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를 받아들이는 교육: 연구자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 3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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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욱 | 울산과학기술원 화학과 조교수, jeongukkweon@unist.ac.kr
서 론
연구자로서 살아가면서 가장 많이 마주하게 되는 것은 무 엇일까요?
최근 감사하게도 새로운 환경에서 연구를 이어가며 저는 이 질문을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던져보게 되었습니다. 어 린 시절 제가 꿈꾸던 과학자는 지금까지 밝혀진 지식을 바 탕으로 새로운 가설을 세우고, 그것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 내는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저에게 과학자는 늘 정답만 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처럼 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대학원과 박사후 연구원 과정을 거치며 유 기화학 연구를 경험한 뒤에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연구에서는 예상과 전혀 다른 결과가 훨씬 더 자주 나타났 기 때문입니다. 기대했던 만큼 나오지 않는 반응 수율, 원하 지 않았던 부반응의 생성, 처음 생각했던 반응 메커니즘과 맞지 않는 실험적 증거들. 돌이켜보면 연구자로 살아가며 가장 자주 마주한 것은 성공의 순간보다 오히려 이러한 예 상 밖의 결과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이를 두 고 실험이 “실패했다”고 이야기하지만, 많은 연구자들은 바 로 그 지점에서 새로운 실마리를 발견하곤 합니다.
실제로 연구자는 원하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데만 시간 을 쓰지 않습니다. 그만큼의 시간을 예상과 다른 결과를 받 아들이고, 이를 해석하며,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내는 데 사 용합니다. 어쩌면 연구란 정답을 확인하는 과정이라기보 다, 예상과 다른 결과 속에서 새로운 질문을 발견하는 과정 에 더 가까운지도 모르겠습니다.
본 론
하지만 한편으로는 앞으로 연구자로 성장할 학생들을 교육해야 하는 미래 교육자의 입장에서, 학생들이 연구 과 정에서 마주하게 될 수많은 예상 밖의 결과들을 건강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경험을 충분히 하고 있는가에 대한 고민 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제 개인적인 경험을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현재 의 교육은 여전히 가능한 한 실수를 줄이고 정답에 도달하 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고 느껴집니다. 아마 도이는 초· 중등 교육부터 대학교 학부 과정에 이르기까 지, 교수자가 지식을 전달하고 학생은 이를 받아들이며, 최종적으로 지필 평가를 통해 성취도를 측정하는 교육 방식이 중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시험 점수가 학생을 평가하는 중요 한 기준이 되고, 한 번의 실수는 상대적으로 낮은 평가로 이어지곤 합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학생들은 능동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하기보다 조금이라도 더 실수를 줄일 수 있 는 안전한 선택을 하는 경향을 가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행동 방식이 대학원에 진학한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연구는 본질적으로 예상과 다른 결과를 반복적으로 마주하는 과정입니다. 실 제로 연구실 생활을 하면서, 예상보다 많은 학생들이 시행 착오 앞에서 의기소침해하거나 혼란을 겪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저 역시 중학교 시절까지는 비슷한 환경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지금도 종종 실수하거나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하 는 제 모습을 발견하곤 합니다. 물론 개인의 성향도 영향 을 미쳤겠지만, 오랜 시간 동안 “틀리지 않는 것”을 중요 하게 여기는 환경에서 성장한 영향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연구자로서 제 삶의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는 한국과학영재학교에서 보낸 고등학교 시절이었습니다. 학 생들은 자신의 관심 분야와 진로에 따라 과목을 선택했고, 획일적인 기준으로 서로를 비교하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성적보다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를 먼저 고민 했습니다. 저 역시 결과보다는 새로운 것을 배우고 탐구하 는 과정 자체에 더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학생 주도로 이루어지는 연 구 경험이었습니다. 당시 최은영 선생님의 지도 아래 포피 린 구조를 가지는 금속-유기 골격체(Metal–Organic Framework, MOF)의 기체 흡착 특성을 연구하며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처음에는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마다 좌절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연구 과 정의 자연스러운 일부라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원인을 분석하고 새로운 가설을 세우고 다시 실험을 설 계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저는 결과보다 과정을 믿는 법 을 조금씩 익혀갔습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후배들이 연 구를 이어가 관련 결과가 논문으로 출판되는 것을 보면서, 과정을 충실히 거치다 보면 결과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는 사실을 비교적 이른 시기에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가끔은 제가 이러한 경험을 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상 상해보곤 합니다. 학업을 이어가며 저보다 뛰어난 친구들 을 많이 만났고,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 순간도 적지 않 았습니다. 대학원에 진학한 뒤에는 더욱 그랬습니다. 몇 달 동안 진행한 실험이 예상과 전혀 다른 결과로 끝나기도 했고, 때로는 스스로의 능력을 의심하게 되는 순간도 있었 습니다. 돌이켜보면 실제로 수행했던 수많은 실험 중 논문 으로 이어진 결과는 빙산의 일각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만약 제가 일찍이 실패를 단순한 좌절의 대상으로만 받 아들였다면, 연구하는 과정은 훨씬 더 힘들고 우울한 시간 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박사 지도교수이신 장석 복 교수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의 격려와 응원, 그리고 과 거의 경험들을 통해 기대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고 해서 과 정 자체가 실패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배울 수 있었기에, 연구를 지속하는 과정 자체를 더욱 즐겁고 의미 있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ETH Zürich에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생 활하던 시기에 더욱 깊어졌습니다. 당시 저는 Bill Morandi 교수님의 지도 아래 연구를 수행했는데, 교수님 께서 미팅 때 가장 자주 하시던 말씀은 “It's fine.”이었습 니다. 몇 주 동안 준비한 실험이 원하는 결과를 내지 못했 을 때도, 기대했던 반응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을 때도 교 수님은 늘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왜 이런 결 과가 나왔는지, 여기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다음에는 무엇을 시도해 볼 수 있을지를 함께 이야기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격려의 표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 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것이 연구를 대하는 태도와 깊이 연 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상과 다른 결 과를 끝난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 성을 발견할 출발점으로 바라보는 태도였습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연구자들은 예상과 다른 결과를 숨기기보다 적극적으로 공유하고 토론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탄생합니다. 저는 이러한 문 화가 연구실에서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척하는 중요한 원 동력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기대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을 곧 바로 실패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연구자들 역시 경험 해 보지 못한 새로운 아이디어와 접근법을 시도하는 데 심 리적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저 역 시 그곳에서 연구를 수행하며 조금씩 같은 방향으로 생각 이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분위기는 단순히 연구 효율의 문제가 아니라 창의성 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조건이라는 사실을 그곳에서 배 울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태도를 교육 현장에서는 어떻게 길러 줄 수 있을까요? 저는 학생들이 실험이나 탐구 활동에서 기대한 결과를 얻지 못했을 때, 그것을 단순히 감점이나 미완성의 근거로만 받아들이지 않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 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결과의 성공 여부뿐 아니라, 처음 세운 가설이 무엇이었는지, 예상과 실제 결과 사이의 차이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그리고 다음에는 어떤 실험이 나 질문으로 이어갈 수 있을지를 함께 평가하고 토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연구실에서도 예상과 다른 결과를 숨기기 보다 공유하고 논의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질 때, 학생들은 실패를 자신의 능력 부족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연구 과정 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이해하게 됩니다. 결국 실패를 받아 들이는 교육은 실패 자체를 긍정하자는 뜻이 아니라, 뜻대 로 되지 않는 결과를 배움과 탐구의 과정 안에서 함께 해 석하도록 돕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결 론
연구는 가설이 옳음을 증명하는 과정인 동시에, 기존의 가설이 틀릴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예 상과 다른 결과는 실패가 아니라 새로운 질문의 출발점이 됩니다. 저는 학생들이 단순히 정답을 찾는 능력뿐 아니 라,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다시 질문하고 다시 시도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히 이러 한 경험은 가능한 한 이른 시기에 이루어질수록 더욱 의미 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상과 다른 결과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 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법을 조금씩 배워왔기 때문인지 도 모르겠습니다.

권정욱 Jeonguk Kweon
• 서울대학교 화학부, 학사(2015.3–2019.2)
• 한국과학기술원 화학과, 박사
(2019.3–2024.2, 지도교수: 장석복)
• 기초과학연구원, 분자활성촉매반응연구단, 박사후 연구원
(2024.3–2025.5, 지도교수: 장석복)
• ETH Zürich, Department of Chemistry and Applied Biosciences(D-CHAB), 박사후 연구원
(2025.6–2026.5, 지도교수: Bill Morandi)
• 울산과학기술원 화학과, 조교수 (2026.6–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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