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화학
- 洪均 梁

- 9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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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의 화학은 구조 이론의 토대 위에 쌓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기서 “구조”란 3차원 구조를 가 리키는 것이 아니라 원자와 원자의 연결 관계를 가리킵니 다. 케쿨레는 1865년 탄소가 네 개의 손을 가지고 다른 원 자들과 결합할 수 있다는 이론을 제안했고, 이를 기반으 로 유기화학자들은 많은 유기화합물을 설명할 수 있었습 니다. 하지만 이 “구조”가 실제로 물리적으로 존재하는지 에 대해서는 케쿨레를 비롯한 대부분의 화학자들이 말을 아꼈죠. 그 때 젊은 화학자 두 명이 등장해서 3차원 공간 에서 “구조”를 생각하는 방법을 제안했습니다. 1874년, 판트호프와 레벨이 탄소가 주위 원자들과 결합하는 구조 는 정사면체 구조를 이루어야 한다는 가정을 도입해 광학 활성을 설명한 것입니다. 13년 뒤인 1887년, 판트호프는 그간의 발전을 정리하면서 “공간의 화학”이 점차 자리를 잡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1 이 “공간의 화학”은 1880년 대와 1890년대를 거치면서 화학 내에 완전히 정착하였습 니다. 오늘 글에서는 이 발전을 견인한 두 명의 화학자를 살펴보고자 합니다.2
이야기는 합성화학에서부터 시작합니다. 1850년대 호 프만(Wilhelm Hofmann, 1818-1892)과 퍼킨(William Perkin, 1838-1907)이 합성을 통해 최초로 염료를 생산 해 낸 이후, 새로운 염료를 합성하는 연구는 유기화학의 중요한 응용 분야였습니다. 1850년대에는 화학 이론 연 구와 염료 합성 연구가 서로 온전히 섞이지 못하고 독립적 으로 진행되었지만,3 1860년대와 1870년대를 거치면서 두 분야 사이의 통합이 서서히 이루어집니다. 특히 1860 년대 구조 이론의 성공이 결정적이었죠. 이후 합성 반응 을 구조 이론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와, 반대로 구조 이론 의 예측을 합성을 통해 검증하려는 시도가 다양하게 진행 된 끝에, 결국 1880년경이 되면 구조 이론이 합성화학의 개념적 틀로 확고하게 자리잡게 됩니다. “1880년이 되자, 유기화학자들은 최근에 수용된, 화학 반응이 진행되는 방 식에 관한 구조적 개념들을 반영하도록 합성을 재정의하 였다”4 유기화학은 구조 이론을 통해 하나로 다시 통합된 것입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유기화학자가 아돌프 바이어(Adolf von Baeyer, 1835-1917)입니다.5 바이어는 1853년 베 를린 대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하였 고, 1년의 군 복무 후 1856년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화학 연구를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분젠의 연구실에서 물 리화학 연구를 했지만 이내 유기화학에 관심이 생겨 1857 년부터는 케쿨레를 지도교수로 삼고 유기화학 연구에 뛰 어들었습니다. 그는 이듬해인 1858년 박사학위논문을 제 출하였고, 그 이후로도 2년간 케쿨레의 연구실에서 연구 를 지속하였죠. 1860년 베를린 공업학교(Gewerbeinsti-tut Berlin)의 강사로 채용되면서 베를린에 자리잡은 바 이어는 요산 유도체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습니다. 그 는 인돌(C8H7N)을 합성(1866년)하고 그 분자 구조를 규 명(1869년)하는데 성공했고, 페놀프탈레인을 합성했습니 다(1871년).
그는 1872년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화학 교수로 임명되 었고, 1875년에는 리비히의 뒤를 이어 뮌헨 대학교의 화 학 교수가 됩니다. 이 시기에 바이어는 합성 염료 회사 BASF의 지원을 받아 염료 연구를 진행하였습니다.6 그의 중요한 업적은 청색 염료인 인디고(C16H10N2O2)의 합성 과 분자 구조 규명으로, 그는 1878년 최초의 합성에 성공한 이래 합성법을 개선하여 1880년 대량생산이 가능할 수준의 합성법을 개발합니다. (기술 이전의 결과로 큰 돈 도 받았습니다!) 그의 연구는 구조 이론에 기반한 합성이 라 할 수 있었고, 이는 통합된 유기화학의 접근법을 보여 주는 좋은 예입니다.
바이어는 1885년 아세틸렌을 여럿 포함하고 있는 유기 물질을 합성하고 이들이 강한 폭발성을 가지고 있음을 발 견하였습니다. 이들의 폭발성을 설명할 방법을 고민하던 그는, 탄소의 3차원 구조에 주목합니다. 그는 탄소와 결합 하는 원자들이 정사면체 구조를 이루어야 한다면, 그 원 자들의 구조가 정사면체에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불안 정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7 그는 끝이 서로 연결된 탄화수소(사이클로알케인)를 상상하여 분자가 포함하는 탄소의 개수에 따라 구조가 얼마나 뒤틀릴 수 있는지를 계 산하였습니다. 특히 바이어는 이중결합이나 삼중결합이 내각이 0°인 도형에 대응되어 굉장히 큰 불안정성을 갖는 다고 보았고, 이것이 아세틸렌 화합물의 폭발성과 관련된 다고 설명했습니다.8 이는 판트호프-레벨 이론이 발표된 이후 최초로 다른 화학 현상에 적용된 예였으며, 보다 많 은 화학자들이 “공간의 화학”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한 연구 였습니다.

과학사학자 존슨(Jeffrey A. Johnson)은 바이어를 2세 대 독일 화학을 대표하는 화학자로 봅니다.10 리비히와 뵐 러로 대표되는 1세대 독일 화학은 1866년을 기점으로 쇠 퇴하였고, 이후 1895년까지 2세대 화학자들이 전성기를 누렸죠. 2세대 독일 화학 연구실의 특징은 “헝그리 정신” 이 강조되는 심히 수직적인 구조라는 것이었습니다. 바이 어가 뮌헨 대학교로 옮겨 설립한 연구실은 1878년 완공 되었는데, 당시 독일에서 가장 크고 가장 비싼 연구실이 었습니다. 자그마치 200명의 학생 및 연구원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지어졌죠. 하지만 그렇다 해서 연구원들이 쾌 적하게 연구를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바이어 는 300명 이상을 이 연구실에 밀어넣었고, 연구 예산은 항상 빠듯했습니다. “장비, 온도계, 원심분리기는 고사하 고 전기조차 없었다. 시험관이 유일한 실험 기구였다.”11 그리고 바이어의 성공 비결은 이 치열한 경쟁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사람들에게만 관심을 주고 자원을 공급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이어 본인이 케쿨레의 애제자였고, 바이 어 역시 학생들 중에서 애제자를 뽑았습니다.
그 애제자는 에밀 피셔(Emil Fischer, 1852-1919)였 습니다. 피셔는 1871년 본 대학교에서 1년 동안 유기화 학을 공부했습니다만, 화학에 재능이 없다고 생각해 포기 할 뻔했다가 사촌의 설득으로 사촌과 함께 1872년 스트 라스부르 대학교에 있는 바이어의 연구실에 합류하게 됩 니다. 피셔는 이곳에서 당시 최신 유기화학을 공부했고, 분자식과 구조식을 실험 결과와 연결시키는 훈련을 받았 습니다. 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친 피셔는 1874년 프탈레 인 염료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피셔를 신뢰 한 바이어는 이후에도 피셔를 조교로 임명하여 연구실을 관리하게 했고, 피셔는 1875년 학생의 실패한 실험을 분 석하다가 노란색을 띤 물질인 페닐하이드라진(C6H8N2)을 합성해냅니다.12
1875년은 바이어가 뮌헨으로 옮긴 해입니다. 피셔는 바이어를 따라가기로 결정하고, 새로운 연구실에서 페닐 하이드라진의 특징을 계속해서 연구하였습니다. 그리고 페닐하이드라진이 염료보다 카보닐(CO) 작용기에 반응하 는 시약으로 더 유용하다는 것을 밝혀냅니다.13 이후 뮌헨 대학교에서 피셔는 바이어의 품을 떠나 독립적인 연구자 의 길을 걷습니다. 1878년에는 사강사(Privatdozent) 자 격을 얻었고, 1879년에는 분석화학 부교수로 임용되었죠. 그는 이 시기에 흥미로운 연구 주제를 찾다가 당(sugar) 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당시 화학자들은 당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었을까요? 화학자들은 여러 당의 분자식을 알고 있었습니다. 글루코 스(포도당), 갈락토스, 프럭토스(과당) 등의 분자식이 C6H12O6로 동일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죠. 그리고 당 안에 하이드록실기(OH)와 카보닐기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 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의 “구조”, 즉 하이드록 실기와 카보닐기가 어디에 어떻게 붙어 있는지는 미스터 리였죠. 특히 1880년대 초반의 쟁점은 카보닐기가 탄소 사슬 끝에 붙어있는가 아니면 탄소 사슬 중간에 끼워져 있 는가였고, 피셔의 스승 바이어는 앞의 가설을 주장했습니 다. 사실 당은 실험하기 까다로운 물질이었습니다. 당은 정제 과정에서 시럽 형태가 되는 경우가 많았고, 그러면 정제도 쉽지 않을 뿐아니라 화학적 특성을 분석하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많은 경우 논문에서 보고된 물질 은 완벽하게 정제된 순물질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해석 하기 어려운 여러 특징을 보였죠.
피셔는 1882년 에를랑겐 대학교의 화학 교수로, 1885 년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의 화학 교수로 자리를 옮기면서 당 연구를 지속했고, 자신만의 무기인 페닐하이드라진을 활용하여 당을 분석하였습니다. 페닐하이드라진과 당을 반응시키면 결정 형태로 쉽게 분리할 수 있는 오사존(os-azone) 이라는 물질이 얻어집니다. 피셔는 이 물질을 이 용해 당의 정확한 분자식을 결정할 수 있었을 뿐더러, 오사존의 녹는점 차이를 이용해 여러 당이 섞여 있는 혼합물 을 분리해낼 수 있었고, 새로운 당을 찾아낼 수도 있었습 니다. 심지어 그는 페닐하이드라진을 이용해 당의 정의를 새로 쓰기도 했습니다. “진짜 당은 알데하이드-알코올 혹 은 케톤-알코올로서 (...) 페닐하이드라진과 반응하여 오 사존을 형성한다.”14
당 분석 기법을 정립한 피셔는 이제 당 합성으로 관심을 옮깁니다. 그는 조수로 일하던 타펠(Julius Tafel, 1862- 1918)15과 함께 여러 시도 끝에 1887년 두 종류의 당을 합성했음을 보고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정제하고 분석 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합성의 각 반응은 매우 낮은 수득률을 보였고, 독하고 해로운 부산물이 나오는 반응도 많았습니다. 이들은 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가리켜 “유기 화학에서 가장 고된 노동”이라고 불렀습니다.16 피셔는 이 노동의 결과로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됩니다. 피셔와 타펠 이 얻어낸 당은 자연에서 얻어진 당과 달리 광학 활성이 없었습니다. 이는 합성 당이 혼합물임을 의미했습니다. 하 지만 그 이상으로 합성 당의 정체를 밝혀내는 것은 불가능 했습니다.
이 당시 피셔는 당 내의 카보닐기가 어디에 위치하는지 하나씩 검증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글루코스와 프럭 토스를 페닐하이드라진과 반응시키면 동일한 오사존을 얻는다는 사실로부터 글루코스와 프럭토스의 카보닐기가 이웃한 탄소에 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습니다. 글루 코스와 프럭토스는 모두 육탄당으로, 여섯 개의 탄소를 포 함하고 있습니다(C6H12O6). 다른 실험17을 통해 글루코스 의 카보닐기가 마지막 탄소(1번 탄소)에 있다는 것을 결정 할 수 있으므로, 이제 프럭토스의 카보닐기는 마지막에서 두 번째 탄소(2번 탄소)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골칫덩어리가 등장합니다. 글루코스와 같은 육탄당인 만노스(mannose)는 글루코스와 유사하지 만 확실히 구분되는 성질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카보닐기가 어디에 위치하는지 실험을 해보니 만노스도 글루코스 처럼 카보닐기가 마지막 탄소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겠습 니까? 반복된 실험을 통해 글루코스와 만노스가 동일한 당 이 아님을 확신한 피셔는 여기서 대담한 가설을 도입합니 다. 바로 3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피셔는 당 화 학 최초로 3차원 구조 모형을 활용하여 글루코스와 만노 스가 2번 탄소에서 서로 다른 3차원 구조를 가지고 있다 는 가설을 제안하였습니다. 이 결과는 1889년 논문으로 발표되었고, 이 논문에서 피셔는 이들을 가리키기 위해 “기하 이성질체”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실마리를 얻게 되자 연구는 속도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피셔는 이제 3차원 구조에 기반하여 여러 육탄당의 관계 를 파악할 수 있었고, 기하 이성질체 중 서로 거울상 구조 를 가지고 있는 광학 이성질체의 정체를 밝혀낼 수 있었습 니다. 동일한 당의 광학 이성질체끼리 섞으면 광학 활성 이 없는 혼합물이 나왔죠. 그중에 1887년 피셔가 합성했 던 두 가지 당과 동일한 성질을 갖는 녀석들이 있었습니 다. 바로 프럭토스와 소르보스(sorbose)였습니다. 이렇게 합성 당의 정체를 밝혀낸 피셔는 거꾸로 이 정보를 이용해 광학 활성을 갖는 프럭토스를 합성할 수 있었고, 1890년 논문으로 보고하였습니다. 그리고 글루코스 역시 합성에 성공하였고(1890년), 3차원 구조까지 규명할 수 있었습 니다(1891년).
이와 같이 피셔는 최초로 “당”이라는 천연물의 한 종류 전체에 대해 화학적인 설명을 제시하였고, 그 과정에서 유 기화학적 방법론을 체계적으로 적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과학사학자 캐서린 잭슨(Catherine M. Jackson)은 피셔를 “유기화학의 아인슈타인”이라고 부릅 니다.18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피셔는 유기화학자 였고, 철저하게 유기화학의 관점에서 연구를 수행한 사람 이었습니다. 피셔의 연구가 오늘날 생화학의 영역과 잘 겹 치기 때문에 피셔를 생화학의 선조로 보기도 합니다만, 당시에는 생리화학자로 분류되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했으 면 좋겠습니다.
오늘 글에서는 바이어와 피셔를 중심으로 원자들 사이 의 입체적인 관계가 화학자들 사이에 어떻게 받아들여지 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바이어는 입체화학 모형 을 새로운 문제에 판트호프 이후 처음으로 적용해냈고, 피 셔는 입체화학 모형을 이용해 복잡한 분자의 이성질 관계 를 설명해냈습니다. 비록 지면 관계상 두 사람만 다뤘지 만, 실제로는 바이어와 피셔 사이에도 다양한 화학자들이 입체화학 이론을 제시하였다는 점을 기억해 주셨으면 합 니다.19 즉, 1880년대 말부터 1890년대 초까지는 여러 화 학자들이 입체화학에 관심을 두고 있던 시기였고, 그러한 분위기에서 바이어와 피셔의 연구가 널리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Peter J. Ramberg, Chemical Structure, Spatial Arrangement: The Early History of Stereochemistry, 1874-1914 (Hampshire, UK: Ashgate Publishing, 2003), 109.
이번 호의 내용은 다음 글들에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Peter J. Ramberg, Chemical Structure, Spatial Arrangement: The Early History of Stereochemistry, 1874-1914 (Hampshire, UK: Ashgate Publishing, 2003); Catherine Mary Jackson, Analysis and Synthesis in Nineteenth-Century Organic Chemistry, Ph.D. dissertation, University of London (2008); Catherine M. Jackson, “Emil Fischer and the ‘art of chemical experimentation’,” History of Science 55 (1), 86-120 (2017); Horst Kunz, “Emil Fischer — Unequalled Classicist, Master of Organic Chemistry Research, and Inspired Trailblzer of Bio-logical Chemistry,” Angewandte Chemie International Edition 41 (23), 4439-4451 (2002).
“화학사 돌아보기 19. 1850년대의 풍경,” 『화학세계』 2024년 6월호 참조.
Catherine Mary Jackson (2008), 128쪽.
Aleksander Sztejnberg, “Adolf von Baeyer (1835-1917) -- The Most Distinguished German Chemist of the Second Half of the XIX Century and the beginning of the XX Century,” Revista CENIC Ciencias Químicas 53, 49-63 (2022).
이 시기 BASF의 연구에 관해서는 다음 글을 참고하십시오. Carsten Reinhardt, “An Instrument of Corporate Strategy,” in The Chemical Industry in Europe, 1850-1914, eds. E. Homburg, A. S. Travis, and H. G. Schroter (Dordrecht: Springer, 1998).
오늘날 각 무리(angle strain)라 불리는 현상입니다.
이중결합 및 삼중결합에 관한 설명은 오늘날 인정 받는 설명은 아닙니다.
Adolf Baeyer,“Ueber Polyacetylenverbindungen,” Berichte der deutschen chemischen Gesellschaft 18 (2), 2279.
Jeffrey A. Johnson, “Academic Chemistry in Imperial Germany,” Isis 76 (4), 500-524 (1985).
Johnson (1985), 510쪽에서 재인용.
피셔의 연구에서 페닐하이드라진이 갖는 중요성에 대해서는 Jackson (2017)의 논의를 주로 참고하였습니다.
당시 시약(reagent)이란 특정한 원소나 작용기에 반응하여 눈으로 볼 수 있는 변화를 일으키는 물질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원래 무기화합물에 주로 사용된 용어였지만 1860년경부터 유기화합물에 대해서도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Jackson (2017), 107쪽에서 재인용.
타펠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피셔의 애제자로서 그 밑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조수로 일했지만, 오스트발트의 영향 아래 당시 떠오르는 분야였던 물리화학으로 분야를 바꿨고 이후 전기화학 분야에 큰 기여를 남겼습니다. Klaus Müller, "Who was Tafel?" J. Res. Inst. Catalysis, Hokkaido Japan 17, 54-75 (1969) 참조.
Jackson (2017), 109쪽에서 재인용.
카보닐기가 탄소 사슬의 끝에 위치하는가(알데하이드), 중간에 위치하는가(케톤)를 구분할 수 있는 실험입니다.
Jackson (2017), 119쪽.

최정모 Jeong-Mo Choi
• 한국과학기술원 화학과, 학사(2003. 3 - 2011.8)
• Harvard University 과학사학과, 석사(2011. 9– 2015. 5, 지도교수:Naomi Oreskes)
• Harvard University 화학 및 화학생물학과, 박사 (2011.9 –2016.5, 지도교수:Eugene I.Shakhnovich)
• Washington University in St. Louis, 박사후 연구원 (2016.8– 2019. 4, 지도교수 : Rohit V. Pappu)
• 한국과학기술원 자연과학연구소, 연구조교수(2019. 6– 2020. 8)
• 부산대학교 화학과, 조교수(2020.9- 2024.8), 부교수(2024.9-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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