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학세계가 만난 화학자>에서는 대한민국 화학계에 공헌한 화학자와의 인터뷰를 소개해 드리고 있습니다. 이번 호에 모신 이창규 강원대학교 명예교수님께서는 재임 기간 강원대학교에서 유기화학 분야의 연구와 교육에 크게 공헌하셨습니다. 특히 헤테로고리 합성 분야와 탄수화물의 구조결정 분야에서 활발한 연구를 하셨습니다.
정년 퇴임하신 2012년 8월 이후에는 고향인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에서 어린 학생들을 위한 무료과학교실을 운영하고 계십니다. 한 편의 영화로 찍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은 감동적인 스토리를 들려주신 이창규 교수님의 인생에 대한 인터뷰를 소개합니다.
[모더레이터: 한순규 교수 (KAIST 화학과)]
1. 교수님께서는 1947년 지금 계신 강원도 원주의 부론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교수님의 유년 시절에 대해서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저는 6·25 전쟁 중 다섯 살(만 4살) 때 넘어져서 오른쪽 무릎을 다쳐 거의 집안에서만 있었고 걷지를 못해서 초등학교 1,2학년은 학교에 다니지 않았고 3학년 한두 달 다니고 4학년부터는 왼쪽 다리가 성장해서 몸을 지탱 해주어 몹시 절면서 4,5,6학년을 다녔습니다. 5학년 1학기까지는 집과 학교가 가까워서 걸어 다니는 것이 그런대로 문제는 없었지만 5학년 여름에 학교에서 약 1.6 km 떨어진 윗동네로 이사를 하였기에 학교에 다니는 것이 좀 힘들었습니다. 참 고맙게도 동네 어른들이 제가 논두렁 길을 걸어오는 것을 보시고는 학교까지 업어다 주시곤 했습니다. 그렇게 동네 어른들의 등에 업혀서 등교를 할 때 그 등이 어찌나 따뜻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 은혜는 꼭 갚아야지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분을 만나는 날은 등교가 쉬웠지만 그렇지 못한 날에는 무릎 통증을 참으면서 걸어야 했습니다.
당시 부론에는 버스가 저녁때 원주에서 와서 아침 일찍 돌아가면 온종일 어떤 교통수단도 없었고 원주까지 80 리를 걸어서 가야 하는데 어떤 의료상의 치료는 받을 수가 없었고 무당이 굿을 하는 것이 유일한 치료였지요.
6학년 여름방학 때 서울에서 고모님과 고종사촌 형이 오셔서 형에게 “나도 서울에 가서 학교에 다닐 수 없나?” 라고 물었던 것이 우여곡절 끝에 중학교를 서울로 진학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중학교 입학시험에 체력장을 보는데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데다가 시골에서 배운 것이 별로 없었기에 1차는 떨어졌고, 형이 2차로 경신중학교를 지원하도록 해주었습니다. 이 학교는 Underwood 선교사가 세운 학교인데 저 같은 장애인들을 많이 입학시켜 주었습니다. 학교가 큰 아량을 베풀어주어 저를 합격시켜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할머니께서 서울에 오셔서 저를 돌보시면서 학교까지 가방을 들어다 주셨는데 3학년 봄 돌아가셨습니다. 그 후로는 혼자서 아픔을 참으며 학교에 다녔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경신고등학교 시험에 합격은 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고등학교 진학을 못하고 시골에서 1년간 어머니께서 하시는 농사일을 거들면서 지냈습니다. 그 해가 5·16 군사 정변이 일어난 다음 해였는데 극심한 가뭄으로 흉년이 들어서 가을 추수를 하고 방앗간에서 벼를 찧어 빚을 갚고 나니까 다시 먹을 식량을 위해 이자가 50퍼센트인 장리 쌀을 빌려야 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농사를 지어서는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생각을 하고 다시 서울로 가서 경신고등학교를 찾아갔습니다. 당시는 중고등학교를 선생님들이 함께 가르치셨기 때문에 제가 다시 공부할 수 있도록 입학을 시켜주셨습니다. 중학교 졸업 후 1년 동안 제가 학교에 다니지 않은 것을 보시고 선생님들께서 저의 집안 사정이 좋지 않은 것을 짐작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입학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에서 전무후무한 “장학생 선발고사”제도를 시행하였습니다. 3달에 한 번씩 다섯 과목(국어, 영어, 수학, 과학, 사회)시험을 봐서 성적이 우수하면 등록금을 면제해주는 제도였습니다. 이 장학금을 받으려고 고1 때 아주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평균 90점 이상을 받았고 고1 시절 2, 3, 4분기 동안은 등록금을 면제받았습니다. 고2 때부터는 교과과정이 어려워지더군요. 그래서 평균 80점 이상을 받아서 등록금의 반액을 면제받았습니다. 고3 때는 시험이 더 어려워져서 평균이 70점 정도로 등록금 면제는 받지 못했습니다. 졸업 후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 안 사실인데, 제가 졸업한 후에 “장학생 선발고사”제도는 시행되지 않았더군요. 지금도 경신학교에는 고마운 마음이 큽니다.
2. 교수님께서는 1971년 연세대학교에서 화학과 이학사를 취득하셨습니다. 특별히 화학을 전공으로 정하신 이유나 있으셨나요?
고3 졸업 무렵 대학 입시를 딱 한 번만 봐서 합격하고 고향에 내려가 다시 농사를 짓는다면 고개를 들고 다닐 수는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차피 대학에 갈 형편은 못되었으니까요. 그래서 담임 선생님께 사정을 말씀 드리고 제가 합격할만한 대학과 학과를 하나만 찍어달라고 했더니 화학전공이시던 그 선생님께서 “너 연세대 화학과 가면 붙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조언대로 연세대 화학과에 지원하였고 그분의 예측대로 합격한 것이 제가 화학을 평생 하게 된 까닭입니다.
저의 대학생활도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당장 아버지께서는 제가 대학에 다니는 것을 반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당시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넉넉하셨던 큰아버지의 도움으로 연세대학교 화학과에 등록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학교에 다니다 보니 무릎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아파왔습니다. 어머니께서 서울로 오셔서 그 때 처음으로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결핵성 관절염”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약을 먹고 쉽게 낫는 병이었지만 그 당시 저의 관절은 이미 많이 손상된 상태였습니다. 그저 통증 없이 걸을 수만 있기 위해 수술을 받았고, 그 이후 무릎을 굽혔다폈다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수술한 날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네요. 1966년 5월 5일 어린이날이었습니다. 수술 후 요양을 하고 1967년 봄학기에 연세대학교에 복학하였습니다. 그래서 67학번 입학생들과 4년을 같이 다녔습니다.
3. 교수님께서는 1976년 University of Minnesota에서 유기화학 박사학위를 받으셨습니다. 당시 유학생활에서 힘드셨던 일, 미국생활 중 새로이 배우신 점 등이 있으셨나요?
제가 미국 유학을 간 것은 무슨 청운의 꿈을 가슴에 품고 소위 말하는 ‘유학 장도’에 오른 것이 전혀 아닙니다. 대학 4학년 초부터 취직을 하려고 공고가 나는 회사마다 입사원서를 내고 필기시험과 면접을 보러 참 많은 곳을 찾아갔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 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한마디로 ‘사람이 아닌 사람’이었습니다. 필기시험에 합격했으니 면접을 보러 오라고 해서 가면 제가 병역면제를 받은 이유를 물었고 무릎을 구부리지 못한다고 하면 그것으로 면접은 끝이고 불합격 통지조차 해주지 않았습니다. 이런 형편을 아신 연세대 화학과 은사님들께서 저를 취직시키려고 졸업생들에게 부탁하시기도 했지만 취업이 어려울 거라는 것을 아시고 결국 대학원에 진학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1971년 3월에 연세대학교 화학과 대학원에 입학하였는데 지금은 작고하신 한치선 교수님께서 저를 연구실로 호출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지금의 대한민국은 너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유학을 가라”고 하셨습니다. 교수님 오피스를 나와서 빈 강의실에 앉아 참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쨌든 그때부터 TOEFL과 GRE시험 준비를 했고 1971년 가을에 미국 대학원에 지원하였고, 1972년 8월에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 Hostfamily인 Marian과 ArnoldLidfors 부부.
당시 유학생이 환전해서 가져갈 수 있는 달러는 100불이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도움으로 미국에 도착한 그날 International Student Center에서 host family로 Lidfors(Arnold and Marian) 가정을 배정해 주었는데 그분들의 가정에서 6주간 머물면서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하였고 기숙사가 여는 날 그 분들이 저를 기숙사로 데려다 주었고, 추수감사절, 성탄절, 부활절, 등 기숙사에서 식당을 닫을 때마다 저를 데려다가 그분들 가정에서 지내도록 해주셨습니다. 이분들과의 교류는 제가 귀국한 후에도 계속되었는데 Arnold는 2017년 9월에, Marian은 2022년 5월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분들의 아들과는 지금도 소식을 나누고 있습니다.
University of Minnesota 화학과에는 1940년경에 제정된 Lee Irvin Smith Award가 있습니다. 유기화학을 전공하는 고년차 대학원생 중 가장 모범이 되는 한 사람을 2년 차 이상의 대학원생들이 사전투표로 선정하고 매년 5월 초에 가장 큰 친교 행사인 490 Party(490호는 미네소타 대학 화학과에서 가장 큰 실험실)에서 시상식이 이루어집니다. 저는 졸업하기 전인 1976년에 이 파티에서 이 상을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수상자에게는 은색 비커가 부상으로 주어지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수상 이유가 적혀 있었습니다.
“In recognition of high ability and leadership in the field of organic chemistry during his years as a graduate student at the University of Minnesota.”

■ Host family 가족들이 제가 유학을 마치고 떠나던 날(1977 년 2월) 가족 만찬을 하던 모습(왼쪽부터 어머니인 Marian, 둘째 아들 Bill, 아버지인 Arnold, 큰 아들 Bob, 며느리 Barbara, 손녀 Jessic
생각해보면 대학원 시절 저의 실험실뿐 아니라 다른 실험실에서도 학생들이 궁금한 것이 있으면 저에게 자주 물어보았는데 그때마다 어떻게든 그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던 모습이 그들에게 “leadership”으로 비쳤던 모양 입니다. 이날 수상 소감으로 “나는 많이 부족하지만 여러분이 나를 사랑해주었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한국에 돌아가서 이 컵에 담긴 사랑을 한국 학생들에게 나누어주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유년, 청소년, 대학생 시절, 그리고 유학을 가기 전까지 저는 우리나라에서 어머니와 형제 자매들 외 누구로부터도 사랑은커녕 사람 취급도 받기 어려운 존재라는 생각을 늘 했었는데 host family와 미국 학생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저의 자신에 대한 관념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고 저도 이들에게서 받은 사랑을 내 나라의 학생들과 이웃들에게 나눠주어야 한다는 신념이 가슴에 싹터서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유학을 해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이라고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Lee Irvin Smith Award’ 부상으로 받은 컵

■ 지도 교수님이신 Wayland E. Noland 교수님(정면을 보시는 분)과 대학원생 모습
4. 교수님의 인생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던 분은 누구셨나요?
평생을 장애인으로 사는 아들에 대해서 ‘당신 전생의 죄로 말미암아 자식이 병신이 되었다’고 한숨을 늘 쉬셨던 어머니, 그 눈물을 잊을 수 없고, 그래서 어머니에게 그리고 누님과 동생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리라 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5. 교수님께서 강원대학교에 부임하시게 된 스토리를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강원대학교 몸담게 된 이야기를 하려면 아내를 만났던 이야기부터 해야겠네요. 경신고등학교 1학년 재학 중인 어느 봄날 학교 전체가 창경궁으로 사생대회를 나갔을 때였습니다. 그곳에서 어느 시각장애인이 하모니카를 부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 옆에 아이를 포대기로 싸서 업은 여인이 벽을 바라보고 서서 그 음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수치심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다리를 몹시 절었던 저는 그때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배우자에게 저의 장애로 인한 어려움과 수치심을 짐 지우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저의 생각은 1977년 미국에서 박사 학위와 포스닥을 마치고 연세대학교 화학과 조교수로 임용되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저의 그러한 생각을 말씀드렸고 이해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종종 어머니가 혼자서 통곡하시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당신 전생의 죄로 제가 병신이 된 것이고 그 때문에 결혼도 안 한다며 우시는데 마음이 참으로 아팠습니다.
1977년 연세대학교에서 대학원 강의를 하는데 이화여자대학교 재학 중이던 당시 제 아내가(한인숙 강원대학교 과학교육학부 명예교수) 제 수업을 들었습니다. 학부 졸업 후 교사 생활도 2년 반 동안 했던 당시 제 아내는 수업을 들으면서 유학을 가고 싶다는 뜻도 말했습니다. 특히 연구와 관련하여 저에게 많은 것을 물어보았고 저는 아는 대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그렇게 대화를 많이 나누다 보니 데이트도 하게 되었습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아내에게 프러포즈를 했고 아내는 받아주었습니다. 하지만 장인 장모님의 반대가 아주 심했습니다. 장애인인 저를 사위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겁니다. 부모님들이 반대 하는 결혼을 하는 것이 옳은지 갈등도 많았지만 저와 아내는 결혼하기로 결심을 했고, 마침 어머니의 회갑 날짜에 맞춰서, 1979년 2월에 연세대학교 채플에서 오전 11시에 결혼식을 하고, 12시에 어머니 회갑연을 겸한 결혼 피로연을 하였습니다. 당시 하객으로 KAIST의 심상철 교수님도 오셔서 축하해주신 기억이 선명합니다.

■ Postdoc 연구시절 그룹사진으로 맨 왼쪽 넥타이맨분이 RobertVince교수님. 오른쪽에서 두 번째분이 이창규교수님

■ 미네소타 대학교 연구원 시절. 큰 아이와 이창규 교수님
결혼 1년 후인 1980년 1월 저는 Vince 교수님의 초청으로 미네소타 대학교 약화학과 연구원 신분으로 임신한 아내와 함께 미국에 갔습니다. 아내는 그해 5월 출산을 했고 9월부터 화학과 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어 물리유기화학을 전공하였습니다(지도 교수: Maurice Kreevoy). 그 후 제가 먼저 1982년에 강원대학교 화학과에 임용되었고 아내는 1984년 8월에 박사 학위를 받고 강원대학교 과학교육학부에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결혼 후 연구원 신분으로 다시 Vince 연구실에 갔을 때(1980년) 큰아이를 낳고 차 없이 살면서 아기 기저귀와 생필품을 사서 stroller에다 매고 back pack에 담아 운반하던 시절의 사진으로, stroller는 미국 교회 친구들이 1980년 4월 종려 주일 날 baby shower party를 전 교회적으로 열어서 아기에게 필요한 모든 용품을 마련해 준 것 중 하나입니다. 이런 이웃을 따듯한 사랑을 처음 받아본 아내가 파티 내내 눈물을 쏟았던 기억은 지금도 부활절 무렵이 되면 떠오르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일깨워 줍니다.
6. 재임 기간에 강원대학교에서 수행하신 연구내용을 간단히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Five-membered heterocyclic compounds의 방향성과 반응성, 그리고 1987년과 1993년에 방문교수로 다시 University of Minnesota에 갔을 때 새로이 배우게 된 다당류의 구조 결정에 관한 연구를 주로 수행하였고, 1997 년에 강원대학교 공동실험실습관에 400 MHz NMR기기가 도입되어 기기담당 교수 임무를 맡게 되어 대학 전체의 이공계 전공 연구자들에게 이 기기의 활용도를 증대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우선 기기 사용빈도를 높이기 위해서 그 동안 제가 합성했던 물질들의 NMR 스펙트럼 특징을 분석하여 이론적인 설명을 제시하는 논문 들을 여러 편 발표하기도 하였습니다.
7. 교수님께서는 강원대학교에서 재임하시면서 혹은 그 이후에도 갖고 계신 교육 철학이 있으신가요?
대학 교육이란 천재를 뽑아서 조금 더 나은 천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보통이거나 그보다도 못한 수준의 학생들을 잘 가르쳐서 사회의 일원으로서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살면서 사회에 기여하는 인재를 만드는 것이라고 늘 생각했고 그러기 위해 저의 모든 것을 쏟아 붓겠다고 다짐하면서 강의와 연구를 했습니다.
1982년 제가 처음에 강원대에 부임했을 때는 강원대학교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 지금보다도 매우 낮았습니다. 학생들도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낮았습니다. 많은 이유로 고민하고 방황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저는 재직하는 동안 온 힘을 쏟아 강원대를 명문대로 만들어 학생들이 가슴을 펴고 학교에 다니게 하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부임 초기 학생들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니 영어 실력이었습니다. 그래서 영어 0교시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화학과뿐 아니라 누구든 영어 공부를 하고 싶은 학생들에게 아침 일찍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혹독했던 저의 영어 0교시 수업 3년 반 코스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학생이 5명이었는데 그중 2명이 교수가 되었습니다.
학과에서 실험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 위해서 제가 갖고 있던 미국의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미국에서 쓰지 않는 실험 기기를 강원대로 보내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실험 여건을 마련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또한 아내인 한인숙 교수가 강원대학교에 부임한 후에는 한 명의 월급은 가족이 생활하는 데 쓰지만 한 명의 월급은 연구비로 쓰기로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1987년 우리가 1년간의 연구 출장을 마치고 1988년 2월에 귀국하면서 미국에서 2만 6,000달러 상당의 실험 기기를 들여왔고, 1993년과 2000년에도 함께 1년씩 연구 출장을 한 후 사비로 연구기기를 구입해서 강원대에 기부채납 형식으로 도입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 화학과 유기화학 세미나 보조원으로 George Olah 교수님을(1994년 노벨 화학상 수상) 뵌 적이 있습니다. 그분의 통찰력과 위대함이 인상 깊게 남았습니다. 그때 제가 받았던 학문적인 충격을 강원대 학생도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1995년부터 헤테로고리 화합물의 화학 심포지엄을 시작하게 되 었습니다. 강원도 학생들이 우리나라 최고의 유기화학자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한편으로는 강원대 학생들에게 프라이드를 심어주고자 했습니다. 헤테로고리 화합물의 화학 심포지엄은 지금까지도 잘 진행되고 있는 데 현재는 이필호 교수님이 심포지엄 운영을 위해서 큰 수고를 해주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심포지엄 운영 초창기에 교수님들을 연사로 초청하면 모두 흔쾌히 수락해주셨습니다.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지요. 그 당시 변변한 연사비도 드리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오시는 연사님들께 저희 집에서 아내가 아메리칸 스타일의 조식을 대접하곤 했습니다. 심포지엄과 관련된 많은 에피스드가 있지만 KAIST의 심상철 교수님을 초청하여 강연도 듣고, 조식도 대접하였는데 몇 달 후 심 교수님께서 암으로 돌아가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초청 당시 저는 교수님의 암 투병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는데 말기 암을 앓고 계셨음에도 심 교수님은 저의 초청을 수락하신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울컥합니다. 이렇듯 동료 화학인들로부터 저는 정말 너무도 많은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합니다.
8. 교수님께서는 2012년 강원대학교 화학과 정년퇴임 후 고향인 원주시 부론으로 돌아오신 후 무료과 학교실인 “지혜탐구창고”를 여시고 지금까지 운영하고 계십니다. “지혜탐구창고”에 대해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지혜탐구창고”를 여신 취지는 무엇이었나요?
앞서 저의 어린 시절 얘기에서 말씀드렸듯이 저를 업어서 학교에 데려다 주신 분들의 등에서 저는 늘 그분들의 등이 참 따듯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에게 입은 은혜를 언젠가는 꼭 갚으리라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1993년 8월에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셨는데 제가 태어난 집을 제 명의로 이미 이전해 놓으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집에다 과학실을 지어서 저에게 등을 내주셨던 분들의 손자 손녀들에게 과학을 가르쳐주는 것으로 그분들에게 마음에 진 빚을 극히 조금이라도 갚으리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정년을 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준비를 하고 외양간, 돼지우리, 창고 등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새 건물을 짓고 기구를 갖추고 해서 2013년 6월에 개원을 하였습니다. 물론 어린이나 부모들 또 지역 주민들에게 어떤 부담도 주지 않겠다는 것이 처음부터 정한 방침이었습니다. 대상은 이곳의 어린이집과 제가 졸업한 부론초등학교 학생들이지만 인근 문막과 원주등지에서 소문을 듣고 연락하고 찾아오는 어린이들도 있습니다.

■ 강원도 부론면에 위치한 어린이무료과학실 “지혜탐구창고”
우리 과학실에서는 선행학습을 하지 않습니다. 어린이들이 사물을 보고 신비하고 아름 답다고 느끼고 사물을 말이나 숫자로 표현하고 싶어하는 습관을 심어주고 의지를 일깨워 주는 것이 모든 실험 지도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기체, 액체, 고체를 주제로 하는 체계적 인 실험을 실시합니다.
9. “지혜탐구창고”와 함께 “지혜탐구사랑방”도 만드셨는데 이에 대해서 설명해주 실 수 있을까요?
사랑방은 제가 어렸을 적에 농사지으며 일꾼들과 함께 새끼를 꼬거나 농기구를 손질하면서 사랑방에 둘러앉아 밤늦게까지 이야기하며 놀던 추억을 되살리고 싶어서 꾸민 것인 데 농사짓는 방법이 예전과는 너무도 다르기에 독서를 통하여 인성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롭게 시도해 보려고 일단은 독서실로 꾸몄습니다. 제가 그동안 모았던 화학과는 관련이 없는, 그러나 과학 일반에 대한 참고서, 소설, 시, 영문 책자, 등 약 3천 권의 책을 구비하고 있습니다.
요즘 농촌의 인구가 급감하다 보니, 그리고 스마트폰과 인터넷, TV, 등 시간을 보낼 방편들이 너무 많으니까 사랑방을 이용하는 사람은 극히 적습니다.

■이창규 교수님이 어린이들에게 과학실험 수업을 진행하는 모습

10. “지혜탐구창고”와 “지혜탐구사랑방”을 운영하시면서 어려운 점도 많이 있었을 것이라 예상됩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고 어떻게 해결을 해오셨는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과학교실을 운영하시면서 가장 보람된 때가 언제인가요?
처음에는 과학 실험을 한다고 하니까 혹시 독극물 같은 시약을 써서 공기나 하수도를 오염시키지 않을까 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시약을 전혀 쓰지 않고, 액체는 물, 식초, 소주, 기름 같은 것만 사용하고 고체는 소금, 설탕, 소다, 모래만 사용한다고 공지를 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했고 지금은 누구도 우리 과학실에서 위험한 실험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린이집 아동들은 대개 만 6세인데 이들이 돌아가서 “고체”, “액체”그런 말을 크게 떠드는 것을 본 어린이집 원장이 “너무 놀랐다”는 얘기를 저에게 했을 때 무엇인가 이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며 과학실을 연 것을 참 잘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최근 코로나 사태가 좀 잠잠해지면서 어린이들을 데리고 온 한 어린이집 원장이 아이들에게 실험복을 입혀서 온 것은 정말 뜻밖이었지만 과학실험에 임하는 마음가짐을 일반인들이 생각할 수 있도록 우리 과학실이 동기유발을 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확신합니다. 우리 과학자들이 사회에다 과학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무엇이라도 찾아서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 저의 신념입니다.
매 학기 말에는 종강파티를 합니다. 학부모도 모두 오도록 초대합니다. 아무래도 시골이다 보니 어린이들에게 좀 새로운 음식을 맛보게 하자고 아내가 직접 정성을 들여서 음식 준비를 합니다. 어린이들이 무척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여러 가지 의미로 보람을 느낍니다.
우리나라의 낮은 출산율이 큰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데 제가 있는 부론면에서도 이를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 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부론면에 초등학교가 5개가 있었는데 지금은 부론 초등학교 하나밖에 남지 않았고 그나마도 전교생이 30명입니다. 전교생 30명 중 다문화 가정 학생이 50-60% 정도를 차지합니다. 이 학생들의 경우 국어 실력이 조금 뒤처지는 것을 느낍니다. 초등학생 과학교실은 방과 후 활동으로 진행하다 보니 집이 근처에 있어 통학버스를 타지 않는 학생들이 주로 참여합니다. 과학교실 후 학생들이 귀가할 수 있는 수단이 있으면 좋겠는데 그런 여건이 되지 않아 과학교실에 참여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11. 교수님의 아내 한인숙 교수(강원대학교 과학교육학부 명예교수)님도 같은 유기화학자로서 교수님의 든든한 동반자로 함께 하셨습니다. 정년퇴임 후 굉장히 의미 있는 사회환원 활동을 하고 계시는데. 이 를 위해서는 교수님의 의지뿐 아니라 가족의 동의와 지지가 있어야 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부분 에 대해서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저의 아내인 한인숙 교수는 제가 정년 후 귀향해서 과학실을 짓고 동네 어린이들에게 과학을 가르치면서 여생을 보낼 거라는 뜻을 적극적으로 공감하며 지원해 주었습니다. 정말 다행히도 우리 부부는 전공도 유기화학이라 서로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잘 통하기 때문에 대화가 쉽게 이뤄집니다. 과학실에 필요한 것은 항상 아내가 구입해서 공급해 줍니다. 저희는 아들만 둘이 있고 다 결혼해서 가정을 가지고 있는데 제가 하는 일에 무척 긍지를 느끼며 응원해 줍니다.
12. 정년퇴임을 앞둔 화학분야 교수님 중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 기대 및 걱정이 있는 분들이 많이 계십 니다. 이분들에게 해주실 말씀 있으실까요? 그리고 끝으로 회원분들에게 해주시고 싶으신 말씀 있으 신가요?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저는 많은 분들로부터 은혜를 입었고 정년퇴임 후에는 그것을 갚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현재 운영하고 있는 과학교실이 그 일환인 것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한편으로는 과학교실을 통해서 어린 세대가 과학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다면 이는 또한 동료 화학자로부터 받은 고마움을 갚은 길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지난 10년 동안 아이들을 지도한 내용을 바탕으로 어린이 실험 책인『지혜탐구창고에서 생긴 일』을 출판하려고 합니다. 몇몇 출판사에 연락하였는데 큰 관심을 받지 못한 상황을 포항공대 박재욱 교수님과 서강대 이덕형 교수님께서 들으시고는 각각 1,000만 원씩 지원을 해주시겠다고 하셔서 출판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이루 말할 수 없이 고맙고 가슴 벅찬 일입니다. 이 실험 책은 어린이가 부모와 함께 식탁, 부엌, 화장실, 등 아무 데서라도 과학실험을 할 수 있도록 편집을 하였습니다. 어린이들이 아주 일찍부터 과학에 관심을 가지도록 하며 스마트폰에 어른이고 아이들이고 깊이 빠져 있는 가정의 분위기를 과학실험을 소재로 하여 대화하는 분위기로 바꿀 수 있는 자료를 많이 수록하였습니다. 지금 과학이 그리 호감이 가지 않는 우리 사회에다 어쩌면 제가 내놓을 수 있는 마지막 정성이라고 생각하며 심혈을 기울였다고 하겠습니다.
저는 1989년 초에 Solomons가 쓴『Organic Chemistry, 4th Ed.』의 번역 의뢰를 받았습니다. 저와 아내 둘이서 1년간 작업을 하여 1990년에 번역본이 나왔습니다. 당시 인세로 350만 원을 받았는데 그때 교수 월급이 100만 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꽤 큰돈이었습니다. 저는 이 돈을 어떻게 의미 있게 쓸까 하다가 절반은 큰아이의 피아노 구입에 썼고 그리고 절반은 미국 유학시절 저를 도와주셨던 Arnold와 Marian의 아들 Bob이 아프리카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Bob에게 선교 후원금으로 인세를 보냈습니다. 그때 Bob은 마침 원주민 목회 자들의 연수 프로그램을 계획하면서 1주일의 식대를 마련하기 위해 기도하는 중이었는데 자기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었다며 감사해 하는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 뒤로도 12판의 번역판이 나오기까지 인세가 나올 때마다 지난 30년 동안 Bob에게 선교 후원금을 보냈습니다. 2019년에는 Bob이 선교 활동을 은퇴해서 인세를 어떻게 쓸까 고민하던 중 저의 대학교 입학금을 내주셨던 큰아버지의 손자(사촌 형님의 큰아들)가 캄보디아에서 선교사로 활동하 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최근 2년간 받은 인세를 모두 그에게 후원금으로 보냈습니다. 그렇지만“너의 할아버지 에게 받은 은혜를 갚는 것이다.”라고는 아직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경신학교는 제가 중·고등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해준 고마운 곳입니다. 장학금을 받아 등록금이 해결되었을 때 언젠가는 이 학교에 진 빚을 갚으리라 생각을 했었고 이따금 그 생각이 떠오르기는 했지만 무려 33년이 지나서야 실천하는 계기가 생겼습니다. 2000년에 저와 아내가 다시 미네소타로 연구 출장을 갈 계획을 세웠는데 우리 나이가 이미 50세를 넘어서인지 미국에서 스폰서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한 교수님으로부터 우리를 1년간 연구원으로 지원하겠다는 이메일을 받게 되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하는 생각에 이르자 문득 경신고등학교 장학생 선발고사와 함께 그때 마음속에 약속했던 빚 갚기가 떠올랐습니다. 아내에게 처음으로 저의 어두웠던 고교 시절 얘기를 하며 혹시 미국에 가서 무슨 사고라도 생기면 그 약속을 영영 지키지 못할지도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아내가 바로 은행에 가서 1,000만 원짜리 수표를 한 장 만들어 왔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1999년 5월 14일, 바로 스승의 날 전날 모교를 찾아갔습니다. 저를 처음 보는 교장선생님께“빚을 좀 갚으러 왔습니다”고 말을 꺼내며 옛날 이야기를 했습니다. 교장 선생님은“저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셨다”고 하시며 두 장의 A4 용지를 제게 보여주셨는데 한 장에는 당시 IMF 사태로 등록금이 밀려 퇴학당할 학생들의 명단과 분기 수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고 다른 장에는 스승의 날을 맞아 올해는 선생님들이 학생 들에게 선물하는 행사로 꾸며보자며 등록금 찬조 금액을 적도록 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정도로는 단 몇 명의 등록금도 해결하기 어렵기에 하나님께 기도를 해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교수님이 주신 금액을 어떻 게 쓸까요?”하고 제게 물으셨습니다.“모두 학생들이 퇴학당하지 않도록 등록금을 내 주세요. 그런데 시험은 보지 마시고요.”
한 3주 후 교장 선생님이 저희 집으로 전화를 하셨는데 아내가 받았습니다. 아내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몇 번 이고 하신 후 아내가 전화를 제게 넘겨주었습니다.“교수님, 오늘부로 우리 학교에 등록금을 단 1기분이라도 밀린 학생은 없습니다.” “아니, 그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IMF로 인해 많은 가정이 어렵다고 하셨는데. 제가 드린 금액으로는 어림도 없을 텐데요.” “교수님,‘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를 기억하시지요? 교수님이 가시고 그날 종례 시간에 “33년 전 선배 교사들이 다리를 몹시 절던 한 학생을 도와준 일이 있었는데 그 학생이 교수가 되어 찾아와 후배들에게 장학금을 내놓았다”고 했더니 교사들이 더 많은 금액을 약정하고 하여 이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지금 생각해보면 씨를 뿌리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누군가는 결실을 거두게 된다는 진리를 제가 늦게라도 깨달을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며 남은 생을 살아가리라 머리를 숙이게 됩니다.
정년을 앞두신 모든 교수님 박사님들께서는 20대 초반에 대학에 입학하여 화학을 공부해서 평생 연구하고 가르친 결과는 머릿속에 엄청난 지식과 지혜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어떤 방법으로든 사회에 또 다른 형태로 환원하는 활동을 계획하고 실천하시면 필경 우리 사회는 더욱 건강하고 밝은 모습으로 조금씩 발전해 갈 거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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