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이드 젤의 두 가지 형성 경로:평형 및 비평형 네트워크의 미세구조와 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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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진 | 제주대학교 화학코스메틱스학과 조교수, tjkwon@jejunu.ac.kr
서 론
우리가 ‘고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소금이 나 다이아몬드처럼 원자 또는 분자가 규칙적인 격자로 배 열된 결정형 고체(crystalline solid)이다. 결정형 고체에 서 기계적 강성은 격자 위치에서 벗어나려는 입자에 강한 복원력이 작용하는 데서 비롯된다.1 반면 우리 주변에는 젤 리나 젤 타입 화장품처럼 결정 격자를 갖지 않으면서도 고 체적 특성을 나타내는 다양한 젤상 물질이 존재한다. 이 중 콜로이드 젤(colloidal gel)에서는 입자들이 시스템 전체 를 가로지르는 성긴 그물망을 이루어 다공성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기계적 강성은 이 연결성에서 기인한다.2
이러한 콜로이드 젤은 입자 간 인력이 열에너지(kBT )보
다 충분히 클 때 형성되며, 이때의 결합은 공유 결합과 같 은 영구적 결합이 아니라 끊어지고 다시 맺어질 수 있는 가 역적 물리 결합이다. 입자들이 이 결합을 통해 시스템 전 영역에 걸쳐 이어지는 현상을 퍼콜레이션(percolation)이 라한다. 다만 퍼콜레이션만으로기계적 강성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며, 입자당 충분한 수의 결합이 형성되어 외부 응 력에 저항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강성이 발현된다.3 그 결과 작은 변형에는 탄성 고체처럼 버티지만, 항복 응력(yield stress)을 초과하면 결합의 재배열을 통해 유동성(fluidity) 을 나타내는 이중적 성질을 보인다. 이러한 연결성과 강성 의 관계가 본 총설이 다루는 핵심 주제 중 하나이다.
콜로이드 젤이 형성되는 경로는 입자 간 인력의 성격에 따라 달라진다. 전통적으로는 등방성(isotropic) 인력을 갖는 시스템을 기체-액체 상분리(phase separation) 영역으로 급랭(quenching)할 때 그 과정이 정지되며 젤이 형성되는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2 최근에는 입자가 형성할 수 있는 결합의 수(원자가, valence)를 제한하여 상분리 없 이 평형 상태에서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경로도 보고되었 다.4 이처럼 서로 다른 젤화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은, 잉 크, 식품, 촉매 지지체, 약물 전달체 등 폭넓은 응용을 갖는 기능성 연성 소재(functional soft materials)의 설계와 직접적으로 연관된다.5,6 본 총설에서는 콜로이드 젤의 형 성 경로를 평형과 비평형의 관점에서 비교하고, 젤화의 핵 심 원리를 모사하는 패치 입자(patchy particle) 모델 및 그 파생 모델(PolyPatch 모델)을 살펴본 뒤, 네트워크의 연결성이 시스템의 상거동, 동역학, 그리고 강성에 미치는 영향을 정리한다.
본 론
1. 비평형 젤화(Non-equilibrium gelation)
콜로이드 젤의 형성 경로는 상분리에 종속되는지 여부 에 따라 크게 비평형 경로와 평형 경로로 나뉜다. 본 절에 서는 먼저 상분리에 기반한 비평형 젤화를 살펴본다.
가장 전통적인 콜로이드 젤은 상분리가 동역학적으로 정지(arrested)되면서 형성된다.7,8,9 콜로이드-고분자 혼 합물과 같이 강한 인력이 작용하는 시스템을 스피노달 분 해(spinodal decomposition) 영역으로 급랭하면, 시스 템은 콜로이드가 풍부한 상과 희박한 상으로 분리되기 시 작한다. 그러나 이 분리가 완결되어 거시적인 두 상으로 갈라지기 전에, 밀도가 증가한 콜로이드-풍부 상이 유리 전이(glass transition) 경계를 넘어서면 해당 영역의 입 자 운동이 국소적으로 정지된다[그림 1(a)]. 그 결과 상분 리에 의해 형성된 그물 형태의 패턴이 중간 단계에서 동결 되어 젤을 이룬다. 즉 완결되지 못한 상분리의 패턴이 그 대로 젤 네트워크로 고정되는 것이다.

콜로이드의 부피 분율이 큰 경우에는, 상분리로 형성된 콜로이드-풍부 네트워크가 주변 매질의 변형 속도를 따라 가지 못하고 탄성체처럼 거동하는데, 이를 점탄성 상분리 (viscoelastic phase separation)라 한다.10 이 과정에서 는 시스템 내부에 자체적인 역학적 응력(mechanical stress)이 생성되며, 이 응력이 젤 골격의 형성에 깊이 관 여한다. 한편 단일 입자 수준에서 비평형 젤화를 추적한 최 근 공초점 현미경(confocal microscopy) 연구는, 이때의 동역학적 정지가 단순히 입자의 조밀한 패킹에 의한 유리 전이가 아니라 국소적 퍼텐셜 에너지(potential energy) 를 최소화하는 비정질 정렬의 결과임을 규명하였다.11 즉 비평형 젤은 전역적으로 가장 안정한 상태를 지향하는 것 이 아니라, 인접 입자 간 에너지를 낮추는 과정에서 형성된 구조가 그대로 정지된 상태에 해당한다.
2. 평형 젤화 (Equilibrium gelation)
평형 젤(equilibrium gel)은 비평형 젤과 상반된 성격을 갖는다. 상분리를 동반하지 않으며, 시간이 지나도 거시적 구조 응집(coarsening)이나 물리적 노화(aging)를 겪지 않는 열역학적으로 안정한 상태이다. 그 핵심은 입자가 형 성할 수 있는 결합의 수, 즉 원자가를 제한하는 데 있다. 결 합 수가 제한되면 상평형도에서 상분리 영역이 더 낮은 온 도와 밀도 영역으로 크게 축소되고, 그 사이의 열린 중간 밀도 구간에서 시스템은 상분리를 피하면서 안정한 네트 워크를 형성한다[그림 1(b)].4,12 따라서 비평형 젤이 조밀 한 패킹에 의존하는 것과 달리, 평형 젤은 성긴 네트워크의 지속적인 연결성과 결합 수에 의해 고체적 성질을 나타낸 다. 라포나이트(laponite)의 방향성 결합이나 DNA 나노 스타(nanostar)의 팔(arm) 개수 조절은 이러한 원자가 제 한으로 평형 젤을 실험적으로 구현한 대표적 사례이다.13,14 이러한 원자가 제한을 이론적으로 모사하는 것이 패치 입자 모델이다.12,15 서로 반발하는 하드 코어(hard-core) 표면에 방향성 인력 지점(패치, patch)을 배치한 입자이다 [그림 2(a)]. 등방성 인력을 갖는 구형 입자는 가능한 한 많 은 이웃으로 둘러싸이려 해 쉽게 조밀한 클러스터를 이루 고 상분리하는 반면, 결합 원자가가 제한된 패치 입자는 최 저 에너지 상태에서도 이웃 수가 패치 수로 제한되어 액체 상의 패킹 밀도가 크게 낮아진다. 이것이 상분리 없이 개방 형 네트워크를 안정화하는 근본 원인이다. 대표적인 Kern–Frenkel 모델과 Wertheim의 열역학적 섭동 이론 (thermodynamic perturbation theory)은, 패치 수가 줄 어들수록 상분리가 일어나는 임계점이 더 낮은 온도·밀도 로 크게 이동함을 보였다[그림 2(b)]. 이 영역에서는 매우 낮은 밀도에서도 상분리 없이 평형 젤에 도달할 수 있다.12

입자 표면에 직접 패치를 설계하는 대신, 고분자·이온· DNA 같은 이차적 링커(linker)로 콜로이드를 가교(bridg-ing)하는 방식도 널리 쓰인다. 이를 기술하는 PolyPatch 모델은 패치 자리를 갖는 콜로이드와 그 패치에 가역적으 로 결합하는 유연한 링커의 혼합물로 구성된다.16 링커가 부족하면 링커의 농도 증가에 따라 가교가 늘어 네트워크 가 성장하지만, 링커가 과포화되면 한쪽 끝만 결합한 댕글 링(dangling) 구조가 늘어 오히려 기존 가교를 끊는다 [그림 3]. 그 결과 링커 양만으로 젤화를 가역적으로 제어할수 있는 재진입(re-entrant) 거동이 나타난다.17
3. 네트워크 연결성에 따른 기계적 강성
콜로이드 젤의 거시적 강성은 결국 미시적 네트워크가 얼마나 촘촘히, 그리고 얼마나 오래 형태를 유지하는가에 서 비롯된다.18 공유 결합으로 이루어진 화학적 젤에서는 시스템 전체를 잇는 퍼콜레이션이 곧 젤화이지만, 결합이 끊어지고 다시 맺어지는 물리적 콜로이드 젤에서는 사정 이 다르다. 단순히 연결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그 연 결이 외부 변형이 가해지는 시간보다 오래 유지되어야 비 로소 네트워크가 골격을 지키며 응력을 견딘다. 이 조건 에 도달하는 방식은 두 경로에서 서로 다른데, 비평형 젤 에서는 입자들이 조밀하게 갇혀 거의 움직이지 못하게 되면서,19 평형 젤에서는 입자가 계속 움직이더라도 개별 결 합의 수명이 충분히 길어지면서 같은 결과에 이른다.20,21 결국 젤이 응력을 견디는 능력은 네트워크의 연결 정도와 그 연결이 유지되는 시간에 의해 함께 좌우된다.


그러나 충분히 오래 연결되어 있다고 해서 곧바로 단단 해지는 것은 아니다. 네트워크가 외부 응력에 저항하려면 입자당 결합 수가 일정 수준을 넘어야 하며, 이는 단계적 으로 진행된다. 처음에는 입자들이 단순히 이어지기만 한 상태(연결성 퍼콜레이션, connectivity percolation)에 도달하는데, 이 단계의 네트워크는 아직 역학적으로 불안 정하다. 이전 연구에 따르면, 네트워크가 응력을 견디는 강성 퍼콜레이션(rigidity percolation)은 입자당 평균 결합 수(배위수 <Z>)가 약 2.4를 넘어서는 지점에서 나타난다.20 이때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결합을 세 개 이 상 가진 입자들이다. 결합이 한두 개뿐인 입자는 사슬처 럼 이어질 뿐 쉽게 휘어지는 반면, 세 개 이상의 결합을 가 진 입자들이 서로 연결되어 별도의 골격(3-bond perco-lation)을 이루면 비로소 네트워크가 형태를 단단히 지탱 한다. 거시적 탄성을 가늠하는 손실 탄젠트(G ″1/G ′1 )는 이 3-결합 골격이 형성되는 높은 결합 밀도에 이르러서야 급격히 감소하며 젤이 단단해진다[그림 4]. 이는 젤의 강 성이 연결의 양만으로 결정되기보다, 입자당 결합 수와 같 은 네트워크의 국소적 구조에도 크게 좌우됨을 시사한다.21
결 론
나노 및 콜로이드 입자 기반 젤은 단순한 무작위 응집체 가 아니라, 입자 간 인력, 상분리 불안정성, 결합 원자가, 네트워크 위상 등이 함께 작용하여 형성되는 복잡한 연성 물질이다. 전통적인 스피노달 분해 기반의 비평형 젤화에 서 출발하여, 방향성 결합을 도입한 패치 입자 모델과 고분 자 매개의 PolyPatch 모델에 이르기까지 이 분야는 빠르 게 발전해 왔다. 그 과정에서 젤화가 단순히 입자 간 인력 의 세기뿐 아니라, 국소적 구조 형성, 결합 원자가, 네트워 크의 위상학적 특성에 의해서도 통제됨이 밝혀졌다.
특히 거시적인 링커 농도나 링커의 유연성과 같은 단일 변수만으로 네트워크의 연결성, 퍼콜레이션 상거동, 이완 시간 척도를 제어할 수 있다는 점은, 가역적이고 정밀한 제 어가 가능한 차세대 소재 설계에 강력한 방법론을 제공한 다. 본 총설에서 다룬 평형·비평형 젤화의 근본적 차이와, 네트워크 연결성에 따른 강성 및 점탄성 동역학의 기초 원 리는, 스마트 하이드로젤, 광학 소재, 다공성 촉매 지지체 등 다양한 연성 소재(soft materials)를 설계하고 최적화 하는 데 중요한 과학적 기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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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진 Taejin Kwon
• 서강대학교 생명과학과, 학사(2011.3–2015.2)
• 서강대학교 화학과, 물리화학 박사(2015.3–2021.2, 지도교수: 성봉준)
• 서강대학교 화학과, 박사후 연구원(2021.3–2022.3)
• The University of Texas at Austin 화학공학과, 박사후 연구원(2022.4–2023.8)
• 제주대학교 화학코스메틱스학과 조교수(2023.9–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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