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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턴 돌아보기


존 돌턴(John Dalton, 1766-1844)은 근대 원자설을 처음 제시한 화학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돌턴의 이름은 중고등학교 화학 시간에도, 대학교 일반화학 시간에도 자주 언급됩니다. 제가 확인할 수 있는 일반화학 교재들은 전부 입을 모아 돌턴이 최초로 근대 원자설을 제시했으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고 설명합니다. ① 물질은 나눌 수 없는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② 주어진 화학 원소의 원자들은 질량과 모든 다른 성질들이 똑같다. ③ 다른 화학 원소들은 서로 다른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다른 원자들은 질량이 서로 다르다. ④ 원자들은 파괴되지 않으며 화학 반응 중에도 그 주체는 보전된다. ⑤ 원소들의 원자들은 서로 정수비로 결합하여 화합물을 만든다.[참고문헌 1] 그래서 우리는 돌턴이 원자라는 개념을 근대 화학자 중에서 최초로 떠올렸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러한 설명은 역사적으로 얼마나 정확한 설명일까요? 오늘 글에서는 돌턴 당시의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여 돌턴의 작업을 다시 한번 평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참고문헌 2]

사실 원자라는 개념은 18세기 말의 과학자들에게 낯선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뉴턴이『광학(Opticks)』에서 “모든 물체들은 단단한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선언한 이래, 뉴턴의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있던 물리학자들[참고문헌 3]은 단위 입자의 개념을 도입하여 여러 물질의 성질을 설명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뉴턴 자신이 기체 입자들 사이의 반발력이 입자간 거리에 반비례한다면 압력과 부피는 반비례한다는 것(보일의 법칙)을 증명한 바 있었고, 이에 따라 18세기 물리학자들이 바라보는 기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입자들이 서로 밀쳐내고 있는 물질이었습니다. 뉴턴의 기본 입자 개념은 화학자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다만 화학자들에게는 “친화력”이라는 다른 전통도 있었기에, 두 개념을 잘 조화시키는 것이 어려운 문제였죠. 개별 입자에 작용하는 친화력을 수식으로 써내려고 하는 시도들은 전부 실패로 돌아갔고, 친화력과 척력이 단위 입자에 각기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였습니다. 그러나 두 종류의 입자가 서로 친화력으로 들러붙어 새로운 단위 입자를 만든다는 사실은 당시 화학자들에게 익숙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글에서 살펴본 베르톨레 같은 사람은 화학적 친화력과 척력의 평형을 통해 화학 반응을 이해 하고자 했고, 수식을 사용하는 대신 적당한 정성적 설명으로 기본적인 설명을 제시하려 하였습니다.

이 단위 입자는 18세기 당시에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영어로는 이 입자를 atom이라 불렀고, 프랑스어로는 이 입자를 molecule이라 불렀죠. 그래서 예를 들어 라부아지에의 저작에 나온“molecules ... qui composent les corps”라는 문장은 영어 번역에서“atoms of which matter is composed” 로 번역되었습니다.[참고문헌 4] 심지어 원자-분자 개념에 큰 기여를 한 돌턴과 아보가드로(Amadeo Avogadro, 1776-1856) 같은 사람들도 두 단어를 혼용하였고, 현재처럼 두 단어를 명확하게 구분해서 쓰기까지는 몇십 년이 걸렸습니다.[참고문헌 5] 이 글에서는 혼동을 막기 위해 이 단위 입자를 그냥 “입자”라는 용어로 통일해서 부르겠습니다.

돌턴은 영국 컴벌랜드 지역의 가난한 퀘이커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열 살 즈음부터 가정교사를 하면서 돈을 벌어야 했고, 15살이 되어 지역의 퀘이커 학교에 들어가 공부하는 한편 조교로 일했습니다. 몇 년이 지나 돌턴은 그 학교의 교장이 되었고, 교장 일을 보면서 스스로 과학을 공부 했습니다. 돌턴이 활동했던 퀘이커 커뮤니티는 학문, 특히 수학과 자연철학(물리학)에 큰 가치를 두는 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돌턴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기상학과 기체 물리학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이 당시의 돌턴은 화학에 크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돌턴의 첫 번째 저서는 1793년 발행된 『기상학적 관찰과 소논문(Meteorological Observations and Essays)』으로, 이 책에서 돌턴은 본인이 관찰한 기상학적 현상들을 보고하고 있으며, 또한 스스로 다양한 기체를 가지고 실험한 내용을 기반으로 여러 기상학적 현상들을 설명합니다. 돌턴은 뉴턴 역학의 전통을 따라 기체를 서로 반발하는 단위 입자들로 구성된 것으로 보았고, 이를 이용해 기체의 성질을 설명하였습니다.

1793년부터 돌턴은 맨체스터의 비국교도 학교에서 수학과 자연철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수학, 자연철학과 더불어 화학을 가르쳐야 했고, 여기서 최신 화학 문헌들을 접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돌턴의 관심사는 기체 분자들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1799년 연구할 시간을 얻기 위해 교수 자리를 내려놓고, 기체에 대한 실험을 본격적으로 수행하기 시작합니다.[참고문헌 6] 그의 연구에는 좋은 조언자가 있었는데, 바로 맨체스터에서 사귄 친구인 윌리엄 헨리(William Henry, 1774-1836)였습니다. 헨리는 에든버러에서 의학을 공부하던 중 기체 화학자 조지프 블랙(Joseph Black)의 수업을 듣고 화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후 기체 화학을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돌턴은 자신의 기체 연구를 종합하여 1801년 논문으로 공개합니다. 이 논문에서 돌턴은 현재 “돌턴의 부분 압력 법칙”으로 알려진 법칙을 처음으로 발표하죠.“두 종류의 기체가 섞여 있을 때 각 기체 입자 사이에는 상호 반발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 그 결과 각 입자에 가해지는 압력 혹은 무게는 오직 자기 자신과 같은 입자들로부터 기인하는 것뿐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돌턴의 압력 개념이 오늘날과는 조금 달랐다는 것입니다. 돌턴은 뉴턴이 제시한 개념을 기반으로 기체의 압력을 이해했고, 기체 입자들이 서로 반발 하고 있기 때문에 압력이 발생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두 종류의 기체 입자를 섞었을 때 그들 사이에 서로 반발력이 존재한다면 같은 종류의 입자간 압력에 더하여 상호 반발력으로 인한 압력까지 발생하게 됩니다. 이는 실험 결과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돌턴은 다른 종류의 기체 입자들끼리는 반발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던 것입니다. 돌턴의 논문은 영국 과학계에서 큰 흥미를 끌었습니다. 험프리 데이비, 토머스 톰슨(Thomas Thomson, 1773-1852) 등 젊은 화학자들이 돌턴의 논문을 열심히 읽었고, 또한 비판했습니다. 돌턴은 순수하게 뉴턴의 전통을 따라 반발력만 가지고 기체의 성질을 설명했죠. 화학자들은 이러한 설명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분명히 입자들 사이에는 친화력이라는 특별한 인력이 존재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반발력만 가지고 입자들의 성질을 설명한다는 말입니까? 심지어 친구였던 헨리조차 돌턴의 이론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돌턴은 이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이산화탄소의 용해 과정을 연구했고, 1802년 기체가 화학적 친화력이 아니라 기체의 압력에 의해 물에 용해된다는 관찰 결과를 발표합니다. 헨리는 이 결과에 자극을 받아 용해 과정에 대한 실험을 수행하기 시작했고, 돌턴이 찾지 못했던 법칙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기체가 두 배, 세 배로 압축되면 일반적인 대기압에서 용해되는 부피의 두 배, 세 배가 용해된다. ”오늘 날의 용어로 하자면 증기압과 용해도가 비례한다는 법칙이죠. 네, 바로 그 “헨리의 법칙”입니다.[참고문헌 7] 돌턴은 이 결과에 크게 기뻐하며 이것이 기체 입자들이 화학적 친화력과 상관없이 물에 용해된다는 방증이라고 여겼습니다. 헨리 역시 그 설명에 설득되었습니다.

하지만 돌턴 스스로가 자신의 설명에 100%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기체의 종류에 따라 용해도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참고문헌 8] 고민하던 돌턴은 입자들의 “상대적 무게”에 따라 서로 다른 반발력이 작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도달하게 됩니다. 돌턴은 1803년부터 실험적으로 이 무게를 결정하려고 시도하였고, 이 시기부터 여러 기본 입자가 결합해서 만들어진 입자들이 존재한다는 가설(이하“원자설”)을 탐구 하기 시작했습니다.[참고문헌 9] 하지만 여전히 돌턴의 주된 관심사는 사방에서 끊임없이 밀려오는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기체 이론을 방어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화학계에서 헨리를 제외한 모든 화학자들은 돌턴의 이론을 의심스럽게 생각했고, 논문과 책으로 날카로운 비판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돌턴은 기체 이론을 변호하는 글을 바쁘게 쓰는 짬짬이 원자설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죠.

1805년 돌턴은 자신의 기체 이론을 개정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는 서로 다른 종류의 기체 입자들이 서로 다른 크기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고, 수소 입자의 크기를 기준으로 여러 입자들의 크기를 표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서로 다른 기체 입자들이 다른 성질을 갖는 것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후 돌턴은 입자들의 “무게” 와 “크기”라는 개념을 두고 많은 고민을 합니다. 이들을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요? 그의 이러한 고민은 몇 년간 숙성되어 마침내 1808 년 발간된『화학 철학의 새 체계(New System of Chemical Philosophy)』에서 완성된 답을 주게 됩니다.

사실 『화학 철학의 새 체계』는 원자설에 관한 책이 아닙니다.[참고문헌 10] 1부(1808년 발간)의 대부분은 열의 효과와 기체, 액체, 고체의 성질을 다루고 있고, 2부(1810년 발간)에서는 무기 화합물들에 대한 설명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원자설은 1부 마지막에 “화학적 합성에 관하여(On Chemical Synthesis)”라는 장에 간신히 등장합니다.[참고문헌 11] 그것도 우리가 일반화학 책에서 보는 식으로 깔끔하게 정리된 설명이 아니라 어떻게 단순 입자(원자)들이 조합되어 복합 입자(분자)들을 만들어내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원리를 이용해 단순 입자 들의 무게를 결정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입니다. 당시의 화학 지식로는 두 물질이 반응할 때 그 단위 입자들이 어떤 비율로 반응하는지는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돌턴은 가장 단순한 비율을 가정합니다. 예를 들어 물 입자는 수소 입자와 산소 입자가 1:1의 비율로 결합하여 만들어지고, 암모니아 입자는 수소 입자와 질소 입자가 1:1의 비율로 결합하여 만들어진다는 것이었죠. 물의 조성이 산소 약 85%와 수소 약 15%라는 것을 밝혀 놓았으니, 해당 비율을 적용하면 산소 입자와 수소 입자의 무게비는 약 7:1이 됩니다. 이 “단순한 비율”가정이 우리에게는 어색하게 보일 수 있지만 돌턴에는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같은 종류의 기체 입자들은 서로 반발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같은 종류의 입자들이 서로 결합하는 상황은 최소한으로 만드는 것이 유리 할 테니까요.[참고문헌 12]『화학 철학의 새 체계』는 즉각 많은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상상과는 달리, 이 책이 “원자” 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했기 때문에 관심을 끌었던 게 아니었습니다. 앞서 설명했던 바와 같이, 당시 화학자들은 이미 물질이 단위 입자로 구성되어 있고, 동일한 종류의 단위 입자들은 동일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데 동의할 뿐 아니라, 단순 입자들이 결합하여 복합 입자를 이룬다는 그림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지난 글에서 살펴본 것처럼 일정 성분비의 법칙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일반화학 시간에 배우는 “돌턴의 원자설”은 사실 19세기 초 화학자들에게는 당연한 이야기였던 것이죠. 돌턴의 창의적인 기여는, 최대로 단순한 결합비라는 (지금의 눈으로 보면 틀린) 가정을 도입하여 각 단순 입자들의 원자량을 상대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인 데에 있었습니다. 데이비는 이렇게 평가하였습니다. “돌턴 씨가 원자들을 배치하고 결합하고 저울질하고 측정하고 계산한 창의성과 재능을 칭송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참고문헌 13]

어쩌면 돌턴은 본질적으로 화학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대담한 시도를 할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당시 화학자들은 화학 원소의 수가 점차 늘어나는 것을 지켜보면서 (1812년에 이르면 약 33개) 진정한 “단위 입자”가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또한 원자설이 쓸모 있는 화학 이론이 되려면 단위 입자들 사이의 반응비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당시에 알려져 있던 것은 당량(equivalent) 뿐이었습니다. 반응비를 알 수 없다면 어떻게 정확한 원자량을 구할 수 있을까요? 따라서 그 어떤 화학자도 돌턴과 같은 시도를 감행하지 못했습니다. 돌턴은 문제를 돌파해 버렸던 것입니다.

오늘 글을 마치기 전에 돌턴에 관한 역사학 논쟁을 한 가지 소개하고자 합니다. 과학사학계에서는 돌턴이 정확히 어디에서 원자설의 아이디어를 얻었는가를 두고 오랫동안 논쟁을 해왔습니다.[참고문헌 14] 돌턴 자신이 세 가지의 기원을 언급하고 돌턴의 주위 사람들도 여러 가지 기원을 제시하는데, 그 기원이 서로 상충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또한 돌턴의 논문 들은 돌턴이 서기로 있던 학회에 몇 년간 비공개 상태로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공개되기 전까지 돌턴이 그 내용을 수정하는게 가능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따라서 사료들끼리 서로 충돌하는 경우 어느 것을 받아들여야 할지 판단하기 어렵죠. 여전히 이 문제는 깔끔하게 해결되지 않 았고, 여러 사람이 계속해서 새로운 사료를 들이밀면서 새로운 기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참고문헌 15] 이 논쟁이 끝나지 않는 것은, 근대 화학의 주춧돌 중 하나인 원자설의 뿌리를 정확히 밝혀낸다는 게 매력적인 작업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네요.[참고문헌 16]



참고문헌


1. 제가 살펴본 책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항목의 개수나 각 문장의 길이는 책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내용은 대동소이합니다. 본문에는 옥스토비 일반화학 책의 설명을 수록하였습 니다.『옥스토비의 일반화학』, 제7판, Cengage(2020), p. 12;『레이먼드 창의 일반화학』, 제12판, 사이플러스(2020), p. 66;『줌달의 일반화학』, 제10판, Cengage(2020), p. 47;『실버버그의 일반화학』, 제8판, 사이플러스(2019), p. 68;『마스터톤의 일반화학』, 제8판, Cengage(2019), pp. 26-27. 2. 이 내용은 다음 글들에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Alan J. Rocke, “In Search of El Dorado: John Dalton and the Origins of the Atomic Theory,” Social Research 72, 125-158 (2005); Arnold W. Thackray, “The Emergence of Dalton’s Chemical Atomic Theory: 1801-08,” the British Journal for the History of Science 3, 1-23 (1966).

3. 당시의 용어로는“자연철학자들”입니다.

4. Mi Gyung Kim,“The Layers of Chemical Language, I: Constitution of Bodies v. Structure of Matter,”Hist. Sci. 30, 74 (1992).

5. Mi Gyung Kim,“The Layers of Chemical Language, II: Stabilizing Atoms and Molecules in the Practice of Organic Chemistry,”Hist. Sci. 30, 397-437 (1992).

6. 생계를 위해서는 개인 교사로 일했습니다.

7. John J. Carroll,“Henry’s Law: AHistorical Law,”Journal of Chemical Education 70: 91-92 (1993).

8. 오늘날의 용어로 하자면 헨리 상수가 분자마다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9.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돌턴의 원자설이 최초로 그의 연구 노트에 등장하는 1803년 9월 6일을 근대 원자설의 탄생일로 보기도 합니다.

10. Philip Ball,“In Retrospect: A New System of Chemical Philosophy,”Nature 537: 32-33 (2016).

11. John Dalton, A New System of Chemical Philosophy, Vol. 1(1808), pp. 211-216.

12. Alan J. Rocke,“Atoms and Equivalents: The Early Development of the Chemical Atomic Theory,”Historical Studies in the Physical Sciences 9: 225- 263 (1978).

13. 앞의 글, 237쪽에서 재인용.

14. Leonard K. Nash,“The Origin of Dalton’s Chemical Atomic Theory,”Isis 47: 101-116 (1956).

15. 최근에는 아마추어 과학사학자들도 이 논쟁에 뛰어들었습니다. 일례로 다음과 같은 논문들이 있습니다. Herbert T. Pratt,“A Letter Signed: The Very Beginning of Dalton’s Atomic Theory,”Ambix 57: 301-310 (2010); Mark I. Grossman,“John Dalton’s‘Aha’Moment: the Origin of the Chemical Atomic Theory,”Ambix 68: 49-71 (2021)

16. 이 글에서는 현재 시점에서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설명을 채택하였습니다.





최 정 모 Jeong-Mo Choi


  • 한국과학기술원 화학과, 학사(2003.3-2011.8)

  • Harvard University 과학사학과, 석사 (2011.9-2015.5, 지도교수 : Naomi Oreskes)

  • Harvard University 화학 및 화학생물학과, 박사 (2011.9-2016.5, 지도교수 : Eugene I. Shakhnovich)

  • Washington University in St. Louis, 박사 후 연구원(2016.8-2019.4, 지도교수 : Rohit V. Pappu)

  • 한국과학기술원 자연과학연구소, 연구조교수(2019.6-2020.8)

  • 부산대학교 화학과, 조교수(2020.9-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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