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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물 이해하기



최정모 | 부산대학교 화학과,



화학자들에게 있어 유기물의 존재는 골치 아픈 것이었습니다. 이슬람 연금술 때부터 다양한 유기물을 탐구해 왔지만, 이들은 그 정체를 쉽게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유기물들은 당시의 기술로 순수하게 얻는 것이 상당히 어려웠고, 설사 순수한 물질이라 하더라도 그 형성 원리가 명백하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서로 다른 유기물들이 비슷한 원소들(탄소, 수소, 산소, 질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도 문제를 어렵게 만들었죠. 그래서 19세기 초까지 활동했던 많은 화학자들이 유기물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무기물에 집중해서 연구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베르셀리우스의 활동 시기와 맞물려 유기물에 대한 몇 가지 설명이 등장하고, 이를 기반으로 유기물에 대한 체계적 이해를 시도할 수 있게 됩니다. 이번 글에서는 19세기 초반, 유기물이 어떻게 화학으로 포섭되어 왔는지 그 초기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참고문헌 1]

연금술사나 화학자들이 유기물을 특별하게 취급했던 것은 아닙니다. 유기물 역시 무기물을 다루는 방식으로 연구할 수 있었고, 다만 그 기원이 동·식물이라는 점이 차이점이었죠. 예를 들어 1801년에 출판된 화학 교재를 보면, 유기물 분석 방법으로 비중 분리법, 증류법, 연소 분석, 침출법, 산 처리, 염기 처리, 용해 분석(물, 알코올, 에터, 기름), 발효 등이 소개됩니다. 대개 무기 물질에도 적용할 수 있는 실험 기법들이었죠. 하지만 보시다시피 순물질을 분석하는 방법과 혼합물을 분리하는 방법이 섞여 있었고, 순물질 분석법들조차 대부분 정성 분석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당시까지도 유기물은 확실한 설명 체계가 존재하기 어려웠습니다. 라부아지에는 자신의 책에서 유기물을 모두 묶어 하나의 장에서 설명하면서 원리보다는 각 물질의 성질을 간단히 소개하는 선에서 멈추었습니다.

그러다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많은 수의 유기물이 분리되었고, 그들의 조성이 점차 정확하게 알려집니다. 메테인(CH4)은 오래전부터 습지 기체(marsh gas)로 알려져 있었는데, 18세기 말 베르톨레에 의해 탄소와 수소로 구성되어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에틸렌(C2H4)은 1794년 발견되었고,[참고문헌 2] 1805년 그 조성이 정확히 알려집니다. 보클랭(Louis-Nicolas Vauquelin, 1763-1829)은 이 시기에 활동한 프랑스의 약사이자 화학자로, 요소(urea, CON2H4), 장뇌산(camphoric acid, C10H16O4), 알란토인(allantoin, C4H6N4O3), 아스파라진(asparagine, C4H8N2O3), 퀸산 (quinic acid, C7H12O6) 등을 분리하는데 성공합니다. 프루스트(Joseph Proust) 역시 이 시기에 식물의 즙을 연구하여 포도당, 과당, 설탕을 분리해냈고, 만니톨(mannitol, C6H14O6)과 루신(leucine, C6H13NO2)도 얻어냈습니다.

이내 화학자들은 유기물이 대부분 탄소, 수소, 산소로 구성되어 있음을 깨닫습니다. 게이뤼삭(Joseph Gay-Lussac)과 테나르(Louis Thenard)는 이 가정을 도입하여 1810년과 1811년에 걸쳐 19가지의 유기 물질을 원소 분석한 결과를 출판합니다. 이들은 염소산 포타슘(KClO3)을 산화제로 사용하여 각 물질을 산화시킨 후 부피를 측정하여 탄소, 수소, 산소의 비율을 결정하였습니다. 베르셀리우스 역시 이 문제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비슷한 기구를 고안하여 1814년 13가지 유기 물질의 분석 결과를 출판하였습니다. 관건은 생성물의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산화가 완전히 일어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강력한 건조 과정을 거치는데, 그 결과 많은 경우 생성물은 무수물(anhydride) 형태로 얻어지게 됩니다. 게이뤼삭은 베르셀리우스의 기구를 보고 더 정확한 측정을 할 수 있도록 개선해내죠. 결국 1815년에 이르면 게이뤼삭과 베르셀리우스의 분석 방법은 각각 충분히 안정화되어, 양측의 측정값이 잘 수렴하게 됩니다. 이렇게 유기물의 정량 분석이 체계를 갖추자, 본격적인 유기화학 연구가 시작됩니다.

게이뤼삭은 1815년 사이안화 수소(HCN)로부터 사이아 노젠(C2N2)을 얻었고, CN이 마치 하나의 원소인 것처럼 행동한다는 기록을 남깁니다.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Cy라는 기호를 도입하여 CN 대신 사용하기도 하였죠. 또한, 알코올과 에터에 대해 밀도를 측정하여 에틸렌과 물의 밀도를 더하여 그 밀도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즉, 식으로 쓰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단위 부피의 알코올 기체

= 1 단위 부피의 에틸렌 기체 + 1 단위 부피의 수증기 1 단위 부피의 에터 기체

= 2 단위 부피의 에틸렌 기체 + 1 단위 부피의 수증기


이는 유기물 내부에 무언가 구조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구조 가설”은 이성질 현상의 발견으로 더욱 탄력을 받습니다.[참고문헌 1]

1810년대부터 이성질체의 존재는 어렴풋이 알려져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포도당과 과당은 서로 다른 분자지만 동일한 조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점에 착안하여 베르셀리우스는 1815년“유기 원자들[참고문헌 3]이 특정한 물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중략) 구조가 아니라면 동일한 원소로 구성된 서로 다른 생성물들을 설명할 수 없다.”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이성질 현상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1826년 게이뤼삭이 라세미산(racemic acid)과 타르타르산(tartaric acid)의 조성이 동일하다는 것을 발표하면서 시작됩니다. 이후 다른 물질들에서도 이성질 현상이 발견되었고, 1830년 베르셀리우스가 여기에 이성질 현상(isomerism)이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그 존재가 확실해졌습니다.

베르셀리우스는 전기적 이원론이 물질의 내부 구조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를 이용해 이성질 현상을 설명 하려고 하였습니다. 즉, 무기화합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전기적으로 양성을 띤 부분과 전기적으로 음성을 띤 부분이 결합하여 유기화합물을 이룬다는 것이죠. 그러면 예를 들어 A3B3와 같이 동일한 화학식에 대해 AB와 A2B2가 결합한 화합물과 A2B와 AB2가 결합한 화합물이 존재할 수 있게 되어 이성질 현상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1832년, 베르셀리우스는 실험으로 그 원소 조성이 결정된 화학식을“실험식(empirical formula)”이라 부르고, 화학 이론에 따라 그 조성을 단위 덩어리로 풀어낸 식을“시성식(rational formula)”이라 불러 구분하였습니다.[참고문헌 4]

베르셀리우스의 영향으로, 이 시기에 유기 물질을 두 덩어리로 쪼개서 이해하는 사조가 유행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뒤마(Jean-Baptiste Dumas, 1800-1884)와 불레 (Felix-Polydore Boullay, 1806-1835)는 1828년 다음과 같이 에틸렌과 암모니아가 유기물 내에서 유사한 거동을 보인다는 점을 관찰하여 보고하였습니다. 이후 글에서 살펴 보겠습니다만, 이렇게“덩어리”가 존재한다는 개념이 훗날 작용기(functional group)의 개념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러한 초기 유기화학의 발전에는 베르셀리우스의 화합물 표기법이 지대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1813년 발표된 이 표기법은 처음에는 그다지 관심을 못 받다가 유기화학이 발전하면서 1820년대 후반부터 널리 사용되었죠. 과학사학자 우르술라 클라인(Ursula Klein)은 이 표기법을 화학 연구의“종이 도구(paper tool)”라며 극찬하는데요, 이는 베르셀리우스 표기법이 실험으로 확인할 수 없는 분자 세계의 복잡한 화학 반응을 종이 위에서 시뮬레이션해 볼 수 있는 강력한 도구였기 때문입니다.[참고문헌 5]

클라인이 소개한 한 가지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알코올과 산을 섞으면 에터가 얻어진다는 사실은 19세기 전부터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19세기 초의 여러 연구를 통해 어떤 산을 섞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에터가 얻어진다는 점이 알려졌습니다. 황산과 알코올을 섞으면“황산 에터”가, 질산과 알코올을 섞으면“질산 에터”가, 그리고 염산과 알코올을 섞으면“염산 에터”가 얻어졌죠. 보클랭은 알코올과 산이 결합하면서 에터가 형성된다고 생각했고, 이 가설은 19세기 초에 널리 수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화학자들은 다르게 생각했습니다.“황산 에터”가 만들어지고 나면 아황산이 생성되는 것을 관찰한 것입니다. 어쩌면 황산이 아황산과 산소로 분해되고 그 산소가 알코올에 전달되어 에터가 만들어지는게 아닐까요? 1820년에 황산 에터 생성 반응에서 에틸 황산염(ethyl sulfate, C2H5HSO4)이 부산물로 발견 되면서 이 대안이 급격히 인기를 끌게 됩니다. 즉, 황산의 산소 하나가 알코올과 결합하여 에터가 되고, 황산은 황산과 아황산의 중간 단계로 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논쟁을 종식시킨 것은 뒤마와 불레의 1827년 논문이었습니다. 뒤마와 불레는 이 논문에서 황산 에터의 생성 반응에 대한“반응식”을 활용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반응식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데요, 등장 요소들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합시다.[참고문헌 6] 먼저 반응물인 황산과 알코올을 생각해 봅시다. 황산은 무수 황산의 형태로 SO3 로 표기합니다. 알코올(에탄올, C2H6O)은 에틸렌(C2H4)과 물(H2O)이 결합된 형태로 이해되고 있었으므로, 무수물은 C2H4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탄소의 원자량을 6으로 보았으므로,[참고문헌 7] 결국 알코올은 C2H2로 표기할 수 있습니다. 생성물은 어떤가요? 에틸 황산염은 정량 원소 분석을 통해 S2O5 + 2H3C4의 조성을 가지고 있음이 밝혀졌습니다.[참고문헌 8] 마지막으로 양변을 같게 맞추기 위해 물(H2O)을 생성물에 추가하면 다음과 같은 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식은 골치 아픈 유기 반응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줍니다. 반응물인 황산과 알코올이 결합하여 에틸 황산염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직관적으로 드러납니다. 게다가 기존의 정성적 이론에서는 예측할 수 없었던 물의 생성을 예측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 실험은 수용액에서 진행되었으므로 그 동안은 물이 크게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이렇게 이론적 예측이 주어지면 정량 분석을 통해 반응 이후 물이 더 생겼는지 알아볼 수 있겠죠.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당시 반응식은 실제 반응을 기술한다고 믿어지는 오늘날의 반응식과는 달리 대수 방정식과 같은 존재로 이해되었습니다(식의 가운데에 이중 화살표 대신 등호가 사용된 것을 보세요). 지난 글들 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아직“원자”의 개념이 확고하게 정립되지 않은 시대였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반응식의 계수 들을 분자의 몰수와 대응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저 산술적으로 양변의 계수를 맞추면 반응을 예측할 수 있다는 실용적 의미가 강했고, 왜 이 대수식이 화학 반응을 설명하는지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도 제시하기 어려웠죠. 하지만 화학자들은 이 식으로 복잡한 유기 반응을 예측할 수 있다는 데에 열광했고, 베르셀리우스의 표기법은 화학계의 표준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오늘 글은 많은 오해를 불러온 개념인 생기론(vitalism)에 관한 논의로 마무리해볼까 합니다. 글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19세기 이전 화학자들도 유기물이 특별한 물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유기물 자체에 초자연적인“생기”가 포함되어 있다고 믿었던 것이 아닙니다. 다만 무기물과는 달리 유기물은 실험실에서 합성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유기물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생명체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죠. 이것을 생기론이라고 부릅니다. 흔히 알려져 있는 이야기에서, 이 생기론은 1828년 뵐러(Friedrich Wohler, 1800-1882)가 사이안산과 암모니아로부터 요소를 합성하면서 한 번에 박살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뵐러 신화”는 역사적으로 사실이 아닙니다.[참고문헌 9] 1837년에 발행된 베르셀리우스의 화학 교재에서도 여전히 유기물은 생명체 안에서만 합성될 수 있다는 언급이 나옵니다. 생기론은 뵐러의 요소 합성 이후에도 계속해서 화학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1840년대에 와서야 그 자취를 감춥니다.

뵐러의 요소 합성 실험은 당대에도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만, 생기론과 연관되어 관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당시 뵐러가 사용한 재료인 사이안산과 암모니아는 유기물로부터 얻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들로부터 요소를 합성했다는 사실이 유기물 합성에 생기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 예가 될 수 없었죠. 도리어 뵐러는 산과 염기를 섞어 염을 얻기를 기대했는데 염이 아닌 물질이 생성되었다는 점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또 요소의 조성이 사이안산 암모늄(NH4OCN)과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 성질 현상의 또다른 예로서 흥미롭게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뵐러 신화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요? 1840년대에 생기론이 완전히 축출된 이후, 유기화학의 시작점을 찾고 싶었던 화학자들은 뵐러의 요소 합성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 합니다. 이제 이 실험은“최초로 무기물로부터 유기물을 합성한 실험”이자“생기론을 끝장낸 실험”이 된 것입니다. 뵐러는 베르셀리우스의 제자였고, 비슷한 시기 활동했던 뒤마, 리비히(Justus Liebig, 1803-1873)와 더불어 새로운 세대를 대표하는 화학자였습니다. 오늘 글에서 살펴본 것 처럼, 이들의 스승 세대인 게이뤼삭과 베르셀리우스 세대는 일견 이해가 불가능해 보였던 유기물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입구를 만들었습니다. 그 뒤를 이어 이 젊은 세대 과학자들이 유기물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죠. 다음 글에서는 이들의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해볼까 합니다.




참고문헌

  1. 이 내용은 다음 글들에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Aaron J. Ihde, The Development of Modern Chemistry (New York, NY: Dover Publications, Inc., 1984), Chapter 7; Alan J. Rocke,“Organic analysis in comparative perspective: Liebig, Dumas, and Berzelius, 1811-1837,”in Instruments and experimentation in the history of chemistry, eds. F.L. Holmes and T.H. Levere (Cambridge, MA: MIT Press, 2000); Alan J. Rocke,“The Theory of Chemical Structure and Its Applications” in The Cambridge History of Science, Volume 5: The Modern Physical and Mathematical Sciences, ed. Mary Jo Nye (Cambridge, United Kingdom: Cam- bridge University Press, 2002).

  2. 당시 이름은 olefiant gas(기름을 만드는 기체)였습니다. 혼동을 막기 위해 이후로는 오늘날의 이름으로 부르겠습니다.

  3. atoms. 오늘날의 용어로는“분자들(molecules)”이겠습니다만, 당시에는 두 용어가 구분 없이 쓰였음을 기억합시다.

  4. “시성식(示性式)”이라는 번역어는“그 구성 성분을 보여주는 식”이라는 의미로, 후대 화학의 관점이 들어가 있습니다. 베르셀리우스의 rational formula는 (empirical formula 와는 상반되게) 이론을 통해 세운 식이라는 의미가 더 강합니다.

  5. Ursula Klein,“Berzelian Formulas as Paper Tools in Early Nineteenth-Century Chemistry.”Foundations of Chemistry 3: 7-32 (2001). 6. 여기서는 뒤마와 불레의 원래 논문에 등장한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겠습니다.

  6. 지난 글들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당시 화학계는 원자량에 대한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7. 오늘날 이온 결합 화합물을 표기하는 방법으로 쓰자면 (S2O5)(H3C4)2처럼 쓸 수 있습니다. 뒤마와 불레가 베르셀리우스의 이원론을 따라 에틸 황산염이 두 가지 구성 요소, S2O5와 H3C4가 1:2로 결합된 형태라고 믿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8. Douglas McKie,“Wohler’s‘Synthetic’Urea and the Rejection of Vitalism: a Chemical Legend,”Nature 153: 608-610 (1944); John H. Brooke,“Wohler’s Urea, and its Vital Force?—a Verdict from the Chemists,”Ambix 15 (2): 84-114 (1968); Peter J. Ramberg,“The Death of Vitalism and The Birth of Organic Chemistry: Wohler's Urea Synthesis and the Disciplinary Identity of Organic Chemistry,”Ambix 47 (3): 170-195 (2000).



최정모 Jeong-Mo Choi

• 한국과학기술원 화학과, 학사(2003.3-2011.8)

• Harvard University 과학사학과, 석사

(2011.9-2015.5, 지도교수 : Naomi Oreskes)

• Harvard University 화학 및 화학생물학과, 박사 (2011.9-2016.5, 지도교수 : Eugene I. Shakhnovich)

• Washington University in St. Louis, 박사 후 연구원(2016.8-2019.4, 지 도교수 : Rohit V. Pappu)

• 한국과학기술원 자연과학연구소, 연구조교수(2019.6-2020.8)

• 부산대학교 화학과, 조교수(2020.9-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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