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빛낸 화학자 40(2025년 8월호)
- 성완 박
- 8월 1일
- 3분 분량
故 김희준(金熙濬) 서울대학교 교수(1947-2022)

별을 사랑한 화학자
선생님은 별을 참 좋아하셨습니다. 어릴 적부터 밤하늘의 별들을 보면서 ‘별들은 얼마나 멀리 있는지, 또 별들은 어떻게 떨어지지 않고 하늘에 떠 있는지’ 궁금해하시며, 별에 대한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보내는 시간을 즐기곤 하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선생님의 미소는 하늘의 별처럼 맑고, 봄날의 햇살처럼 따스했습니다. 2022년 우리 곁을 떠나신 김희준 교수님은 대한민국 화학교육의 지평을 넓히고, 과학의 대중화에 헌신한 진정한 교육자이자 과학자였습니다.
학문의 여정
1947년에 태어나신 김희준 교수님은 1970년과 1974년에 서울대학교 화학과에서 학사 및 석사학위를 받으셨습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1977년 시카고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셨습니다. 시카고 대학 유학 시절, 선생님은 우연히 허블의 발자취를 접하게 되셨고, 이를 계기로 빅뱅우주론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셨습니다. 이후 MIT 연구원(1977-1979), 하버드 의과대학 연구원(1979-1984), 미국 육군 Natick 연구개발센터 연구원(1984-1997)으로 근무하시며 폭넓은 연구 경험을 쌓으셨습니다. 이 시기에 두 차례(1989, 1993) 미 육군성 연구개발상을 수상하셨습니다.

중심 과학으로서의 화학
미국 유학을 떠나신 지 23년 만인 1997년 모교인 서울대학교로 돌아오신 김희준 교수님은 화학이 자연과학의 단순한 한 분야가 아니라, 여러 자연 과학 분야를 연결하고 미시세계와 거시세계를 융합하는 ‘중심 과학(Central science)’임을 널리 알리는데 힘쓰셨습니다. 선생님에게 화학은 물질의 화학일 뿐만 아니라 사람의 화학이었고, 우주와 생명, 그리고 인간을 연결하는 통합적 학문이었습니다. 특히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고갱의 마지막 작품이 던지는 철학적 질문에 과학적 답을 찾아가는 선생님의 접근방식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선생님의 이러한 통합적 사고 강조는 고등학교 과학을 우주의 진화에 근거해 교육하는 혁신적인 교육과정 도입으로 이어졌습니다.

교육에 대한 열정
김희준 교수님은 선생님의 강연이 필요한 곳이라면 시간과 장소, 대상을 가리지 않고 찾아가셨습니다. 서울대에서 15년 이상 강의하신 ‘자연과학의 세계’는 비이공계 학생들에게 과학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명강의로 자리매김했고, 2012년 SBS와 한국교육개발원이 선정한 ‘100대 좋은 대학 강의’에 선정되었습니다. 아울러 ‘일반화학실험’ 과목에 액체 크로마토그래피, 질량분석기 등 첨단기기를 도입하여 학생들에게 최신 연구 경험을 제공하신 것도 선생님의 교육 혁신 중 하나였습니다. ‘일반화학실험’과 ‘자연과학의 세계’ 수업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0년과 2007년 두 차례 서울대 교육상을 받으셨습니다.
김희준 교수님은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화학에 흥미를 가지게 하는데도 늘 열정적이셨습니다. 1999년 서울대 자연대에서 서울 시내 중학교 2학년 과학 영재들을 대상으로 매주 토요일 수학,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강연을 진행했습니다. 이때 학생들이 보인 과학에 대한 열정에 매료되신 선생님께서는 다음 해에 같은 시각에 화학 강의를 무료로 열어, 학생들이 고등학교 진학 전까지 화학에 대한 호기심을 이어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청소년 과학 교육에 대한 선생님의 관심은 국제화학올림피아드(IChO) 한국대표단 교육에 대한 적극적 참여로 이어졌습니다. 귀국 직후인 1998년에 옵저버로서 처음 IChO에 참석하신 선생님은 다음 해인 1999년 태국에서 열린 제31회 IChO에 부단장으로 참여하셔서, 한국 대표단이 우리나라 국제수학/과학올림피아드 사상 처음으로 세계 1등을 하는데 기여하셨습니다. 이후 단장으로 참여하신 2001년과 2002년 IChO 대회에서도 한국대표단이 세계 1위와 3위를 했는데, 이 때 참가한 학생 중 세 명은 선생님께서 주말마다 여신 ‘김희준 화학학교’ 출신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서울대에 재직하시는 동안 총 36명(박사 4명, 석사 32명)의 제자를 길러 내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학생들의 특성에 맞춰 눈높이에 맞는 교육을 해 주셨을 뿐 아니라, 연구자로서 가져야할 태도와 철학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선생님의 따뜻한 격려와 지도는 연구실 생활의 별사탕이었고, 입학할 때 연구에 ‘별로’였던 제자들은 졸업할 때는 스스로 빛을 내는 별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정년퇴임 기념 모임에서 “나는 정말 복 많은 사람이다. 뒤늦게 한국에 들어왔는데, 여러 천사들이 연구실에 모여들어서 여러분 덕분에 무사히 직을 마칠 수 있었다.”라고 제자들에게 고마움을 표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제자들을 ‘천사’라 부르셨지만, 제자들은 선생님 어깨에 달린 커다란 날개에 깃든 아기 새들이었습니다. 선생님은 퇴임 이후에도 광주과학기술원에서 석좌교수로 계시면서 명강의를 이어가셨습니다.
과학 대중화의 선구자
김희준 교수님은 상아탑에만 머무른 학자가 아니셨습니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과학기술 앰배서더 강연, KBS와 EBS 특강 등을 통해 일반 대중에게 과학을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는 데 앞장서셨습니다. 2005년에는 ‘닮고 싶고 되고 싶은 과학기술인’으로 선정되기도 하셨습니다. 저술 활동도 활발히 하셔서 『재미있는 화학여행』, 『자연과학의 세계』, 『철학적 질문 과학적 대답』, 『빅뱅 우주론의 세 기둥』, 『생명의 화학, 삶의 화학』(공저), 『과학으로 수학보기 수학으로 과학보기』(공저) 등 다수의 책을 집필하셨고, 『어떻게 원자를 쪼갤까』,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화학』, 『리비트의 별』 등을 번역하셨습니다. 특히 2009 개정 교육과정과 2015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고등학교 과학 및 화학 교과서의 대표저자로 참여하시어 미래 세대의 과학 교육에도 큰 기여를 하셨습니다.

마지막 선물
“나는 큰 돈이 없으니 큰 돈을 기부할 수는 없다. 그래도 돈이 들지 않는 기부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선생님의 이 말씀처럼, 김희준 교수님은 평생 지식과 지혜를 아낌없이 나누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병마와 싸우시면서도 마지막까지 당신의 혜안을 공유하기 위한 글쓰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선생님의 마지막 저서 『수소경제의 과학』(공저, 2023)은 미래 에너지에 대한 선생님의 통찰을 담은 소중한 유산입니다. 선생님은 이 책을 통해 탄소경제의 대안으로서 주목받고 있는 수소경제가 가지는 과학적 원리와 함의를 쉽게 풀어 설명함으로써 미래의 수소경제에 대비하는 길라잡이를 제공하고자 했습니다.
김희준 교수님은 화학의 눈을 통해 우주와 생명의 신비를 탐구하고, 그 아름다움을 많은 이들과 나누신 진정한 스승이셨습니다. 이제 선생님의 별 같은 환한 미소는 볼 수는 없지만, 선생님의 가르침은 선생님이 사랑하신 별들처럼 앞으로도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글 광주과학기술원 환경·에너지공학과 부교수 김태영
