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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으로 살펴보는 전설


문화와 유행은 일정한 주기로 돌고 돈다는 이야기가 있다. 빠르게 뛰고 습격하는 특징으로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던 소위 K-좀비는 얼마 전까지 세계적인 유행을 이끌었던 괴기다. 그리고 조금 더 이전에는 트와일라잇이나 언더월드 등에서와 같이 뱀파이어나 웨어울프가 주인공이었다. 최초의 좀비(1932, 화이트 좀비)나 뱀파이어(1922, 노스페라투)를 다룬 영화가 무려 90년 이전에 등장해 한 시대를 풍미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긴 시간 동안 잊혀지지 않고 중요한 장치로 사용되어 온 괴기들은 충분히 매력적인 대상이다. 누군가를 단순히 신화나 전설, 미신으로 여기고 넘어 가지만, 논리와 과학으로 가능성을 따져 진실을 파헤치려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다.



뱀파이어는 과학일까


과학적 지식이 충분하지 못했던 과거에는 관찰되는 몇가지 기이한 현상들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착각이나 오해가 녹아들어 괴기가 탄생한 경우가 많을 것이다. 십자가나 마늘, 태양빛 등 뱀파이어를 퇴치할 수 있는 여러 전통적인 방법들이 전해 내려오듯, 그 중 무언가는 나름의 신빙성도 있지 않았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광견병 증상에 의한 것이라는 등 뱀파이어의 근원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들이 있지만, 피와 관련된 하나의 이야기는 유독 흥미롭다. 화학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매우 아름답고도 유용한 분자인 포르피린이다. 헤모글로빈 속 산소 전달의 핵심인 헴(heme)의 기본 구조인 포르피린은 동물과 식물(엽록소) 모두에게 생명 유지의 필수인 만큼 근원적인 분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언제나 예상치 못한 문제는 숨어있다. 정상적으로 헴이 형성되지 않으며 포르피린이 체내에 농축되는 포르피린증은 뱀파이어의 가능성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포르피린증으로 괴담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1964년 영국왕립의학회지에 게재되었던‘ 포르피린증과 웨어울프(On

Porphyria and the Ætiology of Werwolves)’라는 짧은 논문에서부터 시작된다. 이후 혈액과 포르피린에 대한 연

구를 전문으로 했던 데이비드 돌핀이라는 생화학자가 뱀파이어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포르피린은 빛을 흡수

해 활성산소를 생성할 수 있어 광치료에 각광받는 광감각제의 기본 형태다. 결국 포르피린증에 의해 피부 하층에 축적된 포르피린 분자들로 인해, 햇빛에 노출되면 피부가 벗겨지거나 물집이 생겨나는 민감성이 발현된다. 또한 연조직인 잇몸에 농축된 포르피린은 잇몸을 수축시켜 치아가 더 길어보이도록 만드는 경향성이 있다. 다른 이에 비해 더 길고 날카롭게 보이는 송곳니는 약간은 무서운 착각을 하도록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흔히 몸에 염분이 부족하면 짠 음식을 찾게 되고, 당이 떨어지면 달콤한 음식을 떠올린다고 한다. 만약 혈액 속 헴이 부족하면 피를 갈구하게 될까? 실질적인 흡혈은 몰라도 적혈구 생성이 어려운 포르피린증 환자는 3가 철 이온을 함유한 헤마틴(hematin)으로 치료를 시도하게 된다. 산화된 헴의 일종인 헤마틴의 합성에 다른 사람의 혈액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분석화학과 뱀파이어


흡혈하는 괴물에 대한 전설은 각국에서 먼 과거부터 제각기 다른 형태로 전해온다. 하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뱀파이어라는 고상하면서도 음산한 귀족적인 이미지는 분명 그 유래를 두고 있어야만 형성되었을 것이다. 뱀파이어 만큼이나 자주 등장하는 드라큘라(Dracula)라는 표현에서 그 시작을 찾아볼 수 있다. 현재의 루마니아에 위치한 왈라키아 공국의 대공이었던 블라드 3세 드라큘라(Vlad III Dracula)이다. 수만 명의 사람을 꼬챙이에 꿰어 처형했던 잔혹한 행동으로 인해‘ 꿰뚫는 자’라는 의미로 블라드 체페슈(Vlad Țepeș)라 불리기도 했던 만큼, 몇 가지 기이한 특징만 있다면 인간이 아닌 괴물로 생각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블라드 체페슈에 대한 연구결과는 2023년 Analytical Chemistry지에 보고된 바 있다. 블라드 체페슈가 실존 인물이었던 만큼 몇 개의 친필 편지가 남아있었다. 편지를 쓰는 짧은 시간 동안에도 피부가 닿고 땀이나 침이 묻는 등 눈에 보이지 않는 분자들의 흔적이 새겨지기에는 충분하다. 고분자 필름을 이용해 편지에 묻어 있는 생분자들을 채취한 후 인간, 세균, 바이러스, 진균, 곤충 및 녹색 식물과 관련된 펩타이드 정보 수천 종과의 메타데이터 처리를 통해 분간 가능한 인간의 단백질 10여 종을 확인하게 된다.



그 중 호흡기와 관련된 TRANK1, DNAH5와 DHAN11이 확인되었는데, 유전자 변이는 호흡기의 섬모병증 및 망막 질

환을 일으키기 때문에 흥미로운 사실이었다. 몇 가지 단백질 정보를 종합한 바 블라드 체페슈는 피눈물을 흘리기도 하는

혈색소증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피눈물을 흘리고 두 눈이 수시로 붉게 물들기도 하는 모습으로 꼬챙이에

사람을 꿰던 잔혹한 지배자는 뱀파이어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자리 잡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과학은 현실에서 비현실적인 허상을 거르는 방식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존하는 물질을 다루고 해석하는 화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몇 개의 단서들을 조합해 흥미로운 추측과 결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갈 수 있다. 예를 들어 마늘이 뱀파이어를 퇴치하는 액막이라는 사실도 마늘에 함유된 갈산(gallic acid)이 포르피린증을 악화시킨다거나 하는 극단적인 이야기와는 관련 없지만, 알리신(allicin)과 같은 분자들에 함유된 황이 영향을 준다는 이야기도 있다. 은으로 만들어진 무기나 총탄으로 괴물들을 사냥하는 것도 달을 상징하는 금속인 은이기에 밤의 괴물에게 효과적이라는 연금술적인 관점뿐만 아니라, 높은 항균 및 항생 효과를 갖는 은이 치명적인 알러지 요소로 작용해 괴물을 퇴치하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명확한 법칙을 과학으로 찾아가는 것 만큼이나, 확인할 길 없는 전설속의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것도 매력적이다.





장 홍 제 Hongje Jang


• KAIST 화학과, 학사(2004.3-2008.2)

• KAIST 화학과, 박사(2008.3-2013.8, 지도교수 : 한상우)

• 서울대학교 화학과 박사 후 연구원(2013.9-2015.1, 지도교수 : 민달희)

• Georgia Institute of Technology, Department of Chemistry and Biochemistry 박사 후 연구원(2015.1-2016.1, 지도교수 : Mostafa A. El-Sayed)

• 광운대학교 화학과 부교수(2016.3-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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