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올해의 분자: 벤젠(Benzene)
- 성완 박
- 4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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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수 | 서강대학교 화학과 교수

2025년은 벤젠이 처음 발견된 지 200년이 되는 해이다. 대한화학회가 ‘2025 올해의 분자’로 벤젠을 선정한 것은 단순한 기념을 넘어, 현대 화학의 기초를 다지고 화학 산업의 초석이 된 이 분자의 과학적·역사적 의미를 다시 조명하기 위함이다. 벤젠은 방향족 화학의 기반을 구축함으로써 신소재와 의약품 합성으로 확장되는 현대 화학 산업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화학자들에게 방향족 분자의 구조와 반응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온 분자이다. 이 글에서는 벤젠의 발견과 합성, 그리고 유기화학과 구조화학의 발전에 미친 영향을 각 분야에 중요한 기여를 한 화학자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우연에서 시작된 발견: 마이클 패러데이
벤젠의 역사는 1825년, 영국의 화학자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로부터 시작된다. 패러데이는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채 13세에 인쇄제본 공장 (제책소)의 견습생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는 제본을 맡은 책들을 틈틈이 읽으며 독학으로 과학 지식을 쌓았고, 특히 제인 마셋(Jane Marcet)이 쓴 “Conversations on Chemistry”는 패러데이에게 화학이라는 학문을 체계적으로 소개해 준 책이었다.
그가 화학자의 길을 걷게 된 결정적인 전환점은 당대 최고의 화학자인 험프리 데이비(Humphry Davy)의 강연이었다. 후원자의 도움으로 왕립연구소에서 열린 데이비의 강연을 들을 기회를 얻은 패러데이는, 강연 내용을 꼼꼼히 필기해 정리한 노트를 데이비에게 직접 전달했다. 이 노트를 계기로 패러데이는 1813년에 데이비의 실험 조수로 채용되며 본격적으로 과학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이후 패러데이는 조명용 가스, 석탄 타르, 고래 기름 등 실용적 문제와 맞닿아 있는 물질들을 분석하는 연구를 수행하던 중, 고래 기름을 열분해하여 얻은 조명용 가스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1825년 무색의 휘발성 액체를 분리해냈다. 그는 이를 새로운 탄화수소로 인식하고 “On New Compounds of Carbon and Hydrogen”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보고하였다. 당시에는 이 물질의 구조는 물론 명확한 정체조차 알 수 없었지만, 이 물질은 훗날 벤젠으로 불리게 되며 방향족 화학의 출발점이자 현대 화학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인 화합물이 된다.

합성되어 벤젠이라는 이름을 얻다: 미츠허리히
패러데이의 벤젠의 발견 이후 약 10년 동안, “bicarburet of hydrogen (패러데이가 붙인 벤젠의 최초 이름)” 이라 불렸던 이 물질은 화학계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1834년, 독일의 화학자 에일하르트 미츠허리히(Eilhard Mitscherlich)는 벤조산을 석회와 함께 가열하는 실험을 통해 벤젠을 인위적으로 합성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에 벤조산은 이미 알려져 있는 물질이었고, 석회를 이용한 탈탄산 (decarboxylation) 반응 역시 화학자들에게 익숙한 반응이었다. 미츠허리히는 “벤조산에서 탄산을 제거하면 어떤 탄화수소가 생성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이 실험을 시작했으며, 그 결과로 얻어진 생성물이 패러데이가 발견한 물질과 동일한 화합물임을 확인하였다. 그는 이 물질을 ‘Benzin’ 또는 ‘Benzol’이라 명명했고, 이것이 오늘날 ‘벤젠(benzene)’이라는 이름의 기원이 되었다. 이 실험은 벤젠의 최초의 화학적 합성으로 평가되며, 이후 니트로벤젠, 아닐린 등 다양한 방향족 화합물의 합성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유기합성화학의 지평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산업을 탄생시킨 분자: 퍼킨과 염료 화학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벤젠은 학문적 연구 대상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산업을 움직이는 핵심 분자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아닐린(aniline, 벤젠고리의 수소 하나가 아미노기로 치환된 물질)이라는 화합물이 있었다. 아닐린은 석탄 타르에서 얻을 수 있는 비교적 단순한 방향족 아민으로, 그 당시에 합성과 변환이 비교적 용이해 다양한 실험에 널리 활용되던 물질이었다. 벤젠 고리를 포함한 아닐린은 방향족 화합물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유기합성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출발 물질이었다.
이 시기 벤젠 화학이 산업으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 중 하나가 영국의 화학자 윌리엄 퍼킨(William Perkin)이다. 퍼킨은 런던 왕립화학학교에서 아우구스트 호프만(August Wilhelm von Hofmann)의 제자로 연구하던 중, 아닐린을 출발 물질로 말라리아 치료제인 퀴닌을 합성하려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었다. 당시 말라리아는 치명적인 질병이었고, 천연 퀴닌은 값비싼 물질이었기에 인공 합성에 대한 사회적·경제적 요구가 매우 컸다.
그러나 퍼킨의 실험은 목표했던 퀴닌 합성에는 실패했다. 대신 실험 과정에서 생성된 검은 부산물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것을 알코올에 녹였을 때 선명한 보라색을 띠는 물질이 생성됨을 발견했다. 이 물질이 바로 인류 최초의 합성 염료인 ‘모브인(mauveine)’이다. 퍼킨은 이 색이 실크와 같은 섬유에 잘 염착된다는 사실에 주목했고, 10대 후반의 나이에 직접 염료 생산 공장을 설립하며 사업에 뛰어들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성공은 합성 염료 산업의 급속한 성장을 촉발했고, 독일을 중심으로 BASF, Bayer와 같은 화학 기업들이 설립·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염료 산업은 곧 의약품, 농약, 고분자 재료로 확장되며 현대 화학 산업의 기반을 형성하게 된다.
퍼킨의 모브인 발견은 단순한 색소의 발명이 아니었다. 이는 벤젠을 중심으로 한 방향족 화합물이 대량 생산과 산업적 응용이 가능한 화학 물질임을 처음으로 입증한 사건이었다. 벤젠 화학은 염료 산업을 발판으로 유기합성화학, 의약화학, 석유화학으로 이어지며, 오늘날 화학 산업의 핵심 축을 이루게 된다.

구조를 상상하다: 케큘레와 구조화학의 시작
벤젠에 관해 언급할 때, 많은 사람들이 먼저 떠올리는 이름은 아우구스트 케큘레(August Kekulé)일 것이다. 대중 매체와 여러 블로그에서는 마치 케큘레가 벤젠의 구조를 정확히 밝혔고, 심지어 뱀이 자기 꼬리를 무는 꿈을 꾸다가 고리 구조를 떠올렸다는 이야기까지 곁들여 소개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서사는 흥미롭기는 해도 과장된 측면이 있으며,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과학사적으로 무리가 있다.
케큘레의 공로는 벤젠의 실제 구조를 완성했다고 보기보다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이었던 구조적 사고 방식, 즉 분자를 원자들의 연결로 보고 이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구조화학(structural chemistry)을 벤젠에 적용해 새로운 접근에 근거한 모델을 제시했다는 데 있다. 그는 1865년 벤젠을 여섯 개의 탄소가 고리 형태로 연결된 육각형 구조로, 단일 결합과 이중 결합이 번갈아 존재하는 형태로 제안하였다. 이러한 구조적 제안은 단순히 벤젠이라는 한 분자의 모양을 제시한 데서 그치지 않고, 유기화학 전반을 분자의 구조 중심으로 재편하는 계기가 되었다.
흔히 케큘레가 꿈에서 벤젠의 고리 구조를 떠올렸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의 논문이나 동시대의 기록에는 그러한 내용이 전혀 없다. 이 이야기는 벤젠 구조 제안 이후 수십 년이 지나, 케큘레가 강연에서 자신이 벤젠 구조를 생각하게 된 과정을 비유적으로 설명한 발언이 후대에 과장되어 전해진 것이다. 실제로 케큘레는 벤젠 구조를 제안하기 이전에 탄소의 4가 결합과 사슬 형성 가능성을 체계적으로 제안했으며, 이후 분자 이성질체에 대한 이해가 확장되는 과정 속에서 당시 유기 분자에 대한 구조 지식을 종합하여 벤젠의 고리 구조를 제안하게 되었다고 이해하는 편이 역사적으로 더 정확하다.
그러나 케큘레가 제안한 벤젠 구조는 벤젠과 연관된 문제들에 대한 완벽한 해답이 되지는 못했다. 벤젠의 놀라운 안정성과 특이한 구조(정육각형)에서 야기된 반응 양상은 여전히 당시의 화학지식으로는 설명이 어려웠다. 이중결합이 번갈아 존재하는 육각형 구조라면 벤젠은 알켄(alkene)을 포함한 분자이므로, 알켄의 전형적인 반응인 첨가 반응(addition)을 비교적 쉽게 일으켜야 한다. 그러나 벤젠은 놀라울 정도로 안정하며, 브로민 첨가와 같은 반응보다는 치환 반응(substitution)을 훨씬 선호한다. 또한 단일 결합과 이중 결합이 구분되는 구조라면 결합 길이가 서로 달라야 하고, 그 결과 치환 반응에서 더 다양한 이성질체가 생성될 것으로 예측된다. 그러나 실험에서 관찰되는 벤젠 치환체의 이성질체 패턴은 훨씬 단순하고 높은 대칭성을 보인다.
당시의 이러한 논란은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벤젠의 실제 구조와 안정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공명(resonance)과 전자 비편재화(delocalization) 같은 전자구조 개념이 필요하지만, 당시에는 전자의 존재 자체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 전자는 그로부터 30년이 넘게 지난 1897년에야 발견된다. 벤젠에 대해서 매우 다양한 구조가 제안된 사실을 통해서도 얼마나 많은 논란과 고민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케큘레는 벤젠의 구조 제안 과정에서 구조화학의 시대를 열었으며, 동시에 그가 제안한 구조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여러 사실들을 통해 전자구조 이론과 방향족성(aromaticity) 개념이 등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구조의 확정: 캐슬린 론즈데일과 전자구조 이론
벤젠의 구조와 관련된 미스터리는 20세기에 들어서야 풀리기 시작했다. 1929년, X선 결정학자 캐슬린 론즈데일(Kathleen Lonsdale)은 헥사메틸벤젠의 결정구조를 분석하여, 벤젠 고리 내 모든 탄소-탄소 결합 길이가 동일하며 분자가 완전히 평면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는 벤젠이 단순한 이중결합/단일결합의 조합이 아니라, 전자가 고리 전체에 비편재화된 구조임을 의미했다.
이어 등장한 분자궤도함수 이론과 휘켈(Hückel)의 4n+2 π 전자 규칙은 벤젠의 안정성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며 방향족성이라는 개념을 확립했다. 이 개념은 유기화학의 전자구조 이론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고, 이후 수많은 방향족 화합물의 성질을 이해하는 기준이 되었다.
화학을 바꾼 영향력
벤젠 연구는 단지 벤젠 하나의 분자를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분자를 구조식으로 표현하는 방식, X선 결정학의 발전, 전자구조 이론의 정립 등 현대 화학의 핵심 도구들이 벤젠을 통해 발전했다. 또한 아스피린, 타이레놀, TNT, 폴리스타이렌 등 셀 수 없이 많은 물질들이 벤젠 고리를 포함하고 있으며, 벤젠은 여전히 화학 산업의 중심에 있다.
한편, 벤젠은 국제암연구소(IARC)가 지정한 1급 발암물질이기도 하다. 벤젠은 체내 대사 과정에서 생성되는 독성 대사체를 통해 조혈세포의 DNA를 손상시키며, 이는 백혈병을 비롯한 혈액암의 발생 위험을 증가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벤젠은 고농도 노출뿐 아니라 낮은 농도의 장기 노출에서도 건강 위험이 증가한다는 점이 역학 연구를 통해 반복적으로 확인되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벤젠은 작업장 노출 기준 설정, 공정 관리, 대체 물질 도입 등 현대 화학물질 규제와 안전관리 체계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기준점이 되었으며, 오늘날에는 규제와 안전관리의 교과서적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이처럼 벤젠은 화학의 발전을 이끈 분자인 동시에, 화학 물질의 안전 관리와 책임 있는 사용이 왜 필수적인지를 분명하게 일깨워 주는 분자이기도 하다.
200년의 의미
마이클 패러데이의 우연한 발견에서 시작된 벤젠의 역사는, 분자의 성질을 구조를 통해 설명하고, 그 과정에서의 전자의 역할을 이해하며, 화학 산업의 발전과 연결되는 화학의 역사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2025 올해의 분자’ 벤젠은 화학이 어떻게 학문이 되고, 산업이 되었으며, 동시에 사회적 책임을 요구받게 되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벤젠의 200년은 곧 현대 화학의 200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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