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쳐지는 과학에서 소외된 것들(2026년 3월호)
- 5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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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 3일 전
한미영 | 대전과학고등학교 화학교사, imhmy123@gmail.com
서 론
‘과학을 가르치다’라는 문장을 서로 다른 의미로 해석하 지 않기 위해서는 ‘과학’과 ‘가르치다’라는 단어를 이 글에서 어떤 의미로 쓰고 있는지 설명부터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두 단어를 설명하는 것은 과학교육에 대한 모든 논문을 다 인용해야 하는 방대한 일이고, 동시에 어떤 설명 없이도 소통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 글은 이 두 단어 중 ‘가르치다’를 수면에 띄워 논의 하고자 하는 글이 아니다. ‘가르치다’는 그저 ‘과학’을 수 식하는 형용사로 사용될 뿐이므로, 이 글에서는 각자가 자기 나름의 정의와 경험을 바탕으로 ‘가르치다’를 떠올리면 충분하다.
그럼 이제 남는 것은 가르쳐지는 ‘과학’이다. 다행스럽게도 앞에 ‘가르쳐지는’이라는 형용사가 있다. 이것마저 없었다면 또한 감당할 수 없는 주제가 될 뻔하였다. 과학 은 ‘과학’을 담론으로 삼는 학자들의 언어로 말하면 사유와 행위의 방식이자 결과물이고, 다양한 형상으로 사회에 작용하는 행위자이다. 즉 과학은 방법이자 산물이며, 비인간 행위자로 사회 속에서 작동하고, 제도, 기술, 담론, 정 책과 어우러져 구성되는 대상이다.
국가교육과정을 통해 본 과학교육에서의 ‘과학’ 역시 지식(개념)·탐구(기능)·가치·태도가 통합된 과학적 소양과, 그 소양을 바탕으로 미래 사회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르는 것을 목표로 하는 교과이다. 이처럼 과학학 과 과학교육학에서 보는 과학은 표현만 다를 뿐, 과학을 사유의 방식이자 결과물이며 동시에 사회 속에서 작동하는 대상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그렇다면 과학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과학을 방식으로서, 결과물로서, 그리고 사회적 행위자로서 가르치고 있는가? 특히 사회적 행위자로서의 과학에 대하여 적합한 교육을 하고 있는가? 이 글은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사회적 행위자로서의 과학을 가르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 하는지에 대해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한다.
본 론
수년간 과학영재학교에서 앞으로 어떤 형태로든 과학을 하려는 학생들에게 화학을 가르치면서 서두에 제시한 질문을 끊임없이 하여왔다. 서두의 질문에서 과학이 화학으로 바뀌었고 그 질문을 하는 교육 현장은 과학영재학교로 좁아졌다. 결과물로서의 화학 지식과 개념은 매우 오랜 기간 과학 교육의 중요한 대상이었던 만큼 교재와 매체, 연구가 풍부하다. 방법으로서의 화학을 교육하는 일은 더 많은 사례 공유와 새로운 방안이 요구되지만 그래도 결과물로서의 화학과 함께 교육과정안에 교과로서 그 리고 활동으로서 당당히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행위자로서의 화학은 그 이름을 건 교과나 활동이 거의 없으며, 겨우 앞의 두 영역에 비집고 들어가 있는 경우가 많다. 행위자로서의 화학은 심지어 그 명칭마저 불편하다. 방법으로서 그리고 결과물로서의 과학은 매우 풍부하여, 그 중 화학을 떼어 단어를 만들어도 어색하지 않다. 반면 행위자로서의 과학은 화학으로 바꾸어 단어를 만들기에는 아직 많이 부족해 보인다. 그만큼 행위자로서의 과학은 과학교 육에서 추구되고는 있으나 여전히 소외되어 있으며, 최근 에는 AI와 융합된 과학에 그 자리를 내어줄 것처럼 위태 롭게 느껴진다.
이러한 위기감은 단순히 느낌만은 아니다. 과학영재학교의 교육과정에 과학학을 다루는 교과가 교양과목으로라도 있으면 다행이다. 근무하고 있는 학교에서도 올해 드디어 교양과목으로 과학사와 과학철학이라는 교과가 만들어졌다. 반면 AI 융합교과는 세상이 주목한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벌써 기본 선택, 심화 선택 교과로 매우 다양한 교과가 구성되어 학생들이 선택하고 있다. 이처럼 행위자로서의 과학, 과학 그 자체를 이해하고자 하는 과학학은 매우 오래전에 등장하였으나 끊임없이 ‘가르쳐지는 과학’에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교양이나 동아리 활동으로 그 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교양으로라도 교과로 들어와 있는 것에 감사하게 된다.
과학이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라면 과학학은 ‘과학’을 대상으로 한다. 과학을 하는 사람이 ‘과학’을 이해할 필요가 있을까? ‘과학’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참고했던 세 권의 책을 바탕으로 함께 고민해 볼 만한 주제를 제안하고자 한다. 하나는 1600년대 ‘과학’이라는 학문이 이제 세상에 나오려 싹을 틔우던 시기에 ‘실험’이라는 새로운 방법이 새로운 지식을 주장할 수 있는 방법인지에 대한 보일과 홉스의 논쟁이다. 그리고 사회적 행위자로서의 과학과 수행되지 않은 과학이라는 개념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세 가지 사례를 통해 ‘과학’을 이해하는 교육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교육은 필요한 것인지 각자 답을 찾아볼 수 있었으면 한다.
1. 보일과 홉스의 논쟁
스티븐 셰이핀(Steven Shapin)과 사이먼 셰퍼(Simon Schaffer)는 1985년에 『Leviathan and the Air-Pump: Hobbes, Boyle, and the Experimental Life』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이 책은 출간 당시에는 제한된 학계 독자층에 서만 읽혔으나, 2011년 개정판이 출간될 무렵에는 과학 사와 STS(과학기술학) 분야에서 과학을 사회적 실천으로 이해하는 고전적 저작으로 평가받으며 대중에게 알려졌다. 이들은 이 책에서 17세기 보일과 홉스 사이의 논쟁을 통해, 실험이라는 방식이 어떻게 과학적 사실을 정당화하는 기준으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저자들이 다루는 논쟁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 17세기 유럽으로 가보자. 영국의 프랜시스 베이컨은 자연 철학을 단순한 관찰과 사유의 영역에 두지 않고, 인위적으로 상황을 구성하고 체계적으로 개입하는 실험이라는 방법을 철학적 방법으로 정당화하고자 하였다. 실험은 이미 연금술과 장인 기술의 영역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었지만, 베이컨 이후 점차 자연에 대한 지식을 생산하는 공적인 방법으로 등장 하였고 왕립학회를 중심으로 귀족과 신사들에 의해 수행되는 새로운 학문적 실천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영국의 귀족이었던 보일(Robert Boyle)은 자신이 만든 공기 펌프로 진공을 만들어 냈음을 주장하였다. ‘진공이 존재한다’는 새로운 지식,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실험’이라는 새로운 방법으로 지식이 만들어질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실험’이 과연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방법인가? 이 질문은 질문으로서는 매우 생소할 만큼 현대는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내는 방법으로서의 실험이 너무 당연하다. 그러나 논리적 사유 와 성경에 기반한 해석만이 지식으로 인정받던 시대에 이 질문은 꼭 답해야 할 과제였을 것이다.

셰이핀과 셰퍼는 보일이 공기펌프 실험을 통해 만들어 진 결과를 ‘matter of fact’, 즉 사실로 만들기 위해 ‘물질적 기술(material technology)’, ‘문학적 기술(literary technology)’, ‘사회적 기술(social technology)’의 세 가 지 기술을 사용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물질적 기술’은 실험 장치 자체에 대한 전략이었다. 보일은 공기펌프의 구조와 작동 원리를 매우 상세하게 기술하고, 실험 과정에 서 나타난 모든 상황적 세부 사항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그는 긍정적인 결과뿐 아니라 실패와 부정적인 결과도 숨기지 않고 공개했으며, 기계의 불완전성 역시 인정했다. 이러한 태도는 실험 장치가 조작된 인공물이 아니라, 자연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중립적 매개물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문학적 기술’은 관찰을 공적인 사건 으로 만드는 방식이었다. 보일은 실험을 혼자 수행하지 않고, 왕립학회(Royal Society) 회원들 중 선별된 다수의 인물 앞에서 공개적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목격을 집단의 목격, 즉 ‘다중 관찰(multiple ob-servation)’로 전환하고자 했다. 또한 그는 실험 결과를 글과 그림으로 매우 상세히 기록함으로써, 실제 실험에 참여하지 않은 독자들 역시 마치 현장을 직접 목격한 것처럼 느끼도록 ‘가상 관찰(virtual witnessing)’을 만들어냈다. 실험의 재현 가능성 역시 중요하게 강조되었지만, 보일은 당시 기술 수준으로는 완전한 재현이 어렵다는 점도 솔직하게 인정했다. ‘사회적 기술’은 지식을 생산하는 과학자 의 태도와 관련된다. 보일은 자신을 지식의 창조자가 아니라 ‘지식의 토대를 쌓는 사람(under-builder)’으로 묘사 하며, 겸손(modesty)과 절제된 태도를 유지했다. 그는 실험을 통해 얻은 결과가 개인의 사심이나 이론적 편향이 아니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 ‘자연의 거울’임을 강조했다. 이러한 태도는 실험이라는 방식이 사회적으로 신뢰 받는 지식 생산 도구로 승인받기 위한 중요한 조건이었다. 보일의 실험 프로그램을 가장 강하게 비판한 인물은 당시 정치철학자였던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이다. 홉스는 17세기 영국 내전(English Civil War)을 직접 경험한 사상가로, 왕권과 의회, 종교와 정치가 뒤엉킨 극심한 사회적 혼란 속에서 인간 사회가 얼마나 쉽게 붕괴될 수 있는지를 목격하였다. 이러한 경험은 홉스로 하여금 ‘의견의 불일치’와 ‘진리에 대한 불확실성’이 사회적 혼란의 근본 원인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고, 그로 하여금 변하지 않는 확실한 진리,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지식의 형식에 강하게 집착하게 만들었다. 홉스에게 진리는 경험적 관찰이나 다수의 합의에 의해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수학과 기하학처럼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방식으로 증명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연철학 역시 이러한 엄밀한 연역적 체계 위에서 구성되어야 한다고 보았으며, 원인으로부터 결과가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지식만이 참된 철학이라고 생각하였다. 홉스에게 실험을 통해 얻어진 결과는 언제든지 다른 조건에서 달라질 수 있는 불완전한 정보에 불과했으며, 그것을 ‘사실’로 승인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당시 홉스가 제기한 실험이라는 방식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은 과학의 예측 가능성과 보편적 진리로서의 신뢰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현대에 주목할 만한 질문이다. 첫째, 그는 공개 관찰이라는 개념에 회의적이었다. 왜 하필 50명인가, 왜 왕립학회 회원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특정 집단의 목격이 어떻게 보편적 진리로 인정될 수 있는지를 문제 삼았다. 또한 인위적으로 구성된 실험 상황이 일상적인 자연 현상보다 더 높은 인식론적 지위를 가져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도 납득하지 못했다. 둘째, 홉스는 실험 장치에 대한 해석 자체가 이미 특정 이론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예를 들어 ‘진공(vacuum)’이라는 개념은 중립적인 사실이 아니라, 보일이 채택한 이론적 정의에 따라 구성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진공을 완전히 만들 수 있는지, 누출(leakage)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등의 문제는 모두 이론적 전제 없이는 성립할 수 없으며, 따라서 실험 결과 역시 순수한 사실이라기보다는 이론이 개입된 해석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셋째, 사회적 관계에 대한 관점에서도 두 사람은 극명하게 달랐다. 셰이핀과 셰퍼에 따르면 보일과 왕립학회는 겸손하고 관용적이며 협력적인 공동체로 묘사되는 반면, 홉스는 독단적이고 확신에 찬 인물로 대비된다. 보일의 실험 프로그램은 다양한 의견을 허용하고 사실의 축적을 통해 점진적으로 진리에 접근하 는 방식을 취했지만, 홉스의 합리주의는 이미 완성된 철 학 체계에서 진리가 연역적으로 도출된다고 보았다. 이러 한 이유로 홉스는 보일의 실험주의를 철학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홉스에게 보일의 실험은 결과에 대한 지식일 뿐 이며 원인은 추측일 뿐이었고, 원인을 알 수 없은 지식은 철학으로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과학은 원인을 완전히 알지 못하더라도, 실험을 통해 재현 가능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을 정당한 지식 생산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어떤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판단하기 위해서조차, 우리는 이미 보일이 제시한 실험 현상을 ‘사실’로 먼저 받아들여야 한다. 다시 말해, 실험은 자연을 드러내는 도구가 아니라, 무엇이 자연에 대한 사실인지 규정하는 기준이 된 것이다.
이 점에서 보일–홉스 논쟁은 단순한 과거의 철학 논쟁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과학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장면이다. 실험이 과학의 본질이 된 순간, 과학은 자연을 설명하는 학문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진리를 승인하는 제도가 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과학은 중립적 방법이 아니라 권력과 신뢰를 생산하는 행위자가 된다.
이러한 보일과 홉스의 논쟁은 과학을 하고자 하는 학생에게는 어찌 보면 자신이 선택한 학문의 기본적인 방법에 대한 근원적인 고찰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미 패러다임으로 정교해진 과학적 방법에 의문을 품지 않고 수용해도 과학을 수행하는 데 큰 지장은 없을 수 있다. 그 러나 이러한 사유 없이 지금의 패러다임을 넘어 새로운 패 러다임을 만들 수 있을까?
2. 행위자로서의 과학
보일과 홉스의 논쟁에서 보여주듯이 과학적 방법이 새로운 지식 주장의 방법으로 받아 들여지는데 사회적 합의의 시간이 있었다. 처음부터 당연히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었던 과학은 점점 확장되어 사회와 뒤엉켜있다. 이 복잡한 관계를 프랑스의 사회학자 라투르(Bruno Latour)는 그의 저서 『Science in Action』(1987)에서 실타래 풀듯이 풀어냈다. 라투르는 과학을 ‘이미 완성된 과학(ready-made science)’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중인 과학(science in the making)’으로 바라보고 과학의 핵심은 결과물이 아니라 그 결과물이 만들어지는 과정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 과정을 지독히 철저하게 분석하였다. 그는 실험실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외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그 변화에 개입하고 있는 행위자와 행위자 사이의 연결관계를 그려 냈다. 이 과정에서 자동기록기, 실험 장비, 수식, 그래프와 같은 비인간 요소들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 연구자와 함께 세계를 재구성하는 비인간 행위자로 기능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예를 들어 신경내분비학 연구실을 장기간 현장관찰하면서 실험 대상이 되는 쥐와 연구자라는 행위자 외에 다양한 분석기기에 주목하였다. 실제 쥐의 조직이나 복잡한 화학 물질이 이러한 장치들을 통과하면 기계는 혼란스러운 자연의 상태를 정제된 그래프와 수치라는 시각적 기록으로 번역해 출력해냈다. 이러한 장치를 그는 인스크립션 장치(기록장치)라고 명명하며 비인간 행위자로서 이러한 인스크립션 장치가 침묵하는 자연을 대신해 말하며 과학자의 주관적인 주장을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로 확정짓는 역할을 수행하며 실험실의 행위자 네트워크의 핵심 결정권자로 기능한다고 설명한다. 도로의 속도 방지턱은 분명히 행위자로서 차의 속도를 늦추는 기능을 하고 있으며 운전자와 상호작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시각으로 과학이 수행되고 있는 현장을 바라보면 인간 행위자 외에 도구, 문서, 정책 등의 비인간 행위자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단단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그의 주장은 과학을 지식의 집합이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이 얽힌 실천의 네트워크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과학은 설명의 대상이기 이전에, 사회 속에서 실제로 작동하며 영향을 미치는 행위자이다. 또한 과학을 행위자로 본다는 것은, 과학을 더 이상 중립적인 지식의 저장소로 보지 않고, 인간과 비인간이 얽힌 실천의 장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과학을 행위자로 이해하는 것은 STS 교육에서 과학과 기술 그리고 사회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의 기본이 된다.
3. 수행되지 않은 과학
‘과학’을 이해하기 위해 그 소재는 수행된 과학, 즉 과학 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것들일 것이다. 수행되지 않은 과학은 말 그대로 행해지지 않았음을 말한다. 즉 존재하지 않은 과학이란 말이다. 수행되지 않은 과학이라는 개념은 마치 사물의 이면을 보는 것과 같이 과학의 실체를 그래서 더 확실하게 보여준다. 종종 이 개념을 학생들에게 소개하는 이유는 수행된 과학 속에서 무뎌진 감각을 깨울 수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수행되지 않은 과학은 ‘과학’을 이해하는데 어떤 통찰을 주고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왜 수행되지 않았을까? 왜 수행되는 과학에서 배제되었을까?라는 질문에 답을 먼저 해야 한다. 담배 회사와 사회 단체의 소송에서 담배가 유해하지 않다는 증거가 되는 실험은 수행 되어 자료로 제출되는데 담배가 특정 질병의 원인이 된다 는 증거가 되는 실험은 왜 수행되지 않았을까? 임신부에 게 처방된 DES(diethylstilbestrol)가 수십 년 뒤 자녀 세대의 암과 기형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은 왜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밝혀졌을까? 어떤 연구가 수행되고 어떤 연구는 수행되지 않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은 과학이 사회와 깊이 엉켜 있음을 보여준다. 이 질문 속의 과학은 더 이상 사회로부터 독립된 객관적 진리의 집합이 아니다. 과학은 연구비, 정책, 산업, 법과 같은 사회적 행위자들과 상호작 용하며 어떤 질문은 선택되고 어떤 질문은 배제되는 과정 속에서 형성된다. 수행되지 않은 과학은 바로 이 선택의 흔적을 드러내며, 과학이 순수한 탐구라기보다 사회적 조건 속에서 작동하는 실천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수행되지 않은 과학이라는 주제로 학생들과 토의하는 시간을 갖는다면 학생들은 무엇을 볼 수 있게 될까? 아마도 실험실과 연구실에서 나와 사회를 종횡무진하고 있는 과학을 바 라보게 될 것이다.
결 론
과학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과학을 방식으로서, 결과물로서, 그리고 사회적 행위자로서 가르치고 있는가? 특히 사회적 행위자로서의 과학에 대하여 적합한 교육을 하고 있는가? 이 질문이 이 글의 동기가 된 질문이었고, 이 질문 에 답하기 위해 꾸준히 관심 갖고 강의를 듣고, 책을 읽으 면서 찾았던 수업 활동에 함께 토의해 볼만한 주제를 소개 하고자 하였다. 굳이 과학적 방법으로 실험이 이미 새로운 지식을 뒷받침하는 탄탄한 근거로 자리하고 있는데 실험이 과연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냐고 질문할 필요가 있을까? 연구자가 굳이 연구실 밖에서 연구 결과가 어떻게 인용되고 있으며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아야 할까? 결과물로서의 과학, 방법으로서의 과학, 그리고 행위자로서의 과학 중 현재 교육 체계에서 행위자로서의 과학은 강조는 되고 있지만 소외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만큼 현장에서 작은 시간이라도 모아모아 앞으로 과학을 수행해야 하는, 이제 시작하는 새내기들에게 과학을 한 축으로만 바라보지 않도록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을까? 이 글이 이런 질문에 공감하는 현장의 교사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참고문헌
Shapin, S.; Schaffer, S. Leviathan and the Air-Pump: Hobbes, Boyle, and the Experimental Life.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5.
2. Latour, B. Science in Action: How to Follow Scientists and Engineers through Society. Harvard University Press, 1987.
3. Latour, B.; Woolgar, S. Laboratory Life: The Construction of Scientific Facts.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9.
4. Frickel, S.; Gibbon, S.; Howard, J.; Kempner, J.; Ottinger, G.; Hess, D. J. Undone Science: Charting Social Movement and Civil Society Chal-lenges to Research Agenda Setting. Sci. Technol. Hum. Values 2010, 35, 444.
5. Hess, D. J. Alternative Pathways in Science and Industry: Activism, In-novation, and the Environment in an Era of Globalization. MIT Press, 2007.

한미영 Mi Young Han
• 서울대학교 화학교육과, 학사 (1993.3– 1997.2)
• 서울대학교 화학교육과(무기화학전공), 석사 (1997.3–1999.2, 지도교수: 백명현)
• LG화학 기술연구원 연구원 (1999.1-2006.2)
• 대전광역시 교육청 교사(2009.3-현재)
• 현재 대전과학고등학교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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