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線)의 세계(2026년 8월호)
- 7월 28일
- 8분 분량
최종 수정일: 7월 30일

“원자”는 어떤 존재일까요? 19세기 말의 화학자들은 원자를 그저 원자량, 원자가 등 몇 가지 성질을 가지고 있는 단순한 입자로 생각했습니다. 화합물의 변화무쌍한 세계를 설명하기에는 그 정도면 충분했죠. 하지만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원자의 기존 개념은 크게 뒤집히게 됩니다. 이 과정에는 이웃 학문인 물리학의 역할이 컸습니다. 19세기 말의 물리학자들에 의해 X선과 방사능이 발견되면서 원자의 내부 구조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고, 그에 따라 화학계 역시 큰 개념적 혁명을 겪어야 했죠. 오늘은 이 모든 일의 효시가 된 1890년대의 사건들을 다뤄보도록 하겠습 니다.[참고문헌 1]
눈에 보이지 않는 빛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19세기 초부 터 알려져 있었습니다. 프리즘으로 백색 빛을 분해하였을 때 붉은색 너머, 혹은 보라색 너머의 영역에도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떤 작용을 할 수 있는 빛이 존재한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죠. 붉은색 너머의 빛은 열을 전달하기에 “열선(heat rays)”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고, 보라색 너머의 빛은 화학 변화를 일으키기에 “화학선(chemical rays)”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습니다. 이는 19세기 후반이 되어서 적외선(infrared ray)과 자외선(ultraviolet ray)이라는 용어로 대체되었죠.[참고문헌 2] 여기에 더해 음극선 (cathode ray)이 등장합니다. 1838년 패러데이(Michael Faraday, 1791-1867)는 공기를 일부 뺀 유리관 안에 금속 전극 두 개를 넣고 둘 사이에 높은 전압을 가하면 음극 판에서 양극판으로 번쩍이는 빛이 흘러간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후 이 현상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면서 공기를 더 제거하면 빛이 점점 약해지지만 여전히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이 흘러간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19세기 후반의 물리학자들은 이를 “음극선”이라고 불렀습니다. 음극선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다른 분자에 부딪혀 눈에 보이는 빛을 내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었죠. 음극선은 빛과 같이 직진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석을 가까이 하면 그 경로가 휘어졌습니다.
19세기 말의 과학자들은 형광(fluorescence)과 인광 (phosphorescence)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떤 광물들은 빛을 흡수한 후 그 빛과 다른 색을 띠는 빛을 방출했습니다. 만약 외부 빛이 사라졌을 때 빛 방출이 즉각 사라지면 형광, 외부 빛이 사라졌음에도 여전히 빛을 방출하고 있으면 인광이라고 불렀습니다. 인광이라는 명칭은 “빛을 가져오다”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포스 포로스(phosphoros)에서 왔고, 빛을 내는 많은 물질에 일찍부터 사용되어 왔습니다. 원소 인(phosphorus)도 그중 하나이고요. 이런 물질들이 내는 빛은 자연스럽게 인광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참고문헌 3] 반면 형광이라는 명칭은 1852년 물리학자 스토크스(George Gabriel Stokes, 1819-1903)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스토크스는 어떤 물질들의 경우 흡수한 빛의 파장보다 방출하는 빛의 파장이 길어진다는 것을 발견했고, 그런 거동을 보이는 대표적인 물질인 형석(fluorspar)의 이름을 따서 형광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흥미롭게도 형광 현상 자체는 이미 1842년 베크렐(Edmond Becquerel, 1820-1891)에 의해 보고된 바가 있었습니다. 스토크스와 베크렐은 형 광과 인광 분야의 전문가들로서 이들 현상에 대해 다른 이 해를 가지고 있었고, 19세기 중반에 형광과 인광의 본질 에 대해 치열한 논쟁을 벌였습니다.[참고문헌 4]
이제 시간을 1895년으로 돌려 보겠습니다. 1895년 11월 8일, 50세의 물리학 교수였던 뢴트겐(Wilhelm Con-rad Röntgen, 1845-1923)은 암실에서 검은 마분지로 둘러싸인 음극선관을 가지고 실험을 하고 있었습니다.[참고문헌 5] 분명 음극선관은 두꺼운 종이로 덮여 있었지만, 음극선관에 전기를 흘려보내자 몇 미터 떨어진 형광 스크린에서 빛이 발생했습니다. 또다른 “보이지 않는 선”이 발견된 것입니다. 뢴트겐은 이후 몇 주 동안 비밀리에 홀로 이 “보이지 않는 선”을 두고 여러 가지 실험을 수행했습니다. 이 “선” 은 빛처럼 직진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일반적인 빛과는 달리 굴절, 반사, 회절 등의 거동은 관찰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음극선처럼 자석에 반응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선”을 두고 뢴트겐은 “X선” 이라고 불렀습니다. 놀랍게도 X선은 여러 물체를 투과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편, 이 X선은 형광을 일으킬 수도 있었고, 사진 건판을 감광시켜 현상 후 검은 상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를 이용하여 금속 통에 들 어있는 나침반, 문에 박힌 못, 자신의 손뼈 등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새로운 발견이라는 확신을 가진[참고문헌 6] 뢴트겐은 12월 말 논문을 투고하였고, 1896년 1월 초에는 세계 각지의 동료들에게 이 소식을 알렸습니다. 이 때 뢴트겐이 동봉한 사진이 부인의 손을 X선으로 찍은 그 유명한 사진입니다. 1월 5일, 빈의 신문사에서 발빠르게 이 소식을 실었고, 다음 날 런던과 뉴욕에서도 대서특필되었죠. 사람들은 물체 내부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이 새로운 기술에 열광했습니다. 뢴트겐은 하루아침에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된 것입니다. 1월 13일에는 황제 빌헬름 2세의 부름을 받아 황제 앞에서 직접 시연을 하고 프로이센 왕관 훈장을 수여받았습니다. X선은 “뢴트겐선”이라고 불렸고, 1896년 한 해 동안만 1000편 이상의 기사와 책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뢴트겐의 발견은 실험실에서 쉽게 재현해 볼 수 있었습니다. 과학자들은 흥분했습니다. 뢴트겐 본인은 X선에 관해 세 편의 논문을 쓰는 것에 그쳤지만, 많은 이들이 그를 대신해 앞다투어 새로운 실험 결과를 보고했습니다. 그 중에는 발명가 에디슨(Thomas Edison, 1847-1931)도 있었습니다. 그는 백열전구를 개조해 간단한 X선 생성 장치를 만들고, 자신의 손을 찍어볼 수 있는 장치라며 홍보했죠. 의사들은 의학적 가치를 바로 알아보았습니다. 발표 이후 한 달이 안 되어 의사들은 X선을 활용해 몸 안에 박힌 총알이나 부러진 뼈의 위치와 형태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화학자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화학자들은 X 선을 여러 물질에 조사하여 어떤 영향이 있는지 확인했습니다. 영국의 화학 저널 <케미컬 뉴스(Chemical News)> 는 1896년 한 해 동안 총 28편의 X선 관련 기사를 출판 하였습니다.[참고문헌 7]
적외선, 자외선, 음극선에 이어 X선까지 발견되자 새로운 “선”이 더 존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여기저기서 피어 올랐습니다. X선이 발표되고 한 달도 안 되어 아마추어 물리학자 르봉(Gustave Le Bon, 1841-1931)이 “흑광 (black light)”이라는 새로운 “선”을 발견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르봉의 보고에 따르면 흑광은 일반적인 석유 램프에서 발생하는데 금속 상자 안의 사진 건판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졌으며, 빛처럼 직진하되 자석의 영향은 받지 않았습니다. 흑광 역시 즉시 검증에 들어갔습니다. 몇 몇 과학자들은 흑광을 재현하는데 성공했다고 보고했지만, 여전히 수상한 구석이 많이 있었죠. 결국 두 달여의 검증 이후 1896년 3월 말쯤 되자 흑광은 석유 램프에서 방출된 열과 빛, 증기, 사진 건판의 민감성 등이 뒤섞여 만들어낸 가짜 현상으로 정리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X선에 관심을 가진 사람 중에는 앞서 소개한 베크렐의 아들인 앙리 베크렐(Antoine Henri Becquerel, 1852-1908)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연구를 이어 형광과 인광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었던 그는 뢴트겐의 발견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뢴트겐의 결과는 음극선관에 발려 있는 인광 물질에 음극선을 쬐어주어 X선이 방출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참고문헌 8] 베크렐은 다른 형광 및 인광 물질에서 비슷한 현상을 관찰할 수 있을지 궁금 했습니다. 그는 재빨리 연구를 시작해 1896년 2월, 파리과학원에 황산 우라닐 포타슘(K2UO2(SO4)2·2H2O)에서 새로운 “선”을 검출했다고 보고하였습니다.[참고문헌 9] 황산 우라닐 포타슘은 햇빛 아래에서 인광 현상을 보이는 물질로, 근처에 있는 사진 건판을 감광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 “선” 역시 X선처럼, 두꺼운 종이로 건판을 싸두어도 그것을 뚫고 건판에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베크렐은 황산 우라닐 포타슘의 인광 현상과 이 “선”이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지만, 며칠간 흐린 날씨가 계속되면서 햇빛을 이용한 인광 실험을 할 수 없었죠. 그는 하릴 없이 황산 우라닐 포타슘 시료와 사진 건판을 서랍 속에 넣어두었는데, 며칠 후 서랍을 확인한 그는 사진 건판이 감광된 것을 발견했습니다. 햇빛이 없이도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에 놀란 그는 이 결과를 파리 과학원에 보고합니다. 1896년 3월 초의 일입니다.
어쩌면 황산 우라닐 포타슘의 인광이 일반적인 인광 물질에 비해 훨씬 오래 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베크렐은 이러한 가설을 세우고 오랜 시간 동안 빛을 막고 황산 우라닐 포타슘의 “선”이 사라지는지 확인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몇 달을 기다려도 여전히 황산 우라닐 포타슘은 “선” 을 내뿜고 있었죠. 비슷한 시기 영국의 과학자 톰슨(Sil-vanus P. Thompson, 1851-1916)도 우라늄을 포함한 염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이 방출되며, 빛이나 전기가 없이도 오랜 시간 동안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역시 이걸 인광으로 보고 “초인광(hyper-phosphorescence)”이라는 명칭을 붙여주었습니다. 다만 톰슨은 베크렐이 비슷한 결과를 보고했다는 사실을 알고 연구를 중단했죠.
베크렐은 집요하게 본인의 가설을 검증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인광이 사라지게 하려고 염을 녹이고 다시 재결 정하기도 했고, 화학 반응을 통해 다른 화합물로 바꾸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순수한 우라늄 금속을 시험해 보기도 했죠. 우라늄 금속은 우라늄 화합물에 비해 더 강한“선”을 내뿜었습니다. 이러한 여러 노력 끝에 얻은 결론은 우라늄 원소가 이 “선”의 원천이라는 것이었지만, 베크렐은 본인의 인광 가설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라늄 원소 자체가 인광을 보이는 것이며, 기존에 알려져 있던 인광 물질들과는 다른, 새로운 인광 물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편, 베크렐은 “우라늄선”의 성질 또한 살펴보았습니다. 우라늄선은 여러 물체를 투과할 수 있었고, 공기를 하전시키는 성질이 있었습니다. 이는 X선과 유사한 성질이 었죠. 반면 그는 우라늄선에서 반사, 굴절, 편광 등을 관찰했고, 이 때문에 베크렐은 우라늄선이 X선보다는 빛에 가깝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라늄선이 X선의 일종이라고 생각하는 과학자들도 있었습니다. 애초에 X 선의 정체조차 확실하지 않았으니까요.
우라늄의 독특한 성질은 이내 젊은 물리학도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 중에는 폴란드에서 프랑스로 유학 온 마리 스크워도프스카(Marie Skłodowska, 1867-1934)가 있었습니다.[참고문헌 10] 그는 1893년과 1894년 파리 대학교에서 물리학과 수학 졸업시험을 각각 1등과 2등으로 통과하고, 1895년 피에르 퀴리(Pierre Curie, 1859-1906)와 결혼하여 마리 퀴리가 되었습니다. 퀴리는 1897년 베크렐의 동의를 얻어 우라늄선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퀴리는 우라늄선의 크기가 우라늄의 양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이용해, 자연 광석에서 발생하는 우라늄선이 그 안에 포함된 우라늄의 양으로부터 계산한 예상값보다 강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즉, 우라늄선을 내뿜는 다른 원소가 존재한다는 뜻이었죠. 퀴리는 우라늄 광석인 피치블렌드에서 우라늄을 비롯하여 이미 알려진 원소들을 하나씩 화학적으로 제거하여 새로운 원소들을 찾아냈습니다. 바로 폴로늄과 라듐이었습니다. 폴로늄 시료는 우라늄보다 400배, 라듐 시료는 900배 강한 활성을 보였습니다.[참고문헌 11]
1898년의 일입니다. 사실 퀴리의 이 발표 이전까지 우라늄선은 큰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X선과는 달리 별다른 응용 분야를 찾기 어려웠고, “흑광”처럼 유사한 사례도 있었으니까요. 그저 일부 물리학자들만 관심을 가지고 살펴 보는 주제였는데, 퀴리가 우라늄 외에도 우라늄선을 내뿜는 원소들이 있다는 것을 밝혀내자 흥미를 갖는 과학자들 이 늘어났습니다.[참고문헌 12]
한편, 영국에서는 뉴질랜드 출신의 젊은 물리학자 러 더퍼드(Ernest Rutherford, 1871-1937)가 우라늄선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뉴질랜드에서 수학 및 물리학(1893년 석사), 화학 및 지질학(1894년 학사)을 공부한 러더퍼드는 1895년 영국으로 건너와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연구소장은 톰슨(Joseph John Thomson, 1856-1940)이었는데, 1896년 뢴트겐과 베크렐의 연구가 알려지자 러더퍼드에게 X선과 우라늄선을 연구해 보라고 권유했습니다. 1898년, 맥길 대학교에서 러더퍼드에게 교수직을 제안했고, 러더퍼드는 캐나다로 건너가 연구를 지속했습니다. 러더퍼드는 우라늄선이 베크렐의 보고와는 달리 굴절이나 편광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1899년, 러더퍼드의 보고를 접한 베크렐은 자신의 실험을 다시 검토했습니다. 베크렐은 해석에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했고, 우라늄선이 빛의 일종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같은 해에 퀴리는 우라늄 선을 인광으로 해석하는 것에 강한 비판을 가했고, 베크렐은 결국 본인의 인광 가설마저 철회했습니다.[참고문헌 13]
오늘날의 우리는 이 시기의 방사능 연구가 결국 핵화학 및 핵물리학의 시작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이 연구들이 원자의 내부 구조를 밝히는 시작점이 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1890년대 후반의 과학자들은 미래를 알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뢴트겐과 베크렐의 이름을 같이 기억하지만, 1896년의 상황은 달랐습니다. X선은 발표되자마자 과학계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까지 큰 반향을 일으킨 반면, 방사선은 그렇지 않았죠. 퀴리의 업적이 없었다면 베크렐은 그저 조용히 살다 갔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독자들도 느끼셨겠지만 이번 글에서는 화학자들이 별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X선과 우라늄선 연구가 처음에는 주로 물리학의 문제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퀴리를 통해 이 연구는 새로운 원소를 찾는 주류 화학계의 문제와 연결됩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 이야기를 다뤄 보겠습니다.
참고문헌
이번 호의 내용은 다음 글들에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Mary Jo Nye, Before Big Science: The Pursuit of Modern Chemistry and Physics, 1800-1940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99), Chapter 6; Marjorie C. Malley, Radioactivity: A History of a Mysterious Science (New York, NY: Oxford University Press, 2011); Alexi Assmus, “The Early History of X Rays,” Beam Line 25(2), 10-24 (1995).
Philip E. Hockberger, “A History of Ultraviolet Photobiology for Humans, Animals and Microorganisms,” Photochemistry and Photobiology 76(6): 561-579 (2002).
이러한 역사를 생각해 보면, “인광”과 “인”이 동일한 그리스어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맞지만 “인광”이라는 용어가 원소 “인”에서 온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한자 번역어가 매우 정확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Bernard Valeur and Mário N. Berberan-Santos, “A Brief History of Fluorescence and Phosphorescence before the Emergence of Quantum Theory,”
Journal of Chemical Education 88(6): 731-738 (2011).
뢴트겐은 원래 음극선관의 전문가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1895년 10월부터 막 음극선관을 가지고 연구를 시작한 차였습니다.
뢴트겐 이전에도 X선을 발견할 뻔했던 과학자들은 여럿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장치에 수반된 당연한 현상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죠. 어쩌면 뢴트겐은 이 장비를 처 음 썼기 때문에 특이점을 알아차릴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X선 발견의 선구자들에 대해서는 Uwe Busch, “Claims of priority – The scientific path to the discovery of X-rays,” Z. Med. Phys. 33: 230-242 (2023) 참조.
Melinda Baldwin, “‘Keeping in the race’: physics, publication speed and national publishing strategies in Nature, 1895-1939,” British Journal for the History of Science 47(2): 257-279 (2014).
당시 프랑스 물리학을 대표하는 푸앵카레(Jules Henri Poincaré, 1854-1912)가 파리 과학원에서 뢴트겐의 연구 결과를 두고 토론하면서 이런 아이디어를 제시했다고 합니다.
베크렐이 황산 우라닐 포타슘을 선택한 것은 단순한 행운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때로부터 내려오는 형광 및 인광 지식 덕분에 황산 우라닐 포타슘의 독특한 분광학적 성질을 알고 있었고, 몇 가지 인광 물질을 시험했을 때 기대했던 성질을 보이지 않자 바로 황산 우라닐 포타슘으로 실험하기 시작했습니다. Roberto de Andrade Martins, “Becquerel and the Choice of Uranium Compounds,” Archive for History of Exact Sciences 51(1): 67-81 (1997).
폴란드식 이름은 마리아(Maria)였으나, 프랑스로 유학 오면서 프랑스식 이름인 마리(Marie)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더 이상 “우라늄선”이라 부르는 것은 옳지 않지만, 용어의 통일성을 위해 본 글 내에서는 “우라늄선”으로 계속 쓰겠습니다.
Lawrence Badash, “Radium, radioactivity, and the popularity of scientific discovery,” Proceedings of the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122: 145-154 (1978).
Roberto de Andrade Martins, “Becquerel’s experimental mistakes,” Historical Essays on Radioactivity (Extrema: Quamcumque Editum, 2021), 107-166.

최정모 Jeong-Mo Choi
• 한국과학기술원 화학과, 학사(2003. 3 - 2011.8)
• Harvard University 과학사학과, 석사(2011. 9– 2015. 5, 지도교수: Naomi Oreskes)
• Harvard University 화학 및 화학생물학과, 박사 (2011.9 –2016.5, 지도교수: Eugene I.Shakhnovich)
• Washington University in St. Louis, 박사후 연구원 (2016.8– 2019. 4, 지도교수: Rohit V. Pappu)
• 한국과학기술원 자연과학연구소, 연구조교수(2019. 6– 2020. 8)
• 부산대학교 화학과, 조교수(2020.9- 2024.8), 부교수(2024.9- 현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