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물리화학(1)(2025년 6월호)
- 洪均 梁
- 2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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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 10시간 전

뉴턴 이후의 화학자들이 물리학을 바라보는 관점은 복잡미묘했습니다. 어떤 화학자들은 물리학을 모든 과학이 따라야 할 모범으로 보고 화학을 물리학처럼 만들고자 노력했고, 어떤 화학자들은 화학은 물리학과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화학의 고유성을 강조했죠. 화학 혁명을 이끌었던 라부아지에는 화학의 정량화를 시도했습니다. 그는 질량 보존의 법칙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반응 전후의 열량을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했죠.[참고문헌 1] 그 이후 정량적인 측정이 화학의 핵심 방법론으로 부상했고, 원자론과 정량적인 데이터가 결합하면서 화학은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였습니다. 하지만 19세기 후반에 이르도록 여전히 물리 학과 화학의 관계는 명확하게 정립되지 못했습니다. 화학은 화학대로, 물리학은 물리학대로 각자의 길을 걷고 있 었죠.
한편 “물리화학(physical chemistry, Physikalischen Chemie)”이라는 용어는 19세기 초부터 종종 사용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독일의 물리학 학술지였던 『물리학 연보(Annalen der Physik )』는 더 많은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1819년 『물리학 및 물리화학 연보(Annalen der Physik und der Physikalischen Chemie )』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참고문헌 2] 끓는점, 밀도, 열 용량 등 물질의 물리적 성질을 주로 연구하던 헤르만 콥(Herrmann Kopp, 1817-1892) 은 1863년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물리화학 석좌 교수” 로 임명되었고요. 이 당시의 “물리화학”은 그저 화학 내의 물리학적 요소를 강조하는 느슨한 용어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화학이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1880년대부터입니다. 화학사학자 메리 조 나이(Mary Jo Nye)는 이 물리화학을 “새로운” 물리화학이라 부릅니다.[참고문헌 3] “새로운” 물리화학은 화학과 물리학의 관계를 새로 정립하였고, 화학의 흐름을 크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첫 열개의 노벨화학상 중 자그마치 세 개가 이 분야에서 탄생했죠. 이번 글과 다음 글에서는 이 “새로운” 물리화학이 시작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참고문헌 4]
1870년대의 화학계는 구조 이론에 열광하고 있었습니다. 분석 기법의 발전으로 물질의 구성을 정확하게 알 수 있었 고, 합성의 유행으로 전에 본 적 없는 새로운 물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던 시대에, 구조 이론은 이 모든 유기 물질들의 구성 원리를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놀라운 이론이었습니다. 특히 이성질 현상과 같이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을 정확하게 설명한다는 강점을 가지고 있었죠. 그렇지만 구조 이론에 만족하지 못하는 화학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반응이 왜 일어나는가? 반응은 어느 시점까지 진행되는가? 반응의 속도는 어떻게 정해지는가? 구조 이론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답을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질문들에 그동안 아무도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베르톨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참고문헌 5] 베르톨레는 라부아지에와 함께 활동했던 화학자로, 19세기 초 화학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입니다. 베르톨 레는 화학 반응이 항상 반응물을 완전히 소진할 때까지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차렸습니다. 특히 처음에 반응물과 생성물이 얼마나 존재했느냐에 따라 화학 반응의 진행 정도가 달라졌죠.[참고문헌 6] 베르톨레는 이를 화학 반응에 참여하는 물질들 사이의 친화도가 물질의 양에 따라 달라진다고 해석했습니다. 물질 사이의 반응은 구성 성분들 사이의 일정한 비율로 일어난다는 생각이 팽배했던 19세기 초, 베르톨레의 이러한 관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원자론이 주류를 이룬 1820년대 이후에는 화학자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게 됩니다.[참고문헌 7]
하지만 베르톨레가 완전히 잊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반응물과 생성물의 초기 양이 화학 반응의 진행 정도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실험적으로 관찰되는 사실이었기에, 19 세기 중반에도 여러 화학자들이 베르톨레의 이론을 다시 검토하였습니다. 특히 베르톨레에게 깊은 감명을 받은 노르웨이의 수학자 카토 굴베르그(Cato Guldberg, 1836- 1902)와 화학자 페테르 보게(Peter Waage, 1833-1900)는 1864년부터 일련의 논문을 발표하여 질량 작용의 법칙을 수학화하였습니다. 이들은 화학 반응에 참여하는 물질 들이 갖는 “활성 질량(active mass)”의 곱이 “화학적 힘”에 비례한다고 가정하고, 반응물의 화학적 힘과 생성물의 화학적 힘이 같아지는 평형까지 화학 반응이 진행된다는 이론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류 화학계에서 거리가 있던 사람들이다 보니 이들의 연구는 화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구조 이론의 유행 속에서 화학 평형에 대한 관심을 되살린 것이 판트호프(Jacobus van’t Hoff, 1852-1911)입니 다. 판트호프는 19세기 후반 네덜란드 과학의 중흥기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입니다. 이러한 중흥기가 등장한 배경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고등 시민학교(Hoogere Burgerscholen, HBS)의 역할을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고등 시민학교는 1863년 도입된 5년 과정의 중등 교육 기관으로, 과학 중심의 실용적인 교육을 통해 상공업과 기술 분야에 종사할 중간계층 시민을 양성할 목적으로 설립되었습니다. 고등 시민학교는 기존의 인문 고전 중심 교육과 달리 수학, 자연과학, 기술, 현대어(영어, 프랑스어, 독일 어) 등을 중심으로 교육 과정을 구성하여 산업화와 근대화를 추구하던 당시 네덜란드 사회의 필요에 부응하였죠. 고 등 시민학교는 놀랍도록 성공적이었습니다. 1910년의 조사에 따르면 당시 네덜란드 대학교의 교수 중 절반이 고등 시민학교 졸업생이었습니다. 게다가 로런츠(Hendrik Lorentz, 1853-1928), 제이만(Pieter Zeeman, 1865-1943), 온네스(Heike Kamerlingh Onnes, 1853-1926), 더프리스(Hugo de Vries, 1848-1935) 등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과학자들이 전부 고등 시민학교 출신이었죠. 중등 교육의 힘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고 할 수 있겠습니다.
판트호프는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고등 시민학교를 졸업한 후 1869년 델프트 공과 대학교(TU Delft)에 입학하였습니다. 여기서 그는 화학과 수학에 큰 흥미를 느꼈고 2년 만에 델프트의 3년 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이후 화학을 계속 연구하기로 결심한 판트호프는 1872년 케쿨레의 연구실에 들어갔죠. 처음에는 대가의 연구실에서 연구를 배운다는 것에 큰 기쁨을 느낀 판트호프였지만, 이내 케쿨레가 원하는 것과 자신이 원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실망합니다. 판트호프는 구조 이론의 대가로부터 보다 근본적인 원리를 배우길 원했던 반면, 당시 케쿨레는 특정 분자의 연구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판 트호프는 유기화학 실험에 재능이 없었고, 연구실 내의 내부 경쟁 역시 판트호프를 지치게 만들었죠. 결국 판트호프는 케쿨레에게 자신은 다른 연구를 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대체 인력이 많이 있었던 케쿨레는 큰 재능도 없어 보이는 판트호프에게서 관심을 거두었고, 판트호프는 별 소득 없이 네덜란드로 돌아온 후 위트레흐트 대학교(Uni- versiteit Utrecht)에서 1874년 화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 니다.
젊은 판트호프는 당시 구조 이론에 두 가지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 가지는 구조 이론이 원자들이 분자 내에서 차지하고 있는 상대적 위치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분자 내 원자들이 어떻게 움직이는가, 즉 화학 반응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수학과 물리학, 공학에서 충분한 트레이닝을 받은 판트호프는 이 문제를 수학적인 방법으로 풀고자 하였습니다. 그의 첫 번째 시도는 지난 글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탄소 원자 주위의 원자 배치가 정사면체가 되어야 한다는 제안이었습니다(1874년). 당시까지 화학자들은 구조 이론에서 이야기하는 “구조”는 전적으로 편의상의 존재이며 실제 분자의 3차원 구조는 알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판트호프는 그 금기를 과감히 뛰어넘어 공간 속의 배치를 상상했고, 이로부터 광학 활성의 분자적 기원을 설명 할 수 있었습니다.[참고문헌 8]
판트호프는 이러한 업적을 남기고도 한동안 자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그는 수의학 학교에서 화학 및 물리학 강사로 일하다가 1878년이 되어서야 신생 학교인 암스테르담 대학교의 화학, 광물학 및 지질학 교수로 임명되었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속에서도 판트호프는 연구를 멈추지 않았습 니다. 판트호프는 1878년과 1881년, 두 차례에 걸쳐 『유기화학에 대한 단상( Ansichten über die organische Chemie )』이라는 두 권짜리 교과서를 출판하였습니다. 이 책에서 판트호프는 분자의 구조와 화학적 친화력 사이의 관계를 탐구합니다. 판트호프는 화학 결합을 만들어내는 화학적 친화력이 중력과 유사한 수식으로 기술된다고 가정하고, 분자 내 원자의 크기나 모양이 어떻게 화학적 친화력에 영향을 주는지 모형을 세워 수학적으로 풀어내고자하 였습니다. 특히 판트호프의 관심은 이러한 이론을 통해 탄소 원자의 정사면체 구조를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판 트호프는 자신의 정사면체 가설을 더 근본적인 단계에서부터 증명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짐작할 수 있겠지만 판트호프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훗날의 본인조차 이 책은 “굳이 알 필요도 없는(hardly worth knowing)” 책이라 고 평가했으니까요.
그러나 이 작업이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판트호프는 『유기화학에 대한 단상』을 쓰면서 화학 반응에 대한 관심이 생긴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유기화학은 구조만 설명할 뿐 반응의 경향성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메테인(CH4)에서 수소 하나를 OH로 치 환하여 메탄올(CH3OH)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은 구조 이론을 통해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었지만, 어째서 메테인이 메탄올보다 더 연소가 잘 되는지는 설명할 수 없었죠. 이 문제를 풀기로 결심한 판트호프는 당시 원숙해진 열역학 이론[참고문헌 9]을 물리학에서 빌려와 반응 속도의 신비에 접근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 판트호프가 수학과 물리학, 공학에 익 숙한 사람이었다는 점이 큰 이점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판트호프의 연구는 1884년 『화학 동역학 연구(Étudesde Dynamique chimique )』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에서 판트호프는 반응 속도와 반응물의 농도가 수학적으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처음으로 제시합니다. 바로 반응 속도는 농도의 거듭제곱에 비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판트호프는 이 개념에서 출발하여 화학 평형의 개념에까지 도달합니다. 그는 정반응의 반응 속도와 역반응의 반응 속도가 같다면 평형을 이룰 것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반응식에 이중 화살표 기호(⇄)를 등호 대신 사용한 것이 바로 판트호프입니다. 이제 반응 속도식으로 부터, 농도들을 잘 조합하면 항상 상수[참고문헌 10]를 얻게 된다는 질량 작용의 법칙을 유도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판트호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열역학의 방법론을 활용해 평형 상수가 어떻게 온도에 따라 변하는지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는 반응에서 흡수되거나 방출되는 열의 양과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베르톨레가 80년 전 고민했던 문제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화학 반응이 어느 지점까지 진행될 것인가는 온도, 압력, 초기 농도 등에 따라 달라집니다. 판트호프는 이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하였고, 여러 데이터를 인용하여 본인의 이론이 실험과도 잘 부합함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까지 화학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반응과 결부된 열, 즉 흡수열이나 방출열의 양이 화학 결합의 세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평형 상수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였죠. 이 연구는 당시 화학계에 퍼져 있던 여러 오 개념들을 바로 잡았을 뿐 아니라, 새로운 예측까지 제시하는 혁명적인 연구였습니다.
화학계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놀라울 정도로 화학계의 반응은 미미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선 화학자들이 이 책의 내용을 따라가기 힘들었습니다. 당시 화학자 중에는 수학이나 물리학에 익숙한 사람들도 많지 않았을 뿐 아니라, 판트호프 본인이 책을 친절하게 쓰지 않았습니다.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별 다른 설명없이 뛰어넘는 일은 다반사였고, 많은 수식들을 증명없이 제시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판트호프가 이 책에서 여러 화학 시스템을 예로 제시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이 책에 제시된 이론이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이론이 라는 것을 보이려면 더 많은 데이터가 필요했습니다. 평형 상수라는 값이 실험적으로 쉽게 측정할 수 있는 값이 아니다 보니 당시 데이터로는 이론의 보편성을 입증하기 어려웠죠. 마지막으로 판트호프는 기체를 모델 삼아 유도된 열역학 이론을 별다른 증명 없이 용액으로 확장하여 적용하였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설득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사실 판트호프의 이론에서 빈 칸으로 남아있던 부분들 은 그 당시에도 채울 수 있었습니다. 미국의 물리학자 윌러드 기브스( J. WillardGibbs, 1839-1903)는 1870년 대에 열역학을 다양한 평형 계에 적용하는 연구를 수행하였는데, 그 결과 균일 계와 불균일계는 물론, 화학 반응과 전기 현상까지 다룰 수 있는 이론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이론을 사용하면 판트호프의 이론을 더욱 완전하게 만들 수 있었죠. 하지만 기브스의 열역학은 일부 물리학자들에게만 알려져 있었을 뿐, 판트호프를 비롯한 화학자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1890년대가 되어서야 기브스의 이론이 화학자들에게 알려지고, 이를 이용하여 화학 열역학을 더욱 완벽하게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화학사학 자 존 서보스(John W. Servos)는 이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기브스의] 작업은 (...) 화학자들 이 이제 겨우 생각해내기 시작한 문제에 대한 정확한 답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참고문헌 11]
판트호프가 수학과 물리학을 이용하여 화학 반응의 법칙을 찾아내고자 분투하고 있을 때, 비슷한 생각을 가진 화학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화학계의 변방 출신으로, 비슷한 나이 또래였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1877년 자신의 석사 논문 심사에서 이런 주장까지 했다고 합니다. “오늘날의 화학은 개혁이 필요합니다.” 당시 스물세 살이었던 이 당돌한 청년의 이름은 빌헬름 오스트발트(Wilhelm Ostwald, 1853-1932)입니다. 오스트발트와 판트호프, 그리고 그들보다 조금 더 어렸던 아레니우스(Svante Arrhe- nius, 1859-1927)에 의해 화학의 개혁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개혁을 통해 “새로운” 물리화학이 화학의 패러다임으로 자리잡게 되었죠. 다음 글에서는 그 과정을 본격적으로 추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문헌
라부아지에 당시에는 물리학과 화학의 경계가 지금처럼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라부아지에는 물리학과 화학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한편, 화학이 물리학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세한 논의는 Mary Jo Nye, From Chemical Philosophy to Theoretical Chemistry: Dynamics of Matter and Dynamics of Disciplines, 1800-1950 (Berkeley, C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3), Chapter 2 참조.
이걸로도 부족했는지 심지어 5년 후에는 『물리 및 화학 연보(Annalen der Physik und Chemie)』로 이름을 다시 바꿉니다.
Mary Jo Nye (1993), 45쪽.
이번 호의 내용은 다음 글들에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Mary Jo Nye, From Chemical Philosophy to Theoretical Chemistry: Dynamics of Matter and Dynamics of Dis- ciplines, 1800-1950 (Berkeley, C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3), Chapter 5; John W. Servos, Physical Chemistry from Ostwald to Pauling: The Making of a Science in America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1990), Chapter 1; Peter J. Ramberg and Geert J. Somsen, “The Young J. H. van ‘t Hoff: the Background to the Publication of his 1874 Pamphlet on the Tetrahedral Carbon Atom, Together with a New English Translation,” Annals of Science 58: 51-74 (2001); Maurice W. Lindauer, “The Evolution of the Concept of Chemical Equilibrium from 1775 to 1923,” Journal of Chemical Education 39 (8): 384-390 (1962).
베르톨레에 대해서는 “화학사 돌아보기 11. 세기초의 두 논쟁,” 『화학세계』 2023년 4월호에서 자세히 소개한 바 있습니다.
오늘날 “질량 작용의 법칙(law of mass action)”으로 알려진 법칙입니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일정 성분비의 법칙과 질량 작용의 법칙은 양립가능한 법칙들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두 법칙은 서로 모순처럼 보였을 것 입니다. 화학 반응에서 반응물이 반응하는 양이 미리 정해져 있느냐, 정해져 있지 않느냐의 문제로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어떻게 판트호프가 그러한 금기를 뛰어넘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가 있습니다. Ramberg and Somsen (2001), 57-60쪽 참조.
“화학사 돌아보기 19. 1850년대의 풍경,” 『화학세계』 2024년 6월호 참조.
판트호프가 이 상수를 최초로 “평형 상수(equilibrium constant)”라고 불렀습니다.
Servos (1990), 19쪽.

최정모 Jeong-Mo Choi
• 한국과학기술원 화학과, 학사(2003. 3 - 2011.8)
• Harvard University 과학사학과, 석사(2011. 9 – 2015. 5, 지도교수:Naomi Oreskes)
• Harvard University 화학 및 화학생물학과, 박사 (2011.9 –2016.5, 지도교수:Eugene I.Shakhnovich)
• Washington University in St. Louis, 박사후연구원(2016.8 – 2019. 4, 지도교수: Rohit V. Pappu)
• 한국과학기술원 자연과학연구소, 연구조교수(2019. 6 – 2020. 8)
• 부산대학교 화학과, 조교수(2020.9- 2024.8), 부교수(2024.9 -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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