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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와 생성의 학문, 화학을 다시 생각하다: ‘올해의 분자’가 던지는 질문

  • 1월 2일
  • 3분 분량

김태영 | 광주과학기술원 환경에너지공학과 교수


대한화학회가 ‘올해의 분자(Molecule of the Year)’ 선정 사업을 시작했다. 80년 학회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그동안 학회는 학술대회 개최, 학술지 발간, 연구자 교류 등 학문 공동체 내부의 활동에 주력해 왔다. 그런 학회가 이제 대중을 향해 직접 목소리를 내기로 했다. 무엇이 이러한 변화를 이끌었을까? 그 배경에는 화학의 성과는 다른 분야의 이름으로 소비되는 반면, 부정적 인식만은 화학의 몫으로 남아 온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다. 

이에 대한화학회는 ‘앞으로 화학의 긍정적 기여를 균형 있게 전달하는 데 학계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의지를 담아 ‘화학대중화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올해의 분자’ 사업을 시작했다. 이는 화학이 단순히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변화와 생성을 통해 세상을 다채롭고 풍요롭게 만드는 창조의 도구임을 널리 알리기 위한 상징적인 시도다. 


이름 없는 기여자, 화학 

2023년 노벨 화학상은 양자점(quantum dot) 연구에 돌아갔다. 오늘날 고화질 디스플레이의 핵심 소재가 된 기술이다. 그러나 대중에게 이 소식이 전해질 때, 기사의 제목은 대개 ‘디스플레이 혁신을 이끈 나노기술’이었다. ‘화학’이라는 단어는 본문 어딘가에 묻혀 있거나 아예 등장하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반복된다. mRNA 백신이 코로나19 팬데믹의 돌파구가 되었을 때, 이는 ‘바이오 기술의 승리’로 보도되었다. 리튬이온 배터리가 전기차 시대를 열었을 때, 그것은 ‘에너지 혁명’이라 불렸다. OLED가 디스플레이 산업을 바꿨을 때, 뉴스는 ‘전자공학의 진보’를 이야기했다. 그러나 mRNA의 합성, 배터리 전해질의 개발, 유기 발광 물질의 설계 등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화학이 있었다. 

화학의 성과는 늘 다른 이름으로 번역되어 세상에 전해진다. 정작 ‘화학’이라는 단어가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사고와 오염의 뉴스뿐이다. 낙상 사고를 ‘물리 사고'라 하지 않고, 바이러스 감염을 ‘생물 사고’라 부르지 않지만, 유해 물질 유출은 곧바로 ‘화학 사고’로 보도된다. 성과는 나누고 책임만 홀로 지는 구조가 반복되고 있는 셈이다. 



침묵의 대가 

화학계는 오랫동안 이러한 상황을 감내해왔다.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과학 발전에 기여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대중과의 소통은 학회의 본령이 아니라고 여겼다. 그러나 침묵에는 대가가 따랐다. 사회적 인식은 점점 편향되어 갔다. 젊은 세대에게 화학은 ‘어렵고 지루한 암기 과목’이, 대중에게는 ‘위험하고 피해야 할 것’이 되었다. 화학 전공 지원자는 줄었고, 관련 정책 논의에서 학계의 목소리는 힘을 잃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화학에 대한 오해가 비합리적 의사결정을 낳는다는 점이다. ‘천연은 무조건 안전하고 합성은 위험하다’는 이분법적 사고, 미량의 검출 자체를 곧장 위험으로 간주하는 태도, 농도와 노출 경로를 무시한 공포 등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불필요한 갈등과 비용을 유발하고 있다. 


분자라는 이야기 형식 

그렇다면 왜 하필 ‘분자’이야기일까? 추상적인 개념이나 거대한 담론 대신 구체적인 분자 하나를 선택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분자는 화학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이면서, 동시에 풍부한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다. 하나의 분자에는 그것을 발견하거나 합성한 과학자의 이야기, 구조와 성질을 밝혀낸 연구의 역사, 산업적 활용과 일상적 쓰임, 그리고 잠재적 위험과 관리의 문제가 함께 담겨 있다. 분자 하나를 깊이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화학이라는 학문의 본질과 화학이 사회와 맺어 온 관계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또한 분자는 시각적이다. 구조식이라는 형태로 눈에 보이고, 모형으로 만들 수 있으며, 그 모양 자체가 기억에 남는다. 벤젠의 육각형 고리, 물 분자의 꺾인 구조, DNA의 이중나선은 과학적 개념을 대중의 기억 속에 각인시키는 강력한 이미지다. 해외에서도 분자를 매개로 한 과학 커뮤니케이션은 이미 활발하다. 국제순수응용화학연합(IUPAC)의 ‘국제 주기율표의 해’, 미국화학회(ACS)의 ‘이달의 분자’ 시리즈는 대표적인 사례다. 대한화학회의 ‘올해의 분자’ 사업은 이러한 국제적 흐름에 발맞추면서, 국내 맥락에 맞는 고유한 콘텐츠를 만들어가고자 한다. 


균형의 미학 

‘올해의 분자' 사업의 핵심은 단순한 홍보가 아닌 ‘균형’에 있다. 긍정적 측면만 부각하는 것은 또 다른 왜곡이다. 첫 번째 선정작인 벤젠(Benzene)이 좋은 예다. 벤젠은 현대 화학 산업의 초석이자 방향족 화학이라는 거대한 분야를 연 주인공이지만, 동시에 1군 발암물질이기도 하다. 인류에게 수많은 의약품과 소재를 선물했지만, 부적절한 노출은 치명적인 질병을 부른다. 사업은 이러한 양면성을 있는 그대로 조명한다. 화학물질에는 본질적으로 ‘선함’도 ‘악함’도 없다. 오직 물질의 성질에 대한 이해와, 그에 기반한 적절한 사용 및 관리만이 있을 뿐이다. 벤젠의 사례는 유용성과 위험성이 어떻게 공존하는지, 왜 과학적 이해에 기반한 안전 관리가 필수적인지를 역설한다. 


학계의 새로운 책임 

‘올해의 분자’ 사업은 대한화학회가 대중과 소통하는 방식의 전환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그동안 학회의 대외 활동은 정책 제언이나 산학 협력에 집중되어 있었고, 일반 대중을 직접 대상으로 하는 콘텐츠 생산은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이제 학회는 분자 선정에 그치지 않고, 교육 자료 개발, 청소년 대상 강연과 체험 프로그램, 온라인 콘텐츠 제작, 언론과의 협력을 통한 기획 보도 등으로 활동을 확장해야 한다.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해마다 축적되는 콘텐츠를 통해 화학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가는 것이 목표다. 변화는 단기간에 완성되지 않지만, 시작하지 않으면 가능성도 없다. 화학계가 스스로의 이야기를 스스로의 언어로 전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이 사업은 의미 있는 첫걸음이다. 


분자가 전하는 메시지 

‘올해의 분자’로 선정된 분자 하나하나는 화학이 세상과 맺어온 관계의 단면을 보여주는 창이 될 것이다. 어떤 분자는 인류의 삶을 극적으로 바꾼 발명의 이야기를 전할 것이고, 어떤 분자는 실패와 부작용을 딛고 더 나은 대안을 찾아간 과정을 보여줄 것이다. 또 어떤 분자는 아직 풀리지 않은 과학적 수수께끼를 품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쌓여갈 때, 대중은 화학을 단순히 ‘위험한 것’ 혹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고 변화시켜온 인간 노력의 한 축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것이 ‘올해의 분자’ 사업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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