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자라는 개념은 돌턴 이후로 화학에서 핵심적인 역할 을 수행하였습니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단언컨대 원 자 개념의 유용성을의심하는 화학자는 없었습니다. 하지 만 원자가“실재”하는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화학자들마다 입장이 엇갈렸습니다. 원자 개념을 근본적인 사실로 받아 들이고 그 위에 현대 화학을 쌓아올린 우리에게는 당혹스 러운 사실입니다. 물론 이들이 아무런 근거 없이 원자 개 념을 의심한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늘 글에서는 특히 1860 년대에 원자설이 어떤 논란에 휘말려 있었는지를 집중적 으로 조망해 보고자 합니다.1
먼저 원자 개념이 화학 내에서 인식되어 온 역사를 간단 히 살펴보죠. 돌턴은 당연히 원자가 실재하는 입자라고 믿 었습니다. 그에게 원자는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기본 입자 로, 정해진 무게와 성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돌턴과 같 은 시대를 살아가던 화학자들에게도 이러한 원자개념은 자연스러웠습니다. 이들은 뉴턴의 입자 개념에 익숙한 사람들이었고, 돌턴이 정의한 원자와 다를지언정 어떤 형태 로든 기본 입자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후예들은 원자 개념을 이렇게 단순하게 받아 들이지 않았습니다. 돌턴이 원자설을 발표한 뒤(1808년) 원 자설에 대한 이해는 점점 깊어졌고, 일정 성분비의 법칙을 논하기 위해 원자의 실재성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 이 밝혀졌습니다. 휴얼(WilliamWhewell, 1794-1866)은 1837년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화학 조성의 법칙 은 필요하지만, 물질이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관점은 중 요한 것도, 확실한 것도 아니다. 원자라는 가설적 형태는 결 정 구조로부터 확인되지 않는 이상 아무런 가치가 없다.”2
뒤마의 입장은 조금 더 흥미롭습니다. 처음에 뒤마는 원 자가 실재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믿음 위에서, 그는 돌턴의 가설과 아보가드로의 가설에 기반하여 정확한 측 정을 통해 각 원자의 원자량을 결정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각 분자가 원자 몇 개로 구성되어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원자량을 결정할 수 없었고, 많은 노력이 수포 로 돌아가면서 결국뒤마는 원자의 실재성에 회의를 품게 됩니다. 말년의 뒤마는 심지어 원자라는 단어를 과학에서 삭제해 버리고 싶다고까지 말합니다. 이는원자라는 입자 가“경험 너머에 있고, 화학에서는 경험 너머까지 가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3
1860년대 화학을 규정하는 중요한 실험적 혁신은 바로 분광기의 발명입니다.4 19세기 초부터 금속을 불꽃에 넣어 발생하는 빛이나 태양빛을 프리즘에 통과시키면 특이한 선 스펙트럼이 얻어진다는 것은 알려져 있었습니다. 프라 운호퍼(Joseph von Fraunhofer, 1787-1826)와 같은사 람은 이 선 스펙트럼을 이용하여 생산된 렌즈의 신뢰성을 체크하기도 했죠. 하지만 1860년 이전까지 선 스펙트럼 현상은 일부 물리학자들에게만 알려져 있는 신기한 현상 에 불과했습니다. 이것을 최초로 화학 연구에 이용한 것이 화학자 분젠(Robert Bunsen, 1811-1899)과물리학자 키 르히호프(Gustav Kirchhoff, 1824-1887)였습니다.5
분젠은 빛을 이용하여 화학 물질을 분석하는 법을 연구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1859년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동료 교수였던 키르히호프에게 이 문제를 논의했고, 광학의 전 문가였던 키르히호프는 선 스펙트럼을 이용해 보자고 제 안합니다. 각 원소의 선 스펙트럼은 독특한 패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마침내 이들은 1860년 시료의 선 스펙트 럼을 얻는 분광기를 개발하여 세상에 발표하였습니다. 그 리고 이를통해 다른 방법으로는 찾을 수 없었던 세슘 (1860년), 루비듐(1861년), 탈륨(1861년), 인듐(1863년)이 새로 발견될 수 있었습니다.
과학자들은 분광기에 열광했고, 빛을 내는 여러 존재를 대상으로 스펙트럼을 얻어 나갑니다. 먼저 행성에서 얻어 진 스펙트럼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원소들의 선 스펙트럼 이 나타나면서 우주에도 동일한 원소들이 존재한다는 것 이 확인되었습니다. 1864년에는 별과 성운을 대상으로 분 광학적 분석을 수행한 연구가 출판되었습니다. 여기서 놀 라운 것은 성운에서 얻어진 스펙트럼이었습니다. 여기서 질소의 선 스펙트럼에 나타나는 선이 하나 강하게 나타났 는데, 질소에서 나타나는 다른 선들은 보이지 않았습니 다.6 하나하나의 선이 개별 입자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한다 면, 질소는“원자”가 아니라 더 단순한 입자들로 구성된 존재일 수도 있겠죠.7 즉 원자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단 위 입자라는 생각에 균열이 생긴 것입니다.
브로디(Benjamin Brodie, 1817-1880)는 리비히 밑에서 공부했던 영국 화학자로, 1860년 영국 화학회의 회장 을 맡기도 한 사람입니다. 그는 1866년「화학 조작의 계산 법(Calculus of ChemicalOperations)」이라는 논문을 써서 원자라는 가설적 존재 없이도 화학을 온전히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1867년 영국 화학회에서 자신의 주장을 발표하였습니다. 브로디는 분자를 설명하기 위해 공과 철사를 이용하는 것8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 다. 그는 원자설이 결국“처음부터 끝까지 천박한 목공품” 으로 귀결된 것을 보면, 이제 화학은 오류와 오개념으로 가득 차 철학의 궤도에서 벗어난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브로디는 정상 온도와 압력에서 단위 부피를 차지하는 기준 기체를 생각하고, 여기에 가상의 조작을 가해 실제 기체로 변환해 줍니다. 예를 들어 조작을 통해 수소 한 단 위를 얻었다면, 이 조작을 α라고 표시하고 그 결과는 1이 라는 무게로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조작을 통해 염화 수 소 한 단위를 얻었다면, αχ라는 기호를 사용하여 표시하고 그 결과는 18.25라는 무게가 됩니다. 이를 통해 원자라 는 개념 없이 모든 화학 반응을 계산해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아이디어였습니다.9
α 혹은 χ등의 기호로 표현되는“존재”는 실재하는 것 일까요? 브로디에게 이들은 실재해도 상관없고, 실재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그런 존재입니다. 기본 입자일 필요는 더 더욱 없죠. 그는 이들을 이데아의 세계에 살고 있는“이상 적인”존재로 보았고, 자신의 체계를“이상 화학(ideal chemistry)”라고 불렀습니다. 브로디는 자신의 새로운 계산법이 화학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브로디의 발표가 끝나고 좌장인 윌리엄슨은 그의 논리 에 설득되었다며 브로디의 계산법이“화학의 언어와 표기 법에 있어 매우 중요한 시대를 여는”효시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10 발표 자리에 참석한 화학자들과 물리학자 들은 치열한 토론을 벌였죠. 그의 발표와 그 이후이어진 토론은“미래의 화학”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실렸고, 화학 계 밖에까지 널리 알려졌습니다. 1868년 발간된 신문 기사 에 따르면, 이계산법으로 인해 원자에 관한 질문은 다시 미궁에 빠졌고, 여전히 열린 질문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원자설은 분명 화학에 눈부신 발전을 가져왔 다는 점에서 성공적인 이론이었지만, 그 바탕에 있는“원 자”라는 개념은 1860년대의화학자들을 혼란에 빠뜨렸습 니다. 어떤 이들은 브로디처럼 결국 원자 개념을 폐기하는 입장을 취합니다. 멘델레예프도 원자설을 강하게 공격했 습니다. 멘델레예프는 자신의 주기율표는 원자의 존재를 증명하거나 반증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원자라는 미 시적인 존재를 이용해화학을 설명하는 시도를 강하게 비 판했습니다. 그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사실, 원자 이 론은 일정 성분비의 법칙으로 강하게 뒷받침되는것 못지 않게, 소위 비(非)일정 성분비 화합물에 의해 도전받는 다.”11 멘델레예프는 의심스러운 원자 개념 없이 원소의 주 기성을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원자설이 가지고 있는 이점이 많았기 때문에, 많 은 화학자들은 실용적인 입장을 택합니다. 원자설이 설명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는 그 쓸모를 인정하되, 원자의 실 재성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말년의 뒤마는 원자 설의 쓸모는 인정했지만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원자설은 그저 어떤 범위 내에서 화학 현상을 설명해내는 도구일 뿐, 만약 더 나은 이론이 나온다면 언제든 버려질 수 있는 것이 었죠. 케쿨레도 비슷한 관점에서 1867년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원자가 존재하는가 아닌가 하는 질문은 오히 려 형이상학에 속하는질문이다. 화학에서는 원자 가설이 화학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적용될 수 있는 가설인가, 그리 고 원자 가설의 발전이 화학 현상의 메커니즘에 관한 우리 지식을 늘릴 수 있는가만 결정하면 된다. 나는 우리가 훗날 우리가 지금 원자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수학적이고 기계 적인 설명을 찾아내어 원자량과 원자가를 비롯해 소위 원 자의 수많은 성질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12
그럼 원자의 실재성을 믿은 화학자들은 없었던 것일까요? 윌리엄슨은 원자의 실재성을 강하게 변호하는 화학자 였습니다. 그는 1869년 6월 3일 런던 화학회에서“원자 이론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회장 취임 강연을 하였는데, 이 강연에서 그는 원자의 실재성을 옹호하였습니다. 원자 이론은 사실들에 관한 명확하고 일관된 설명을 제공할 뿐 만 아니라, 강력한 예측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동료 화학자들이 이렇게 원자 이론을 의심 한다는 것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죠.“모든 화학자들이 원 자 이론을 이용하고 있는 한편, 그 중의 상당수가 그 이론 을 불신하고 심지어 혐오한다고 말한다 해도 과장은 아닐 것입니다.”13 그도 원자를 실제로 볼 수 없다는 것은 인정 하였지만, 당시 원자 개념에 쏟아지던 비판은 과하다고 항 변합니다. 여전히 원자 개념은 화학에서 중요한 개념이고, 이 개념 없이는 화학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 다. 원자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성취도 불가능했을것이라는 게 윌리엄슨의 논리였습니다.
윌리엄슨의 강연 이후에는 토론 시간이 없었습니다. 따 라서 반론을 제기하고 싶은 사람들이 발언할 기회가 없었 죠. 사람들은 윌리엄슨에게 따로 시간을 잡아 공개 토론회 를 열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그리고 1869년 11월 4일,“원 자 이론에 관한 윌리엄슨 박사의 강연에대한 토론회”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는“화학회의 역사를 통틀어 기억 할만하고 흥미로운 저녁”이었다고 하죠.
이번 토론회의 좌장은 브로디였습니다. 브로디는 토론 회가 시작되자 강력한 공격을 시작합니다. 그는 화학에서 구조적인 비유를 전부제거해야 한다며, 이 비유가 화학자 들을 속여“자신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것들을 이해하 고 있다는 믿음”에 빠뜨렸다고 강변했습니다.화학은 기 체의 부피 비나 반응열 등 실험으로 측정할 수 있는 값들 에 의존해야 하며, 원자와 같은“허구”는 이러한 사실들과 구분되어야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죠.
윌리엄슨은 즉각 반박했습니다. 그는 허구와 사실을 구 분하고 있으며, 브로디와 자신의 차이는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고 있는 데에서기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윌리엄슨은 케쿨레를 인용하면서 원자 자체가 어떤 모양일지 따지는 것은 현재의 지식 수준에서 의미 없을지 모르겠지만 그 개 념은 충분히 화학자들에게 의미가 있다고 항변했습니다. 윌리엄슨의 발언이 끝나고 실용주의자들이 입을 열었습니 다. 이들은 원자의 실재성에는 여전히 의문이 있으나 그보 다 나은 설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화학자들이 사용하 고 있다는 입장을 재차 천명했습니다.
흥미롭게도 그 자리에 참석한 물리학자들이 윌리엄슨을 거들었습니다. 최근 물리학계에서 등장한 빛의 파동 이론 이 테이블 위로 올라왔습니다. 뉴턴 이후 빛은 입자로 구 성되어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지만, 19세기 들어 빛을 파동으로 기술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입장이 등장 하였습니다. 1830년대의 치열한 토론을 거쳐 결국 1860년 대에는 빛의 파동 이론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죠.14
토론회에 참석한 물리학자들은 파동 이론이 빛의 여러 가지 성질을 잘 설명하는 이상 자신들은 빛의 본성이 무엇인 가를 두고 계속 토론하는 대신 파동성을 빛의 본성으로 받 아들였다며, 화학자들이 불필요한 토론을 하는 것 같다고 지적했습니다.
결국 토론회에서는 세 가지 입장이 확인되었습니다. 원자 의 실재성을 믿는 원자론자들, 원자의 실재성을 믿지 않는 반원자론자들, 그리고원자의 실재성에는 눈을 감은 채 원 자설을 실용적으로 이용하려는 실용주의자들이 그들이었죠. 어느 한쪽도 다른 쪽을 완전히 설득해내지못했습니다. 막 창간된 학술지15『네이처』에서는“원자 논쟁”이라는 제목 아 래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남겼습니다.“그 자리에 참석한 양편 의사이에는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깊고 넓은 구덩이가 있으며, 아마 그 사이에 다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16
사실 이것은 오랜 전쟁의 서막이었습니다. 19세기가 끝 나고 20세기가 시작될 때까지, 원자의 실재성은 화학자들 에게, 그리고 물리학자들에게 확실하게 증명된 과학적 사 실이 아니었습니다. 원자론자들, 반원자론자들, 실용주의 자들은 이후로도 몇십 년 동안 치열하게 논쟁을 벌였습니 다. 우리가 19세기 화학사를 읽을 때 주의해야 할 점이 이 것입니다. 당시 화학자들에게 원자 개념은 우리에게처럼 확실한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이 불확실한 기초인 원자 개념 위에 발을 디딘 채 연구를 진행하였고, 심지어 새로운물질까지 합성해내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1. 이 내용은 다음 글들에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Mary Jo Nye,“The Nineteenth-Century Atomic Debates and the Dilemma of an‘Indifferent Hypothesis’,”Stud. Hist. Phil. Sci. 7 (5), 245-268 (1976); MaryJo Nye, From Chemical Philosophy to Theoretical Chemistry: Dynamics of Matter and Dynamics of Disciplines, 1800-1950 (Berkeley, C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3), Chapter 3; Brock and Knight,“The Atomic Debates:‘Memorable and Interesting Evenings in the Life of the Chemical Society’,”Isis 56 (1), 5-25 (1965); Alan J. Rocke,“The‘Indifferent Hypothesis’Redux: the Dilemmas of Pierre Duhem,”Historical Studies in the Natural Sciences 47 (3), 268-292 (2017).
2) Brock and Knight (1965), 8쪽에서 재인용.
3. Mary Jo Nye (1976), 248쪽.
4. Frank A. J. L. James,“The Establishment of Spectro-Chemical Analysis as a Practical Method of Quanlitative Analysis, 1854-1861,”Ambix 30 (1), 30-53 (1983).
5. 분젠과 키르히호프의 방법론이 이전 세대의 시도와 비교하여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과학사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갈립니다. 다음 글들을 참조하십시오. Frank
A. J. L. James,“The Creation of a Victorian Myth: The Historiography of Spectroscopy,”History of Science 23 (1), 1-24 (1985); M. A. Sutton,“Spectroscopy, Historiography and Myth: The Victorians Vindicated,”History of Science 24 (4), 425-432 (1986); Frank A. J. L. James,“Spectro-Chemistry and Myth: A Rejoinder,”History of Science 24 (4), 433-437 (1986).
6. 훗날 이 선 스펙트럼은 이온화된 산소 원자에서 나온 스펙트럼으로 밝혀졌습니다. I. S. Bowen,“The Origin of the Nebulium Spectrum,”Nature 120, 473 (1927).
7. William Huggins,“XIII. On the Spectra of Some of the Nebulæ,”Phil. Trans. 154, 437-444 (1864).
8. “화학사 돌아보기 21. 화학 구조의 인식,”『화학세계』2024년 10월호 참조.
9. 실제로 브로디의 논리는 따라가기가 어렵고, 그가 사용한 기호의 의미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단순히 그가 원자 개념을 피하기 위해 수학적 연산으로 화학을 다시 쓰 고자 했다는 점만 언급합니다. 보다 깊은 논의는 Stephen T. Irish,“Brodie’s Calculus and Chemical Classification,”Ambix 60 (3), 234-254 (2013)를 참조하십시오.
10. Brock and Knight (1965), 12쪽에서 재인용.
11. Masanori Kaji,“Mendeleev’s Discovery of the Periodic Law: the Origin and the Reception,”Foundations of Chemistry 5, 194 (2003).
12. Mary Jo Nye (1993), 70쪽에서 재인용.
13. Brock and Knight (1965), 14쪽에서 재인용.

최 정 모 Jeong-Mo Choi
• 한국과학기술원 화학과, 학사(2003.3 - 2011.8)
• Harvard University 과학사학과, 석사(2011.9 - 2015.5, 지도교수 : Naomi Oreskes)
• Harvard University 화학 및 화학생물학과, 박사 (2011.9-2016.5, 지도교수 : Eugene I. Shakhnovich)
• Washington University in St. Louis, 박사후연구원(2016.8 - 2019.4, 지도교수 : Rohit V. Pappu)
• 한국과학기술원 자연과학연구소, 연구 조교수(2019.6 - 2020.8)
• 부산대학교 화학과, 조교수(2020.9- 2024.8), 부교수(2024.9- 현재)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