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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현장에서 국가 전략까지,대한민국 과학기술의 궤적을그리다(2026년 4월호)

  • 3월 30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4월 1일


<화학세계가 만난 화학자> 4월호에서는 연세대학교 공과대학 김성수 특임교수(전 한국화학연구원 원장)를 모셨습니다김 교수님은 한국화학연구원 선임연구원을 시작으로 한국화학연구원 원장과기정통부 과학기술혁신본부 본부장과학기술인공제회 이사장을 역임하셨습니다의약화학 분야의 현장 연구자로 시작해 과학기술 행정과 정책국가 전략 수립과학기술인 복지 및 투자까지 아우르며 대한민국 과학기술계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해 오셨습니다이번 인터뷰에서는 연구 현장의 실무부터 국가적 전략 수립까지 폭넓은 혜안을 쌓아온 김성수 교수님과 함께급변하는 산업 지형과 AI라는 새로운 학문적 흐름 속에서 한국 화학계가 나아가야 할 발전 방향을 짚어보았습니다.


[모더레이터: 김명길 교수(성균관대학교 신소재공학부)]



Q1. 교수님께서는 현장 연구자, 연구 행정가, 국가 연구정책의 입안자로 여러 경력을 거쳐 오셨습니다. 그동안의 발자취에 대해서 간단히 이야기해 주실 수 있으실지요?


저는 1988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 화학과에서 유기합성으로 박사학위(지도교수: 김성각)를 받고, 2년간 하버드대학 화학과에서 박사후과정(지도교수: E. J. Corey)을 수료한 후 1990년 한국화학연구원 신물질연구본부에 선임연구원으로 입사해 신약개발분야에서 의약화학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2001년에 21세기 프론티어사업의 하나였던 생체기능조절물질개발사업단(단장: 유성은) 기획에 참여해 해당 사업 출범에 기여했고, 이를 계기로 대사성 질환 치료제 연구책임자로서, 비만 및 당뇨와 관련된 호르몬인 GLP-1을 분 해하는 DPP-4 단백질의 기능을 저해하는 저분자 화합물을 개발하는 연구에 집중했습니다.

이때 KAIST 유기합성실 동문이신 문영춘 박사님의 초청으로, 2003년 말 4개월간 미국 뉴저지의 바이 오벤처 PTC Therapeutics에서 방문연구원으로 활동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당시 뉴저지는 미국 바이오 산업의 중심지 중 하나였으며, 그곳에서 첨단 신약개발의 흐름을 직접 경험했고, 뉴저지 지역을 중심으로 거대제약사(예, Merck, Norvatis 등) 및 바이오벤처에 근무하는 한인과학자들로 구성된 KASBP(재미한인제 약인협회)를 통해 연구자들과 다양한 교류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 경험은 한국 제약·바이오 산업의 발전 방향과 전략을 구상한 중요한 계기이자 연구자의 삶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귀국 후 ‘제약산업의 기술혁신 패턴과 발전’보고서(STEPI, 김석관)를 접하며 주변 전문가들과 관련 논의를 활발히 이어갔고, 국내 제약산업 발전을 위한 산학연 및 정부 부처별 역할 분담과 단계별 발전 전략을 간단한 리포트로 정리했습니다. 2004년 ‘과학기술 중심사회’ 구축을 주요 국정과제로 채택하면서, 과학기 술부총리체제 출범과 함께 과학기술혁신본부가 신설되었습니다. 당시 바이오 및 제약산업 육성전략을 추진중이던 생명해양심의관실에 해당 리포트를 공유했고, 이는 2005년 발표된 ‘범부처 신약개발 R&D 추진 전략’의 기본 컨셉트로 채택되었습니다.

이러한 인연으로 2007년 생명해양심의관으로 발탁되면서 정부의 과학기술정책에 직접 참여하게 됩니다. 이후 연구원으로 복귀해 신약개발연구에 종사하던 중 2018년에 한국화학연구원 원장으로 선임되었습니다. 2019년부터 최근까지는 과기정통부 과학기술혁신본부장을 거쳐, 과학기술인공제회 이사장직을 역 임하면서 과학기술 정책·예산·평가와 함께 과학기술인의 복지 및 관련 투자 등 연구 외적인 분야에서 소중 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Q2. 기초화학 분야의 연구역량 향상에 더불어 최근 제약 및 바이오 산업의 성장이 눈에 띕니다. 오랜 시간 의약화학 분야의 현장 연구자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보실 때 최근 화학·바이오 연구 환경의 변화와 신약 연구 패러다임의 전환에 대한 의견을 여쭙고 싶습니다.


제가 한국화학연구원에서 신약개발연구에 몰두하던 시기와 비교하면, 현재의 화학·바이오 연구 환경은 단순한 발전을 넘어 연구 방식과 구조 자체가 전환되는 단계에 들어섰다고 생각합니다.

2000년대 초반 국내 신약 R&D 투자는 연간 약 2조 원 수준이었지만, 최근에는 민관 합산 기준으로 6조 원을 넘어섰습니다. 또한 연구 참여 주체 역시 대기업, 출연연, 벤처, 중견 제약사 등으로 크게 확대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신약 하나를 개발하는 데는 평균 10~12년의 시간과 2~3조 원 규모의 비용이 필요하며, 성공 확률은 1% 미만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화학의 역할은 단순한 후보물질 합성을 넘어, 신약 개발의 성공 가능성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로 재정의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AI 기반 분자 설계나 고속 스크리닝 기술이 도입되면서 초기 후보물질 탐색 속도는 크게 빨라 졌습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신약의 성패를 결정짓는 것은 여전히 화학적 설계의 정밀도와 목적하는 화합 물의 합성 역량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내 연구 환경은 기술 수준 측면에서는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지만, 실패 경험을 축적하고 이를 다음 연구로 연결하는 제도와 문화는 여전히 개선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앞으로 화학·바이오 분야의 경쟁력은 개별 기술의 수준을 넘어, 연구의 지속성과 실패를 감내할 수 있는 구조를 얼마나 구축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Q3. 교수님께서는 현장 연구자에서 연구행정가로 역할을 전환하시며 가장 고민했던 지점이 무엇인지 이야기해 주실 수 있으실지요?


연구자에서 연구행정가, 특히 출연연 기관장으로 역할이 바뀌면서 가장 크게 체감한 것은 연구 성과를 좌우하는 힘이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에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당시 출연연 연구과제의 70% 이상이 3년 이하의 단기 과제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구조에서는 장기적인 원천 연구를 수행하기가 구조적으로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연구단 중심의 중장기 프로그램을 확대하고, 평가 기준 역시 단기 성과보다는 연구 축적과 파급 효과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전환하려 노력했습니다.

또한 내부 분석 결과 연구자들이 행정 업무에 사용하는 시간이 전체 근무 시간의 약 30%에 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이에 따라 행정 부담을 줄이고 연구 몰입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판단 했습니다. 저는 연구행정의 본질이 연구를 통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연구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도는 연구자를 관리하는 장치가 아니라, 실패를 감내하면서도 도전적인 연구를 지속할 수 있도록 보호하는 장치여야 합니다. 이러한 인식은 이후 과기정통부에서 국가 과학기술정책을 설계하는 과정에서도 중요한 기준이 되었습니다.



Q4. 지난 2019년 과학기술혁신 본부장으로 재직하시던 중 일본 수출규제 시에 혁신본부에서 많은 역할 을 해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한일 소재·부품·장비 대응에서 현장 경험이 정책으로 전환된 과정에 대하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2019년 한일 소재·부품·장비 갈등 대응은 연구 현장의 경험이 정책 설계에 어떻게 반영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대표적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정부의 긴급 점검 결과,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핵심 공정에 사용 되는 일부 소재·부품·장비는 특정 국가 의존도가 80~90%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중에는 단 기간에 대체가 어려운 품목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단순히 “국산 기술이 없었다”라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연구실 수준의 기술은 상당 부분 확보되어 있었지만, 실제 양산 공정에 필요한 장기 운전 경험과 검증 데이터가 검증 데이터의 부족이 보다 근본적인 한계였습니다. 연구 현장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상황은 낯설지 않습니다. 화학과 소재 기술은 논문이나 특허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반복 실험과 장기 운전을 통해 품질 안정성과 재현성을 확보해야 비로소 산업 기술로 자리 잡습니다. 그러나 정책 판 단은 종종 ‘기술 보유 여부’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었고, 그 결과 산업 현장이 요구하는 기술 성숙도와 정책 인식 사이에 간극이 존재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러한 문제 인식을 바탕으로 대응 정책은 단기적 국산화 성과보다 기술 성숙도(TRL)에 기반한 단계적 전략으로 설계되었습니다. 즉 1~2년 내 대체 가능한 품목, 중기적 기술 축적이 필요한 품목, 장기적으로 글로벌 협력이 필요한 품목을 구분해 접근한 것입니다. 특히 중·장기 과제는 단년도 성과를 요구하기보다 최소 5년 이상의 지속적 투자를 전제로 연구 구조를 마련하는 데 정책적 초점을 두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연구 현장의 경험은 정책의 속도보다 방향을 설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기술 자립은 선언이나 예산 확대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패와 축적을 감내할 수 있는 시간 구조 속에서 형성된다는 점 을 정책적으로 분명히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후 전략기술 중심의 국가 연구개발 체 계를 강화하고, 단기 성과 중심 정책에서 장기적 기술 축적으로 전환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Q5. 국가 예산의 효율적인 집행이라는 측면에서 지속적으로 정부 R&D 예산 효율화에 대한 논의가 이어 지고 있습니다. 미래의 ‘지속 가능한 국가 R&D 시스템’을 위한 핵심 과제에 대한 의견을 여쭈고자 합 니다.


최근 정부 R&D 예산 효율화를 둘러싼 논의는 단순히 예산을 늘리거나 줄이는 문제가 아니라, 국가 R&D 시스템이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를 점검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정부 R&D 예산은 연간 약 35조 원 규모이며, GDP 대비 연구개발 투자 비중도 5%를 넘어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양적인 측면에서 는 이미 선진국 수준에 도달했지만, 현장에서 체감하는 연구 효율성과 몰입도가 그에 비례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가장 구조적인 문제는 과제의 과도한 분절화입니다. 예산 확대와 함께 과제 수가 크게 늘어나면서 연구 자 1인당 평균 과제 규모는 정체되거나 오히려 줄어드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그 결과 연구자들은 다수의 소액·단기 과제를 동시에 수행해야 했고, 이는 연구 집중도를 떨어뜨리고 행정 부담을 증가시키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출연연과 대학 연구자의 경우 행정·보고·평가 대응에 사용하는 시간이 전체 근무 시간의 약 30%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국가 R&D 효율성 측면에서도 결코 작은 손실이 아닙니다.

지속 가능한 국가 R&D 시스템을 위해서는 몇 가지 구조적 개선이 필요합니다. 우선 과제 구조의 단순화와 대형화를 통해 중장기 연구에 자원을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진국의 원천·기초 연구는 대부분 5~10년 이상의 장기 투자 속에서 성과가 축적됩니다. 다만 대학 중심의 기초연구는 규모가 작더라도 장기 적이고 안정적인 지원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평가 체계의 전환입니다. 현재 평가는 논문 수나 특허 건수와 같은 정량 지표에 크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전적이고 불확실성이 큰 연구를 장려하기 위 해서는 실패 역시 학습과 축적의 과정으로 인정하는 평가 철학이 필요합니다. 셋째는 연구자 경력의 지속 가능성입니다. 단기 과제 중심 구조는 고용 안정성을 약화시키고 장기 연구 주제 설정을 어렵게 만듭니다. 이는 결국 우수 인재의 이공계 이탈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결국 ‘효율화’는 단순한 예산 축소가 아니라 선택과 집중을 통해 연구의 질과 파급 효과를 높이는 과정입니다. 국가 R&D는 비용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투자이며, 연구 시스템의 경쟁력은 예산 규모보다 그것을 어떤 철학과 구조 속에서 운영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Q6. 교수님께서 국가연구개발혁신법 제정 경험에서 본 국가 R&D 시스템 개혁의 방향성에 대한 의견을 여쭈고자 합니다.


2019년 6월 과학기술혁신본부장 취임 당시, 전임이셨던 임대식 교수님(KAIST 생명과학과)께서 법의 초안을 구성한 상황에서, 국회 입법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본부장으로 재직하며 국가연구개발혁신법과 시행령 제정 과정에 참여했던 경험은 우리 국가 R&D 시스템의 구조적 한계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국가 R&D 예산은 20조 원에서 30조 원 규모로 빠르게 확대됐지만, 연구 현장에서 체감하는 효율 성과 연구 몰입도는 그에 비례해 높아지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이 제기되고 있었습니다.

국가 R&D 예산의 상당 부분이 부처 단위로 기획·집행되면서 유사·중복 과제가 반복되고 연구 성과가 다음 단계 연구로 이어지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반도체, 바이오, 이차전지, 인공지능 등 전략기술은 범위와 파급 효과가 넓어 범부처 협력이 필요함에도 제도적으로는 부처 칸막이에 묶여 있었습니다. 본 법은 이를 개선하기 위해 다부처 공동기획을 강화하고 예비타당성 조사 제도를 유연화해 중장기 연구가 기획 단계부터 연계될 수 있도록 범부처 조정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동시에 법 제정의 중요한 목표는 연구 자가 행정 부담에서 벗어나 연구에 보다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과도한 서류 제출과 연차 중심의 성과 평가는 연구 몰입을 저해한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습니다. 이에 연구비 관리와 행정 절차를 합리화하고 중장기 연구에 대해서는 평가 주기와 방식을 차별화할 수 있도록 제도적 유연성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연구는 예측보다 탐색의 과정이며 일정 수준의 불확실성을 전제로 합니다. 국가 R&D 제도 역시 이러한 특성을 고려해 연구자의 자율성과 책임을 기반으로 설계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 법 제 정은 R&D 시스템이 양적 확대를 넘어 질적 성숙 단계로 전환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려는 시도였습니다.


Q7. 미래 산업에서 화학 원천기술의 자립을 위한 정부· 출연연·기업의 역할 분담에 대한 말씀을 해주시 면 감사하겠습니다.


화학 산업은 반도체, 디스플레이, 이차전지, 바이오 등 국가 주력 산업의 기반을 이루는 핵심 분야이지만, 원천기술 확보 측면에서는 여전히 구조적 취약성을 안고 있습니다. 글로벌 화학기업들은 매출의 5~8%를 연구개발에 투자하고 일부 선도 기업은 연간 수조 원 규모의 R&D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반면 국내 화 학기업의 R&D 투자 비율은 2~3% 수준에 머무는 경우가 많아 기업 단독으로 장기·고위험 원천기술을 감 당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한일 소재 · 부품 · 장비 갈등 대응 과정에서도 확인되었듯이 화학 원천기술의 핵심은 기술의 유무보다 공 정 경험과 실패 데이터를 얼마나 오래 축적했느냐에 있습니다. 당시 일부 핵심 소재는 연구실 수준의 기술이 있었지만 양산 공정 경험과 품질 신뢰성 데이터가 부족해 즉각적인 대체가 어려웠습니다. 이는 화학이 본질적으로 시간 축적형 산업임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이러한 특성을 고려하면 화학 원천기술 확보를 위해서는 정부·출연연·기업 간의 역할 분담과 장기적 협력 구조가 필요합니다. 정부는 단기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장기·고위험 연구를 책임지고 지속적인 투자 구조를 마련해야 합니다. 출연연은 공정 기술과 실증 인프라, 데이터 축적의 중심 역할을 맡고, 기업은 이를 시장과 연결해 양산 공정에서의 품질과 비용 경쟁력을 확보해야 합니다. 결국 화학 원천기술 자립은 단기간 성과로 평가할 수 없는 과제입니다. 정책 역시 기술을 ‘사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사는 일이라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며, 실패를 감내하며 장기적으로 기술을 축적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국가 경쟁력 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Q8. 나날이 격화되는 첨단 산업분야에서 향후 10년, 대한민국 화학계가 반드시 선점해야 할 기술과 전략적 방향에 대한 의견 부탁드리겠습니다.


향후 10년은 대한민국 화학계에서 그동안의 선택과 집중이 실제 성과로 나타나는 시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화학은 반도체, 배터리, 바이오, 에너지 등 거의 모든 전략 산업의 기반 기술이지만, 그동안 상대적으로 후방 산업으로 인식되어 온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탄소중립, 디지털 전환,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라 는 구조적 변화 속에서 화학은 다시 산업 경쟁력의 핵심 분야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첫째, 탄소중립을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화학 기술입니다. 탄소중립 관련 글로벌 시장은 2030년 약 5조 달러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되며, 그 중심에는 촉매·소재·공정 기술이 있습니다. CCUS, 고효율 촉매, 바이오 기반 고분자, 재활용 가능 플라스틱 등은 이미 주요 국가들이 선점 경쟁을 벌이고 있는 분야입니다. 우리나라도 일부 촉매와 소재 분야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지만, 실증과 상용화로 이어지는 단계는 아직 강화가 필요합니다.

둘째는 AI와 화학의 결합입니다. 글로벌 제약·소재 기업들은 AI 기반 분자 설계를 활용해 신물질 탐색 기간을 크게 단축하고 있으며 이는 연구 효율성과 성공 확률을 높이는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기술은 고품질 실험 데이터와 화학적 해석 능력이 결합될 때 비로소 효과를 발휘합니다.

셋째는 공급망 안정과 산업 안보 차원의 화학 기술입니다. 지정학적 리스크가 상수가 된 상황에서 핵심 화학 소재 기술의 내재화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 과제가 되었습니다. 결국 향후 10년 화학 산업의 경쟁력은 단기 성과보다 장기 전략과 지속적인 기술 축적에 의해 결정될 것입니다.



Q9. 최근까지 근무하셨던 과학기술인공제회에서 이사장으로서 중점적으로 보고 계셨던 사안은 무엇일 까요?


과학기술인공제회 이사장으로 재직하며 가장 중점적으로 고민했던 과제는 공제회가 양적 성장 단계를 넘어 질적 성숙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공제회는 2003년 설립 당시 수백 명 규모의 회원 조직에서 출발해 현재 회원 수가 14만 명을 넘어섰고, 장기적으로는 25만 명 수준까지 확대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운용 자산 역시 약 18조 원 규모로 성장하며 공제회는 단순한 복지 조직을 넘어 공적 금융·연금 기관으 로서의 역할이 크게 확대되었습니다. 과학기술인연금의 지급준비율은 110% 이상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으며, 연금 급여 수준도 사학연금의 약 88%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이는 단기 수익률 중심의 운용보다 보 수적 자산 배분과 장기적 재정 건전성을 우선한 전략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앞으로 약 10년간 베이비붐 세대 과학기술인의 은퇴가 본격화되면서 연금 수급자 비중이 빠르게 증 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에 따라 세대 간 형평성과 제도의 지속 가능성을 함께 고려한 장기 재정 전략이 중 요한 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또한 최근 공제회 설립 이후 처음으로 자체 사옥인 삼성역 인근 SEMA타워에 입 주한 것은 이러한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이는 단순한 공간 확보를 넘어 공제회가 과학기술 인의 생애 전 주기를 함께하는 신뢰 기관으로 자리매김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현재 공제회는 자산 운용, 연금·복지 서비스, 조직 혁신을 연결하는 중장기 비전 ‘SEMA2033’ 실현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Q10. 과학기술인의 삶과 공제회의 역할, 그리고 사회적 인식 전환에 대하여 여쭈고자 합니다.


우수 인재의 이공계 기피 현상은 단순한 연봉이나 처우의 문제가 아니라 과학기술인의 삶 전반에 존재하는 불확실성에서 비롯된 구조적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국내 이공계 박사 인력의 상당수는 30대에 경력의 불 연속을 경험하며, 실제로 박사 학위 취득자의 40% 이상이 비정규직 또는 단기 계약 형태로 연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는 장기적인 연구 몰입이나 도전적 연구를 선택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점에서 과학기술인공제회의 역할은 연구자가 삶의 안정성을 바탕으로 연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데 있습니다. 공제회는 단순한 복지 기관을 넘어 과학기술인의 생애 전주기를 함께 설계하는 제도적 기반이 되어야 합니다. 앞으로는 연금과 복지 기능에 더해 경력 전환기 지원, 은퇴 이후 삶의 안정, 금융·자산 관리 교육 등 삶 전반을 지원하는 플랫폼으로 발전할 필요가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과학기술인이 존중받는 사회는 구호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연구의 실패를 낭비가 아닌 학습과 축적의 과정으로 인정하고, 과학기술인을 비용이 아닌 미래에 대한 투자로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 전환이 함께 이루어질 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Q11. 마지막으로 교수님께서 화학세계 독자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을 하나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바둑 격언 가운데 “착안대국(着眼大局), 착수소국(着手小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큰 흐름을 보며 전체 판세를 읽되, 실제로 돌을 놓을 때는 작은 부분부터 정확히 챙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연구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시야는 크게 열어 전체 흐름을 바라보되, 실제 연구를 수행할 때는 구체적인 문제를 치밀하게 해결해야 합니다. 결국 연구의 성과는 이러한 두 가지 시각이 균형을 이룰 때 만들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연구자들이 자신의 연구 분야에 깊이 몰입하는 것은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연구가 다른 분 야와 어떻게 연결되고 있으며 과학기술 전체 흐름 속에서 어떤 위치를 갖는지를 함께 고민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는 이러한 시각이 연구 주제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연구 내용을 구체화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연구자의 길을 이끌어주신 김성각 교수님과 경영의 눈을 뜨게 해주신 오헌승 원장님, 그리고 함께 해주신 한국화학연구원·과학기술혁신본부·과학기술인공제회의 동료 및 선후배님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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