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빛낸 화학자 44(화학세계 10월호)
- 성완 박
- 6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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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현(金秉玹) POSTECH 교수 (1955~)

한국 핵산 화학의 선도적 연구자
김병현 교수님은 1988년부터 2020년까지 포항공과대학교(POSTECH) 화학과에 재직하며 핵산 화학(nucleic acid chemistry) 분야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은 학자이십니다. 특히 형광 및 변형 핵산의 설계와 합성을 통해 올리고뉴클레오타이드(oligonucleotide)를 기반으로 한 분자 진단 및 치료 기술을 선도적으로 발전시켜 오셨습니다. 소광체 없이 작동하는 형광 분자 비콘(quencher-free molecular beacon)을 세계 최초로 고안하여 유전자 검출 기술의 패러다임을 전환하였고, 특정 염기서열 및 이차 구조를 실시간으로 인식할 수 있는 정밀 형광 탐침 시스템을 확립함으로써 핵산 염기서열 기반 진단 기술은 물론 핵산의 구조와 상호작용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셨습니다. 또한 siRNA(small interfering RNA) 전달 플랫폼과 저분자 하이드로겔(hydrogel)을 활용한 나노바이오 소재 연구를 통해 화학과 생명과학의 융합 연구를 선도하셨습니다. 이러한 연구 성과는 『Journal of the American Chemical Society』를 비롯한 국제 저널에 폭넓게 발표되었으며, 150편 이상의 논문과 5,000회 이상의 인용을 기록하며 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퇴임 이후에도 명예교수로서 활발한 연구 활동을 이어가셨으며, 2021년부터 2024년까지는 국내 핵산 분야 선도 기업인 바이오니아에서 올리고 연구소장으로 재직하며 분자 진단과 신약 개발의 가속화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셨습니다.
학술적 여정

김병현 교수님은 1955년생으로, 1977년 최규원 교수님의 지도 하에 서울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셨고, 1979년에는 KAIST 최삼권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셨습니다. 이후 미국 University of Pittsburgh로 유학하여 Dennis P. Curran 교수님의 지도 아래 유기 화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으셨으며, 학위 과정 중 수행한 나이트릴 옥사이드 사이클로첨가 반응(nitrile oxide cycloaddition)을 이용한 합성 연구와 (-)-스페시오닌(specionin)의 전합성은 학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박사과정 이후에는 University of Pennsylvania의 K. C. Nicolaou 교수님 연구실에서 1987년부터 1988년까지 박사후과정을 수행하며 천연물 전합성 연구를 이어가셨고, 이러한 우수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1988년 POSTECH 화학과에 부임하셨습니다. 부임 초기에는 유기합성법 개발 및 전합성을 중심으로 연구를 수행하셨으며, 이후 점차 바이오 분야에 접목 가능한 핵산 화학 연구로 영역을 확장하셨습니다. 오랜 기간에 걸친 지속적이고 깊이 있는 연구를 통해 김 교수님은 한국을 대표하는 핵산 화학 분야의 석학으로 자리매김하셨습니다.

김병현 교수님은 초기 연구에서 비대칭 합성 전략 개발과 천연물 전합성을 중심으로 독창적인 유기 화학 연구를 선도하셨습니다. 특히 오폴처 카이랄 설탐(Oppolzer’s chiral sultam)과 보네인-10,2-설탐(bornane-10,2-sultam)을 활용한 나이트릴 옥사이드 및 실릴 나이트로네이트(silyl nitronate) 사이클로첨가 반응 연구를 통해 새로운 비대칭 사이클로첨가 방법을 개발하고 이를 바탕으로 노낙틴(nonactin)과 같은 복잡한 천연물의 효율적인 전합성 기술을 발전시키셨습니다. 또한 이러한 비대칭 사이클로첨가 반응 연구를 확장하여 알파-하이드록시 케토메틸렌(α-hydroxy ketomethylene)과 아이소옥사졸린(isoxazoline) 구조를 활용한 다이펩타이드(dipeptide) 동등체(isostere)를 설계하고 이를 통해 효소 저해제 등 생리활성 화합물 개발에도 기여하셨습니다. 더불어 왕관형 에터(crown ether) 형태의 사이클로페인(cyclophane)을 비롯해 다양한 칼릭사렌(calixarene) 유도체와 실리콘 브리징 거대고리(silicon-bridging macrocycle) 등의 복잡한 고리 구조체(J. Am. Chem. Soc. 1995, 117, 6390)와 형광 고분자(J. Am. Chem. Soc. 2003, 125, 11241)를 효율적으로 합성하시며, 이들 화합물이 지닌 독특한 분자 인식 능력과 자기조립 특성을 심층적으로 탐구하셨습니다. 특히 다중 사이클로첨가와 실리콘 브리징 같은 혁신적인 합성 전략을 통해 기존에 합성이 까다로웠던 대형 고리 화합물의 구조적 다양성을 크게 넓히신 점은 중요한 연구 성과로 평가됩니다. 이러한 연구는 자연스럽게 형광체 개발과 자기조립 특성을 지닌 생체 고분자인 핵산 연구로 이어져 교수님의 융합적 연구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김병현 교수님은 유기 화학 연구에서 축적한 성과를 바탕으로, 유기 화학 기술이 핵산과 같은 중요한 생분자에 적용될 때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일찍이 깨닫고 화학과 생물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융합적 연구에 도전하셨습니다. 약 2000년경부터는 유기 화학에 기반한 변형 핵산(modified nucleic acids)의 합성과 그 응용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시어, 뉴클레오사이드(nucleoside)에 형광체를 접합한 새로운 형광 핵산을 개발하고, microRNA, mRNA, 반복 염기서열, 단일 염기 다형성(SNP, single nucleotide polymorphism) 탐지와 핵산의 이차 구조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다양한 분자 비콘 기술의 혁신에 주력하셨습니다. 특히 형광 소광체 없이 작동하는 quencher-free molecular beacon(QF-MB) 시스템을 세계 최초로 고안하여 DNA와 RNA 서열을 비용 효율적으로 검출할 수 있는 획기적인 탐지 플랫폼을 제시하셨습니다 (J. Am. Chem. Soc. 2004, 126, 6528). 교수님이 발표하신 수많은 형광 핵산 연구 결과는 현재에도 세포 내외에서 유전자 분석과 진단 시스템 설계의 기본 토대로 활용되고 있습니다(Chem. Soc. Rev. 2008, 37, 648). 아울러 후천성면역결핍증후군(AIDS) 등의 질병 치료에 필요한 세포 투과성 siRNA와 핵산 전달 시스템 개발에도 힘쓰셨습니다. 교수님은 siRNA와 같은 기능성 핵산의 세포 내 전달이 핵산 치료기술의 최대 난제임을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양이온성 뉴클레오리피드(cationic nucleolipid), 리보플라빈(riboflavin) 기반 하이드로겔, 에스트론(estrone) 유도체 등 다양한 핵산유도체와 나노소재를 융합하여 siRNA를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표적 세포에 전달하는 혁신적 플랫폼을 개발하셨습니다. 이처럼 단순한 핵산 합성을 넘어 진단뿐 아니라 치료 기술까지 아우르는 폭넓은 연구를 통해 김병현 교수님은 핵산 화학의 연구 수준을 한층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셨습니다.
김병현 교수님은 유기 화학과 핵산 화학 분야에서의 탁월한 연구 성과를 인정받아 국내외에서 다양한 상을 수상하셨습니다. 1999년에는 대한화학회 유기화학 분과회에서 수여하는 장세희 학술상을 받으셨고, 2000년과 2007년, 2008년에는 일본, 태국, 대만 등 아시아 각국 유기 화학 협회로부터 Asian Core Program Lectureship Award를 연이어 수상하며 국제 강연자로서의 위상을 드러내셨습니다. 2005년에는 대한화학회에서 Aldrich Award를 수상하셨으며, 2008년에는 한국연구재단이 수여하는 이달의 과학기술자상에 선정되어 5월의 과학기술자로 이름을 올리셨습니다. 또한 2010년에는 국내 최고 과학기술 학술단체인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의 정회원으로 선임되셨습니다. 이러한 수상 경력은 김 교수님의 학문적 영향력과 연구 성과가 국내외에서 높이 평가받았음을 잘 보여줍니다.

국내외 학회 발전에 지대한 기여
김병현 교수님은 연구뿐만 아니라 국내외 유기 화학 및 핵산 화학 학회의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하셨습니다. 다양한 국내외 학술지의 편집위원으로 활발히 활동하며 학술 출판과 저널 운영에도 크게 기여해 오셨습니다. 2005년부터 2008년까지는 대한화학회의 주요 학술지인 『Bulletin of the Korean Chemical Society』의 부편집장을 역임하였고, 이후 자문위원으로도 활동하셨습니다. 또한 『Journal of Nucleic Acids』, 『Current Chemical Biology』, 『International Review of Biophysical Chemistry』, 『WebmedCentral plus Biochemistry』, 『Journal of Modern Chemistry & Applications』, 『Journal of Pharmaceutical Analysis』 등 여러 국제 학술지에서 편집위원 또는 자문위원으로 재직하며 학문적 교류와 출판 품질 향상에 이바지하셨습니다. 이 외에도 청암과학펠로 선발위원장, POSTECH 화학과 BK 분자과학사업단장, POSTECH 기초과학연구소 소장, 삼성미래기술육성사업 화학분과 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화학 학계의 발전에 힘을 쏟으셨습니다.
특히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핵산 화학 학회의 활성화에 큰 역할을 하셨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오사카대학의 Kazuhiko Nakatani 교수, 톈진대학의 Zhen Xi 교수와 함께 한·중·일 3개국 핵산 연구자를 위한 학회인 A3RONA(Asian 3 Roundtable on Nucleic Acids)를 창립하셨습니다. Nakatani 교수가 주관하여 2010년 오사카에서 첫 학회를 시작하였으며, 이 학회는 현재에도 아시아 핵산 화학 연구자 간 국제 협력 기반을 구축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수님은 글로벌 핵산 화학 연구 네트워크의 확장과 강화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시어 2010년 이후 스웨덴, 러시아, 태국, 대만, 베트남, 뉴질랜드 등 여러 연구 그룹과 공동 연구를 활발히 진행하며 국제 협력 네트워크를 넓히는 데 힘쓰셨습니다. 교수님의 이러한 노력 덕분에 한국은 아시아는 물론 세계 핵산 화학 분야에서도 확고한 입지를 다질 수 있었으며, 이는 현재 후학들의 적극적인 학회 활동을 이끄는 든든한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자립과 성실의 DNA
김병현 교수님은 연구 성과 못지않게 제자들이 스스로 성장하고 자립할 수 있는 연구자로 거듭나는 것도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학생이 실험실 안팎에서 주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아이디어에 도전할 수 있도록 늘 신뢰와 격려를 보내주셨으며, 이를 통해 제자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학문적 길을 개척할 수 있도록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셨습니다. 또한 교수님은 연구 윤리와 정직함, 성실의 가치를 항상 강조하셨고, “공부하는 이들은 자기 마음을 깊이 믿어 스스로를 굽히지도 말고 높이지도 말아야 한다”, “게으른 사람은 늘 뒤만 돌아보며 스스로 자기를 버린다”, “포기는 김장할 때나 쓰는 말이다”, “운은 노력하는 사람을 따라다닌다”와 같은 말씀으로 제자들에게 큰 가르침을 전해주셨습니다. 이는 제자들이 학문적 역량뿐 아니라 올곧은 연구자로서의 책임감을 마음 깊이 새기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소중한 가르침 덕분에 16명의 박사와 34명의 석사가 성장하여 국내외 유수 대학과 연구기관에서 활발히 활동할 수 있게 되었으며, 교수님께서 베풀어주신 가르침과 정신은 앞으로도 많은 졸업생들의 든든한 길잡이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아프지 않는 것이 프로다”라고 하신 교수님의 말씀처럼, 앞으로도 건강하시고 행복하신 모습으로 매년 뵙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며 다시 한번 교수님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글 김병현 교수님 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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