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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화학(2025년 10월호)

  • 작성자 사진: 洪均 梁
    洪均 梁
  • 10월 1일
  • 4분 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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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우리는 주류 화학의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19세기 후반에는 구조 이론의 발전과 더불어 유기화학이 압도적인 인기를 끌었고, 19세기가 끝나갈 무렵 물리화 학이 화학 내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정의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1887년 『물리화학 저널(Zeitschrift für physikalische Chemie )』이 창간되면서 물리화학은 독자적인 소통 창구를 갖게 되었고, 이는 분야의 전문화를 가속했죠. 하지만 전문 학술지의 존재가 해당 분야의 독립성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최초의 무기화학 학술지 『무기화학 저널(Zeitschrift für anorganische Chemie )』은 1892년 창간되었고, 생화학은 심지어 물리 화학보다 이른 1877년에 『생리화학 저널(Zeitschrift für physiologische Chemie)』을 창간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화학 내에서 독립적인 분야로 인정받는 데에는 훨 씬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참고문헌 1]

오늘 글에서는 그 중에서도 생화학에 관한 이야기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생화학은 생물학 및 의학과의 밀접한 상호작용을 통해 발전해 왔기 때문에 흥미로운 특징을 보입니다. 화학 내에서는 생화학이 화학의 주요 분야로 인정받지 못했던 반면, 생리학에서는 생화학을 많이 활용했기 때문에 생화학의 학문적 위치를 두고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생화학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전 인 1880년경까지 생화학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간 단히 살펴보려고 합니다.[참고문헌 2]

화학과 생명 현상의 관계는 멀리 연금술 때까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금속의 변환에 처음 관심을 가졌던 연금술사들은 이슬람/라틴 연금술을 거치면서 생명 현상도 같은 원리로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이후 의약 연금술은 연금술의 주요 분야 중 하나로 자리 잡았고, 의학 및 약학 분야에서도 널리 활용되었습니다. 화학이라는 이름으로 간판을 새로 바꿔 단 이후에도 화학자들은 생명 현상에 계속해서 관심을 가졌습니다. 대표적으로 라부아지에는 생명체 내에서 산화 과정이 수행하는 역할에 관심을 가졌는데, 식물성 물질의 조성을 분석한 뒤 식물 안에서는 산화의 역과정이 진행되어 식물 조직을 구성하는 물질을 합성하고 산소를 방출한다는 가설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일부 과학자들은 화학 지식을 통해 생명체가 흡수하는 물질과 배출하는 물질, 그리고 생명체 자체의 조성을 분석하여 생명체 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고자 하였습니다. 특히 18세기 말에 관심을 끌던 주제는 동물이 섭취한 영양소가 어떻게 동물을 구성하는 물질로 변환되는가였습니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관찰했습니다. 동물이 섭취하는 식물성 물질은 대부분 탄소와 수소로 구성된 반면, 동물을 구성 하는 물질에는 질소가 훨씬 높은 비율로 들어 있습니다. 이 질소의 기원은 오랫동안 미스터리였습니다. 한 가지 이론에 따르면 동물은 호흡 과정을 통해 섭취한 식물성 물질에서 탄소와 수소를 제거하고 질소 함량이 높은 물질로 변환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제거된 탄소와 수소는 간을 거쳐 배설물의 형태로 배출됩니다. 이를 동물화(ani- malization)라고 불렀는데, 생물학적 과정을 화학적 원리로 설명하는 이 이론은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19세기 초, 질량 분석법이 발전하면서 유기 물질의 화학이 보다 명확하게 밝혀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게이뤼삭, 테나르, 베르셀리우스는 유기 물질 내의 탄소, 수소, 산소 의 양을 정확하게 결정할 수 있는 기법을 개발하였고, 이는 유기화학의 발전을 추동하였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들 유기 물질이 어디에서 왔는가에 따라 서로 다른 비율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 알려졌고, 이러한 특징을 기반으로 유기 물질을 분류하려는 시도도 여럿 등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게이뤼삭과테나르는 당과 녹말 같은 물질들을 구성하고 있는 산소와 수소의 비율이 물 속의 산소:수소 비율과 동일하다는 것을 밝혔습니다.[참고문헌 3] 기름과 수지(樹脂) 에는 이보다 많은 양의 수소가 들어 있고, 식물성 산에는 산소가 더 많이 들어 있었죠.

1820년대가 되면서 동물화 이론의 인기가 사그라들었습니다. 동물화 이론을 지지하는 직접적인 실험 결과가 거의 없었고, 이론의 약점도 많이 지적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뵐러의 스승이기도 했던 그멜린(Leopold Gmelin, 1788-1853)은 정량적인 원소 분석 결과를 근거로 1827년, 식물과 동물 안에서 일어나는 영양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대안으로 제시하였습니다. 그는 질소가 아니라 산소에 주목하여 생명체 내에서 얼마나 많은 과정을 거쳤는지가 산소의 비율에 반영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의 주장에 따르면, 식물은 탄산과 물로부터 물질을 합성하는데 그 과정에서 산소가 빠져나오기 때문에 합성이 여러 단계 지속될수록 산소의 함량이 줄어들게 됩니다. 반면 동물은 물질을 산화시키기 때문에 여러 과정을 지날수록 산소의 함량이 늘어나게 되죠.

같은 해 프라우트(William Prout, 1785-1850)는 영양 물질의 분류를 시도하였습니다. 이들은 크게 세 가지 종류로 분류할 수 있었는데, 당류(saccharine), 유지류 (oleaginous), 단백류(albuminous)[참고문헌 4] 라고 불렀죠. 당 류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물과 동일한 비율의 수소-산소 비율을 가지고 있었고, 유지류는 물에 에틸렌(C2H4)이 추가된 것과 같은 비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단백류는 질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죠. 이 세 가지 종류의 물질은 식물과 동물에서 전부 발견되었고, 프라우트의 분류법은 보편적인 분류법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 니다.

리비히가 1831년 유기 물질의 조성을 정량적으로 손쉽게 결정할 수 있는 기구인 칼리구를 개발한 이후 급속도로 쌓인 데이터로부터, 네덜란드 화학자 뮐데르(Ger- ardus Johannes Mulder, 1802-1880)가 1838년 새로운 이론을 제시합니다. 그는 단백류에 속하는 여러 물질에 주목하였습니다. 달걀 흰자에서 얻을 수 있는 알부민 (albumin), 혈액이 응고할 때 얻어지는 섬유질 물질인 피브린(fibrin), 우유를 응고하여 얻을 수 있는 카제인(casein) 등은 화학적 성질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서로 다른 물질로 간주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량 원소 분석 결과를 보면 이들의 탄소, 산소, 수소, 질소의 비율이 거의 유사했습니다. 뮐데르는 이 결과로부터 이들이 모두 동일한 라디칼, C40N10H62O12를 포함하고 있다는 이론을 세우고, 그 라디칼의 이름을 프로테인(proteine) 라디칼 이라고 지었습니다.[참고문헌 5] 뮐데르는 생명체 내에서 일어나는 변 환 과정은 프로테인 라디칼을 조금씩 변화시키는 것에 불과하고, 기초적인 원소 조성은 유지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리비히는 뮐데르의 이론에 매료되었습니다. 리비히는 자신의 학생들과 함께 다양한 유기 물질의 조성을 분석하였고, 식물성 물질과 동물성 물질이 원소 조성에 있어 차이가 없다는 점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결국 동물을 구성하는 물질들은 식물로부터 오며 혈액이나 조직 속에서 사용될 때 조금씩 수정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원소의 비율이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질소를 포함하지 않는 물질인 당류나 유지류는 동물성 물질의 형성에 기여하지 않는다는 추론을 제시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리비히는 유기 이론에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고, 합성 화학과 더불어 생명체의 화학을 열정적으로 탐구하였습니다. 그의 노력은 1842년 『동물 화학(Animal Chemistry)』에서 집대성됩니다.

『동물 화학』에서 리비히는 영양 과정과 생리학적 기능을 연결하는 방대한 이론을 제시하였습니다. 동물의 조직은 “프로테인” 라디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물질은 근육을 쓰는 것과 같은 생체 과정 중에 계속해서 분해됩니다. 분해 과정에 발생한 질소는 콩팥을 거쳐 요소, 요산 등의 형태로 배출되고, 탄소는 간으로 이동해 탄소 함량이 높은 물질인 담즙산(choleic acid)을 만들게 됩니다. 담즙산은 장을 통해 순환계로 들어오게 되며, 미세 혈관에서 산화되어 탄산과 물을 만들면서 열을 발생시킵니다. 그러나 담즙산만으로는 충분한 열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질소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당과 지방을 영양소로 섭취하여 호흡의 연료로 사용합니다. 리비히는 이 이론에 등장하는 여러 물질의 조성을 비교하여 “반응식”의 형태로 변환 과정을 제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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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소개한 일부 연구를 제외하면 리비히 이전까지 생 명의 화학은 별다른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습니다. 대 부분의 화학자들은 화학 분석 결과를 생리 현상까지 연결시키기 꺼려했고, 생리학자들은 생명 현상을 화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죠. 하지만 리비히의 『동물 화학』이 등장하면서 분위기는 반전됩니다. 이 책을 통 해 화학자, 생리학자, 의학자들이 생명체의 화학 과정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생리화학(physiological chem- istry)은 생리학 교과서의 중요한 주제로 자리잡게 되었 습니다.[참고문헌 6]

19세기를 대표하는 생리학자인 베르나르(ClaudeBernard, 1813-1878)는 생리학계의 분위기 변화를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베르나르는 생체 해부를 전문 기술로 하는 전통적인 생리학자로 훈련받았지만, 동시에 화학 실험실에서도 연구 경험을 쌓았습니다. 그의 첫 논문 은 동물 화학에 관한 것이었고, 영양 성분의 변환 과정을 연구하여 리비히의 이론을 반박하기도 하였습니다. 베르나르는 전통 생리학과 생리화학에 모두 능숙한 생리학자로서 두 가지 방법론을 모두 사용하여 연구하였고, 그의 연구는 생리학 분야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베르나르의 영향력 아래, 1860년대가 되면 생리화학은 생리학의 주요 방법론 중 하나로 자리 잡게 됩니다.

한편, 화학자들은 생리화학을 지렛대 삼아 화학의 대학 내 지위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1840년대까지도 화학 교수 자리는 의학부 소속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화학과 약학은 떼어놓을 수 없는 사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생리화학이 중요해지면서 대학들은 생리화학을 가르칠 수 있는 유기화학자들을 화학 교수 자리에 임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초기에는 리비히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유 기화학과 생리화학을 모두 가르칠 수 있는 사람들이 화학 교수로 임명되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 자리가 순수 유기화학자들에 의해 채워지게 됩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자리가 의학부나 약학부가 아니라 철학부에 속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자리를 옮겨가게 됩니다. 그멜린이 차지하고 있던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화학 교수 자리는 전통적으로 의학부 소속이었는데, 그멜린의 뒤를 이은 유기 화학자 로베르트 분젠(Robert Bunsen, 1811-1899)이 1852년 강하게 주장하여 결국 철학부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화학이 “철학”이 되어 의학부에서 독립해 나가면서 뜻하지 않은 부작용으로생리화학의 분열이 초래되었습니다. 유기화학에 더 가까운 사람들은 자연철학의일 종으로서 “과학”을 추구했고, 생리화학은 그 응용 분야 중 하나로 생각했습니다. 생리학에 더 가까운 사람들은 생리화학을 생명 현상을 설명하는 중요한 도구로 받아들 여 생리학의 주요 방법론으로 다루었습니다. 그런데 1860년대 합성 화학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유기화학자들의 관심사는 생리화학에서 더 멀어졌습니다. 그 결과 생리학이 생리화학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죠. “이 분야의 중 요한 연구 대부분은 유기화학자가 아니라 의대의 생리학 과및 병리학과에 속한 생리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참고문헌 7] 이 분위기가 지속되었다면 생리화학은 생리학의 일부로 흡수되었겠지만, 생리화학의 독립을 두고 싸워나간 투사가 등장합니다. 바로 호페자일러(Felix Hoppe-Seyler,1825-1895)입니다.

호페자일러는 원래 의사로 훈련받은 사람으로 1851년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공부 중에 생리화학에 흥미를 갖게 되어 1856년에 베를린의 병리학 연구소에서 화학 연구를 시작하였고, 1861년부터 튀빙겐 대학교에서 생리화학 교수로 일하였습니다. 그는 1872년에 스트 라스부르 대학교로 옮겨 새로운 생리화학 연구소를 열었는데, 이 연구소는 생리화학이 유기화학과 생리학으로 쪼개지던 와중에 생리화학의 독립을 끝까지 지킨 보루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는 특히 호흡 및 대사 과정에 있어 헤모글로빈의 역할에 관심이 많았고, 다양한 화학 분석 기법을 활용하여 연구를 진행하였습니다. 호페자일 러는 연구와 더불어 생리화학 교과서와 화학 분석법 핸드 북을 집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호페자일러를 상징하는 업적은 오늘 글 서두에서 소개한 『생리화학 저널』을 창간한 것입니다. 이 학술지는 1877년 창간된 이래 30년간 유일한 생리화 학/생화학 학술지로 기능하였습니다. 그는 이 학술지를 활용하여 자신의 연구를 출판하였을 뿐 아니라, 생리화학 이 독립 학문이어야 한다는 강한 메시지를 계속해서 내보냈습니다. 그는 『생리화학 저널』 발행호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죠. “생화학(die Biochemie)은 이렇게 자연스럽고 필요한 분석 기법에서 시작하여 과학으로 성장했다.”[참고문헌 8] 호페자일러에 따르면 생화학은 이제 독립적인 “과학”이 되어 자신만의 영역을 갖춘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 생리학자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들은 생리화학은 생리학의 일부로, 독립적인 학술지가 필요 없다고 생각했죠. 호페자일러는 죽는 날까지 외로운 싸움을 계속해야 했습니다.

과학사학자 타이히(Mikuláš Teich)는 19세기 생화학의 발전을 세 단계로 분류합니다.[참고문헌 9] 약 1800년에서 1840 년까지 화학에서 유기화학이 형성되는 시기, 약 1840년 부터 1880년까지 생리학의 영향 아래 있던 시기, 그리고 약 1880년 이후로 생리학에서 독립한 시기입니다. 그리고 그는 생리학에서 현대 생화학이 독립한 것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호페자일러의 『생리화학 저널』 창간을 제시합니다. 물론 실제로 생화학이 무게감 있는 독립 학문으로 인정받게 되는 것은 훨씬 후의 일이지만,[참고문헌 10] 많은 반대 속 에서도 호페자일러가 개인의 신념과 열정으로 생화학의 독립을 지켜냈다는 점에서 선구자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생화학의 발전을 물리화학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흥미로운 차이점을 보입니다. 물리화학 역시 비슷한 시기에 

『물리화학 저널(Zeitschrift für physikalische Chemie)』이 창간되었고, 호페자일러처럼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오스트발트가 그 과정을 주도했습니다. 거기까지는 비슷해 보이지만, 이후 학계의 반응이 달랐습니다. 물리화학은 바로 화학계 내에서 유행이 되어 많은 화학자들이 물리화학에 뛰어든 반면, 생화학은 호페자일러의 사망 순간(1895년)까지도 화학 내에서 그만한 커뮤니티를 만들 어내지 못했습니다. 호페자일러가 세상을 뜨면서 자신의 뒤를 이을 사람을 찾을 수 있을지 걱정할 정도였습니 다.[참고문헌 11] 그리고 물리화학과는 달리 생화학은 생리학, 병리학, 의학에서 자신들의 하위 분야라고 주장하고 있었고, 심지어 이러한 추세는 20세기까지도 계속되었습니다. 이렇게 물리화학과 생화학을 대조해 보면, 학문 분야가 과학자 사회에서 정의되는 과정이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참고문헌


  1. 무기화학의 역사는 Jay A. Labinger, Up from Generality: How Inorganic Chemistry Finally Became a Respectable Field (Heidelberg, Germany: Springer, 2013)를, 생화학의 역사는 Robert E. Kohler, From MedicalChemistry to Biochemistry: The Making of a Biomedical Discipline (Cambridge, UK: Cambrdige University Press, 1982)를 참고하십시오.

  2. 이번 호의 내용은 다음 글들에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Robert E. Kohler, From Medical Chemistry to Biochemistry: The Making of a Biomedical Discipline (Cambridge,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2); FredericL. Holmes, “Elementary Analysis and the Origins of Physiological Chemistry,” Isis 54, 50-81 (1963); Noel G. Coley, “Studies in the History of Animal Chemistry and its Relation to Physiology,” Ambix 43 (3), 164-187 (1996).

  3. 오늘날의 이해를 따르자면 1:2의 비율입니다만, 당시에는 원자량이 통일되지 않았음을 기억합시다.

  4. 알부멘(albumen)은 달걀 흰자를 가리키는 라틴어, 단백(蛋白)은 달걀 흰자를 가리키는 한자어입니다.

  5. 이는 ‘으뜸의’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 πρωτειος로부터 만든 말이었습니다. 이 용어는 베르셀리우스가 뮐데르에게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Harold Hartley, “Origin of the Word ‘Protein’,” Nature 168, 244 (1951).

  6. 생리학은 1840년대에 두 가지 이론의 도입으로 크게 변화하였습니다. 하나가 생리화학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세포 이론이었죠. 리비히는 세포 이론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7. Coley (1996), 182에서 인용.

  8. Hoppe-Seyler, F. “Vorwort,” Zeitschrift für physiologische Chemie 1 (1), I (1877).

  9. Mikuláš Teich, “The Historical Foundations of Modern Biochemistry” in The Chemistry of Life, ed. Joseph Needham (Cambridge,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0), 171쪽.

  10. Kohler (1982)는 20세기가 되어서야 미국을 중심으로 생화학이 독립 학문으로 만들어졌다고 봅니다.

  11. Kohler (1982), 23-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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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모 Jeong-Mo Choi


•  한국과학기술원 화학과, 학사(2003. 3 - 2011.8)

•  Harvard University 과학사학과, 석사(2011. 9– 2015. 5, 지도교수:Naomi Oreskes)

•  Harvard University 화학 및 화학생물학과, 박사 (2011.9 –2016.5, 지도교수:Eugene I.Shakhnovich)

• Washington University in St. Louis, 박사후 연구원 (2016.8– 2019. 4, 지도교수 : Rohit V. Pappu)

•  한국과학기술원 자연과학연구소, 연구조교수(2019. 6– 2020. 8)

•  부산대학교 화학과, 조교수(2020.9- 2024.8), 부교수(2024.9-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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