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을 인식하자 보인 것들(2026년 2월호)
- 洪均 梁

- 4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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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 3일 전

오늘날 우리는 분자의 구조를 3차원 공간 속에서 이해 하는 데 익숙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1860년대에만 해도 “구조”라는 단어는 단순히 원자와 원자의 연결 관계를 가리킬 뿐, 실제 물리적 공간에서의 입체 구조를 의미하지 않았죠. 하지만 1874년 판트호프와 레벨이 탄소 주위의 원자들이 정사면체 구조를 이루어야 한다는 이론을 제시했고, 이후 이 개념에 기반하여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지난 글에서 살펴본 피셔의 기하 이성질체 연구였죠. 이제 1890년경이 되면 탄소의 정사면체 구조는 화학계에서 확고하게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1890년대에는 이 개념을 확장하고 체계 화하려는 움직임들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글에서는 그 중 세 가지를 골라 살펴보려고 합니다.[참고문헌 1]
첫 번째 움직임은 유기화학의 명명법(nomenclature)을 정리하려는 움직임입니다. 1870년대와 1880년대를 거치면서 새로이 합성된 유기화합물은 어마어마하게 늘었습니다. 하지만 각 화합물의 이름은 연구자에 따라 제멋대로 붙어 있었고, 동일한 분자에 대해 여러 이름이 붙은 경우도 흔했습니다. 이전까지는 이성질체 등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명명법을 체계화한다는 것이 어려웠지만, “공간의 화학”이 완성되면서 유기화합물의 구조에 대한 이해가 원숙한 단계에 들어섰죠.[참고문헌 2] 이제 때가 무르익은 것입니다.
한편, 이와는 다른 목적에서 명명법을 개혁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프랑스 화학자들이었습니다. 라부아지에 때만 해도 화학 연구를 주도했던 프랑스는 19세기 말에 이르러 화학계에서 2등 국가로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몇몇 프랑스 화학자들은 이를 타개할 방안으로 화학 교육의 개혁을 생각했죠. 이들은 최신 화학 이론인 구조 이론을 체계적으로 화학 교육과정에서 다루고자 했는데, 이내 용어가 정리되어 있지 않아 “체계적”인 교육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참고문헌 3] 이들 중 하나가 바로 샤를 프리델(Charles Friedel, 1832-1899)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죠. “과학은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데, 특히 우리나라의 공교육은 전체적인 체계의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신중하게 변화하기 때문에 [과학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것이 버겁다. (중략)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표현하기 위해 언어 자체가 변해야 한다.”[참고문헌 4]
프리델은 1889년 열린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화학 국제 회의를 주최하고 그중 한 세션을 “화학 명명법과 표기법의 통일”에 할애했습니다. 또한 명명법 문제를 다룰 국제 위원회를 조직하여 활동을 시작했죠. 그러나 명명법 세션이나 명명법 위원회나 프리델을 비롯한 프랑스 화학자들이 주도하였고, 화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이를 깨달은 프리델은 프랑스 외부의 영향력 있는 화학자 들까지 논의에 포함시키고자 했습니다.
1892년 4월 18일, 제네바의 한 호텔에 서른네 명의 화학자들이 모였습니다. 이들 중에는 각 나라의 화학회 회장들과 유명 학술지 편집장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지난 글에서 살펴본 바이어와 피셔도 참석자 명단에 올랐죠. 프리델은 본격적인 회의를 시작하면서 자신의 위원회에서 그동안 연구한 명명법안을 발표했습니다. 이 안의 특징은 이미 이름이 잘 정착해 있는 단순한 유기화합물부터 출발해 “모든” 유기화합물을 다룰 수 있는 체계라는 점이었습니다. 위원회는 이 안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고, 단순명료하며, 지속 가능하다”고 자평했습니다.[참고문헌 5]
이어진 토론 시간에 바이어가 입을 열었습니다. 그는 세부 사항을 논의하기 전에 중요한 질문을 먼저 해결해야 한다고 말하며, 어떤 현장이 명명법 개혁을 가장 시급하게 요하는지, 이 현장에서 새로운 이름들이 효과를 볼 수 있도록 이 회의에서 우선해야 하는 원칙은 무엇인지, 그리고 개혁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를 물었습니다. 프리델과 동료 위원들은 전반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지만, 바이어는 거기 동의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이어는 모든 화합물에 대한 명명법 체계를 새로 만드는 것은 큰 노력이 필요한 일이고, 이 회의에서는 그저 각 화합물에 대해 그 조성을 잘 표현할 수 있는 공식적인 명칭을 확정하자고 제안하였죠.
이 논의로부터 명명법 개혁에 관심 있었던 두 부류의 화 학자들이 어떤 입장이었는지가 드러납니다. 프리델은 유기화학을 기술하는 체계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즉, 그는 체계적인 “명명법”을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반면 바이어가 명명법 개혁에 관심이 있었던 이유는 연구의 용이성 때문이었습니다. 혼란스러운 “동의어”들을 제거하고 하나의 화합물에는 하나의 이름만 붙이자는 것이죠. 그에게 필요한 것은 각 화합물에 대한 “공식 명칭”이었지, 꼭 체계적인 명명법까지 개발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열띤 토론 끝에 프리델이 양보했습니다. 남은 회의 동안, 화학자들은 화합물을 몇 가지 그룹으로 나눠 각 그룹 내에서 공식적인 화합물 이름을 정하는 규칙을 논의하였습니다. 이렇게 제네바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들 중에는 오늘날의 유기화합물 명명법에 사용되는 여러 규칙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화합물 내 가장 긴 탄화수소를 기준으로 하여 이름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그렇습니다. 이중 결합을 포함한 탄화수소는 –인(-ene)을, 삼중 결합을 포함 한 탄화수소는 –아인(-ine)을 접미어로 써서 표현하는 것도 여기서 결정되었죠.[참고문헌 6] 그 과정에 불꽃 튀는 논쟁도 있었습니다만, 결국 모두가 만족하는 명명법이 도출되었습니다. 피셔는 훗날 이 회의를 회상하며 각국의 화학자들이 “커다란 한 가족처럼” 느껴졌다고 말합니다.[참고문헌 7] 이런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회의 참석자들은 구조가 복잡한 분자들에 대한 논의는 나중으로 미루기로 하였습니다. 프리델이 당초에 계획했던 “완벽한” 명명법은 도출하지 못한 것이죠. 그럼에도 제네바 명명법은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습니다. 제네바 회의의 회의록과 결론은 1892년 5월 프랑스어로 발간되었는데, 짧은 시간 안에 영어, 독일어, 이탈리 아어, 러시아어, 루마니아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이제 유기화합물의 구조를 이름과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체계가 만들어졌고, 연구 현장에서 효율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심지어 제네바 명명법은 교육에 쓰지 않기로 정했음에도 이 명명법만을 따라 쓰여진 교과서가 등장했을 정도입니다. 한편, 의심의 목소리도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명명법으로 지어진 이름들은 길고 어색했고, 연구자들이 관심을 갖고 있던 많은 분자들은 명명법 규칙에서 누락되었습니다. 제네바 명명법을 적용했던 학술지들 일부는 이런 이유로 제네바 명명법을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제네바 명명법은 오늘날까지도 유기화학 명명법의 토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구조화학의 성장이 체계적인 명명법으로 이어졌다는 첫 번째 이야기는 이쯤 정리하고, 이제 나머지 두 가지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이는 입체화학적 사고방식이 유기 화학에서 나머지 분야로 퍼져나간 이야기입니다. 생체 분자와 무기 분자가 그들입니다.
먼저 생체 분자 이야기를 간단하게 따라가 봅시다. 지난 글의 주인공 중 하나인 피셔가 다시 등장합니다. 3차원 구조를 활용해 당의 미스터리를 해결했던 피셔는 이후 다른 프로젝트로 눈을 돌립니다. 그는 일찍이 효모(yeast)에 관심이 있었는데, 1891년 글루코스의 합성과 더불어 당 프로젝트가 일단락된 후 효모를 활용한 연구를 재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당의 종류에 따라 발효 여부가 달라진 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흥미롭게도 발효 여부는 당의 구조가 조금만 달라져도 크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탄소가 다섯 개인지 여섯 개인지, 하이드록시기(-OH)가 어디에 있는지, 광학 활성은 어떻게 되는지, 이런 미묘한 특성들이 정확히 맞아떨어져야 발효가 효율적으로 일어났습니다.[참고문헌 8]
이러한 현상은 효모에서 발효를 담당하는 분자로 알려져 있는 효소(enzyme)를 뽑아내어 시험관 내에서 반응을 시켰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참고문헌 9] 그렇다면 “효소 분자”와 당이 정확히 구조적으로 맞아떨어져야 효소가 기능을 제 대로 수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피셔는 유명한 표현을 만들어냅니다. “그림을 사용하자면, 나는 효소와 글루코사이드가 서로에 대해 자물쇠와 열쇠처럼 맞아떨어져야 서로에 대한 화학 작용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고 말하겠다.”[참고문헌 10] 이제 이러한 개념을 통해 효소의 작용을 “화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고, “자물쇠-열쇠 모형”은 빠르게 화학계와 생리학계에 퍼져나갔습니다. 1894년의 일입니다.
한편, 무기 분자의 입체화학은 알프레드 베르너(Alfred Werner, 1866-1919)가 홀로 개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는 원래 유기화학자로 훈련받았습니다. 취리히 대학교에서 1890년 질소의 입체화학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1891년「친화도와 원자가 이론에 대한 소고(Beiträge zur Theorie der Affinität und Valenz )」라는 논문을 발표하였습니다. 이 논문에서 베르너는 입체 화학을 이용해 원자가를 설명하고자 하였습니다. 당시 많은 화학자들은 원자가에 따른 화학 결합을 방향성을 갖고 있는 결합으로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메테인(CH4)이 정사면체 구조를 갖는 것은, 정사면체 모양의 특별한 C-H 결합이 네 개 존재한다는 것이었죠. 베르너는 여기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탄소 주위에 정사면체 구조가 형성되는 것을 두고, 탄소와 주위 원자들 사이에 작용하는 힘은 “단순한 인력”일뿐이지만 그 인력을 최대로 만들기 위해 주위 원자들이 서로 멀찍이 위치하게 되면서 정사면체 구조가 만들어진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이 “인력”의 크기는 중심 원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이에 따라 최대로 안정한 구조를 만들 수 있는 주위 원자의 수도 달라진다고 보았습니다. 즉 “원자가”라는 것은 중심 원자와 주위 원자 사이의 인력을 잘 배분할 수 있도록 정해지는 수인 것이죠. 이 이론의 귀결은, 원자가로 만들어진 결합이 고정된 결합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조건에서는 서로 자리가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도 광학 활성이나 불포화 탄소의 위치가 변화하는 사례들이 알려져 있었고, 베르너의 이론은 그런 사례들을 훌륭하게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1892년에 취리히 공과대학교에 자리 잡은 베르너는 1893년, 그의 유기화학자로서의 배경을 고려할 때 다소 생뚱맞아 보이는 논문을 출판합니다. 바로 무기화합물 인 금속-암모니아 염에 관한 연구 논문이었습니다. 금속-암모니아 염은 코발트, 백금, 로듐과 같은 금속과 암모니아, 염소 등을 반응시키면 얻어지는 염으로, 다양한 색을 띠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18세기 말에 발견되어 19세기를 거치면서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여전히 이 염의 조성과 구조는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암모니아와 염소가 모두 포함된 코발트 염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코발트가 다른 원소들 세 개와 결합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고(CoCl3), 어떤 경우에는 여덟 개와 결합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며(Co(NH3)5Cl3), 어떤 경우에는 아홉 개와 결합을 이루는 것처럼 보입니다(Co(NH3)6Cl3). 그럼 여기서 코발트의 원자가는 얼마일까요? 그리고 질산 은과 반응시켰을 때, 염소 세 원자가 전부 염화 은의 형태로 석 출되는 경우도 있지만(Co(NH3)6Cl3),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습니다(Co(NH3)5Cl3). 동일한 조성(Co(NH3)4Cl3)임 에도 녹색과 보라색의 다른 색을 띠는 두 가지 종류의 이 성질체도 발견되었고요. 이와 같이, 금속-암모니아 염은 당시까지 알려져 있던 구조 이론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화합물이었습니다.
금속-암모니아 염의 조성에 대해, 1869년 스웨덴 화학자 블롬스트란드(Christian Blomstrand, 1826-1897)가 새로운 설명을 내놓습니다. 이 염 안에서 암모니아는 전부 금속에 직접 결합하지만, 염소 원자는 두 가지 부류로 구분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가지 종류의 염소는 금속에 직접 결합하고, 나머지 종류의 염소는 암모니아에 결합합니다. 그래서 금속에 직접 결합하는 염소는 염화 은으로 석출되지 못하는 한편, 암모니아에 결합한 염소는 떨어져 나와 염화 은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블롬스트란드의 이 설명은 덴마크 화학자 예르겐센(Sophus Jørgensen, 1837-1914)에 의해 보강되어, 모든 암모니아가 금속에 직접 결합하는 것이 아니고 암모니아끼리도 연결되어 사슬 구조를 이룰 수 있다는 사슬 이론으로 발전합니다.

1893년 베르너가 등장한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 속이었습니다. 그는 이 논문에서 기존의 문헌을 깊이 살펴본 끝에 금속 이온에 결합하는 암모니아의 수는 최대 여섯 개임을 밝히고, 이러한 금속 이온들에는 암모니아 여섯 개가 정팔면체 형태로 결합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경우 일반적인 분자식은 M(NH3)6X3과 같이 쓸 수 있습니다. M 은 금속, X는 음이온을 가리키고, M(NH3)63+ 전체가 3가 양이온으로 행동하여 염을 이루게 됩니다. X 이온은 양이 온과 결합하는 음이온으로 존재하지만 가열을 통해 암모니아가 하나 빠져나가면 X 이온 하나가 금속에 직접 결합하게 됩니다. 이렇게 결합한 음이온은 질산 은으로 석출 시킬 수 없습니다. 베르너는 만약 암모니아가 세 개 빠져나가면 만들어지는 M(NH3)3X3는 더 이상 염으로 작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고, 이는 블롬스트란드-예르겐센 이론의 예측과 다른 점이었습니다. 이어 베르너는 정팔면체 구조를 기반으로 이성질 현상을 설명합니다. M(NH3)4X2라는 화합물은 정팔면체에서 X가 어디에 위치 하는가에 따라 두 가지 이성질체를 가질 수 있습니다. 베르너는 그동안 실험적으로 알려져 있던 이성질체들을 이 개념을 가지고 설명해냅니다.
또한 베르너는 이러한 결합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이는 명백히 기존의 원자가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었고, 베르너는 자신의 1891년 이론을 가져와서 이 현상을 설명합니다. 중심 금속과 라디칼[참고문헌 12]은 인력으로 결합하는데, 그때 인력이 최대가 되는 라디칼의 수가 여섯 개라는 것이죠. 이는 원자가와는 다른 개념이기에 배위수(coordination number)라는 새로운 용어를 도입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코발트의 원자가는 3이지만 배위수는 6이 됩니다.[참고문헌 13]
이 논문 이후 커리어를 막 시작한 젊은 화학자였던 베르너는 국제적인 관심을 받게 됩니다. 그의 이론에 설득된 사람도 있었고, 격렬히 반대한 사람도 있었죠. 예르겐센은 끝까지 베르너의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베르너의 논문이 나오자마자 바로 반박했고, 이후 베르너는 예르겐센과 이론적 논쟁을 주고받는 한편 실험을 통해 자신의 이론을 입증하고자 하였습니다. 젊은 베르너에게는 또 하나의 행운이 따랐습니다. 때마침 1892년에『무기 화학 저널(Zeitschrift für anorganische Chemie )』이 창간되었고, 베르너는 이 학술지를 통해 자신의 연구를 세 상에 알릴 수 있었습니다.
유기화합물에 적용되어 오던 입체화학을 생체 분자와 무기 분자로 확장시킨 피셔와 베르너, 이 두 사람의 태도를 비교해 보면 흥미로운 차이점이 드러납니다. 피셔는 매우 조심스러운 사람이었고, 새로운 이론이나 개념을 제시하기보다 기존의 이론을 차용해서 자신의 실험을 설명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오늘날은 그의 “자물쇠-열쇠 모형” 이 유명하지만, 그마저도 논문 원문을 찾아보면 몇 번 사용되지 않는 용어입니다. 피셔는 그 표현을 비유로 제시했을 뿐, 새로운 개념으로 내세울 생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반면 베르너는 그의 1893년 논문에서 아무런 실험 데이터도 추가하지 않았습니다. 기존의 문헌 데이터를 모아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예르겐센의 비판이 들어왔을 때 적극적으로 방어했죠. 이렇게 베르너는 공격적으로 가설을 세우고 이론을 제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글에서는 화학자들이 구조화학의 마지막 조각, “공간”을 인식하면서 생긴 여러 가지 귀결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화학자들은 완성된 이론을 새로운 분자 시스템에 적용하는 한편, 이 이론을 담아낼 수 있는 명명법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과학 이론이 원숙해지면서 어떻게 확장하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한편, 같은 시기 물리화학자들과 물리학자들은 지금의 눈으로 보면 너무도 이상한 주제를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바로 “원자라는 것이 실재하는가?”라는 주제였죠. 다음 글에서는 이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문헌
이번 호의 내용은 다음 글들에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Evan Hepler-Smith, “‘Just as the Structural Formula Does’: Names, Diagrams, and the Structure of Organic Chemistry at the 1892 Geneva Nomenclature Congress,” Ambix 62(1): 1-28 (2015); Bernadette Bensaude-Vincent, “Languages in Chem-istry,” in The Cambridge History of Science, Volume 5: The Modern Physical and Mathematical Sciences, ed. Mary Jo Nye (Cambridge, United Kingdom: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 Peter J. Ramberg, Chemical Structure, Spatial Arrangement: The Early History of Stereochemistry, 1874-1914 (Hampshire, UK: Ashgate Publishing, 2003); Jay A. Labinger, Up from Generality: How Inorganic Chemistry Finally Became a Re-spectable Field (Heidelberg, Germany: Springer, 2013).
물론 화학 결합이 “왜” 생기는지, 이중 결합과 삼중 결합의 정체는 무엇인지 등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문제들도 있었습니다만, 기본적으로 블록들을 연결하는 규칙은 다 알 려진 상태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날의 유기화학 교육과정에서도 명명법이 매우 이른 시기부터 다뤄지는 것을 생각해 보면 체계적 명명법이 화학 교육에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Hepler-Smith (2015), 12쪽에서 재인용.
Hepler-Smith (2015), 16쪽에서 재인용.
제네바 회의에서 결정된 원래 명칭은 -yne이 아니라 –ine이었습니다.
Hepler-Smith (2015), 23쪽에서 재인용.
이는 30년 전 파스퇴르가 광학 활성을 가진 분자들을 가지고 발견한 사실과도 일치합니다. “화학사 돌아보기 24. 결정, 빛, 생명, 그리고 탄소,” 『화학세계』 2025년 4월호 참조.
당시에는 효소가 단백질의 일종이라는 사실이 명백하지 않았습니다. 피셔는 효소를 “단백질과 공통점이 많은 어떤 분자”로 취급합니다.
Ramberg (2003), 271쪽에서 재인용.
Ramberg (2003), 282쪽에서 재인용.
이렇게 중심 금속에 결합하는 원자 혹은 원자단을 오늘날은 “리간드(ligand)”라고 부릅니다만, 베르너는 “라디칼”이라고 불렀습니다. 리간드라는 용어는 1916년에 도입 됩니다.
문제의 1893년 논문도 이 학술지에 실렸습니다.

최정모 Jeong-Mo Choi
• 한국과학기술원 화학과, 학사(2003. 3 - 2011.8)
• Harvard University 과학사학과, 석사(2011. 9– 2015. 5, 지도교수: Naomi Oreskes)
• Harvard University 화학 및 화학생물학과, 박사 (2011.9 –2016.5, 지도교수: Eugene I.Shakhnovich)
• Washington University in St. Louis, 박사후 연구원 (2016.8– 2019. 4, 지도교수: Rohit V. Pappu)
• 한국과학기술원 자연과학연구소, 연구조교수(2019. 6– 2020. 8)
• 부산대학교 화학과, 조교수(2020.9- 2024.8), 부교수(2024.9-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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