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엔트로피 에너지 소재:조성 복잡성이 바꾸는 소재 설계 패러다임
최한별, 이원태* | 경북대학교 화학교육과 조교수, ciel@knu.ac.kr
서 론
전기자동차와 에너지저장장치(Energy Storage System, ESS)의 보급 확대와 함께 차세대 에너지 저장 소재에 대한 요구가 증가하고 있다. 높은 에너지 밀도와 긴 수명, 우수한 안전성을 동시에 만족하는 소재 개발이 요구되지만, 기존의 조성 최적화와 원소 치환 전략만으로는 성능 향상에 한계가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최근 주목받 고 있는 새로운 재료 설계 전략이 바로 고엔트로피 에너지 소재(High-Entropy Energy Materials, HEEMs)이다.
고엔트로피 개념은 2004년 Yeh와 Cantor 연구진이 각 각 제안한 고엔트로피 합금(High-Entropy Alloy)에서 시작 되었다.1, 2 기존 재료가 하나 또는 두 개의 주요 원소를 중심 으로 설계된 것과 달리, 고엔트로피 소재는 다섯 개 이상의 원소를 유사한 비율로 혼합하여 높은 배치 엔트로피(con-figurational entropy)를 구현한다.

이후 이러한 개념은 금 속 합금을 넘어 산화물, 질화물, 황화물 등 다양한 무기 소재 로 확장되었으며,3, 4 최근에는 리튬이온전지, 나트륨이온전 지, 전고체전지, 촉매 및 에너지 변환 소재 등 다양한 에너지 분야로 확대되고 있다[그림 1].5
특히 고엔트로피 설계는 구조 안정성 향상, 상전이 억제, 산소 방출 완화, 반응 가역성 향상 등 다양한 긍정적 효과를 제공할 수 있는 것으로 보고되면서 차세대 에너지 소재 개 발의 유망한 전략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러한 기대의 배경 에는 높은 배치 엔트로피가 특정 결정 구조를 안정화할 수 있다는 개념이 자리 잡고 있으며, 이는 Rost 연구진이 보고 한 엔트로피 안정화 산화물(entropy-stabilized oxides) 을 통해 대표적으로 입증된 바 있다.6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성능 향상의 기원이 무엇인지 는 아직 명확히 이해되지 않고 있다. 많은 연구에서는 향상 된 특성을 ‘고엔트로피 효과(high-entropy effect)’로 설 명하지만, 실제로 어떤 구조적·전자적 변화가 이러한 성능 향상을 유도하는지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
최근 분석기술과 계산과학의 발전은 이러한 질문에 새 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고엔트로피 소재의 특성은 단 순히 엔트로피의 크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수 의 원소가 형성하는 복잡한 국소 화학 환경에 의해 좌우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조성 복잡성(composi-tional complexity)이 국소 구조(local structure), 전자 구 조(electronic structure), 그리고 전기화학 반응 메커니즘 (electrochemical reaction mechanism)을 변화시키며 궁극적으로 소재의 성능을 결정할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 되고 있다.
본 글에서는 고엔트로피 개념의 발전 과정과 에너지 소재 분야로의 확장 사례를 살펴보고, 최근 제기되고 있는 ‘고엔 트로피 효과’에 대한 재해석과 향후 연구 방향을 소개하고 자 한다.
본 론
1. 엔트로피 안정화는 실제로 존재하는가?
고엔트로피 소재 연구의 출발점은 엔트로피에 의한 열역학적 안정화 개념이다. 재료의 안정성은 깁스 자유에 너지(G = H - TS)로 표현되며, 엔트로피가 증가하면 자 유에너지가 감소하여 특정 결정상이 안정화될 수 있다.3 이러한 개념은 2015년 Rost 연구진이 보고한 엔트로피 안정화 산화물을 통해 실험적으로 입증되었다.6 연구진 은 다섯 종류의 금속 양이온이 혼합된 산화물이 단일 암 염 구조를 형성하며 안정적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 었고, 이는 높은 배치 엔트로피가 실제 상 안정화에 기여 할 수 있음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모든 고엔트로피 소재가 엄밀한 의미에서 엔트 로피 안정화된 것은 아니다. 특히 대부분의 배터리 소재 는 상온 부근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엔트로피 항의 기여가 제한적일 수 있다. 실제로 최근 연구들은 고엔트로피 소 재(high-entropy materials)와 엔트로피 안정화 소재 (entropy-stabilized materials)를 구분하여 이해할 필 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성능 향상의 원인을 단순한 엔 트로피 증가로 설명하기보다 다수의 원소가 형성하는 복 잡한 화학 환경에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2. 배터리 분야에서의 고엔트로피 설계
고엔트로피 개념은 다양한 배터리 전극 소재에 적용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니켈 함량이 높은 층상 양극재에서는 다 수의 전이금속을 동시에 도입함으로써구조 안정성과 열 안 정성을 향상시키고, 충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산소 방출과 구 조 붕괴를 완화할 수 있음이 보고되고 있다.7 또한 고엔트로 피 산화물은 우수한 가역성과 구조 안정성을 나타내는 리튬 저장 소재로 주목받고 있으며,8 무질서 암염(disordered rock-salt, DRX) 구조에서는 조성 복잡성이 리튬 이온 이 동 경로와 산화환원 반응을 조절하여 높은 용량과 가역성을 구현할 수 있음이 알려져 있다.9
최근에는 나트륨이온전지용 프러시안 블루 유사체 (Prussian Blue Analogue, PBA)에도 고엔트로피 개념 이 적용되고 있으며, 다양한 결정 구조와 반응 메커니즘 을 가진 소재들에서 향상된 안정성과 가역성이 보고되고 있다.10 이러한 결과는 고엔트로피 설계가 차세대 에너지 소재 개발을 위한 유망한 전략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이 남아 있다. 층상 구조, 스피넬 구조, DRX 구조, PBA 구조와 같이 서로 다른 반응 메 커니즘을 갖는 소재들에서 관찰되는 성능 향상을 모두 ‘고 엔트로피 효과’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3. 정말 엔트로피 때문일까?
많은 연구에서는 다섯 개 이상의 원소를 도입한 후 성능 향상이 관찰되면 이를 곧바로 ‘고엔트로피 효과’로 설명해 왔다. 그러나 최근 연구 결과를 살펴보면 동일한 수준의 배치 엔트로피를 가진 소재들 사이에서도 매우 다른 전기 화학적 거동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5,11 또한 특정 원소 하나만 선택적으로 도입하더라도 유사한 성능 향상이 나 타나는 사례도 보고되고 있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실제 고엔트로피 소재가 완전히 무 작위적인 고용체(random solid solution)가 아니라는 사 실이다. 최근 연구들은 많은 고엔트로피 소재에서 특정 원 소들이 선호적으로 배열되는 국소 화학적 질서(local chemical ordering)가 존재함을 보여주고 있다.4, 5 이는 단순히 엔트로피의 크기만으로는 성능 향상의 원인을 설 명하기 어렵다는 점을 의미한다.
결국 연구의 초점은 “얼마나 높은 엔트로피를 구현할 수 있는가?”에서 “조성 복잡성이 실제로 무엇을 변화시키는 가?”로 이동하고 있다.
4. 첨단 분석기술이 밝혀낸 진실
최근 첨단 분석기술과 계산과학의 발전은 고엔트로피 소 재 연구에 새로운 전환점을 제공하고 있다. 초기 연구에서 는 주로 조성과 전기화학 성능의 상관관계에 초점이 맞추어 졌지만, 최근에는 다양한 분석기술을 통해 조성 복잡성이 실제로 어떤 구조적·전자적 변화를 유도하는지 이해하려는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5. 회절 분석(Diffraction)
고엔트로피 소재 연구에서 가장 널리 활용되는 분석기 법은 X선 회절(X-ray diffraction, XRD)이다[그림 2]. XRD는 결정 구조를 규명하고 단일 상 형성 여부를 판단 하는 핵심 도구로 활용되어 왔다. 최근에는 operando XRD를 이용하여 충방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상전이와 격 자 변화를 실시간으로 추적할 수 있게 되면서, 고엔트로 피 설계가 구조 안정성에 미치는 영향을 직접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XRD는 평균 구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 에 국소적인 구조 변화까지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 에 따라 최근에는 총산란(total scattering) 기반 쌍 분포 함수(Pair Distribution Function, PDF) 분석이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이를 통해 평균 구조 뒤에 숨겨진 국소 화학 환경과 구조 왜곡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6. 분광 분석(Spectroscopy)
분광 분석은 고엔트로피 소재의 전자 구조와 국소 배위 환경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그림 3]. 특히 X 선 흡수 분광법(X-ray Absorption Spectroscopy, XAS) 은 고엔트로피 연구에서 가장 강력한 분석 도구 중 하나로 활용되고 있다.
X선 흡수 근접 가장자리 구조(X-ray Absorption Near Edge Structure, XANES)는 전이금속의 산화 상태와 전 자 구조 변화를 분석하는 데 활용되며, 충방전 과정에서 각 원소가 산화환원 반응에 어떻게 참여하는지를 추적할 수 있다. 반면 확장된 X선 흡수 미세구조(Extended X-ray Absorption Fine Structure, EXAFS)는 원자 주변의 배위 환경과 결합 거리 정보를 제공하여 국소 구조 변화를 분 석할 수 있다. 따라서 XAS는 전자 구조와 국소 구조를 동 시에 이해할 수 있는 강력한 기법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X선 광전자 분광법(X-ray Photoelectron Spec-troscopy, XPS)은 표면 화학 상태와 전자 구조를 분석하 는 데 활용되며, 표면 재구성과 계면 안정화 메커니즘을 이 해하는 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7. 현미경 분석(Microscopy)
원자분해능 주사투과전자현미경(Scanning Transmis-sion Electron Microscopy, STEM)의 발전 역시 고엔트 로피 연구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초기에는 고엔트로피 소재를 원소들이 균일하게 혼합된 이상적인 고용체로 가정 하였지만, 최근 주사투과전자현미경 분석 결과는 실제 소 재가 훨씬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12


주사투과전자현미경과 에너지분산형 X선 분광법(En-ergy-Dispersive X-ray Spectroscopy, EDS)을 결합하 면 원자 수준에서의 원소 분포를 직접 관찰할 수 있다. 이 를 통해 특정 원소의 국소 농축, 원소 간 선호 배열, 그리고 국소 조성 불균일성이 보고되고 있으며, 이는 고엔트로피 소재의 특성이 단순한 무질서가 아니라 복잡한 국소 화학 환경에 의해 결정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그림 4].
8. 계산과학(Computation)
고엔트로피 소재는 방대한 조성 공간을 갖기 때문에 실 험만으로 모든 조성을 탐색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최근에는 밀도범함수이론(Density Functional Theory, DFT), 특수 준무작위 구조(Special Quasirandom Structure, SQS), 클러스터 전개(cluster expansion) 등의 계산기법이 활발히 활용되고 있다.
또한 머신러닝 기반 원자간 퍼텐셜과 데이터 기반 소재 탐색 기법은 기존 계산으로는 다루기 어려웠던 거대한 조 성 공간을 효율적으로 탐색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이러 한 계산과학 접근은 특정 원소 조합이 이온 이동 장벽, 금 속–산소 결합 세기 및 반응 경로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그림 5].13,14
9. 다양한 분석기술이 보여준 공통된 사실
회절, 분광, 현미경, 계산과학 연구들이 공통적으로 보 여주는 사실은 고엔트로피 소재의 특성이 단순히 엔트로 피의 크기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조 성 복잡성은 국소 구조, 전자 구조, 그리고 전기화학 반응메커니즘에 영향을 미치며, 이러한 다중 길이 척도(mul-tiscale)의 변화가 궁극적으로 소재의 성능을 결정하는 것 으로 이해되고 있다[그림 6].
10. 엔트로피에서 복잡성으로
최근 연구들은 고엔트로피 효과를 단순한 열역학적 안 정화 현상이 아닌 조성 복잡성(compositional complexity) 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있다. 다수의 원소가 공존하는 환 경에서는 매우 다양한 국소 화학 환경이 형성되며, 이러 한 구조적 다양성은 전자 구조를 변화시키고 궁극적으로 는 이온 확산, 산화환원 반응, 계면 안정성 및 열화 거동을 조절하게 된다.
따라서 고엔트로피 설계의 진정한 가치는 단순히 원소 의 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국소 화학 환경을 설 계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또한 고엔트로피 효과는 하나 의 단일 메커니즘으로 설명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라, 다 양한 길이 척도에서 발생하는 구조적· 전자적 변화가 결합 된 결과로 이해하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
이러한 관점은 고엔트로피 에너지 소재 연구를 단순한 조 성 설계에서 복잡성의 과학으로 확장시키고 있으며, 향후 차세대 에너지 소재 개발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결 론
고엔트로피 에너지 소재는 지난 20년 동안 에너지 소재 연구에서 가장 주목받는 설계 전략 중 하나로 발전해 왔다. 초기에는 높은 배치 엔트로피에 의한 구조 안정화 개념을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되었지만, 최근에는 이러한 현상을 보 다 근본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첨단 회절, 분광, 현미경 분석기술과 계산과학의 발전은 고엔트로피 소재 내부에 존재하는 복잡한 국소 구조와 전 자 구조를 밝혀내고 있으며, 실제 성능은 이러한 구조적· 전자적 변화에 의해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보여주 고 있다. 이에 따라 연구의 초점은 “얼마나 높은 엔트로피 를 구현할 수 있는가?”에서 “조성 복잡성이 실제로 무엇을 변화시키는가?”로 이동하고 있다.
특히 최근 연구들은 조성 복잡성이 국소 구조, 전자 구 조, 그리고 전기화학 반응 메커니즘에 영향을 미치며, 이 러한 다중 길이 척도의 변화가 궁극적으로 소재의 성능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고엔트로피 효 과는 하나의 단일한 열역학적 현상으로 이해되기보다 다 양한 구조적·전자적 요소들이 결합된 결과로 해석하는 것 이 더욱 적절하다.
결국 고엔트로피 에너지 소재 연구의 궁극적인 목표는 단순히 많은 원소를 혼합하거나 엔트로피를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조성 복잡성이 만들어내는 국 소 화학 환경을 이해하고 이를 의도적으로 설계하는 것이 다. 이러한 관점은 고엔트로피 에너지 소재 연구를 단순한 조성 설계에서 복잡성의 과학으로 확장시키고 있으며, 미 래 에너지 소재 개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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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별 Hanbyeol Choi
• 경북대학교 화학교육과, 학사(2019.3-2023.2)
• 경북대학교 화학과 석사과정(2025.9-현재, 지도교수: 이원태)

이원태 Wontae Lee
• 성균관대학교 화학과, 학사(2008.3-2013.2)
성균관대학교 에너지과학과, 석박사 통합(2013.3-2020.2, 지도교수: 윤원섭)
성균관대학교 성균융합원, 박사후 연구원(2020.3-2021.5, 지도교수: 윤원섭)
성균관대학교 성균융합원, 연구교수(2021.6-2024.2)
경북대학교 화학교육과 조교수(2024.3-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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