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화학교육이 그려야 할 다음 지도
조예린 | Nvidia Applied Research Scientist, Digital Biology Team, choyl1998@gmail.com
서 론
중·고등학교 시절 화학 교과서에는 늘 비슷한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어떤 과학자가 새로운 원소를 발견하고, 물질 의 성질을 밝혀내어 노벨화학상을 받았다는 이야기였다. 그때는 그저 교과서 한 귀퉁이에 실린, 나와는 상관없는 위 인전의 한 페이지처럼 느껴졌다.
그 거리감을 깨뜨린 것은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아주 사 소한 순간이었다. 고등학교 화학 실험실에서 손으로 세포 를 세던 여름밤부터, 대학원에서 인공지능 단백질 구조 예 측 프로그램인 알파폴드(AlphaFold)를 접하고 이를 개발 한 존 점퍼(John Jumper) 박사와 실제로 연구를 논의하기 까지, 그리고 이 분야의 대가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데이비 드 베이커(David Baker) 교수 제자의 연구실에서 박사 학 위를 마치기까지, 나의 경험은 인공지능 시대에 화학교육 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생각하게 한 하나의 사례가 되었다.
본 론
1. 반복 노동을 지우는 인공지능
고등학교 연구·교육(R&E) 활동에서 나는 형광 표지된 뇌 세포를 현미경으로 하나하나 세며 여름을 보냈다. 대학원 에서는 픽셀 하나하나의 밝기를 손으로 재고 기록했다. 그 때마다 같은 의문이 들었다. 컴퓨터로 무엇이든 되는 시대 에 왜 이런 일을 아직도 손으로 하고 있는가. 그 사소한 의문이 나를 코딩과 딥러닝 수업으로, 결국 컴퓨터로 단백질 구조를 예측하고 설계하는 연구로 이끌었다. 알파폴드가 세 상에 나오고, 이어 단백질 서열을 설계하는 프로틴엠피엔 엔(ProteinMPNN), 단백질의 구조와 기능을 새롭게 설계 하는 알에프디퓨전(RFdiffusion) 같은 도구가 잇따라 등장 하면서, 몇 년 전만 해도 손으로 몇 주씩 걸리던 실험이 컴 퓨터 화면 안에서 몇 시간 만에 끝나는 광경을 직접 지켜보 았다.
반복적이고 정형화된 실험·계산·측정 작업은 앞으로 점 점 더 인공지능이 대신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교육이 지 금까지 공들여온 정확하게 손으로 재현하는 능력만으로는 학생들이 이 시대에 경쟁력을갖기 어렵다. 곧 어떤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을 어떻게 풀어갈지 설계하는 능력으로 교육의 무게중심이 옮겨가야 한다. 이런 변화는 오히려 화학 교육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예전에는 스무 개 곁사 슬(side chain)의 구조를 평면적인 그림으로 외우는 데 그 칠 수밖에 없었다면, 지금은 3차원 구조를 직접 들여다보며 어떤 잔기(residue) 쌍이 실제로 결합을 이루는지, 그 결합 이 왜 일어나는지 눈으로 확인하며 배울 수 있다.
2. 융합이 만드는 새로운 분야
컴퓨터로 단백질을 설계하는 연구가 하나의 분야로 자리 잡기까지, 그 안에는 수학과 통계를 전공한 사람, 컴퓨터공 학 알고리즘을 짜던 사람, 생물학자, 화학자가 함께 있었다.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던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아이디어 를 주고받는 과정 자체가 새로운 분야를 만들어냈다. 앤트 로픽(Anthropic), 오픈에이아이(OpenAI)를 비롯해 구글 (Google), 메타(Meta), 아마존(Amazon) 같은 기업들도 이 미 다음 화두로 과학을 위한 인공지능(AI for Science)을 빼놓지 않고 이야기한다. 아직 풀리지 않은 과학의 질문에 답하는 힘은, 더 나은 인공지능 모델을 만드는 것 못지않게 어떤 문제를 풀고 싶은지 정확히 이해하는 데서 나온다.
하지만 모든 것을 얕게만 안다면 그 한계 또한 명확하다. 누구나 아는 흔한 정보를 가장 잘 아는 것은 결국 인공지능 이기 때문이다. 2024년 노벨화학상을 받은 알파폴드 개발 자 존 점퍼의 박사 학위 논문을 보면 이 점이 뚜렷이 드러난 다. 곁사슬 배치(side chain packing), 구조 최적화(opti-mization), 결정학적 인공산물(crystallographic artifact) 처리, 단백질 물리학(protein physics), 사슬 골격(back-bone) 구조, 결합각 퍼텐셜(angle potential), 수소결합 퍼 텐셜(hydrogen bonding potential) 등 화학·생물학 수업 에서 배우는 기초 개념들이 논문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알 파폴드라는 혁신을 만든 것은 새로운 모델 구조이기도 하 지만, 그보다 먼저 단백질이라는 대상을 물리적·화학적으 로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었는가였다. 최신 인공지능 모 델을 다루는 능력만큼이나, 그 모델이 다루는 대상에 대한 기초 과학 지식이 여전히, 어쩌면 더 중요해지는 이유가 여 기에 있다.
3. 실패를 통해 배우는 태도
지금까지 만난 뛰어난 연구자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자신의 실패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이야기하고, 모르는 것 을 모른다고 주저 없이 묻는다는 것이다. 교육의 형태도 여 기서 배울 점이 있다. 맞고 틀림을 나눠 점수를 매기는 데 그치기보다, 틀렸다면 왜 틀렸는지 스스로 추론(reason-ing)하고 이를 발판 삼아 더 나은 답에 다가서는 경험을 학 생들이 직접 해볼 수 있어야 한다. 쉬운 문제는 이제 인공지 능이 순식간에 풀어버리는 시대다. 학생들 앞에 남는 것은 결국 어려운 문제뿐이고, 어려운 문제에는 필연적으로 숱 한 실패가 따라온다. 실패를 받아들이고 다시 나아갈 수 있 는 회복탄력성을 길러주는 것이야말로 교육이 지녀야 할 중 요한 역할이다. 또한 왜 되는가보다 왜 안 되는가를 훨씬 더 많이 물어야 한다. 과학책에 나오는 내용은 이미 검증된 이 론을 정리한 결과이지만, 그것을 찾아내기까지는 숱한 실 패가 이어졌을 것이다.
4. 공개 과학을 지향하는 태도
지도교수인 세르게이 오브치니코프(Sergey Ovchin-nikov) 교수는 소셜 미디어 엑스(X, 옛 트위터)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매일 사람들이 올리는 단백질 공학 관련 논문과 소식을 챙겨 보고, 자신의 의견이나 새로운 발견도 주저 없이 공유한다. 좋은 아이디어를 빼앗기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있지만, 달리 보면 전 세계 사람들과 거리낌 없이 소 통하며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최고의 교육 도구이기도 하다. 실제로 나의 최근 연구도 한 과학자가 소셜 미디어에서 현 재 기술의 단점을 지적한 글에서 출발해, 그 단점을 새로운 방법론의 발판으로 삼은 것이었다.
연구를 정리해 논문으로 학술지(journal)에 싣기까지는 몇 년이 걸리지만, 기술의 발전 속도는 그보다 훨씬 빠르다. 그래서 최근 인공지능 기반 과학 연구 분야에서는 새로운 발견과 도구를 사전공개논문 서버인 바이오아카이브 (bioRxiv)를 통해 먼저 세상에 알리고, 많은 의견과 협업을 거쳐 정식 논문으로 발전시키는 방식이 널리 퍼지고 있다. 연구자로서도 교육자로서도 학술지에 실린 논문만 기다리 기보다 새로운 흐름을 빠르게 흡수해 학생들에게 좋은 방 향을 제시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요즘은 매일 발표되는 논 문을 자동으로 정리해 알려주는 인공지능 도구도 많아, 이 를 활용하면 정보 탐색에 드는 시간도 훨씬 줄일 수 있다.
5. 인공지능이 아직 넘지 못한 것
한 학회에서 앤트로픽은 '과학을 위한 인공지능은 무엇을 발견하려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과학 연구의 목적은 결국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해하고 형성하는 데 있 다고 답했다. 동시에 지금의 인공지능이 아직 잘 해내지 못 하는 지점도 짚었다. 연구 방향을 스스로 정하고 질문을 구조화하는 것, 여러 제안 가운데 무엇이 추구할 가치가 있는 지 판단하는 것, 의미 없는 결과를 뚫고 흥미로운 결론에 도 달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흥미로운 비대칭도 있다. 수학이나 이론물리학, 소프트웨어 코드처럼 답을 만들어내기는 어렵지만 검증은 비교적 쉬운 영역이 있는 반면, 생물학·화학·재료과학처럼 답을 만들어내는 것도 그 답을 검증하는 것도 모두 어려운 영역이 있다. 화학은 후자에 가깝다. 새로운 물질이나 반응 경로를 제안하는 것 자체도 어렵지만, 그것이 실제로 맞는 지 확인하려면 합성하고 측정하고 재현하는 시간과 비용이 드는 실험이 뒤따라야 한다. 그래서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 전해도, 무엇을 검증할 가치가 있는지 판단하는 인간의 전 문성은 화학 분야에서 더 오래 중요하게 남을 것이다.
6. 세 가지 제언
이런 흐름 속에서 인공지능 시대의 화학교육이 특히 힘주 어야 할 세 가지를 꼽는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답을 맞히는 시험이 아니라 문제를 정의하고 해 결 과정을 설계하는 프로젝트형 평가다. 정형화된 실험 절 차를 정확히 재현하는 능력보다,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을 풀어낼 도구를 찾아 나서는 경험이 이제는 더 중요 해졌다. 남들이 안 될 거라 여기는 어려운 문제일수록 먼저 뛰어드는 경험이, 쉬운 문제를 인공지능이 대신 풀어주는 시대에 오히려 학생을 앞서게 한다.
둘째, 정보를 스스로 찾아 흡수하고 그 신뢰도를 가려내 는 능력이다. 교과서에 실린 지식은 이미 정제된 정보이지 만, 그만큼 실제 연구 현장에 도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 린다. 최신 논문과 사전공개논문, 온라인 자료 속에서 필요 한 정보를 찾아내고 선별하는 방법 자체를 가르치는 것이, 정제된 지식을 전달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해졌다.
셋째,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 과정을 즐기는 태도다. 쉬운 문제는 인공지능이 순식간에 풀어버리는 시대이니, 학 생들 앞에는 결국 쉽게 풀리지 않는 어려운 문제만 남는다. 틀렸을 때 왜 틀렸는지 스스로 추론하고 다시 시도할 수 있 는 회복탄력성을 길러주는 것이야말로, 반복 실험을 인공 지능이 대신하는 시대에 화학교육이 갖춰야 할 핵심이다.
결 론
자신이 경험한 모든 일은 아무리 사소해도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 스티브 잡스의 스탠퍼드 졸업연설처럼, 인간은 서로 다른 시간과 분야 사이에서 연관성을 찾아내 는 유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는 상상력과 더불어 스 스로를 제한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너무 잘 아는 분야 에 갇히면 혁신이나 창의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결국 혁신 은 익숙한 경계 밖, 낯선 극단값에서 나온다. 인공지능이 반복 노동을 대신하는 시대일수록, 화학교육은 학생들이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서로 다 른 분야를 넘나들 수 있도록 돕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조예린 Yehlin Cho
• KAIST, 재료공학과, 학사 (2017.1-2020.12)
• MIT, 재료공학과, 박사
(2021.9-2026.5, 지도교수: Sergey Ovchin-nikov)
• Nvidia Applied Research Scientist (2026.5-현재)
1. Jumper, J.; Evans, R.; Pritzel, A. et al. Highly Accurate Protein Structure Prediction with AlphaFold. Nature 2021, 596, 583.
2. Dauparas, J.; Anishchenko, I.; Bennett, N. et al. Robust Deep Learning-based Protein Sequence Design using ProteinMPNN. Science 2022, 378, 49.
3. Watson, J. L.; Juergens, D.; Bennett, N. R. et al. De Novo Design of Pro-tein Structure and Function with RFdiffusion. Nature 2023, 620, 1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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