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적 없는 시작과 끝을 갈망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인 듯싶다. 되돌아갈 수 없는 장대한 시간 속에서 인간과 생명의 시작, 그리고 우주의 탄생 순간을 끝없이 밝혀내려 노력하며, 허락된 시간 바깥 너머에 있을 우주의 마지막 순간을 상상하고 예측하며 기대한다. 물질 자체를 탐구하는 분야인 화학에는 그 어느 과학 분야보다도 희미하지만 확실한 학문의 끝과 경계선이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이 역시 언제든 거대한 발견으로부터 뒤바뀔 수 있는 가정 중 하나일 뿐이지만 적어도 진지하게 이야기하며 즐길 가치 는 충분하다.
화학의 끝
인간은 언제 과학을 만났을까? 당연히 인간이 탄생하기 전에도 과학은 존재했다. 물체는 중력 방향을 향해 떨어지고 원시 수프에서는 아미노산과 핵산이 만들어졌다 부서 져 내린다. 최초의 세포는 무언가를 들이키며 진화를 시작 하는 이 모든 과정은 정의하자면 지구라는 과학자의 시대 다. 그리고 인간의 탄생 이후 저마다의 과정에서 지금 과 학이라 구분 짓는 몇 가지 분야와 의도치 않았고 인식하지도 못했지만 만났을 것이다. 돌을 던져 사냥하거나 물체를 옮기며 물리학이 다가왔고 성장과 죽음, 섭취와 회복의 과 정에서 생명과학과 의학을 만난다. 화학의 시작은 어떠한 이유로 불타오르는 나무 조각을 만난 순간일 것이다. 최초의 화학 반응이라 불리는 연소(combustion)는 그 이후 한 순간도 빠짐없이 인간의 역사와 함께 했다. 빛과 열의 제 공부터 구리와 철의 정련과 문명의 시작, 증기의 힘과 전 기의 생산까지 연소는 뜻깊다.
그렇다면 이 과학들의 끝이나 마지막 영역은 어디일까? 섣불리 다른 과학을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화학에는 비교적 명확한 끝이 적어도 하나는 있다. 물질의 거대함을 기준으로 다가간다면 건물을 바라보며 이산화 규소의 비정질 유리가 자외선 이외의 빛을 투과시키고 있으며 다양한 결정립계(grain boundary)의 금속과 그 산화물이 경화되어 있다 표현하지는 않는다. 어느새 화학이 아닌 재료나 건축 등의 영역으로 사르르 녹아 뒤섞인다. 반면 물질의 작은 방향에서는 명확한 경계선이 있다. 원자(atom)를 ‘화학적으로’ 더 이상 나눌 수 없는ατομος 입자라 표현 했듯 화학에서의 가장 작은 대상은 원자다. 제아무리 양보 해서 단 하나의 수소 원자보다 작은 미립자들에 대해서는 화학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어서 다른 궁금증이 생겨난다.
원소의 끝
원소와 원자. 화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며 가장 먼저 접하는 개념이자, 이후 화학의 어떤 세부 과목 교과서를 펼치든 빠지지 않고 단골로 등장하는 핵심이다. 원소와 원자를 규정하는 과정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유구한 과정을 거쳐 드라마처럼 표현되며, 이후 분석화학과 전기화학, 그리고 분광학의 발달에 힘입어 뒤섞여 감춰져 있던 수십 가지 원소들이 저마다 이름을 갖고 등장한다.
화학에서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라 일컬어지는 원소 주기율표(Periodic table)의 탄생 또한 멘델레예프를 위시한 여러 화학자들의 시행착오와 노력으로 이야기된다. 멘델레예프가 남긴 것은 단순히 확보된 정보의 배열과 재정립이 아니었다. 존재하리라 여겨지지만 관찰된 적 없던 원소들에 대해 물리적 및 화학적 성질들을 예측해 빈 공간과 함 께 기록하였고, 절묘하게 들어맞는 발견이 하나씩 뒤를 이어왔다. 텅 빈 종이에 무엇이든 해 보라 독촉하는 당혹스러운 요구가 아닌 정성껏 만들어진 십자말풀이(cross- word)게임이 화학자들에게 던져진 셈이다. 인공적으로 합성된 테크네튬(Tc)과 프로메튬(Pm)의 2개 원소를 포함해 자연이 만들어냈을 총 92개 원소가 모두 채워진 후, 그 기술을 발판 삼아 우라늄(U) 이후의 새로운 원소들을 합성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118개의 원소로 깔끔하게 일곱 가로 줄이 모두 채워진 주기율표가 만들어졌다. 제아무리 짧은 시간 존재하며 지구에서의 실용적 가치가 없으리라도 우리는 그 이후의 원소들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원소의 끝은 어디일까? 계속해서 원자핵들을 합치다 보면 흡사 수열이 성립하든 계속해서 창조할 수 있을 듯싶지만 원소는 의외로 끝이 있다. 원자 번호가 증가 함은 원자 중심의 핵을 구성하는 양성자(proton) 역시 하나씩 늘어난다는 의미와 같다. 자연스레 양성자의 양(+)전 하는 증가하며 음(-)전하는 갖는 가장 가까운 주위 전자들 을 끌어당긴다. 이들의 충돌은 원소의 소멸과 중성자의 탄 생이 될 뿐이니 전자는 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더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핵이 전자를 끌어당기는 힘과 전자가 끌려가지 않기 위한 빠른 움직임이 증가하다 보면 어느새 전자는 허락되지 않은 광속 이상을 요구받는다. 이 순간이 이론적으로 물질계에서 존재 가능한 마지막 원소의 조건이 될 것이다.
우주는 여전히 신비하다
예상되는 마지막 원소는 172번으로 생각된다. 아직 119번과 120번을 찾아가는 중이니 여전히 도전할 목표는 많은 셈이다. 하지만 이미 수천 번 이상의 시도를 통해 불안 정한 원자핵 몇 개를 만들어내는 수준에서 인공 원소들을 합성하고 있으니 찾아낸다 해서 과연 쓸모가 있을지 의구심을 버릴 수는 없다. 간혹 강연에서 원소 이야기를 소개 하다 보면 받게 되는 질문이 있다. 블랙홀이나 중성자별과 같은 특별한 천체에서 지구에서는 본 적 없던 특별한 원소 가 만들어질 수는 없느냐는 누구도 명확한 답변이 어려운 난감한 질문이 대표적이다. 얼마 전까지는 단순히 가능성 은 있으나 어려운 일이며 차갑고 광활한 우주에서는 쉽지 않으리라는 부정적인 의견을 답했지만, 과학은 발전하고 새로운 사실은 끝없이 나타나곤 한다.
초고밀도 컴팩트 천체(compact ultra dense object(CUDO))라는 독특한 천체들로부터 예측이긴 하지만 약간의 발견이 최근 얻어졌다. CUDO의 내부는 암흑물질로 채 워져 있으리라는 흥미롭지만 쉽사리 공감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그것이다. CUDO가 단순히 흔한 물질이 단단히 뭉친 암석이 아니라는 사실은 러브조이(Lovejoy)라는 별명을 갖는 혜성 C/2011 W3가 태양 코로나를 뚫고 지나가는 장면에서 관측되었다. 100만K 이상의 온도에 1시간 이상 노출되었음에도 혜상은 꼬리를 남기며 무사히 태양을 뚫 고 지나갔으며 의문의 핵으로 이루어진 천체라는 사실에 신빙성을 얻는다.
더욱이 CUDO 중 하나로 알려진 화성 궤도 외부의 폴리힘니아 33(Polyhymnia 33)라는 소행성은 무려 75.3±9.6 g/cm3의 밀도를 갖는다는 사실이다. 지구에 존재하는 가장 높은 밀도의 원소는 오스뮴(Os)이며 밀도는 22.59 g/cm3에 해당한다. 단순히 생각해도 지구에 존재하는 어 떤 물질을 사용해도 폴리힘니아 33의 밀도는 만들어질 수 없다. 안정한 원자핵의 위치와 산술적인 추론은 소행성의 내부는 원자번호 164번 원소로 이루어졌으리라는 두근거리는 결론을 내놓는다.
물론 이 모든 내용은 수많은 검증과 확인이 필요한 문제 다. 하지만 그러면 어떠한가. 하루하루 새로운 발견이 이어지고 물질과 화학에 대한 이야기도 끝날 듯 끝나지 않고 이어진다. 가끔씩 사그라들기도 하는 과학이라는 아름다 운 학문에 대한 사랑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 설레이듯 커지는 이 순간들은 우리가 화학을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 이다.
장 홍 제 Hongje Jang
• KAIST 화학과, 학사(2004. 3 - 2008. 2)
• KAIST 화학과, 박사(2008. 3 - 2013. 8, 지도교 수 : 한상우)
• 서울대학교 화학과 박사 후 연구원(2013. 9 - 2015. 1, 지도교수 : 민달희)
• Georgia Institute of Technology, Department of Chemistry and Biochemistry 박사후연구원
(2015. 1 - 2016. 1, 지도교수 : Mostafa A. El-Sayed)
• 광운대학교 화학과 부교수(2016. 3 - 현재)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