으로 살펴봅니다. 실험과 이론은 각기 다른 원리에 기초하여 서로 독립된 데이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최대한 다양한 데이터들을 확보하여 좀 더 일관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서 실험과 이론은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상보적으로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이러한 상호신뢰는 서로의 연구영역을 최대한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이론화학자지만 실험에 대해서 최대한 이해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저의 이론을 엉뚱한 실험결과에 맞추는 것을 미연에 방지해야 하니까요. 실험화학자 역시 이론의 세세한 부분까지는 다 알지 못하더라도 각 이론의 장점은 무엇이다 단점은 무엇이다 정도를 알고 있는 것이 건설적인 논의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8. 교수님께서는 지금까지 화학자의 길을 걸어오면서 좋은 일도 많았지만 고난도 많았을 것이라 예상합 니다. 지금까지의 커리어 중 가장 큰 스트레스 요인 혹은 교수님을 가장 힘들게 했던 요인은 무엇이 었나요? 그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셨고 해결하셨나요?
아무래도 매너리즘에 빠질 때 일것 같습니다. 하던 연구가 잘 되어서 안주하는 순간이 위기인 것 같습니다. 박사학위 그리고 포닥 기간 동안 연구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독립된 연구자가 돼서도 어느 정도 연구를 이어갈 수 있는데, 그 후에는 한계에 부딪히는 순간이 오기 마련입니다. 새로운 것을 추구해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것을 하기에는 실패의 두려움이 크기 때문에 과감한 변화를 주기 힘듭니다. 이를 넘어 서려면 실패의 두려움보다는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 자체를 즐길 줄 아는 마음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때로는 결과에 연연해 하지 않고 과학에 대한 순수했던 마음으로 돌아가 원래 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고민하다 보면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 수 있습니다.
제가 앞서 말씀드린 MRSF-TDDFT도 그러한 고민의 산출이었습니다. 새로운 양자이론을 개발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습니다. 이론적 개념구상, 그의 수학적 유도, 최적화를 위한 각종 수치해석적 기법,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통한 최종 구현 등 다양한 과정을 망라해야 합니다. 투여시간 대비 결과가 비례해서 나오지 않습니다. 당연히 실패할 가능성이 더 많고 비록 개발하더라도 기존 이론대비 우위를 점하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을 즐기고, 훌륭한 학생이 있고 실패 가능성이 대부분이더라도 저 개인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다른 사람들이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양자이론을 개발하겠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9. 교수님께서 풀고 싶으신 궁극의 화학 문제가 무엇인가요?
팸토나 아토초에서 일어나는 전자-핵 상호작용의 체계적 이해입니다. 이에 대한 충분한 이해는 물질의 물성 및 화학반응의 근원적 이해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예를 들어‘빛을 흡수한 DNA가 어떻게 그 추가 에너지를 해소하는지? 왜 특정 물질만 형광을 잘 내는지?’등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 영역에서는 Bohn-Oppenheimer 가정이 성립되지 않고 핵과 전자 간의 상호작용이 중요해집니다. 물론 지금까지 많은 연구 들이 있어왔지만 이를 효과적으로 기술할 수 있는 양자이론이 없었습니다. 저희가 개발한 MRSF-TDDFT가 중요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고 이를 활용한다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발견으로 이어질 것이라 기대합니다.
10. 지금 이 시간에도 화학연구를 열심히 해 나가고 있는 신진/중견 화학 연구자에게 조언의 말씀을 해주 실 수 있을까요?
제가 최근 느끼는 것 중 하나가 국내의 젊은 연구자들이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새로 독립된 연구자로 시작 하면 당장 승진을 생각해야 하고 여러 가지 평가에 대비하기 위하여 연구 업적의 숫자 채우기에 신경을 쓰게 됩니다. 조금은 여유를 갖고 깊은 고민도 해보고 하길 바라는데 현실적인 여건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저희 학과에 신임교수가 부임하면 가장 먼저 하는 말이“이제 좀 쉬어라” 입니다. 그동안 여기까지 오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눈에 선하기 때문입니다. 앞만 보고 달려왔기 때문에 주변을 볼 심적,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상태에서는 중요한 연구적 가능성을 놓칠 수 있습니다. 여건이 힘들수록 조금 여유를 가지시길 권유합니다. 그를 통해 현실과의 타협보다는 힘들지만 이상적인 연구에 대한 구상을 하시길 바랍니다. 최근 외국의 저명학자와 대화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분의 말씀이 한국의 과학자 개개인들은 무척 뛰어난데 한국으로 돌아가면 안주하는(self-contained) 것처럼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비록 한국에 있지만 다양한 국제적 활동과 활발한 교류를 통해 끊임없이 자극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한자리에 머물지 않고 꾸준히 앞으로 진행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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