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장세헌 교수(서울대학교 화학과, 대한화학회 회장(1980~1982))
물리화학의 태두 장세헌 교수님의 존함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으나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된 것은 제가 1981년 서울대학교 화학과 조교수로 임용되면서부터입니다. 선생님과는 전문 분야가 달라 함께 연구할 수 있었던 기회는 없었지만, 동료 선배 교수님들과 화학과 동문을 통하여 교수님의 고매한 인격과 학문적 진지함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화학과 교수 회의 또는 회식자리에서 교수님의 아우이신 장세희 교수님과 담소를 나누시던 모습이 한 장면의 오래된 사진처럼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선생님의 백수(白壽, 99세)와 백수(百壽, 100세)를 축하드리기 위해 서울대 자연대학의 옛 동료들과 교수님 댁을 방문하였을 때 반듯하신 자세로 반가이 맞아주셨던 일이 기억납니다. 우리나라 해방 전후, 6·25 전쟁 전후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시고 납북 과학자들의 소식과 경성제대 시절 및 서울대학교 설립 당시 혼란했던 우리나라의 정치적 환경이 우리나라 과학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소상히 설명해 주시는 선생님의 놀라운 기억력에 모두 감탄하기도 하였습니다. 올 초 돌아가시기 한 달 전쯤 학술원 제1분과 회장이신 이호인 교수와 선생님의 국민 훈장 1등급‘ 무궁화장’ 정부포상 후보자 추천을 위한 서류를 준비하던 중 선생님의 소천 소식을 접하고 비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1941년부터 시작된 선생님의 학문 여정은 경성제국대학에서의 예과 과정으로 시작하여, 경성대학 이공학부 화학 분야에서 이학사 학위를 취득하셨으며 1958년부터 1960년까지 미국 유타대학교에서 매우 짧은 기간에 화학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시어 모교인 서울대학교에서 계속 교수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1946년 서울대학교 화학과 교수 조무원으로 시작하여 1947년 전임강사, 1954년 조교수, 1956년 부교수, 1961년 정교수로 그리고 1989년 명예 교수에 이르기까지, 평생을 학문의 최전선에서 후학 양성과 연구에 매진하셨습니다. 장세헌 교수님은 국어학자 장지영(1887~1976) 선생님의 장남이며, 아우 장세희 교수(1927~1997)도 서울대학교 화학과 교수로 재직하셨고, 장남 장직현은 서강대학교 컴퓨터학부 명예교수로, 차남 장태현은 포항공과대학교 화학과 명예교수로, 장태현 교수의 아들 장완수 박사(화학박사)는 LG에너지솔루션에서 연구하고 있어‘ 3대 화학자 가문’을 이루시어 모든 이들이 부러움을 샀습니다.
선생님은 1980년부터 1982년까지 대한화학회 회장과 1981년부터 작고하시기까지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으로서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발전에 크게 기여하셨습니다. 또한, 녹조근정훈장(1960. 03), 대한민국 과학상 대통령상(1971. 04), 국민훈장 동백장(1972. 08), 그리고 국민훈장 모란장(1989. 02) 등 수많은 상과 훈장을 수훈하시어 국가적으로도 교수님의 업적을 인정받았습니다.
한국 화학계의 선구자: 한국전쟁 이후 기초과학의 틀을 마련하다
1945년 해방 후 미래 세대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선배 과학자들의 선구적인 노력이 계속되었습니다. 학문 후
속세대인 지금의 교수들이나 학생들은 일제강점기 말과 한국전쟁 이후 우리나라 기초과학의 기틀 마련이 얼마나
절망적이었을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1. 일제로부터의 해방 및 한국전쟁의 혼란 속에서
선생님은 경성제국대학(일본 제국의 패망과 함께 한국이 광복된 후 경성대학으로 전환되었다가, 미군 군정에 의해 폐교) 이공학부 화학과에 재학 중이던 시절, 일본인 교수가 제안한“ 수소이온 농도가 과산화수소의 분해속도에 미치는 영향”을 주제로 연구를 수행했습니다. 과산화수소는 로켓 연료로 쓰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일본인 교수가 군수 연구의 일부 과제를 교수님께 맡겼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함께 화학과에 재학하던 오태호님(유기화학전공)은 플라스틱 관련 과제를 수행했습니다. 이후 해방을 맞아 1946년 여름경성대학 화학과의 처음이자 마지막 졸업생이 된 선생님은 졸업과 동시에 조교(助敎)로 임용되었고, 같은 해 경성대학이 서울대학교로 개편되면서 세계적인 물리화학자 이태규 교수님을 비롯한 김순경, 김용호, 최규원, 최상업, 오태호 교수님 등과 함께 서울대학교 화학과 학생들을 지도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서울대학교 화학과는 당시로는 이례적일만큼 수준 높은 교수진을 갖추게되어 예과 학생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하지만 소위‘ 국대안 파동’(1946-1948)으로 인해 학교 전체가 어수선해졌고, 이태규 교수님은 1948년 문리대 학장을 사직하고 미국 유타대학으로 떠났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고, 이태규 교수님은 미국에서 자리를 잡은 뒤 많은 한국인 유학생을 지도하며 척박한 고국에 과학연구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선생님도 유타대학에서 이태규 교수님의 지도를 받아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1950년대 들어 서울대학교 화학과의 교수진 중 김순경, 최상업(1954), 최규원(1955), 김태봉(1956), 장세희(1958) 교수 등이 차례로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2. 가난한 나라에서 빛난 교육의 힘
1955년 당시 우리나라는 세계 최빈국으로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65달러에 불과하여 제대로 된 과학연구를 할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선생님은 학생들의 교육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한만운, 김태린, 김시중, 김길종 등 네 명의 대학원생들의 논문을 지도하셨습니다.
당시 한만운은 리제강(Liesegang; 젤(gel)에 침전을 이룰 수 있는 성분을 포함한 물질을 녹인 후, 침전을 만드는 성분을 첨가하면 젤의 표면에서 동심원 고리 모양의 침전이 생김) 현상을 연구했고, 김태린은 용액 속에서 크롬·황이 콜로이드 형태로 분산될 때 색깔과 분산 사이의 상호관계를 연구했습니다. 김시중은 직접 장비를 만들어 전기영동(electrophoresis) 실험을 진행했고, 김길종은 단분자 화학을 연구 주제로 삼았습니다.
선생님은 연구비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학부 교육에 배당된 학과 예산을 절약하여 일부를 대학원생 실험비로 충당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학술지를 구하기도 매우 어려워 미국에서 연구하고 있던 이태규 교수의 개인소장 학술지를 화학과에 기증받기도 했습니다.
3. 미국 유타대학교 유학을 통한 학문적 갈증의 해소
선생님은 해방 후 서울대학교의 교수 조무원, 전임강사 및 조교수(1946 ~ 1956)로 봉직하면서 액체구조 이론과 계면화학의 연구 및 교육에 몰두하여, 기초과학의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하셨습니다. 교수님께서는 미국 유타대학에서 Henry Eyring 교수님 지도하에‘ Significant structure theory of liquids’의 창안에 참여하셨으며, 이 이론을 활용하여 액체의 표면장력을 분자의 기본 성질로부터 통계 열역학적으로 계산하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이는 과학적 발견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액체의 본질을 이해하는 새로운 창을 열었습니다.
4. 귀국 후 서울대학교의 어려운 연구 환경
선생님은 미국에서 귀국하여 서울대학교 화학과의 우수한 학생들을 많이 지도할 수 있었으나 당시 우리나라의 열악한 경제 상황으로 국가연구비 수혜는 상상할 수도 없었으며, 1970년대 말까지도 우리나라 과학기술 분야에서 제대로 된 연구를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1950년대에는 거의 모든 교수가 유학을 떠나 대학 운영이 어려웠고, 1960년대에는 유학을 떠났던 교수들이 한 두 명씩 돌아왔지만, 연구수행은 불가능하였습니다. 단지 어떻게든 학생들이 학문에 뜻을 가지고 유학할 수 있도록 길러내는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자연과학에서 실험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어, 선생님은 귀국한 뒤 이론 연구에 주력하면서도 필요한 장비를 만들어가며 실험하고자 노력했습니다.
1974년 지금의 관악 캠퍼스로 이주하고 나서 몇 가지 의미 있는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관악 캠퍼스로 옮긴 뒤에도 한동안은“ 물리화학 연구실”,“ 유기화학 연구실”과 같이 분야별로 공동 실험실을 운영하였으나 1970년대 말 화학과의 교수진이 급격히 팽창하면서 새로 들어온 젊은 교수들의 연구 공간문제가 불거져 나왔습니다. 화학과 교수회의에서 이것을 해결하게 된 것은 1980년대가 다 되어서의 일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어려움을 딛고 1985년 전후해서 본격적으로 경쟁력 있는 연구가 시작되었고, 대학원도 양과 질 관점에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과거를 돌아보면 실로 격세지감이 느껴지며, 선배 교수님들의 노고와 척박한 시절을 견뎌온 선생님의 삶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5. 열정과 노력이 이루어낸 탁월한 연구업적
선생님은 1960년에 귀국하여 아르곤, 산소, 질소, 사염화 탄소, 메탄, 벤젠, 사이클로헥산 등 30가지 액체의 몰부피, 증기압, 엔트로피, 임계값, 압축률, 열용량, 표면장력과 같은 열역학적인 파라미터를 성공적으로 계산해 내었으며, 이성분 액체 혼합물의 증기압, 몰부피, 엔트로피, 압축률 등을 이론적으로 계산하여 분자의 성질을 이해하는데 기여하였습니다.
1960년대 중반에는 액체의 흡착 현상을 연구하기 위해 미량천칭을 직접 개량해 쓰기도 했으며, 1968년부터는 기체-고체 계면 현상에 대한 연구로서 철-산소, 철-수증기의 표면 반응 속도를 Quartz Crystal Microbalance를 이용하여 측정하고, 반응 메커니즘을 Argon Matrix Isolation 법을 통해 밝히셨습니다. 또한 액체 표면장력이 표면의 곡률에 따라 변함을 밝혀내고, 이 현상이 다공성 물질의 동공 부피 분포를 흡착 등온식으로부터 산출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연구하셨습니다. 더불어, 구형 분체 표면의 물리흡착에서 표면장력의 곡률 의존도가 구의 접촉점에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도 밝혔으며, 이러한 연구는 지금도 나노소재, 다공체, 및 고체 촉매 설계의 기초 지식을 제공하는 매우 중요한 결과가 되었습니다.
6. 제자 사랑 그리고 우수한 후학양성
선생님의 이와 같은 커다란 학문적 업적이 학문 후속 세대에게 귀감이 된 것 이상으로 선생님의 순수하고 선한 삶도 후학들에게 큰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연구실 제자들이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선생님의 제자 사랑은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감동적인 이야기들로 남아있는데, 예로서 당시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조창현 박사가 외국 유학을 준비할 때 선뜻 재정 보증을 서주신 일을 들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화학과 동창회장으로서도 오랜 기간 봉사하셨으며, 동문 간의 친목 도모와 상호 지원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셨고, 어려운 후배들이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동창회 장학금 제도를 마련하셨습니다.
동창회 명부에 기재된 모든 동문의 이름을 기억하셔서 동문들로부터 큰 존경과 감사를 받았습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많은 동문의 이름을 기억하시냐고 여쭈었을 때, 선생님께서는“ 기억하려고 노력하지”라고 겸손하게 답하셨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선생님 연구실에서 연구를 수행한 대표적인 화학자로는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이었던 고 김태린 교수, 미국 학술원 회원이었던 고 김성환 교수, 전 과학기술부 장관인 고 김시중 교수 등이 있으며, 대한화학회 회장을 역임한 한만운, 안운선, 김낙중, 이순보 교수 등을 들 수 있습
니다.
진정한 교육자로서의 참모습
1970년대 초반 당시 연구 자금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선생님은 연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이론 연구를 꾸준히 진행하시며, 제한된 자원으로도 실험 연구의 토대를 차근차근 준비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지식의 추구가 아닌, 진정한 학문적 집념의 표현이었습니다.
선생님 연구실 문하생(울산대 박상윤 명예교수)의 후담에 따르면, 선생님의 연구비 관리는 엄격했으며, 계획된 예산안에서 정확히 집행하시어 연구의 질을 유지하였습니다. 그 시절 연구비 사정이 좋지 않아 대부분의 연구 참여자들이 인건비를 포기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대학원생들과 학과 사무실의 사무장이었던 나상도 씨에게도 적지만 공평하게 연구 참여비와 수고비를 분배하셨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단순히 재정적 지원을 넘어, 학생들과 직원들에 대한 깊은 존중과 애정을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또한 대학원생들이 대한화학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함으로써 학문적 호기심과 연구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도록 배려하셨습니다.
선생님의 학문적 엄격함과 인간적인 관심이 조화를 이루는 교육 방식은 가정 교육에 있어서도 자녀들이 학문에
대한 열정과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갖도록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두 아드님과 손자가 우리나라 과학기술계에
큰 기둥이 되었으니, 이보다 더한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인생길에는 늘 희로애락이 교차하듯, 사모님과
이른 사별, 사랑하는 아우 장세희 교수와 몇몇 소중한 제자들의 갑작스러운 별세는 선생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평정심을 유지하셨으며, 이는 선생님의 절제된 삶과 깊은 내면의 힘을 보여주는 한 단면
이었습니다.
추모사를 마치며
선생님께서는 연구에 대한 놀라운 이해와 통찰력으로 제자들은 물론 화학계의 후배들에게 새로운 지식의 세계로
안내하는 등대와 같은 존재셨습니다. 학문적 업적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면모와 깊은 인품은 우리 모두에게 깊은 영
감과 감동을 주셨으며, 선생님께서는 학문에 헌신하시고 동문 사회에 깊은 애정을 가지셨으며 끊임없는 배움의 가
치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후학 양성에 있어 항상 겸손하고 열정적이셨으며 지식을 전달하는 것 이상의 가
치를 우리에게 깨우쳐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선생님을 떠나보내지만, 선생님의 정신은 한국 과학계와 우리 사회
곳곳에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입니다. 비록 이생에서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큰 가르침을 저희에게 남기신 선생님! 감
사드리며 마음 깊이 간직하겠습니다. 영원한 화학계의 거목, 장세헌 교수님께 존경과 추모를 바치며, 평안한 안식
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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