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상과학과 공상화학(2026년 9월호)
최종 수정일: 8월 31일


공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은 우리 생각보다 작다. 쥘 베른(Jules Verne)이 그려낸 달 여행과 잠수함은 한 세기가 지0나기도 전에 실현되었고, 아서 클라크(Arthur C. Clarke) 가 소설에 흘려 둔 정지궤도 통신위성은 지금 우리의 머리 위를 돌고 있다. 상상이 막연히 제안하고 기술이 뒤따르는, 오래전부터 반복되어 온 과정을 우리는 과학소설, 즉 SF의 전통이라 부른다. 그런데 여기서 문득 궁금해진다. 우주, 심해, 로봇, 시간여행, 그리고 양자역학과 평행우주까지 그토록 풍성한 상상의 무대가 되었는데, 어째서 화학은 좀처럼 공상 속 주인공이 되지 못했을까. 시험관 속에서 벌어지는 반응은 SF가 되기에 너무 소박한 것일까.
음의 시간을 갖는 분자

되새겨 보면 대중문화 속 화학의 자리는 늘 좁았다. 과거의 연금술사는 광기에 휩싸인 채 실패하는 인물이며 현대의 화학자는 대개 폭발물을 만들거나 독약을 조제하는 조연으로 소비되었다. 우리가 사랑하는 화학 반응식은 화면을 스쳐 지나는 배경 장식에 그쳤으며 그마저도 대부분 크고 작은 오류로 점철되어 있다. 그나마 성공적인 예외다. 흥미로운 대목은 이 작품이 미국화학회(ACS) 회장을 지낸 유기화학자 도나 넬슨(Donna Nelson)을 과학 자문으로 두었다는 사실이다. 픽션이 진지해지려 할 때 화학자를 필요로 했다는 뜻이며, 바꿔 말하면 화학 역시 제대로 된 설정으로 사용될 매력이 충분하다는 의미다.
그 여지를 가장 우아하게 증명한 인물은 SF의 거장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다. 그는 본래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생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보스턴 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생화학을 가르친 어엿한 화학자였다. 실제로 그의 이름은 미국화학회지(JACS)에 실린 효소 반응속도론 논문에 남아 있다.
1948년, 아직 학위 논문을 붙들고 씨름하던 대학원생 시절 그는 지겨움을 달래려 한 편의 가짜 논문을 썼다. 「재 승화된 티오티몰린의 내시간적 특성(The Endochronic Properties of Resublimated Thiotimoline)」이라는, 제목부터 근사하게 학술적인 글이었다. 형식과 데이터 모두 학술 논문의 형태로 쓰여, 지금 찾아봐도 누구나 속을 수밖에 없을 모양새였다. 당시 카테콜(catechol) 관련 연구를 하던 아시모프는 물에 닿자마자 녹아내리는 뛰어난 친수성에 주목해 티오티몰린(Thiotimoline)이라는 가상의 물질을 창조해 낸다. 티오티몰린이 지닌 특별한 성질은 단 하나, 그러나 결정적으로 현실과 상식을 위배한다. 역시나 물에 넣으면 녹는다. 여기까지는 평범하지만, 문제는 녹는 시점이다. 이 분자는 물이 닿기 1.12초 전에 이미 녹아 버린다. 실험보다 관찰이, 원인보다 결과가 앞서 는 것이다.
가짜 논문이 만든 진짜 소동

아시모프는 이 터무니없는 설정에 그럴싸한 화학적 근거까지 붙였다. 일반적인 탄소처럼 4개의 결합을 이루고 있는 티오티몰린의 중심부 탄소는 특별하다. 2개의 결합은 현실에 존재하지만, 나머지 2개의 결합은 시간축을 향해 비틀려 있어 하나는 미래를 또 다른 하나는 과거를 향해 뻗어 있다. 특히 미래를 향한 결합이 높은 친수성의 당 분자와 결합해 있기에 간단히 용해된 미래의 사건이 화학 결합을 통해 현실에 영향을 미쳐 앞서 녹도록 이끈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분자가 도달할 미래를 감지하고 예언하는 셈이며, 녹아내리는 모습을 관찰한 후 미래를 바꾸려해도 시간적 공백 현상에 노출되어 필연적으로 어떻게든 물을 만나게 된다는 운명론적 결과를 이야기한다.
아이디어는 흥미롭지만 그보다 감탄스러운 것은 역시 이 공상과학이 공개를 위해 취한 형식이다. 아시모프는 티오티몰린을 소설 속 삽화가 아니라 정식 논문의 외형으로 빚어냈다. 서론과 실험, 결과와 고찰이 순서대로 놓였고, 참고문헌 목록에는 존재하지 않는 저널과 저자들이 정연 하게 나열되었다. 용해 시간을 정밀하게 재는 내시간측정기(Endochronometer)라는 분석 장비에 대한 설계 개념 도가 곁들여졌고, 1가 이온과 2가·3가 이온을 섞어가며 용해 시간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비교 분석해 정리한 그래프까지 실렸다. 실재하는 개념인 이온 세기(ionic strength)를 경향성 설명에 도입해 숲에 가짜 나무를 숨 겨두는 것처럼 진지한 유머가 되었다.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미래와 운명을 이야기하는 화학 물질에 대한 논문이 실리자 문의가 이어졌고, 도서관 사서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저널을 찾느라 헛수고를 했다고 전해진다. 아시모프 본인은 마침 학위 심사를 앞두고 있었기에, 심사위원이 짓궂게 이 논문을 언급했을 때 진땀을 뺐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농담이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후 아시모프 본인이 작성한 후속편이 등장해 설명에 살을 붙이며 하나의 잘 만들어진 농담이 학문의 형식 전체를 빌려 하나의 세계관으로 자라 났다.
공상이 현실을 향해 걸어올 때
뻔한 말이지만 티오티몰린은 실존하지 않는다. 원인에 앞서는 결과란 인과율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며, 적어도 우리가 아는 물리 법칙 안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농담을 그저 농담으로만 흘려보내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 결과가 원인을 앞지르는 듯 보이는 현상은, 형태를 달리하여 실제 화학의 최전선에서 관측되기 때문이다. 빛을 흡수한 분자가 채 반응하기도 전에 전자가 먼저 재 배치되는 초고속 광화학, 고전적으로는 넘을 수 없는 에너지 장벽을 뚫고 지나가는 터널링 효과, 관측 이전에는 여러 상태를 동시에 품고 있는 양자 중첩. 이들은 인과의 직관을 얼마간 흔든다는 점에서 티오티몰린이 건드린 감각과 멀지 않다. 아시모프가 상상만으로 그려 본 '시간을 앞질러 반응하는 분자'는, 엄밀히 같은 의미는 아니더라 도 펨토초(10⁻15초) 단위로 반응의 찰나를 들여다보는 초고속 분광학이 등장하면서 은유의 차원에서 현실의 언어로 조금 더 가까이 옮겨졌다.
아시모프의 유산은 지금도 이어진다. 화학자들은 장난 스레 존재하지 않는 분자에 전합성 경로를 그려 넣으며 논다. 스즈키-미야우라 짝지음 (Suzuki-Miyaura cou-pling)이나 DIBAL-H 환원, 고리닫음 복분해 같은 실존하는 반응들 사이에 '쉰켄파우스트 라디칼 교차-스피플리 케이션'이나 '슐레퍼-클룽크 탈방향족화' 같은 존재하지 않는 반응명을 천연덕스럽게 끼워 넣는다.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려면 상당한 수준의 유기화학 지식이 필요하며, 그 사실 자체가 이 놀이의 문턱이자 즐거움이 된다. 농담을 이해하기 위해 공부가 필요한 분야는 그리 많지 않다.
돌이켜 보면 화학은 SF의 재료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상대성이론이 금(Au)의 노란빛과 수은(Hg)의 액체 상태를 결정한다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이미 한 편의 설정처럼 들리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물에 닿기 전에 녹는 분자를 상상하는일과, 6주기 원소의 안쪽 전자가 광속의 절반이 넘는 속도로 내달린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일은 놀라움 의 결이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점은 앞의 사실은 검증되 었지만 티오티몰린은 검증될 수 없다는 것뿐이다.
아시모프가 남긴 이 정교한 농담이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는, 결국 쓸모없어 보이는 일을 누구보다 진지하게 밀어붙였기 때문일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분자에 구조식을 그리고 학명을 붙이고 측정 장치를 설계하는 데 들인 그 성실한 유희 속에, 화학이라는 학문의 즐거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공상은 언젠가 현실이 되고, 화학은 얼마든지 흥미로운 설정이 될 수 있다. 시험관 속 세계가 상상력의 무대가 되지 못할 이유는, 처음부터 어디에도 없었다.

장홍제 Hongje Jang
• KAIST 화학과, 학사(2004.3-2008.2)
• KAIST 화학과, 박사(2008.3-2013.8, 지도교수 : 한상우)
• 서울대학교 화학과 박사후 연구원(2013.9 - 2015.1, 지도교수 : 민달희)
• Georgia Institute of Technology, Department of Chem-istry and Biochemistry 박사후 연구원(2015.1-2016.1, 지도 교수 : Mostafa A. El-Sayed)
• 광운대학교 화학과 교수(2016.3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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